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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강해(103)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
(2022. 09. 20. 화)
본문 : 눅 16:19-31
눅16장에는 예수님의 재물에 대한
가르침이 모여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결론은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을 상대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옆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는 “비웃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배를 신으로 삼은 자들).
그들은 다른 이를 위하여 돈을 쓰는 것을
낭비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자신의 배를 불리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이 땅에서 호의호식하며
사는 것이 삶의 목표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삶>
그러한 그들의 삶이 얼마나 어리석은 삶인지를
예수님은 깨우쳐 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입니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벌어진 사건에 대한 보도가 아니라 비유입니다.
어떤 근본적인 진리를 가르치기 위한
메타포(은유)라는 겁니다.
함부로 이 내용을 근거로 해서
교리화하는 우를 범해서 안 됩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면서 살았습니다
(19절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이 부자는 단순한 부자가 아니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자색 옷’은 아주 비싼 염료로
물들인 옷감으로 만든 옷입니다.
고대에 왕족이나 귀족들,
부자들이나 입는 옷입니다
(참고-행16:14절에 나오는‘루디아’라는 여인이 두아디라
출신으로서 자색 옷을 파는 사람이었습니다).
‘고운 베옷’ 역시 부자가 아니면
입을 수 없는 아주 비싼 옷입니다.
같은 무게의 금보다 두 배가 넘는 금액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면서’ 살았습니다.
‘호화롭다’는 말을 NIV에서는
“luxury”(사치스러운)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부자는 친구들을 불러다가.....
자신의 온몸을 명품으로 치장하고
자랑하는 것을 삶의 낙으로 여겼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집 대문에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 살고 있었습니다.<20-21절>
20절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절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나사로는 집이 없었습니다.
부자의 집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길바닥 인생을 살아가던 소위
‘노숙인’이었습니다.
부잣집에서 나오는 음식 쓰레기를 먹고 목숨을 부지하였습니다.
게다가 건강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헌데’는 종기나 고름이 나는 피부병입니다.
온몸이 헌데 즉 종기투성이였습니다.
치료받을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심지어 동네 개들이 틈만 나면 헌데를 핥았습니다.
이것은 나사로에게 더 큰 고통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야기 속에 개가 등장하는 것은
그의 비참함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드는 구성요소입니다.
동네 개까지 그를 무시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거지 나사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같은 날 죽음 – 뒤바뀐 처지>
공교롭게도 이 둘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죽었습니다.
22절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죽음의 순간까지도 그들의 운명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부자는 죽어 ‘장사 되었습니다.’
부자의 장례식은 살았을 때만큼이나
호화찬란했을 것입니다.
반면 거지는 그냥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거지의 시신은 그냥 거적에 말아서
성 밖으로 내다가 버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코로나19에 걸려 죽은 사람들이 비참한 것은
공식적인 장례를 치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입회하지도 못한 채,
바로 화장터로 보내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후에 그들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날마다 잔치로 호화롭게 지내던 부자가 죽어서는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게 되었고....
부자의 대문 앞에서 구걸하며 살던 거지
‘나사로’는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의 품’은
‘낙원’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약2:23)으로까지
칭함을 받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품’은
곧 천국(낙원)을 상징하는 대명사입니다.
반면에 ‘부자’는 ‘음부’에 들어갔습니다.
23절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아브라함의 품’과 ‘음부’라는 다소 생소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이는 간접적으로나마.....
사후의 중간 상태에 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부분입니다.
인간이 죽은 후 머무는 처소에 대하여
성경이 결정적인 확증을 해주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 여러 곳의 종합적 고찰을 통해
대략 다음과 같이 추론하여 볼 수 있습니다.
즉 사후에 인간의 육체는 무덤에서 부패하나
영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 상태인 낙원과 음부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영은 낙원에(오른편에 달린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불신자들의 영혼은 음부에 가는데 낙원은
이 세상에 비해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곳인 반면,
음부는 이 세상에 비해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그러나 종국적으로 도래할 완전한 천국과 지옥에 비하면
그야말로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왜 부자는 음부에 떨어지고...,
거지는 ‘아브라함의 품’ 곧 낙원으로 들어갔을까 ?
부자는 부자였기 때문에 음부에 간 것은 아닙니다.
부유하게 살았다는 것 그 자체가 죄악은 아닙니다.
성도님들도 잘 알다시피 아브라함도
사실은 세상에서 부자로 살았습니다.
때때로 어려운 일을 겪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부유한 족장의 지위를 누리고 살았습니다.
재산이나 종들도 많았고,
심지어는 개인적인 사병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성경이 칭찬하고 있는 사람 중에서 부자들도 제법 많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살았다는 것....
또는 다른 사람보다 건강하게 살았다는 것이
음부에 떨어질 결정적인 이유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부자에게 문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의 인생에만 집착했다는 데 있습니다.
자신의 몸을 치장하고, 자랑하고, 즐기는 데만 몰두하였습니다.
다른 사람, 특히 주변의 어려운 사람에 대한 무관심이
그의 결정적인 실패의 원인입니다.
