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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묘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 산59외
조선제15대 광해군(재위1608∼1623)과 문성군부인 유씨의 무덤.
광해군(光海君-이혼/李琿)1575,4.26~1641,7.1(음력).
조선 제15대왕(재위1608~1623)
선조에게는 정비 의인왕후 박씨,공빈김씨,인빈김씨,순빈김씨,인목왕후 김씨(후일 정비/계비)가 있었다.
선조는 후궁 출생이라는 꼬리표가 있었다.
정비 의인왕후 박씨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선조는 인빈김씨의 아들 신성군을
왕세자로 점찍어 두고 있었다.
순빈김씨와의 사이에서 순화군을 낳았다.
인목왕후(1606년)는 영창대군을 낳았다.
(영창대군 폐사 사건으로 인목대비, 정명공주가 서궁에 유폐당함)
선조는 공빈김씨와의 사이에서 임해군, 광해군을 낳았다.
공빈김씨는 광해군이 세살이 되기도 전에 병사하고 말았다.
이것은 공빈김씨가 정비 의인왕후, 인빈김씨와의 모종의 권력쟁탈 암투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선조는 인빈김씨를 편애하고 신성군을 왕세자로 책봉할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공빈김씨를 밀어내기 위해 모종의 일을 도모하여 제거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게 공빈김씨는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장자 임해군(李津/이진)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함경도로 피신하여 분조하였다.
선조는 의주로 피난하였다.
피난길에 선조가 왕세자로 마음에 두고있었던 인빈김씨의 아들 신성군은 죽게 된다.
왕이 도성을 버리고 몽진하면 왕자들은 분조하고 여러 곳으로 파조하여 훗날을 대비하는 것이
조선시대의 법칙이었다. (사대사고와같은 이치)
(정비소생:대군(大君),후궁소생:군(君),왕의 장인:부원군(府院君),정 1품 관직에 하사하기도 함.)
차남 광해군(李琿/이혼)은 강원도 이천 분조지에서 전주성으로 사람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고
의병들에게 관직을 나눠주며 남원성과 전주성의 무군사에서 10만명의 의병을 관리한다.
고경명에게 호남 의병사령관 창의사 관직을 제수하고, 양대박에게 부창의사 관직을 제수하며
이치,웅치,슬치전투와 전주성을 사수하였으며, 경남 진주성 전투에 전라 의병을 파견하여
사수하게 만든 주인공이다.
장남 임해군(이진)은 장인과 가노및 호위무사들이 함경도에서 전비를 마련한다며
백성들의 식량과 재산을 강제로 징발하며 내놓지 않으면 폭력을 행사하는 등
무뢰배처럼 굴며 재산을 강탈해가자, 백성들이 재산을 들고 산속으로 숨어들어가 버린다.
이를 보다못한 국경인, 국세필, 김수량 등 16인이 사람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고,
임해군과 순화군의 장인, 호위무사, 대신이었던 정귀영, 황정욱, 황혁부자, 남병사 이영,
문몽헌(부사), 이수(온성부사) 등, 그의 가족들까지 붙잡아서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거버린 사건이 발생하였다.
국경인은 전주 출신 아전이었으며 작은 부패 문제로 회령으로 좌천되어 아전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의 삼촌 국세필과함께 김수량 등 16인을 끌어들여 가토[가등청정]에게 임해군, 순화군을 넘기고
투항해버렸다.
그리고 1년여간을 왜군을 위해 일하다가
북평사 의병장 정문부가 이붕수 의병장과함께 격문을 붙이자,
격문을 본 유생 신세준, 오윤적 등이 유인하여 국경인, 김수량을 암살하여 정리하였다.
임해군을 왜군에 넘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하여 한백겸을 함경도 초유사로 파견하였는데,
한백겸이 숨어있는 백성들을 회유하려고 산속으로 들어갔다가 발견한 것이 황초령비였다.
한백겸은 신라가 동옥저를 복속하고 세운 것으로 동국지리지에 기록해 놓았다.
선조의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던 신성군이 죽게 되자, 선조는 임해군을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공빈김씨의 죽음이 인빈김씨와 관련이 있다고 본 것으로 판단된다.
임해군은 어머니 공빈김씨의 죽임이 인빈김씨 일파가 죽인 것으로 판단한 것 같다.
임해군의 성정은 포악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것은 장인과 순화군의 호위무사들이
백성들에게 난폭하게 굴며 전비를 마련한다며 약탈을 일삼았기 때문에
임해군의 성격이 포악한 것으로 기록되어진 것이다.
임해군은 가토-기요마사에게 포로로 잡혀 1년여 간을 잡혀 있었기 때문에,
왕세자로서는 부적격자였다.
왜군에게 포로로 잡힌 왕자를 다음 후계자로 세울 수는 없었다.
