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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종별 | 지정번호 | 명칭 | 소재지 | 비고 |
국 보(3) | 11 | 익산 미륵사지 석탑(益山 彌勒寺址 石塔) | ||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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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益山 王宮里 五層石塔 舍利莊嚴具) | |||
전주시 완산구 쑥고개로 249(효자동2가) | 국립전주박물관 | |||
289 |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益山 王宮里 五層石塔) | |||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산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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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益山 蓮洞里 石造如來坐像) | |||
보 물(10) | 익산시 삼기면 진북로 2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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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 400-2, 동고도리 10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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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益山 古都里 石造如來立像) | |||
236 | 익산 미륵사지 당간지주(益山 彌勒寺址 幢竿支柱) | |||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79, 9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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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1 | 익산 연안이씨 종중문적(益山 延安李氏 宗中文籍) | |||
익산시 삼기면 현동1길 3 | 연안이씨종중박물관 | |||
825 | 익산 숭림사 보광전(益山 崇林寺 普光殿) | |||
1753 | 익산 미륵사지 금동향로(益山 彌勒寺址 金銅香爐) | |||
익산시 웅포면 백제로 495-57 | 숭림사 | |||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로 362 | 국립익산박물관 | |||
1842 | 익산 관음사 목조보살입상(益山 觀音寺 木造菩薩立像) | |||
익산시 평동로9길 72(갈산동) | 관음사 | |||
1890 | 익산 심곡사 칠층석탑 출토 금동불감 및 금동아미타여래칠존좌상 | |||
익산시 낭산면 장암길 113(낭산리 176) | 심곡사 | |||
1990 | 대곡사명 감로왕도(大谷寺銘 甘露王圖) | |||
익산시 익산대로 460 | 원광대박물관 | |||
사 적(7) | 1991 |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 (益山 彌勒寺址 西塔 出土 舍利莊嚴具) | ||
익산시 미륵사지로 362 | 국립익산박물관 | |||
익산 쌍릉(益山 雙陵) | ||||
87 | ||||
익산시 석왕동 6-12 일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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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 익산 토성(益山 土城) | |||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 산5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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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 익산 미륵사지(益山 彌勒寺址) | |||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3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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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 | 익산 나바위성당(益山 나바위聖堂) | |||
익산시 망성면 나바위1길 1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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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시 웅포면 입점리 산1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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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7 | 익산 입점리 고분(益山 笠店里 古墳) | |||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24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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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5 | 익산 제석사지(益山 帝釋寺址) | |||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6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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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기념물(1) | 408 | 익산 왕궁리유적(益山 王宮里遺蹟) | ||
익산시 여산면 태성리 산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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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
익산 천호동굴(益山 天壺洞窟) | |||
중요무형 문화재(2) |
11-다 |
이리농악(裡里農樂) | 익산시 익산대로21길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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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시 익산대로21길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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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나 | 이리향제줄풍류(裡里鄕制줄風流) |
2019-05 전북익산 답사자료 마산문화유산답사회 2019.05.22.
* * * 왕궁리 유적
사적 제408호(1989.09.17.)
소재지 : 익산시 왕궁면 궁성로 666
‘왕궁리성지’라고도 부르며 마한·도읍지설, 백제 무왕의 천도설이나 별도설, 안승의 보덕국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이 전해지는 유적이다. 석탑 동쪽으로 30m 지점에서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보이는 기와 가마 2기를 발견했다. 면적은 21만 6,862㎡에 이른다.
