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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의 철인 4월과 5월 풋풋한 새 차가 선뵈는 차의 계절 이 차의 계절에 우리나라에서는 새롭게 처음으로 시도되는 연재를 시작했슴니다 바로 '다신전'입니다 '동다송'과 함께 초의스님의 작품으로 알려진 명나라때 장원이란 차쟁이가 새로 시도하고 용기를 내서 '다록'이란 이름으로 쓴, 요새 우리나라 차를 만드는 교과서와 같은 고전입니다. 초의스님이 칠불암에서 '만보전서'를 보고 베껴 온것에다 '다신전'이라는 이름만 붙였을 뿐 사실은 '만보전서' 또한 명나라때 장원이라는 차 마니아가 쓴 '다록'을 베껴서 쓴 것이 '만보전서'였음이 밝혀 졌읍니다.
수많은 찻꾼들이 시도했지만 자신이 없어서 인지 실력이 모자라서 인지 한번도 시도 조차않은, 꿀먹은 벙어리로 지낸 귀한 자료입니다
********* ******** <최초로 시도되는 '다신전' 해부> ① 초의스님은 '만보전서'의 「채다론」을 베껴와 왜 '다신전'이란 이름을 부쳤을까? 역사상 가장 맛있는 차를 만들어 내는 덖음차의 교과서
차문화유적답사기 저자 김 대 성
‘베껴 보이는 것, 두려운 일이지만 좋은 것은 과감히 따르겠다’ 초의스님이 정리했다는 '다신전'을 보면 표지의 상단 왼쪽에 '茶神傳'이라고 제법 큰 글씨가 네모반듯하게 한자로 쓰여져 있다. 그 표지를 넘기면 ‘채다론(採茶論․차 따기를 논함)’이라는 제목 아래에 작은 글씨로 ‘초출 만보전서(抄出 萬寶全書․만보전서에서 가려 베낌)’이라고 도드라지게 써놓고 있다.
처음부터 '만보전서'에 있는 것을 베껴 썼음을 분명히 밝혀 놓고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차에 관한 자질구레한 것에 까지 20여 가지 제목을 달아 1520자를 7장에 베껴 또박또박 쓰 놓고 있다. 마지막 부분인 「발문(跋文)」에서 초의스님은 '다신전'을 펴내게 된 내력을 소상하게 쓰 놓고 있다. ‘절 집에서는 조주선사(趙州禪師․778~891)의 다풍(茶風)이 있다고는 하나, 그것만으로는 다도를 알기에 충분치 않아, 외람되지만 베껴서라도 보인다(叢林或有趙州風 而盡不知茶道 故抄示可畏)’는 것이 '다신전'을 펴낸 목적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글속의 조주풍은 당나라 때 조주라는 이름의 스님이 110살이 넘도록 살면서 누가 찾아와 무엇이든 묻기만해도 ‘차나 한 잔 마시게(喫茶去)!’라고 해 ‘끽다거’를 절 집안의 공안(公案)으로 자리 잡도록 했던 스님이다. 차 한잔 속에서 종교적인 심오함을 바닥에 깔도록 했다. 성공을 했다. 지금도 끽다거하면 조주를 생각할 만큼이다.
초의스님이 조주선차(趙州禪茶)의 뜻을 몰랐을 리 없다. '다신전'에서 추구하려 했던 초의스님의 다도는 조주선사의 ‘끽다거’처럼 추상화된 관념적 다도가 아니라 정성껏 만들고, 잘 갈무리하여, 차를 차같이 마시는 실용적 다도에 있다는 생각에서 일 것이다. ‘무자년 장마철에 스승을 따라 지리산 칠불선원 아자방에 갔다가 이 책자를 등초하여 내려왔다(戊子雨際 隨師於方丈山 七佛啞院 騰抄下來)…’
‘경인년 중춘 일지암에서 병으로 쉬고 있는 선승이 눈 내리는 창가에서 화로를 안고 삼가 쓰노라(庚寅 中春 休菴病禪 雪窓擁爐 謹書)’고 써놓은 것을 보면 무자년(서기 1828년)에 스승과 함께 칠불선원에서 베껴 온 것을 경인년(서기 1830년)에 마무리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의스님이 43세 때 칠불선원에서 청나라 모환문(毛煥文)이 엮은 '만보전서'의 「채다론(採茶論)」(청나라 高宗 乾隆 4년 1739년 刊)을 베껴와 2년간을 미루어 두었다가 초의스님의 나이 45세때인 1830년 이른 봄에 '다신전'이라는 전혀 다른 이름의 제목을 달았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飮茶의 변화, 煮茶→煎茶→點茶→泡茶시대로 초의스님이 살았던 당시에는 그런데로 규모를 갖춘 절집에서는 오래 전부터 정착되어 온 ‘끽다거’라는 공안과 함께 차 마시는 것을 스님들은 멋으로 여겼었다. 차승으로 당나라 때를 주름잡은 조주스님의 전통적인 조주풍의 다도는 자연스럽게 불교와 어울려 ‘다선일미(茶禪一味)’나 ‘다선일여(茶禪一如)’로 정착됐다.