임해군을 빼내기 위해서 조선정부는 이중고를 겪어야만 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조는 차남 광해군을 왕세자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광해군은 강원 이천으로 내려와 의병을 지휘하며 많은 전공을 세우고 있었다.
선조는 광해군의 인기를 견제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광해군이 이치, 웅치, 슬치, 진주성 전투에 모두 승리하게 되자,
당장 양위압박을 받을 것에 대비하여 광해군을 견제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선조는 광해군의 공적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고, 실제로도 인정해 주지 않았다.
광해군의 임진왜란 공적을 인정하면 바로 양위당할 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부터 선조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또 한현, 왕족 이몽학의 반란으로 전국 의병총대장 김덕령을 죽여, 의병을 견제하기 시작하였고,
이순신(주기학파) 등을 견제하기 위해 원균(서인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을
대항마로 내세우기 시작하였다.
호남 의병총대장 1대 창의사 고경명 ,2대 창의사 김천일, 전국 의병총대장 김덕령(익호장군)은
모두 광해군이 임명하여 나중에 선조의 재가를 받았기 때문에, 모든 의병은 광해군 휘하에 놓이게 된다.
또한 전라 병마절도사 최원을 제외하고 전라 순찰사 권율(광주목사/전라 순찰사 이광 교체)등
모든 관의병은 광해군에게 임명된 보직이었기 때문이었다.
전란시 왕자가 파조하여 관직을 주면, 무조건 왕은 그대로 임명장을 주어야만 하였다.
초유사 권한도 마찬가지였으나, 임명할 수 있는 직위가 종3품 당하관이하 임시직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이들이 큰공을 세우는데는 광해군의 임명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광해군의 힘은 막강할 수밖에 없었다.
영남의병들은 김덕령의 죽음으로 소극적 의병활동으로 전환한다.
곽재우는 김덕령이 역모에 연루되자 잡혔다가 간신히 풀려나 주는 관직마다 거부하였으며,
정유재란이후 평생 초야에 묻혀 살게 된다.
그렇잖아도 남명학파 김면, 정인홍, 곽재우, 정기룡, 이달 등은
호남 동인 정여립의 기축옥사로 2천여 명을 학살한 사건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 사건은 풍신수길이 임진왜란 침공 전에 사전공작을 벌여 양광도 동인에 대항하여 일어난
정여립학파, 합천, 산청의 조식학파 연합인 영호남 동인 지도부를 와해시킨 사건이었다.
또, 풍신수길은 중국에 사신을 보내 조선이 물소뿔을 밀수한다면서
이는 장차 중국의 큰 위협이 될거라며 사전 공작을 하였던 것이다.
만주에서는 갈수록 여진족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은 그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강성해지는 여진족을 견제하기 위하여, 조선에 물소뿔 수출을 1년에 50개 이내로 제한한다.
중국 명나라는 조선이 여진족과 손을 잡고 명나라를 침공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내다 본 것이다.
그 바람에 조선의 예맥각궁 숫자가 부족해지는 사태가 발생하여,
조선 주력군의 전력이 약화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선조가 광해군을 미워하게 된 원래 배경에는 임해군에게 있다.
피난 중에 신성군을 임해군이 은밀하게 죽였을 것이라고 판단한 선조는
임해군 동생인 광해군까지 미워한다.
광해군이 임란전공을 많이 세우자, 그때부터는 왕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광해군을 견제하며 더욱 미워한다.
광해군은 강원 이천군에서 왜 수군이 서해안 루트를 통해, 한강 하구로 들어가
한양을 점령하려는 계획을 알아내고, 왜 수군 차단 교란 작전 명령을 전라 병마절도사 사령관 최원과
호남의병 1대 창의사겸 수원부사 김천일에게 하달한다.
그후 최원의 1만대군과 김천일은 남원성과 전주성에 집결했던 10만 의병 중에서 1천의 특별 사수부대를
편성하고, 김제 금산사 주지 처영이 이끄는 1천 승병과함께 강화도를 근거지로하여
한강 하구로 들어가는 왜수군의 후방 교란작전을 벌여 한양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방어한다.
이 작전은 왜수군이 한양을 점령하지 못하도록 하는 큰 성과를 내었으나,
왜군은 육로로 한양을 점령하고 평양성 점령 후 명군 참전으로 한양으로 퇴각하여
강화도에 묶여있던 전라 병마절도사 최원 군이 명나라군과 연합군을 형성하지 못하도록
조선군을 선제 공격하기 위해 행주산성으로 출병한다.
이때 강화도에서 김천일 수원부사겸 창의사 부대가 김제 금산사 주지 처영병력 1천여명과 함께
행주산성으로 들어가, 임시 전라 병마절도사 선거이의 1만2천군, 전라 순찰사 권율과함께
우희다수가[우키다 히데이에]군,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군 3만을 대파하여,
행주대첩이라는 기념비적인 사건을 남긴다.
