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녕김씨
김녕김씨 시조는 김시흥은 신라 경순왕의 8세손이며 신라김씨의 원조 대보공 김알지의 35세손이다. 그는 고려 인종 때 평장사에 이르렀으며 김녕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김녕을 본관으로 삼았다. 김녕은 김해의 옛이름이다. 가라국 김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김해김씨와 신라의 김알지를 시조로 하는 ▲김녕김씨는 뿌리가 다르다. 고려 말에 김녕이 김해로 바뀌면서 김녕김씨의 본관도 김해로 부르게 된다. 그래서 김해김씨를 선김(先金), 김녕김씨를 후김(後金)으로 구분하기도 했다.
고려 인종 때 이자겸의 난을 평정한 김향은 시조 김시흥의 큰 아들이다. 그의 딸이 당시 최고의 권세를 떨치던 이자겸의 며느리가 되어 그와 사돈이 된다.
단종 복위 거사의 주역 김문기는 시조 김시흥의 9대손이다. 호조판서 김순의 손자이며 영의정에 추증된 김권의 아들이다. 세종 8년 생원으로 문과에 등과한 김문기는 한림학사를 거쳐 함길도도관찰사를 지냈다. 관찰사로 재직 중 둔전법을 실시해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단종 때는 형조참판을 거쳐 공조판서 겸 삼군도진무에 으른다. 그는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강탈하자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모의했다. 김문기는 병력동원을 책임진다. 그러나 이 거사는 김질의 밀고로 무산됐고, 모의 가담자들은 모진 고문 속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다. 김문기 역시 세조의 모진 고문 끝에 아들 김현석과 함께 순절했다. 단종과 동지에게 누가 미칠까봐 끝까지 입을 다물고 절의를 지켰다.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자 김녕김씨 가문에는 세찬 시련이 몰아친다. 가까운 일가붙이는 유배를 당했고 김녕김씨라는 이유로 역적의 누명이 씌어진 사람들은 산중으로 피하거나 본관을 숨기며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