하지만 조주풍이라는 다풍은 어디까지나 조주스님 나름대로의 색깔인 차의 종교적인 바램이었을 뿐이다. 조주 다풍은 어떤 것인지 얼마만큼이나 차 맛이 있는지는 어느 누구도 속 시원한 답을 내릴 수는 없었다. 물론 잘못 만들어서 또 잘못 우려낸 차도 조주풍이라는 미명아래에서는 말 한마디 이견을 달지 못했을 법도 하다. 선배스님의 행동이나 말에 이의를 다는 것은 불경스럽게 생각한 것이 그때의 풍조였다.
당나라때 차라면 명나라 때의 차와는 900여년이라는 시간의 차가 난다. 당나라때의 차는 떡차(餠茶․團茶)를 가루 내어 물에 끓여 마시는 차가 대종을 이루었던 시절이다. 역대 우리나라 절에서 조주차라는 이름으로 마신 차가 가루차였는지 잎차였는지도 아직 정리가 되어 있지 않다.
조주차가 어떤 종류의 차라는 것은 육우(陸羽․733~804)가 세계 최초로 차에 관한 모든 것을 간추려 쓴 '다경(茶經)'에 상세히 나와 있다. 당시의 차는 떡차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떡차라는 것은 갓 따온 찻잎을 뜨거운 물에 살짝 데치거나, 뜨거운 김에 살짝 쪄서 이를 절구에 찧은 다음, 틀에 넣고 모양을 만들어 건조시킨 것으로 병차(餠茶) 혹은 단차(團茶)라고 했다. 이 차들은 또 떡모양으로 뭉쳐서 만들어진 덩이차라고 해서 고정차(固定茶)라고도 불렸다. 결국 이렇게 만들어진 떡차는 마실 때 망치로 깨거나 잘게 부셔서 이를 체에 쳐서 낸 가루를 뜨거운 물에 우려 마시는 것이다.
그런데 「채다론」대로 만든 차는 지금까지 만들어 온 떡차와는 처음부터 전혀 다른 방법으로 만들어 졌다. 찻잎을 딴 그대로, 생잎을 바로 뜨거운 솥에서 덖고 비비고 말리는 것으로 끝이다. 그 다음 잘 덖어진 차를 뜨거운 물에 우려내어 마시는 소위 덖음차, 즉 초청녹차(炒靑綠茶)를 만드는 진수를 엮어 놓은 책이다. 떡차인 가루차가 맛이 있느냐, 뜨거운 솥에서 덖은 잎차가 맛이 있느냐는 마시는 사람의 기호에 따라 그 선호도가 다를 것이다. 하지만 불의 힘을 빌려 솥에서 덖어 내는 초청법이 차를 만드는 제다과정이 수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을 한다.
가루차가 절정을 이루고 있었던 당․송 때는 이 가루차를 만들기가 너무 어려웠다. 따라서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여 만들어 궁궐에 공납을 해야 해 백성들의 원성이 극에 달 할 수밖에 없었다. 송나라에 이어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朱元璋․재위 1368~1398)은 백성의 원성이 많은 떡차 만들기를 어명으로 중단시키고 만들기 쉬운 잎차 즉 산차(散茶)를 쓰도록 했다.