(조선군 130여명 사상vs 왜군1만5천여 명 사상)-장성의 변이중이 고흥에서 만들어온 만든 화차부대,
처음으로 비격진천뢰에 지연식폭탄을 장착하여 초대승을 거둠).
임진왜란 중에 임해군이 왜군 포로 경험으로 하자가 있어 왕세자는 광해군으로 결정된다.
광해군은 정비 의인왕후 박씨의 양자가 되는 것으로 하여 왕세자가 되었다.
그러나 정유재란이 끝나고 1606년에 인목왕후 김씨가 정식 왕비(계비)가 되었다.
인목왕후는 영창대군을 낳게된다.
선조는 다시 광해군을 몰아내고 영창대군을 왕세자로 임명하려 하였다.
원래 광해군은 서인 정권인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 송익필을 이은 정철 등이 옹립하려 했었다.
이것을 알고 1593년 임진왜란 한양 환도 사흘 후 동인 영수 이산해, 류성룡 등이 정치공작을 벌여,
정철에게 광해군을 왕세자로 옹립하라고 사주하였다가 광해군을 싫어했던 선조에 의해
서인정권이 몰락하고 동인정권이 들어선다.
양광도 동인 주리학파 세력은 1589년 정여립의 기축옥사로 1~2천여 명을 죽인 원수 정철에게
주기학파 전라 병마절도사 최원이 주둔하고 있던 강화도에서 원수를 대신 갚아 주고
혐의를 피해간 것이었다.
그러나 동인은 영창대군파와 광해군파로 나뉘어져 대북파와 소북파로 나뉘어진다.
쉽게 설명하면
대북파는 합천,상주,선산,구미,성주,거창,함양,산청,고령,칠곡일대의 대가야파에 해당한다.(낙동강 서안지역)
소북파는 밀양, 창녕 등에 해당하는 원가야파에 해당한다.(낙동강 동안지역)
정여립의 기축옥사로 죽은 호남 동인세력은 영남이 힘이 없을 때 조식학파와 연합하여 영남을 대신하여,
영남의 권리를 지켜주고 있었다.
(원래 호남 동부지역이 우르가야(철, 도기 생산지)지역으로 대가야의 약진 때 점령하고,
전사집단이 거주했던 곳임)
호남동인은 남인과함께 서인정권을 견제하고 있었으나,
동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정여립이 역모사건으로 모함을 받아 죽고,
호남 동인 관의병 세력이 임란, 정유재란으로 대다수가 죽게 되자,
영남 동인이었던 양광도 주리학파 이산해, 영남 조식학파 정인홍 등의 남명학파가 정유재란 이후
정권을 잡게 되는 것이다.
[광해군 등극초 양광도 동인 주리학파는 낙동강 서안지방의 조식학파 정인홍에게 밀려
동인권력이 경상 서부지방으로 교체됨].
남인은 나주에서 부산, 김해 지역에 이르는 지역을 남인이라 하였다.
이산해, 정인홍, 이이첨 등은 대북파였고 정인홍이 이산해를 밀어내고 영수가 되어, 물러나서도
배후에서 이이첨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광해군을 지지하였다.
소북파 유영경(전주유씨), 유희분은 선조의 뜻에 따라 적통론을 내세워 영창대군을 지지하였으나,
소북 영수 유영경이 대북파 홍여순, 정인홍, 이이첨 등에 의해 계축옥사로 사사당한 이후,
박승종이 광해군의 장인이 되자 광해군을 적극 비호하였다.
이때부터 소북파도 박승종이 주도하면서 광해군을 지지한다.
그러자 세력이 죽었던 서인세력은 보복의 칼날을 다시 갈게 된다.
양광도 동인 주리학파가 대북파 홍여순 [임해군을 죽이려다가 발각되어 진도에서 제거됨]을 죽이자,
대북파가 양광도 동인 이산해파를 밀어내며 권력을 차지하고 진릉군 역모사건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정치공작이 시작된다.
1609년 이이첨은 진도 교동으로 유배를 갔던 임해군을 자객을 시켜 암살해 버리고 병사하였다고 고변한다.
그러면서 소북 영수 유영경까지 역모로 몰아 죽이면서 계축옥사가 발생하였다.
1589년 정여립의 기축옥사를 일으켜 사건을 주도하였던 서인 정철도 1593년 왜란 중에
명나라 강화사신으로 다녀오게 하여 양광도 주리학파가 강화도에서 병사 처리해 버린 적이 있었다.
(띨한 정철..ㅠㅠ)>정철은 왜란 중에 강화도에서 그렇게 죽은 것이다.
1608년 소북 영수 유영경(柳永慶)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하였다며 계축옥사를 일으켜
소북파 영수 유영경을 사사하는 사건이 대북파에 의해 발생한다.
그후 계축옥사 사건을 연루시켜 1613년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며 역모로 몰아
인목왕후의 부친인 김제남을 사약으로 사사시켜 제거하였다.