왕궁리유적은 1989년부터 현재까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 의해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조사 결과 백제 무왕대의 왕궁 외곽담장과 건물지, 석축, 정원유적, 공방지, 국내 최고의 위생시설인 대형화장실 유적 등이 발굴되어, 왕궁의 축조 과정과 왕궁에서의 생활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는 내부시설이 확인되어 왕궁으로 일정기간 사용되다 왕궁의 중요 건물을 헐어 내고 그 자리에 탑, 금당, 강당 등 사찰이 조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 * 왕궁리 유물전시관
백제 무왕대의 왕궁터인 왕궁리유적의 발굴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내용을 알리고 출토유물을 전시하여 문화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건립하였으며, 2008년 12월 23일 개관하였다. 전시관은 연면적 2,250㎡ 규모로서 유적의 남동쪽에 있으며, 건물 내부는 전시실, 영상실, 수장고, 자료실 등으로 꾸며져 있다.
* * * 왕궁리 5층 석탑
국보 제289호(1997년 1월 1일)
시대 ; 백제, 통일신라, 고려 높이 ; 약 8.5m
석탑은 마한(馬韓)의 도읍지로 알려진 곳에서 남쪽으로 2㎞ 정도 뻗은 산줄기 끝의 낮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 간행된 익산읍지인『금마지(金馬誌)』에는 “왕궁탑은 폐허가 된 궁터 앞에 높이 10장으로 돌을 쌓은 것이다. 속전에는 마한시대에 만들었다고 한다.”고 전한다. 이전에는 흙으로 만든 받침을 둔 희귀한 석탑으로 알려졌지만, 1965년에 해체하여 보수하면서 원래 돌로 만든 받침을 갖추었음이 밝혀져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 = = 제석사지
사적 제405호(1998년 05월 12일)
소재지 ;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247-1
시대 ; 백제 크기 ; 면적 24,218㎡
제석사는 백제 무왕(武王:?~641)이 도읍을 왕궁평으로 옮길 계획을 추진하면서, 왕궁 부근에 창건한 것이다. 이곳은 제석천을 모시면서 왕실의 번영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했던 내불당인 셈이다. 백제 무왕대에 익산천도의 사실을 밝혀줄 수 있는 왕궁평 유적과 관련되어 있다.
* * *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益山古都里石造如來立像 ]
보물 제46호(1963년 1월 21일)
소재지 ; 익산시 금마면 고도9길 16(동고도리)
시재 ; 고려말 크기 ; 높이 424㎝
석조여래입상은 쓰러져 방치된 것을 조선 말 익산군수로 부임해 온 최종석(崔鍾奭)이 현재의 위치에 세웠다고 한다. 사다리꼴 돌기둥에 옷자락 무늬뿐 아니라 대좌(臺座)나 신체 부분 등을 겨우 나타낸 불상이다..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유물을 중심으로 지상 1층, 지하 1층의 건물에 전시하고 있다. 전시실은 중앙홀·개요실·유물실·불교미술실로 나뉘며, 백제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을 종류·기능·시대별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다. 전시된 유물 및 자료는 총 394점으로 유물 315점, 자료 79점이다.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다가 2019년 명칭을 '국립익산박물관'으로 변경하였고, 2020년 증축개관한다.
* * * 미륵사지 석탑(서탑)
국보 제11호(1962.12.20.)
시대 ; 백제
미륵사지 석탑은 세 개의 탑 중 서쪽에 위치한 탑이다.
우리나라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창건시기가 명확하게 밝혀진 석탑 중 가장 이른 시기에 건립된 것이다. 원래는 9층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반파된 상태로 6층 일부까지만 남아있었다. 창건당시의 정확한 원형은 알 수 없으며, 17~18세기 이전 1층 둘레에 석축이 보강되고 1915년 일본인들이 무너진 부분에 콘크리트를 덧씌운 상태로 전해졌다.
석탑의 1층 내부에는 ‘十’자형 공간이 조성되어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출입이 가능하며, 탑의 중심에는 여러 개의 사각형 돌을 수직으로 쌓아올린 기둥(심주)이 4층까지 연속된다. 이러한 모습은 다른 석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며, 2009년 1층의 첫 번째 심주석에서 발견된 사리봉영기(舍利奉迎記)의 기록을 통해 639년이라는 석탑의 건립연대가 명확하게 밝혀졌다.
