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강령은 선언적 선서를 통해 사회복지사들의 윤리적 민감성을 고양시키고 윤리적으로 준비시킨다."
사회사업가는 쉬운 말로 기록합니다.
영어나 어려운 한자 따위를 되도록 쓰지 않습니다.
「내 인생과 글쓰기」 (윤구병 외, 작은책, 2015)에서 하종강은
어렵게 쓰는 말은 또 다른 지배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경계했습니다.
약자 곁에서 일하는 사회사업가의 글이 어렵다면,
이는 평소 당사자와 거의 대화하지 않았다는 뜻일지 모릅니다.
주민과 가까이에서 이야기 나누는 사람의 말이 어려울 리 없습니다.
독자를 구체적으로 상상하며 쓰면 글이 쉬워집니다.
사회사업 글쓰기의 독자는 동료 사회사업가이기도 하지만,
그 글의 주인공인 당사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쓴 글을 언제든지 당사자에게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아가, 그 글을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느 대학 앞에서 인문·사회 책을 판매하는 서점을 운영했던 은종복은
그의 책 「풀무질-세상을 벼리다」 (은종복, 이후, 2010)에서
자기 글은 모두 초등학교 5학년도 알 수 있도록 쉽게 쓰려 애쓴다고 했습니다.
어린아이가 읽고 이해하지 못하는 글은 조금 더 쉬운 말로 다듬어 고쳐 씁니다.
시인 안도현은 「시와 연애하는 법」 (안도현, 한겨레, 2009)에서
어렵고 관념적인 한자어를 암세포에 비유합니다.
이런 말을 발견하는 즉시 ‘체포하여 처단하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가 병든답니다.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유시민, 생각의길, 2015)에서도
유시민은 이오덕의 「우리말 바로 쓰기」 (이오덕, 한길사, 2009)를 읽은 뒤 자기 글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일본어와 영어 문법을 따라 썼고,
공연히 어려운 한자어를 남용했으며,
쓸데없이 길고 복잡한 문장을 늘어놓았다며 반성했습니다.
약자 곁에서 일하는 사회사업가의 글이 쉽고 편안하면 좋겠습니다.
“글 쓰는 필자들은 독자를 배려해야 해요.
자기 글을 쉬운 글에 담아서 공유하는 노력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신영복의 「담론」 소개 인터뷰 가운데. 한겨레, 2015.5.9.
글쓰기는 나와 남을 연결하는 일이다. 그 글을 봐 주는 사람이 이해 못 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게 하고 제대로 이해시킬 책임은 쓰는 사람에게 있다.
좀 심하게 얘기하면 글이나 말은 듣는 사람, 읽는 사람 입에 떠 넣어줘야 한다.
손에 잡히도록 쥐여 주어야 하는 것이다.
「대통령의 글쓰기」 (강원국, 메디치미디어, 2017)
회의는 말로 하는데, 그 말 가운데서
어려운 말, 알 수도 없는 말을 반드시 해야 비로소 의견을 내어놓을 수 있다면,
회의에 끼어들기가 어렵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 국회의원들은 벌써 그 어려운 한자말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고,
그 어려운 말을 팔아서 특별한 권리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말로 살려놓은 헙법」 (이오덕, 고인돌, 2012)
사람이 평등하다면 그 사람이 하는 말도 평등합니다.
영어나 한자어, 전문용어를 즐겨 사용하는 사람은
그가 주로 돕고 만나는 사람이 그런 말을 이해할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언어로 상대보다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숨은 의도가 있는 건 아닌지….
언어를 차별하는 건 사람에 대한 차별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사회사업가 사이에 쓰는 말이 다르고 약자와 나누는 말이 다르다면,
이는 고스란히 그를 대하는 태도와 자세에도 차이가 벌어집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언어가 계급을 만듭니다.
사실 글은 지배 계급의 권력을 강화하고 고착시키는 도구였다.
글쓰기가 지배 계급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도구가 되지 않으려면
글은 누구든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게 써야 한다.
일하는 사람들이 쓴 글이 감동을 주는 이유는 솔직함 때문이다. 「내 인생과 글쓰기」 (윤구병 외, 작은책, 2015)
글을 잘 쓰려고 하면 자기의 삶과는 상관없는 미사여구를 동원해 글을 꾸미게 된다.
꾸미는 글은 자기 삶이 담기지 않은 거짓 글이다.
자기가 겪은 일 중에서 한 가지 일을 자세히 쓰면 자연스럽게 좋은 글이 된다.
생동감이 넘치는 삶이 담긴 글, 글을 읽을 때 그림이 그려지는 글이야 말로 살아있는 글이다.
글이 살아 있다는 것은 글이 진실일 때 뿐이다.
우리가 사는 주위 사물을 자세히 보는 일이 글쓰기의 시작이다.
자세히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생각이 많아진다.
그 생각을 정리하여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표현하면 글이 되고 그림이 된다.
「김용택의 교단일기」 (김용택, 김영사, 2006)
영국의 ‘쉬운 영어 운동(Plain English Campaign)’의 주장처럼
당사자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말을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가난하게 살던 어느 모녀가 어려운 용어 때문에
정부로부터 난방수당을 더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추위에 떨다 얼어 죽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크리시 메이어라는 여성이 쉬운 말 운동에 나섰습니다.
1973년, 영국 런던의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학생들과 함께
탁자에 종이를 쌓아 올리고 갈가리 찢어대며 특이한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들이 찢고 있던 종이는 몹시 어렵게 쓰인 공문서들이었습니다.