이이첨 등의 대북파는 인목왕후가 의인왕후의 능을 저주하였다면서 상궁 김개시,
유생 강경파 허균 등을 내세워 의인왕후 저주설을 퍼트려, 김제남을 무덤에서 3년만에 꺼내
다시 부관참시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그리고 김제남의 아내와 막내 아들을 제외하고 인목왕후 형제인 세아들을 모두 처형시켜 버렸다.
그리고 1618년 정명공주와 함께 인목대비 유폐사건을 일으킨다.
광해군이 대북의 적극적인 지지로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호남 의병세력이 대다수 왜군과 싸우다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이치, 웅치, 슬치, 진주성 1,2차 전투, 무풍 전투, 상주 전투, 성주성 전투, 성주봉 전투(진안 동향),
죽산성 전투(진안) 남원성 전투, 석주관 전투 등 대형 전투를 치루는 과정에서 대다수가 죽어
호남세력은 약해져 있었고, 나주 이남의 남인들만 소수 살아 있었으며,
그것도 의성 출신인 김성주,류성룡,김성일 등 양광도 주리학파 동인이
정유재란 칠천량 해전 패전 이후부터 남인으로 분열하여 대변하고 있었다.
원래 광주는 서인 정권의 스승들이 정신적 지주로 있었던 곳이다.
서인정권의 학문적 스승이었던 이이 [강릉/파주], 이항 [정읍 태인], 성혼(광주출신 한성/파주),
박순[광주/영의정] 등이 서인의 정신적 지주 역활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임란 ,정유재란 때 광주, 담양 세력은 조선 의병의 주축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전에는 호남 동인세력이 나주 이남의 남인 세력과 함께,
서인정권을 견제하고 있었다. (류성룡,김성일이 나주목사로 오래 재직하여 남인을 대변함)
임진, 정유재란은 영남 동인에게는 정권을 잡을 천조(재)일우의 기회가 되었던 셈이다.
그런데 몰락한 호남 동인세력을 대신하여 영남 동인세력이
영창대군과 광해군을 사이에 두고 대북과 소북으로 분열해 버린 것이다.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는 해주, 안악, 재령 등 해서인의 진릉군 역모 사건에 이어
1614년 영창대군을 강화에 유배시키고 장작 불을 태워 방안에 가두고 죽였다.
1615년에는 능양군의 동생 능창군을 폐서인시켜 목을 메어 자결시켰다.
1618년 대북파 이이첨, 정인홍은 상궁 김개시, 유생 강경파 허균 등을 시켜 상소릴레이로
각종 조작설을 유포시켜 인목대비 폐비조작을 벌여 정명공주와함께 서궁에 유폐시키기에 이르른다.
이 사건으로 인조반정(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의 명분이 되었다.
광해군은 대내적으로 왕권 강화책을 실시하고 대외적으로는 중도 실리 외교정책을 펼쳤다.
1608년 선혜청을 두고 경기도지역에서 대동법을 실시하였고,
1611년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을 중건하였으며, 인경궁을 신축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도 등을 간행하였다.
이 시기에 허균의 홍길동전, 허준의 동의보감등이 쓰여졌다.
1618년 인목대비가 유폐되는 해에 만주에서는 여진족(건주여진/수렵생활)의 후금이 건국된다.
1619년 누루하치가 요녕성 신빈에서 심양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명나라가 원군을 요청하자
강홍립, 김경서를 보내 명나라를 지원한다.
명나라군이 사르하 전투[薩爾滸/살이호/사르후 전투], 상간하다 전투[尚間崖/상간애 전투],
아부달리 전투[阿布達裡/아포달리 전투], 부차전투[富察/부찰 전투]에서 전패하고,
조선군 8천여 명과 주요 장수들이 전사하자 강홍립은 후금에 항복해버렸다.
광해군은 본의 아닌 출병이라 해명하고 후금의 침공 위기를 벗어난다.
이이첨, 상궁 김개시, 허균 등은 무자비한 옥사를 일으켜 반대파 신료들을
잔인하게 숙청하여 절대 왕권을 강화시키려 하였다.
정인홍과 이이첨은 능창군 역모사건과 영창대군의 옥사를 주관하면서
1617년 인목왕후 폐모론까지 조작하며 학살을 자행하였다. (능양군(인조)동생이 능창군)
상궁 김개시는 부패하여 인조반정의 사전정보를 알고있으면서도
뇌물을 받고 눈감아 주었다가 인조반정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1623년 서인의 김자점, 이귀, 김집, 김류, 이서, 신경진, 최명길, 남인 이괄 등은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을 앞세워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광해군은 강화로 유배되었다가 제주도로 이감된다.
1641년 6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인조 반정군은 정인홍, 이이첨, 김개시, 허균 등을 사사하였다.
80세가 넘은 정승을 지낸 관리는 사사하지 않는다는 조선 법령을 어기고 대북 영수 정인홍을 처단시켰다.
