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뿌리 문화운동의 의미
- 버스종점 1주년 기념 강연
김용락(시인, 경북외대 교수)
- 대구 수성구 범물동 버스종점 부근에서 ‘버스종점 이야기 마당’을 시작한지 1년이 됐다. 장소 제공해준 주헌옥 선생님, 운영위원 여러분, 그리고 참석해서자리를 만들어 주신 지역주민들께 감사한다.
- 풀뿌리 문화운동의 의미, 다른 말로하면 중요성이 될 수도 있을텐데, 그 의미를 이야기하기 전에 개념 정리부터 하고 지나가겠다.
※ 풀뿌리(grass-roots)
우선 ‘풀뿌리’(grass-roots)라는 용어는 1935년 미국 공화당의 전당대회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말로 알려져 있다. 풀뿌리 민주주의(grass-roots democracy)에서 유래한 이 용어는 의회제(대의민주주주의)에 의한 간접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시민운동·주민운동 등을 통하여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참여민주주의를 일컫고 풀뿌리란 용어도 여기서 파생되었다. (* 이명박 정부 초기에 있었던 쇠고기 수입파동-촛불집회 상기하면 좋을 듯)
흔히 ‘풀뿌리 민주주의(grass-roots democracy)’라는 관용어로 쓰이는 이 제도는 우리나라에서는 민주주의의 기초로서 지방자치를 의미하기도 한다. 한국의 지방자치는 1952년부터 실시되었으며, 특히 제2공화국(1960. 4. 19-1961. 5. 16) 시기에는 전면적으로 실시되었으나 5·16군사쿠데타로 중단되었다. 그 후 1987년 6월 항쟁 이후 성장한 민의를 바탕으로 지방자치에 대한 요구가 증대하자 1991년 30년 만에 기초단위인 군 의회와 시·도의회 의원에 대한 선거가 실시되었다. 그리고 1995년 6월 27일에는 기초단위 단체장, 시장·도지사 등 광역단위 단체장, 기초의회의원, 광역의회의원 등을 선출하는 선거가 실시됨으로써 전면적인 지방자치제가 부활되었다.
참고로 풀뿌리운동이라면 곧바로 연상되는 ‘시민운동’의 역사, 한국의 시민운동은 1989년 경실련의 출발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참여연대와 같은 대중적인 시민단체들이 대거 생겨났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운동은 기존 반독재 정치운동이 가지는 대중성의 한계를 극복하는 한편 여전히 시민대중성이란 한계에 부딪치는 양면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풀뿌리민주주의를 이야기 할 때 가장 중심적인 주체가 시민개개인이란 원론에 합의하면서도 실천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전혀 다른, 시민운동의 한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의 정치적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기 어려운 한국 정당정치 속에서 시민단체들은 과도기적으로 정치적 대표성을 인정받고 있다. 왜냐하면, 시민단체는 정당보다 의사결정과정이 민주적이기 때문이고 공공선(公共善)을 위해 활동한다는 도덕성까지 겸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덕성의 우월이 다른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문제는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라는데 있다. 대중성의 문제는 일반 시민이 시민운동의 진정한 주인이 되고 있느냐의 문제와 직결된다. 한국 시민운동은 정확하게 말하면 ‘활동가운동’이거나 ‘전문가운동’수준에 머무르고 일반시민이 운동의 중심에 서있지 못한 실정이다. 그래서 소수의 명망가를 만들고 그 명망가가 시민단체를 대표하는, 대표성의 독과점현상이 나타나 건강한 시민운동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언론을 통해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 문화(Culture)
다음으로 ‘문화’(culture)란 무엇인가? 지난 80년대 문화운동이 본격화될 때 문화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다. 넓게는 인간생활 중에 파생되는 모든 게 문화라고 할 수 있고, 문화 컬쳐의 어원이 컬티베이트(Cultivate 경작하다. 밭을 갈다의 뜻)에서 파생되었다고 보고 인간의 노동행위에서 발생되는 모든 것을 문화라 지칭해서 유물론적인 관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요즘은 많이 바뀌었지만, 옛날에는 문화라면 고급문화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고, 곧바로 클래식음악이나 오페라 같은 서양고급문화와 직결되기도 했다.)
내가 월간 <대구문화>(2009. 10)에 쓴 문화에 대한 단상을 인용하면서 논의를 진전시켜보자.
“문화란 무엇인가? 지난 80년대에 한창 민중문화운동이 일어날 때는 문화란 영어어원 컬쳐(culture)가 ‘경작하다’라는 의미의 컬티베이트(Cultivate)에서 유래했다는 논리로 문화의 생산적 의미를 부각시키는 논의가 활발했다. 문화가 생산이나 노동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기는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이 논의가 당시 무 내용적 유희중심주의와 퇴폐적인 의미의 문화논리가 횡행하던 풍토에 뭔가 생산적인 논의의 장을 열면서 문화에 대한 개념 확장과 인식의 깊이를 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논의는 문화를 지나치게 유물론적인 관점으로 몰아갔다는 한계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문화론 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긴 레이먼드 윌리엄즈 라는 영국의 문화이론가는 자신의 책 <문화와 사회 1780~1950>에서 문화에 대해 의미 있는 정의를 내린 바가 있다. 그에 의하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는 문화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비로소 보편적으로 확립된 의미이다. 당시 문화는 산업. 민주주의, 계급. 예술과 같은 언어와 함께 발전해 왔다는 것이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이미 알아챘겠지만, 문화는 나 홀로 고고하게 태어나고 성장하는 돌연변이가 아니다. 이것은 철저히 시대와 현실과 관계를 맺고 있는 개념인 것이다. 윌리엄즈에 의하면, 문화는 “첫째 ‘인간완성’이란 개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정신의 보편적 상태 내지 습성을 의미하는 것이거나, 둘째는 사회 전체에서 지성적 발전 상태, 셋째는 예술의 총체, 넷째는 19세기에 와서는 물질과 지성, 정신에 걸친 전반적 생활방식”인 것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무엇보다 문화는 인간완성과 관련이 있다.