석탑은 1998년 구조안전진단 결과에 따라 이듬해 해체수리가 결정되었고 2001년 해체조사에 착수하여 2017년 조립공정이 완료되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고대의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충실하게 잘 보여준다. 또한 고대건축의 실제 사례로써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아 우리나라 불탑건축 연구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화재이다.
* * * 미륵사지 당간지주
보물 제236호(1963년 1월 21일)
높이 3.95m로 현재 원위치에는 지주만이 약 90cm의 간격을 두고 동·서로 서 있다. 지주의 양 외측면에는 둘레를 따라 외연선(外緣線)이 있고 중앙에도 한 가닥의 선이 있으며 앞뒷면에는 양끝을 따라 선이 새겨져 있다. 기단부(基壇部)는 완전히 파괴되어 파묻혔고, 직사각형으로 짠 기단의 면석(面石) 사방에는 안상(眼象)을 조각하였다.
* * 미륵사지 석등하대석
도문화재자료 제143호(1999년 23일)
원래 미륵사지석탑과 금당의 중간에 배치되어 있었고 석등도 3기였으나 발굴 조사를 통해 2기만 확인되었다. 이 중 화사석 3개는 국립전주박물관에서 보관하여 전시하고 있다.
동원과 중원에 남아 있는 석등하대석으로 한국석등의 시원 양식이다.
* * 동원 구층석탑
현재 미륵사지에 있는 동탑은 미륵사지 석탑의 발굴 결과를 바탕으로 1993년에 복원한 것이다
= = =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45호( 1963년 1월 21일)
소재지 ; 익산시 삼기면 진북로 273
광배(光背) 높이 4.48m, 몸 높이 1.69m로 구성되어 있다. 당당한 어깨, 균형 잡힌 몸매, 넓은 하체 등에서 서툰 듯하면서도 탄력적이고 우아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 * 고스락 (이화동산)
소재지 : 익산시 함열읍 익산대로 1424-14
순우리말로 으뜸, 정상을 뜻하는 고스락에는 2만5천여평의 청정소나무 숲에서 국내산 유기농 원료를 가지고 3,500여개의 전통항아리를 통해 발효숙성 시킨 유기농 된장, 찹쌀고추장, 간장, 양파식초 등의 전통장이 담겨 있다.
* * * 나바위 성지(성당)
사적 제318호
소재지 ; 익산시 망성면 나바위1길 146
조선 현종 11년(1845년)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 다불뤼 신부와 함께 황산 나루터에 상륙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우리나라 최초 신부, 김대건 신부를 기리는 성당 =1897년 본당 설립 당시 '화산본당'이란 이름으로 불렸지만 1989년부터 '나바위성당'이라고 불렸다. 화산 산줄기 끝자락에 광장처럼 너른 바위가 있는데 이 너른 바위에서 이름을 따와 '나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나바위성당은 1906년 순수 한옥 목조건물로 지어진 후 1916년까지 증축을 거듭하면서 한·양 절충식 건물로 형태가 바뀌었다. 나바위성당은 이 독특한 건축 양식 때문에 1987년 7월에 국가문화재 사적 제318호로 지정됐다.
화산 나바위가 한국천주교회사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1845년 10월12일이다. 이날 밤 8시경 전라도 강경 황산포구에서 조금 떨어진 이곳에 한국인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중국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고 입국, 첫발을 내딛는다.
* * 금강 제7경 옥녀봉과 금강
소재지 ; 논산시 강경읍 옥녀봉로73번길
선녀들도 반할만큼의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강경 제일의 조망을 지니고 있고, 남쪽으로는 강경 읍내, 북쪽으로는 금강 물줄기가 보인다.
「택리지」저자 이중환은 일찍이 강경의 풍물과 경치에 빠져 이곳에 살면서「택리지」를 집필하였다고 한다.
(네이브지식백과,두산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익산군청 등 자료 편집)
마산문화유산답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