40여 명의 대북, 소북파가 구금되어 사사되고 200여 명이 유배되어 사실상 대북, 소북은 몰락하였다.
대북은 완전 전멸하다시피 하였고,소북은 몇몇이 살아 남았다.
남인도 동반 몰락했으나,명맥은 유지할 수가 있었다.
이로써 임진, 정유재란의 의병 기반 세력은 전멸해버린다.
"대북정권의 정치적 보복을 피하기 위해 일시 협력했던 호남의 주기학파 40여 명도 유배되어
조선의 근대화가 사라지는 원인이 된다."
대북이 몰락하기 전에 부패 문제가 아주 심각하였다.
그 과정에서 대북과 소북이 대립하는 사이 대북은 골북, 중북, 육북으로 분열되고,
소북은 청소북, 탁소북으로 분열하는 틈을 타서 인조반정이 발생한다.
(청소북=청풍~청도~청송, 탁소북=마산, 창원, 진해, 거제)
영남의 대가야파, 원가야파인 대북,소북의 주요 몰락 원인은
말도 안되는 정치공작을 마구 일삼아 학살에 가까운 옥사를 일으키고,
조선 유학의 근간인 어린 영창대군에게 불을 지펴 방에 가둬 죽이고,
능창군에게 역모하였다며 누명을 씌워 죽였으며, 인목대비 유폐사건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실수를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이첨이 임해군까지 진도 교동으로 암살자를 보내 제거해버렸다.
인목왕후 부친인 김제남의 시체를 3년만에 꺼내 부관참시하고 세아들을 죽인 사건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유학의 기본 근간을 흔드는 사건이었기 때문에 인조반정에 가담자가 많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광해군의 아들 왕세자 이질과 세자빈 박씨는 강화도에서 탈출하려다가 걸려 자결하고 말았고,
광해군의 처 왕비 중전 유씨도 홧병으로 죽고 말았다.
광해군이 주도하기보다는 대북정권의 뜻대로 움직이다 보니, 광해군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모두 임진/정유재란 때 의병으로 활동하던 전쟁세력이었기 때문이었다.
훗날 영조 때 1728년 3월 이인좌(괴산)가 고향이었던 청주에서 역모를 일으키고 대가야 지역으로 내려가
합천의 정희량을 끌어들여 고령, 거창, 함양, 산청 산음 등 대가야 지역인을 이끌고 다시 북상한다.
남인 윤휴의 손주 사위였던 이인좌는 정인홍의 후손 정희량 등과함께 북상하다 안성에서 대패한다.
그후 죽산으로 숨어 들어갔다가 죽산 마을 주민 신길만(申吉萬)등에게 붙잡혀
한양으로 압송을 당한 후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이 당시 영남의 정신적 지주였던 윤휴학파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 분명하다.
호남 동인세력은 처음에는 호응하였으나 실제로 역모사건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정여립이 죽은 원한때문에 호응을 해주었다.
그러나 정읍 태인 현감 박필현이 가담하였지만,
영조 어머니 숙빈최씨(최복순(어릴적)/최소령(숙종)/최화경(영조))의 고향이 태인이라
태인현이 폐현될 위기에서 벗어나 책임을 묻지 않는다.
[태인 출신 숙빈최씨가 호남동인, 낙동강 서안 동인/경상우도까지 대변]
(원래 고려/조선 역사에서 정읍 태인, 임실이 민중항쟁, 왜란, 호란, 항일 독립운동으로 유명한 지역임.
특히 삼국시대 백제 부흥운동이 크게 일어나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하는 곳이 태인이다.
신라군이 무진주 병력을 이끌고 백제 부흥군을 치러 북상하다가 정읍 병력을 흡수하여
태인에 다달았을 때 태인 병력이 백제를 치러간다는 사실을 알고 돌아서서 야간에 잠을 잘 때,
신라군을 모조리 참살해버린다.
이로써 백제 부흥운동의 첫 불씨가 타오른다.
신라군은 대패하여 백제 부흥군이 200여성을 회복하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한다.
이로 인해 호남 동부지방과 거창 거열성,함양,
산청(김유신의 시조묘 금관가야왕 김구해/구형왕묘가 위치) 등에서도
백제 부흥군이 맹활약을 펼친다.이 지방의 속내는 백제가 멸망했기 때문에 대가야 부흥운동이었다.)
이인좌, 정희량 등이 숨어 들어가서 잡힌 곳은 경기도 안성이 아니다.
진안군 상전면 죽도의 죽산이거나 동향면 손죽도, 진안읍 죽산리라고 확신한다.
진안에 진안산성(우화산)이 있고 옛 부터 진안을 그냥 안이라고 불렀다.
진을 안에서 안성으로 옮겼다는 말은 진안에서 현재의 무주군 안성면으로 옮겼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쪽이 수세에 몰렸을 때 군사적으로 방어하기 좋은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당시는 무장군이라고 불렀다.