이 시위를 주도한 크리시 메이어는 정부의 서식과 공문 등에 쉬운 영어를 사용하라고 촉구했습니다.
정부에 제출해야 하는 온갖 서식에는
서민들이 그 뜻을 알기 어려운 라틴어나 전문 용어가 수두룩했습니다.
메이어가 쉬운 말 운동을 시작하면서 영국에서는 ‘쉬운 영어 운동(Plain English Campaign)’이 펼쳐졌습니다.
「내 마음이 글이 되었다」 (정민영 외 공저, 구슬꿰는실, 2021) 정민영 선생님 글 가운데
아이들은 시인들 같은 태도로 결코 쓰지 않는다.
(…) 생활 현장에서 그때그때 얻은 감동을
대체로 소박 솔직하게 토해내듯이 쓰면 시가 되는 것이 아이들의 시다.
아이들은 어른과는 달리 현실 속에 무한한 감동의 원천을 갖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을 시인라고 한다.
「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다」 (이오덕, 양철북, 2017)
사회복지사 윤리강령 개안을 만들고 있다고 합니다.
윤리강령 개안 초안을 구해 읽었습니다.
"윤리강령은 선언적 선서를 통해 사회복지사들의 윤리적 민감성을 고양시키고 윤리적으로 준비시킨다."
이 문장을 읽고 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이런 글로 쓴 문장이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초안이라고는 해도, 그 내용을 떠나 문장이 못마땅합니다.
'고양시키다'란 말이 어렵습니다.
첫째, 북돋는다는 뜻의 '고양(高揚)'은 어려운 한자어입니다.
둘째, '시키다'는 영어식 번역 문체(수동태)입니다. 우리말은 능동태입니다.
셋째, '윤리적으로 준비시킨다'고 했지만, 그 실체가 모호합니다.
'윤리적 준비'란 도대체 무언가요? 누가 누구를 준비시키나요??
관료적인 구시대 문장처럼 다가옵니다.
낡은 말을 쓰는 이유를 짐작합니다.
이런 어려운 말을 씀으로써 더 많이 배웠다거나 전문가처럼 보이려는 마음이 있어 보입니다.
조선시대에는 한자를 쓰면서 높아지려 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말을, 지금은 영어가 그렇습니다.
(장애인복지관 현장과 의료사회사업 현장은 유달리 영어가 많습니다.)
이런 말을 써버리면,
사회복지사들에게 와닿지 않고, 금세 낡은 말이 되어 사용하지 않고,
현장 실무에 스며들지 않아 관념으로만 남게 됩니다.
이런 글버릇이 말버릇에도 영향을 주면, 당사자와 소통이 쉽지 않습니다.
당사자와 동등한 만남을 어렵게 할 겁니다.
'선언적 선서'란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말뜻을 알기 어렵고, 구체적 행위를 짐작하기 쉽지 않습니다.
'적(的)'이란 표현도 한글 학자들은 꼭 사용할 곳이 아니면 쓰지 말자고 합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수정했습니다.
(원안) "윤리강령은 선언적 선서를 통해 사회복지사들의 윤리적 민감성을 고양시키고 윤리적으로 준비시킨다."
(수정1) "윤리강령은 선언적 선서를 통해 사회복지사들에게 윤리적 민감성을 되새기게 하고, 실천 전반의 기준이게 한다.
몇 번 더 읽으면서 '의'와 '적'을 빼고 말하듯 간결하게 다듬었습니다.
(수정2-1) "사회복지사 스스로 윤리강령을 선언함으로써 윤리에 민감하게 하고, 이런 강령이 실천 속 기준이게 한다."
더욱 사회복지사가 주체이게 하다면 이렇게 다듬을 수도 있습니다.
(수정2-2) "사회복지사는 윤리강령을 선언함으로써 윤리에 민감해지고, 이런 강령이 실천 속 기준으로 자리잡는다."
"윤리강령은 선언적 선서를 통해 사회복지사들의 윤리적 민감성을 고양시키고 윤리적으로 준비시킨다."
"사회복지사 스스로 윤리강령을 선언함으로써 윤리에 민감하게 하고, 이런 강령이 실천 속 기준이게 한다."
"사회복지사는 윤리강령을 선언함으로써 윤리에 민감해지고, 이런 강령이 실천 속 기준으로 자리잡는다."
사회복지사 윤리강령이 개정이 어떻게 어디까지 이루저졌는지 알지 못하지만,
우리말을 잘 아는 이에게 최종 초안을 검토하게 부탁하면 좋겠습니다.
이번 개정 뒤 또 한동안 사용할 말인데 민감하게 살펴보길 바랍니다.
첫댓글 저도 한계가 있습니다.
더 다듬어야할지 모릅니다.
저도 잘못 쓰는 말이 있을 겁니다.
<사회복지사들에게 와닿지 않고, 금세 낡은 말이 되어 사용하지 않고,
현장 실무에 스며들지 않아 관념으로만 남게 됩니다.>
공감합니다. 일상에서 쓰이지 않는 말은 결국 문서로만 남게 되는 것 같아요. 문제는 시대에 따라 말도 변하는데 문서에 있는 용어는 아직도 옛 것이니 오히려 소통을 방해하는 일도 생기는 것 같습니다.
돌아봅니다... 🙏
이혜미 선생님, 고맙습니다.
함께 공부하며 우리는 다듬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