찻가루를 찬물에 풀어 이것을 끓여 마시거나(煮茶), 뜨거운 물에 우려내 마시거나(煎茶), 가루내어 솔로 저어 거품을 마시던 점차(點茶)시대를 끝내고 잎차(산차), 즉 지금의 포차(泡茶)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일본은 포차의 시대가 열리면서 중국의 차문화는 뒷걸음을 쳤다고 평가하지만 중국의 차전문가들은 “무슨 소리냐”며 고개를 흔들고 있다. 오히려 잎차시대가 열리면서 중국의 차문화는 차문화의 신기원을 여는 계기가 됐다고 반박한다. 여기다 다양한 차종류와 함께 도자기 산업까지 발전시키는 계기가 됐다며 차문화는 당․송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됐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뜨거운 솥에서 덖어 만드는 새로운 부초차 시대를 열다 아무튼 포차는 당․송 때의 떡차로 만드는 방법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신선한 색․향․기․미의 차를 손쉽게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차가 가지고 있는 색․향․기․미에 있어서도 포차는 떡차 보다는 절대적으로 앞선다는 평가이다.
뜨거운 물이나 증기에서 찌거나 데치는 증차(蒸茶)법이나 뜨거운 쇠솥에서 덖어내는 부초(釜炒)법은 찻잎의 산화를 중단시킨다는 점에서는 같은 효력을 가지고 있지만 만든 후의 그 색․향․기․미는 전혀 다르다. 뜨거운 물에 살짝 쪄지거나, 뜨거운 증기에 살짝 데쳐진 후 비비고 말려 만들어진 차와 처음부터 쇠솥의 열에 의해 덖어진 차가 맛이 다를 것은 물어보나 마나다. 맛 뿐 아니라 그 향과 색깔, 기운이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오늘 날의 중국이 명나라 때부터 찻잎을 뜨거운 솥에 덖어 만드는 덖음차, 즉 초청차법을 고수하고 있고 절대 다수의 수요자가 덖음차를 선호하는 데는 그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차박사라 불릴 만큼 차에 관한 한 달인의 경지에 있던 초의스님이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점차(點茶) 즉 증차(蒸茶)의 수준에 머물러 있던 당시의 절에 혁신적인 시도를 보인 덖음차의 진수가 실려있는 '만보전서'의 「채다론」을 베껴서라도 알려 보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다시 손질한 것이 '다신전'일 것으로 봐야 한다. ‘茶神’은 차의 참(眞) 색.향.기.미 아무튼 초의스님은 42세 때인 1828년 장마철에 스승을 따라 전남 해남 대둔사에서 경남 지리산 쌍계사 위쪽에 있는 칠불선원에 공부하러 갔다. 초의는 그곳에서 '만보전서'라는 책을 보게 된다. '만보전서'에서 차에 관한 부분인 「채다론」만을 베껴 가지고 돌아온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2년 뒤인 45세가 되던 해인, 1830년 겨울에 칠불선원에서 베껴 온 「채다론」에 발문을 붙이고 '다신전'이라는 전혀 새로운 제목을 달았던 것이다. 항간에서는 이 책의 제목이 틀린 것만 보고 초의스님이 쓴 새로운 책이라고 생각을 했다. 지금도 다신전'하면 '동다송'과 함께 초의스님이 쓴 책이라고 하는 사람이 많다.
'만보전서'의 「채다론」이라는 이 글은 사실상은 초의스님이 베껴온 때보다 약 330여 년 전, 명나라때인 1595년에 쓰여 졌던 것이다.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진택현(震擇縣) 태호(太湖)의 동정서산(洞庭西山)에 살았던 장원(張源)이 쓴 '다록(茶錄)'이었다. 학자들의 연구결과이다.
초의스님이 다신(茶神)이라고 새로운 이름을 단 것은 「채다론」에 있는 「탕용노눈(湯用老嫩)」편의 ‘그렇게 만든 차는 찻물에 차의 색․향․기․미가 쉽게 드러난다(則見湯而茶神便浮)’. 「포법(泡法)」편에서 ‘너무 일찍 따르면 차의 색․향․기․미가 채 우러나지 않고(早則茶神未發)…’. 「품천(品泉)」편에서의 ‘차는 물의 신이요(茶者水之神) 물은 차의 몸이다(水者茶之體). 참된 물이 아니면 그 신령스러움이 들어나지 않으며(非眞水莫顯其神)…’에서 나오는 차와 신이라는 글자에서 따왔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또는 스님과 가까웠던 벗,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가 초의스님에게 보낸 편지에서 ‘햇차(新茶)’의 뜻으로 다신(茶神)이라고 써 온 글을 보고 인용하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아무려나 다신(茶神)은 ‘거룩한 차의 정신(精神)’이 아니라 좋은 차와 좋은 물과 좋은 솜씨가 제대로 어우러져 나타내는 차의 참된 색․향․기․미이고, 다도는 그것을 구현해 내는 실체적인 방법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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