이인좌는 동인의 정신적지주였고 정여립의 근거지였던 진안군 상전면 죽도였던 죽산으로
진을 옮겨 달아났다가 잡혔다는 말이다.
상전면 죽도에서 진안읍 가막리를 거쳐 토벌군을 피해 산을 넘어가면 진안읍 죽산리로 이어진다.
또 일부 병력은 진안군 동향면 손죽도의 죽산으로 달아났다가 잡힌 것이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이곳은 최경회가 왜장 후쿠시마를 활로 쏘아 죽이는 곳이기도 하다.
동향면 손죽도 정상에는 죽산성과 성주봉이 있어, 왜장 후쿠시마(福島正側/복도정측)가
1593년 3월까지 퇴로가 막혀 웅거하는 곳이기도 하다.
최경회가 왜군 제6군 병력을 상대하는사이 전임 전라 병마절도사 최원이 이끄는 2천 병력과
남원 출신 충청도 병마절도사 조방장 황진이 성주봉의 성주성과 죽산성을 탈환하는 곳이다.
죽도는 맑은 날에는 무릅까지 차는 강물을 건너갈 수 있지만, 싸우다가 비가오면
강을 건너갈 수가 없는 요새였다.
왜군은 진안 동향면 성산리로 달아나다가 성산 전투에서 대패하고,
나머지는 거창 지레 사랑암으로 달아난다.
호남동인이 가담하지 않은 근거는 죽산 마을의 신길만(申吉萬)등이 이인좌를 잡아
조선정부에 넘겼다는 사실때문이기도 하다.
경기도 안성은 허허벌판으로 군사적으로 전략적 요충지가 될 수가 없는 지역이다.
많은 수의 기마대를 보유하고있다면 몰라도 아무런 이유없이 점령할 필요가 없는 지역이다.
바보가 아닌이 상 기마대를 가지고 있는 조선군 본군을 상대로 경기 안성을 점령하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양으로 갈거라면 병력 손실없이 우회해서 곧장 가야한다는 것은 기본상식이다.
천안 목천, 경기 안성 죽산전투는 이인좌가 초기에 싸우는 전투이고,
진안 죽도 죽산전투는 청주로 밀려나 상당산성 전투에서 패하고 도원수 오명항 군에 대항하기 위해
대가야 지역의 지원군을 이끌고 진안 죽도에서 싸우는 전투이다.
진안 죽도는 이성계, 정여립, 임진왜란까지 이곳에서 승리만을 거둔 곳이었기 때문에 선조들의 기운을 받아
죽도로 끌어 들여 이곳에서 반드시 이겨보고 싶었했을 것이며, 또한 요새라는 인식이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전열이 흩어지는 것을 막고 심리적 위안을 받을 수가 있는 곳이었다.
그이후 도원수 오명항에게 잔당들이 패퇴하여 대구에서 토벌되어 영조의 평영남비와 함께
99년간 관료 등용금지를 당하고 5품 이상은 진출하지 못하기에 이르른다.
동대구에서 완전 궤멸되고 살아남은 자들은 만주로 달아나고 일부는 상해로 배를 타고 피신하고 말았다.
1589년 10월 정여립의 기축옥사 여파가 정인홍을 거쳐 오래도록 질기게 이어졌던 것이다.
(원래 정여립이 부산정씨임)-범동인을 대변하였던 영조 어머니 숙빈최씨 때문에
5년후부터 점차적으로 풀려 등용시키게 함.
기축옥사에 대한 원한으로 영남 동인들은 임진왜란, 정유재란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들은 진주성에도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였다가, 정유재란 이후에 정권을 잡은 것이었다.
1873년 고종 10년에 정도전, 정인홍, 윤휴, 이현일, 한효순, 목내선, 정희량 등의 신원 복권운동이 있었으나,
1907년 대한제국 융희 2년에 가서야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에 의해 복권된다.
호남 동부지방에서 기축옥사로 죽은 숫자가 2천여명에 달하는데,
영남 동인[합천, 산청의 조식학파]도 다수가 죽임을 당하였다.
이게 다 풍신수길이 조선 침공 전에 사전공작하여 황해도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에게 농간을 벌여
정여립이 반란군을 이끌고 신립대장을 죽이고 한양으로 진격할 것이라는 고변으로
영호남 동인 세력의 지도급 인사 1~2천여 명이 학살당하는 풍신수길의 사전 공작에 당한 것이었다.
그래서 옛부터 패려한혀(稗麗/悖戾翰舌/패려한설)를 조심하라는 고사성어가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패려(稗麗/浿麗)지방은 세곳이 있다.
청해성 청해호 서부의 해서지방, 산서성 태원시, 대동시 서부지방, 평안남도 평양이남,
황해도의 해서지방을 말한다.