그러니까 문화를 생산하거나 문화의 향유를 통해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간이 되는 과정이나 목적, 제도 등이 지성을 동반한 생활방식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문화의 윤곽이 대강 드러난다. 그러면 인간완성이라고 할 때 ‘인간’이란 어떤 존재일까? 이 책에서 저자는 딱 부러지게 어떤 인간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크게 보아 공동체 형성의 룰과 규범에 합당한 인간에 대해 말하고 있는 듯하다.
파편화되고 쇄말화 된 산업사회에서 하나의 단자로 전락한 인간들이 문화행위를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하고 자기 소외를 극복하면서 헌신과 연대의 사회공동체를 이루는 데 기여하는 인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인간의 완성이 문화의 첫 번째 목표라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 상황에서 생각해봐도 의미심장하다.
윌리엄즈를 인용하는 김에 조금 더 나가보자. 문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예술’에 대해서 알아보자. 그에 따르면 예술은 본래 인간이 가진 숙련(skill)을 의미했다. 그러나 예술은 숙련 가운데서도 특수한 숙련, 다시 말해 상상적 혹은 창작적 기예를 의미하는 말로 바뀌었고 예술가는 전에는 기능인과 같은 말로 사용되다가 이제는 선택된 숙련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예술은 특수한 진리, 즉 상상적 진리를 의미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예술과 기술은 애초 한 모양이었으나 이후 ‘상상적 진리’를 추구하는 선택된 숙련이 바로 예술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술 하면 곧바로 연상되는 문학이나 음악, 미술 같은 장르는 단순한 숙련이 아니라 상상적 진리를 추구하는 제한된 의미이다. 무엇보다 단순한 기술이나 기능은 숙련이 최고 목표이지만 예술은 ‘진리’ 탐구가 목표인 것이다. 예술과 동궤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문화 역시 이 범주에서 멀리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인간완성과 진리탐구가 문화예술의 중요한 과제라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이 정도로 문화가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 정리는 일단락을 짓는다.
※ 운동(Action/Movement)
운동(Action/Movement)이란 ‘공동의 역사적 과제, 혹은 공공선을 획득하기 위한 집단적이고 지속적인 노력’ 정도로 개념을 규정한다. 이렇게 볼 때 ‘풀뿌리 문화운동’이란 풀뿌리에 해당하는 지역(일종의 커뮤니티/Community=커뮤니티란 지역사회의 생활의 통합과 공동체 활동의 통합을 의미한다.)을 ‘문화활동’을 통해 건강하고 아름다운 사회, 뭔가 인간적인 교감이 가능하고 그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인격적인 자부심을 갖고 살아갈 수 있는 정신적, 물적 기반을 갖도록 집단적으로 힘쓴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알다시피 지역사회는 현대 우리사회의 축소판이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경제체제 아래서의 과잉욕망, 과잉공급과 과잉소비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본주의적 삶에서, 지역사회 역시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모순과 왜곡, 불평등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를 극복하고 치유하기 위해서 필요한 게 풀뿌리 문화운동이 아닐까 생각한다. 1년 전 ‘버스종점 마을’이 생기기 전후하여 대구지역에서도 이와 유사한 모임들이 여럿 나타났다는 보도가 있었다.(<버스종점 마을> <공간앞산달빛> <수성주민광장> 2009. 4. 7 영남일보) 이 모임들 외에도 많을 것이다. 이 모임들의 지향점도 아마 대동소이할 것이다.
이런 풀뿌리 문화운동체들의 지향점은 무엇일까? 아니 무엇이 되어야 할까? 풀뿌리 문화운동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이 서로 고민하고 풀어가야 할 과제라 할 수 있다.
그 과제로 나는 다음과 같은 것을 우선 시론적으로 제시하고 싶다.
-지역(커뮤니티)내 민주적인 질서(정치)를 통해 국가, 인류의 민주적인 정치체제 수립에 기여
-생태 친화적인 문화 생성 및 그 문화의 민주적 향수
-‘작은 것이 아름답다’(슈마허) ‘자발적 극빈’(권정생) ‘무소유’(법정)과 같은 자발적인 욕망 자제의 정신적 자세 수립
-평등하고 평화로운 커뮤니티 인간관계 형성
이를 위해서는 조직의 내밀한 결속력, 여론을 환기할 수 있는 언론매체 창출 등 여러 가지 대안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의 삶을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하고 아름다운 공동체의 삶을 모색하는 모든 이들의 과제임에 분명하다. <끝>
(2010. 4. 3 토. 버스종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