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그것에 생각해 보았는가? - 2
어제 시간에 이어서 오늘은
지무생사知無生死를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어제 시간에서 말씀드렸듯이
옛 스님들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가 생사대사를 해결하고 성불을 이르는 데에도
몇 가지의 단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지무생사知無生死,
계무생사契無生死,
용무생사用無生死.
그 첫 단계인 지무생사知無生死란?
‘생사가 본래 없다.’고 하는 생사의 본질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지·수·화·풍 4대 원소로 모여서 이루어 진 것이고,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도 수·상·행·식이라고 하는
정신작용이 인연 따라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을 뿐
본래 내가 어디에 있었던 것이 아니므로
죽음도 따로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중국의 장자라는 유명한 사상가가 있었습니다.
(공자·맹자는 유교에서 첫째, 둘째가는 사람이므로
유교를 ‘공맹지도孔孟之道라고 하는데
이와 쌍벽을 이룬
노자·장자의 사상을 노장철학老莊哲學이라고 합니다.
노자와 장자의 철학사상이란 뜻입니다.)
장자의 아내가 죽어서 친구인 혜자가 문상을 갔습니다.
마침 장자는 두 다리를 뻗고 앉아서
물동이를 두드리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에 혜자가 말하기를
“자네는 부인과 같이 살면서 자식도 양육하고,
몸이 함께 늙어가다가 죽었는데,
곡을 하지 않은 것은 혹 그렇다 해도
물동이를 두드리면서 노래까지 부르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
그러자 장자가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네.
아내가 처음 죽었을 때 내가 어찌 슬퍼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가 태어나기 이전의 처음을 살펴보면
원래 아무런 생명도 없었네.
생명이 없을 뿐 아니라 본래는 형체도 없었네.
형체가 없을 뿐 아니라 본래는 기氣도 없었네.
흐릿하고 아득한 사이에 섞어 있다가 변해서 형체가 생기고,
형체가 변해서 생명이 갖추어진 것일세.
그것이 지금 또 바뀌어 죽음으로 간 것일 뿐이네.
이것은 춘하추동의 네 계절이 번갈아 운행하는 것과 같네.
옛날의 진인은
삶을 좋아하거나 죽음을 싫어할 줄 몰랐으므로
태어난 것에 기뻐하지도 않았고,
죽는 것을 거부하지도 않았네,
그저 덤덤하게 살아가다가 덤덤하게 죽을 뿐이었다네,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를 잊고,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를 따지지 않았으니,
그저 주어진 대로 만족했고,
죽어서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뿐이었네.
이러한 태도를 가리켜
욕심으로 도를 훼손하지 않고,
인위적인 노력으로 타고난 것을 망치지 않는다고 말하네.
이러한 사람이 바로 진인이네.
그 사람은
바야흐로 천지라는 거대한 방에서 편안히 자고 있을 뿐이네.
그런데 내가 큰소리로 따라서 운다면,
나 스스로가
천명에 통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스스로 울기를 그쳤네.”하고 말했습니다.
“아까 내가 들어가서 조문을 하려고 했을 때
곡을 하던 늙은이가 있었는데
마치 제 자식의 죽음에 곡하는 것 같았고,
어떤 젊은이는 마치 제 어머니의 죽음에 곡하는 것 같았네.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들어 구슬프게 곡을 하는 것은
생전에 넘칠 정도의 정이 쌓여 있었던 것이니겠는가?
그러니 노담이 설령 원치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사람들이 찾아와 조문하고
구슬프게 곡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는 자연스러운 실정에 어긋나고
부여받은 바를 잊어버리는 것으로
옛날 사람들은 이를
‘하늘의 도리를 저버린 형벌’이라고 불렀다네.
노담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그저 노담이 태어날 때였기 때문이고,
죽은 것은 노담이 돌아갈 때가 되어서 그런 것이 다네.
태어날 때를 편안하게 맞이하고
돌아갈 순서를 편하게 따른다면
거기에는 슬픔과 기쁨 따위가 끼어들 수가 없는 걸세.
옛날 사람은 이것을 ‘하늘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말했다네.”
죽음은?
◆ 죽음을 거부하면서 도덕을 실천하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 삶과 죽음은 낮과 밤처럼 순환하므로 초연하게 대해야 합니다.
◆ 죽음 이후의 새로운 삶을 받지 않도록 열반에 도달해야 합니다.
◆ 삶과 죽음을 서로 차별하지 말고 동등하게 수용해야 합니다.
◆ 삶과 죽음은 슬퍼하거나 기뻐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돌고 돌아가는 윤회의 굴레기에
죽음으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몸으로 새 인연을 찾아 가는 것입니다.
상가집에서는 곡을 하는 것이 슬픔의 애도로 보지만
옛날 사람은 이것을
‘하늘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속박이 된다는 것은 벗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가볍고 훨훨 날지 못하겠습니까?
이해가 되십니까?
다음 시간에는 계무생사契無生死를 이야기 하겠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따끈따끈한 글입니다.
2024년 06월 25일 오전 06:42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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