호남은 마한지방으로 마한시대를 거쳐 가야시대를 맞이하여,
호남 마한 동부 우르가야 지방이 대가야에 점령당한다.
그후 가야전사로 활동하다가 백제의 남진정책으로 백제의 선진 문물에 쉽게 동화되어 백제에 편입된다.
대가야는 신라에 복속당하자 마한으로 들어와 백제로 활동하면서 내부적으로는
가야 부흥운동을 위해 신라와 싸웠다.
백제의 무왕, 의자왕 때 대가야 지방 100여 성을 복속한다.
상주, 선산, 성주, 거창, 함양, 산청산음, 생초면, 생비량면 일대까지 백제영역으로 들어간다.[무왕]
그후 백제 영향력하에 들어간 거제 겨내량에서 신라에 밀려나자 마산포로 옮겨 왜로 이주한다.
(상주 출신 아자개의 아들 견훤이 왜, 후백제를 세우는지 그 해답이 될 것이다.)
백제 멸망후 백제 부흥운동을 마지막까지 펼친 곳이 가야인 중심의 대가야 지방이다.
거창 거열성(800 전사), 장수군(1,070 전사), 남원시(1천5백여 명 전사), 구례군(1천여 명 전사),
화순군, 곡성군, 함양군, 산청군 일대에서 마지막 백제 부흥군이 신라에 패하게되자 백제인들과 함께
일부가 왜로 이주한다.
사실상 멸망한 백제 부흥운동이 아니라, 가야 부흥운동이라고 해야 더 정확하다.
백제가 멸망하였기 때문에 대가야를 다시 세우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호남 동부지방에서 부흥운동이 막을 내리게 된다.
가야지방은 초기에 경기 광주, 여주, 이천지방인 한산주를 기반으로 조령(문경새재)을 거쳐
낙동강 서안지방을 통하여 왜로 이주하는 루트였고 실크로드 교통로였으며, 진흥왕의 팽창정책으로
신라가 점령하자, 510년 백제의 남진정책으로 경호강을 이용하다가 562년 신라가 대가야를 복속하자,
후기에는 섬진강 루트를 통하여 왜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양나라, 백제, 서진, 동진인, 북위/남위,
북제, 북주등 중원인들이 가야루트를 통해 왜로 이주하는 주요 루트였고 모든 경제적 기반이
여기에서 나왔으므로 백제군과 백제 부흥군 편에 가담자가 많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P/S
보통 북인이라고 하면 북한지방을 생각하는데, 북한지방이 아니라 북인은 대가야 지방을 말함.
소북은 대가야 동부지방을 말한다.
대북은 대가야 지방 중부, 서부, 서남부, 북부지방을 말하고, 소북은 대가야 동부,동남부 지방을 말한다.
대북(경북,경남 대가야 지역~낙동강 서안지방.)
소북(대가야 지역 낙동강 동안지역~경남 창녕,밀양지방,탁소북(마산,창원,진해,거제))
청소북(청풍,청도~청송/신라 지역).
김성주,류성룡,김성일 등의 동인은 류성룡과 김성일이 나주 목사로 오래 재직하면서
남인을 대변하였기 때문에, 대북이 소북과 하나로 합쳤을 때의 범북인 지역은
의성, 안동지역 이남까지도 포함된 적도 있었다.
조선 초기 정권이 경기 여주, 전북 전주 정권이었지만,
유학의 사상적 기반은 광주가 가져가서 서인정권의 토대가 된다. [전북은 무인계열이 등용됨]
호남 동부지방은 원래 이 주류에 들어가지 못했다.
호남 동부지방은 원래 우르>대가야지역이었고 변방 지역이라 전사집단이 주로 거주하였던 곳이었다.
(임실군 관촌면 성미산성/각산산성 앞 슬치의 기문, 진안 웅치, 완주 운주 이치, 임실 관촌 슬치가
가야, 전나국, 하한, 백제와의 국경이었음.
가야 변방 국경지대의 가야 전사들이 백제 문물을 쉽게 받아들인 이유는
가야 갑옷은 화살에 쉽게 뚫렸지만, 백제 갑옷은 절반은 뚫리고 절반을 뚫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구려 갑옷이 가장 강했다.
슬치 기문, 남원성 전투에서만 치열했음.)
그러나 같은 호남지방이라는 것 때문에 조선 중종 때 사대사고 필사 과정에서 알려져 등용되기 시작하여,
전주 출신 정여립이 호남 동부지방인 진안 죽도로 들어가 영호남 동인을 지지하고 대변하면서
낙동강 서안 경상우도 조식학파[합천, 산청]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된다.(호남동부~경북,경남대가야지방)-
원래 정여립이 부산 정씨로 경상우도 조식학파와 연합하여 1587년 왜군 지리정찰대를 토벌하면서
탄력을 받아 동인 권력이 정여립학파, 조식학파 연합으로 동인권력이 급속히 이전되자,
양광도 동인 주리학파 이산해파는 서인 정철을 내세워 기축옥사로 제거하고 동인 권력을 지속적으로
독차지하는 것임. [양광도-경기동부, 충청북부, 충북, 강원 영월, 경북서북부]
원래 전란에 대비하기 위하여 중종 때 4대사고를 필사하는 과정에서 이성계가 남원 운봉 황산대첩을 치루고
회군하는 과정에서 우르>대가야 지방인 진안 마이산에 가서 마이산을 보고 새로운 왕업을 창업할 꿈을 품은
사실이 확인되어 호남 동부지방의 우르/대가야인들이 출사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호남 동부지방은 서인과 동인이 혼재되어 있었지만,호남 동인은 영남 동인을 대신하여
영남을 대변하게 되는데 정여립 때 대동계를 중심으로 가장 강력한 세를 형성한다.
[광해군 때 정인홍의 대북정권이 경기 일대에 추진하는 법도 대동법이며 영조 때도 실시함]
의성, 안동 출신의 김성주, 류성룡, 김성일 등의 동인은 단독으로 동인을 대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두 나주 목사로 오래 재위하여 동인이면서도 남인을 대변하였던 것이다.(나주~부산)
이당시는 모두 호남을 끼고 자기 지역을 대변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였다.
호남이 곡창지대로서 가장 많은 세금을 조선 정부에 내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일단 세금을 많이 내는 지방의 입김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세곡 이외에 부과되는 방납 특산품으로 세금을 내는데 있어 전국이 호남 특산물에 의존 구조]
또한 조선 창업기반이 전주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한성부(부윤)와 함께 전주부(부윤)가 있어 전주가 제2의 수도였음.
조선왕조실록 사대사고 중 유일하게 건재.
조선 초기 정권의 지도부 유학 강화무장은 불교폐단 등,고려말 혼란과 충혜왕 현상에서 기인한 것임.)
고려 국왕이자 심양왕이었던 충선왕대에 이성계의 4대조 이안사(목조)가
전주에서 170여 가구를 이끌고 삼척을 거쳐 함흥으로 가서 소와 말을 키워 몽고에 전투마를 팔아
부호가 된 후, 조부 이춘이 쌍성 총관부 총관 조휘의 손녀와 결혼하면서 이자춘(한왕)이 천호장이 되어
공민왕에게 협력하면서 조선 창업의 기틀을 마련한다.
정유재란이전까지 전국은 모두 호남을 끼고 정치를 하지 않으면
조선 정부의 정치권에 들어 갈 수가 없었다.
[호남은 병조, 비변사, 선전관 요직,궁궐 수비군 등 중간 무관직만 차지하고,
여주, 이천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파/서인에게 문관 정권을 내줌]
[주기학파의 등장으로 힘이 약해지기 시작하는 것임.
주리철학을 정면으로 거부하며 성리학 반란사건을 일으켜 주기철학만을 가르쳐 조선을 근대화시키려 했고,
주리학파가 중국에 고자질하면 침공을 당하게되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동인 주리학파 이산해파가
1591년2월 서인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 정철을 탄핵하면서 서인정권 마저 차지하며
양광도 동인 주리학파 정권[세력 중심 체제]이 들어서고 1592년 4월13일 임진왜란이 시작된다.]
호남 방어의 원동력은 이이(강릉/주기학파 서인>파주)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주기학파 이항 [정읍 태인]이
서경덕의 주기철학과 기대승의 "이성의 상호 통제론"을 호남에서 집결한 제자들에게 가르쳐 길러낸다.
황박, 황진, 정담, 이복남, 송상현, 선거이, 김천일 ,남언경, 이순신 등 수많은 문무관을 태인에서 길러내어
주기학파 사상철학의 근간인 근대 이성철학 [이성주의, 경험주의, 현실주의, 합리주의]을 깨우치게 하여
호남을 방어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1624년 인조2년 이괄의 난이 발생하는 것도 이괄이 서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였던 이괄(남인/여주)은 인조반정에 주력으로 나서 협력하였지만,
서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한성부 판윤[서울시장] 자리를 주자 불만을 품고 있던 차에,
후금의 여진족이 북방에서 발호하자 도원수 장만 휘하의 평안북도 병마절도사에 부원수 직위를 주면서
토벌가도록 하게 한다.
이에 화가난 이괄이 난을 일으켜 인조는 공주 공산성으로 피신하였다.
이괄은 서울을 점령했으나 도원수 장만에게 패하여 광희문을 거쳐 경기 광주(廣州)로 패퇴하다가
이천(利川)에서 한명련과 함께 있다가 2월15일 수하였던 기익헌, 이수백이 배신하고
이괄, 한명련 등 9명의 목을 치고 관군에 투항해 버린다..
순변사 한명련의 아들 한윤(韓潤)이 후금으로 달아나 후금의 침략을 유도하여,
4년후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의 명분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