그의 눈에는 자기 집 대문에 누워 사는
나사로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나사로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물론 귀찮다고 해서 나사로를 쫓아버리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돌봐주지도 않았습니다.
그에게 나사로는 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미국의 노예제도가 살아있을 때
노예 주인들은 흑인 노예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청교도 후예로서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고
나름으로 도덕적이고 인격적이었지만...
흑인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주인 여자는
흑인 남자 노예 앞에서 옷을 갈아입기도 했습니다.
흑인을 강아지 정도로 생각한 겁니다.
마음과 인격이 비뚤어져서가 아니라.....
자기의 세계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했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이게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오늘 우리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요즘의 사회학적 용어로 말하면
갑을관계와 비슷합니다.
갑은 을을 인격으로가 아니라
사물로 다루기만 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이윤을 극대화합니다.
갑에게 을은 본문의 나사로와 같습니다.
아마 부자는 음부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항변하였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저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적어도 저는 나사로를 우리 집에서 쫓아내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를 죽이지도 않았고 도둑질하지도 않았고
간음하지도 않았습니다.
도대체 왜 내가 여기에 있어야 합니까?”
성도님들은 그의 항변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이런 전도지가 있습니다.
앞면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지옥을 가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 뒷면에는 또한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다…” 지옥을 가기 위해서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는 겁니다.
단지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가르쳐주는 진리입니다.
이 부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
적어도 거지 나사로를 도울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음부에 간 것입니다.
즉 무관심과 부주의 때문에 벌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가 ‘재물의 적절한 사용’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서 부요한 재물을 가졌지만
가난한 단 한 사람을 위해서도 적절하게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지옥의 고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지 ‘나사로’는 왜 낙원에 들어갔을까요?
가난하고 어렵게 산 사람들은
모두 낙원(천국)에 들어갑니까? 아닙니다.
그가 무슨 착한 일을 많이 했다던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뛰어났다던가 하는 그런 이야기가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나사로가 죽은 후에 낙원에 들어가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재물에 집착하는 바리새인을 교훈하기 위한
비유임을 다시 상기해야 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무슨 교리를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한 가지 실마리가 있다면 바로 거지의 이름입니다.
특이하게도 비유에서 부자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거지의 이름은 ‘나사로’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누구의 이름이 더 유명했겠습니까?
당연히 이 세상에서 살 때는 분명 부자의 이름이 유명했을 것입니다.
누가 거지의 이름에 관심이나 가졌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에는 부자의 이름은 없고,
거지 나사로의 이름만 소개됩니다.
‘나사로’는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그가 얼마나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며
살았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의 이름으로 미루어
매우 신앙적인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음부(지옥)의 고통>
부자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보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습니다
(실제 낙원과 음부는 서로 마주 볼 수 없는 곳이겠지요.
교훈을 위한 비유이니 가능한 이야기).
부자는 나사로를 알아보았습니다.
자기의 대문에서 자신이 먹다 남은 음식으로
연명하던 나사로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간청하였습니다.(24절)
24절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이 내용은 지옥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첫째는 육체적 고통입니다.
‘불꽃 가운데서’ 당하는 육체적 고통입니다.
사람의 육체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바로 ‘화상’입니다.
그런데 지옥은 유황불 속에서 영원토록 괴로움을
당하는 곳이라고 하니(계20:10),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둘째는 정신적 고통입니다.
의식이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죽으려고 해도 죽지 못하는 곳입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하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부자의 요청을 냉정하게 거절합니다.
<25-26절>
25절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절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음부와 아브라함의 품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서
아무도 건널 수가 없다는’(26절) 것입니다.
한 번 정해진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이 불가능합니다.
이 지옥에서 탈출할 수 없다는
절망이 그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셋째는 영적 고통입니다.
다른 형제들에게 자신의 고통을
전할 수 없다는 고통입니다.
이 부자는 고통 가운데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자신의 남은 다섯 형제를 기억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간청하였습니다.
<27-28절>
27절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절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성도님들 ! 이 부자의 안타까운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자신이 고통을 당해 보니 자기 형제들이라도
여기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직접 세상에 나갈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압니다.
자신에게는 어떤 기회도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렇다면 나사로를 대신 보내서라도
이 이야기를 전해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전도를 해보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예수 믿지 않다가 돌아가셨는데,
의리가 있지 어떻게 나 혼자 예수 믿고 천국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말입니다.
만일 성도님들의 부모님이 예수 믿지 않고 돌아가셨다고 합시다.
그리고 만일 그분들이 성도님들에게 오실 수 있다면 뭐라고 그러실까 ?...
“너희들은 여기 오면 안 돼.
제발 살아있을 때 예수 잘 믿고 천국 가야 해!”
그러지 않으시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음부에 떨어진 부자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브라함은 거절합니다.
29절“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여기에서 ‘모세와 선지자’는
각각 ‘토라’와 ‘느비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는 예수님 당시에 구약성경을 지칭하는 표현이었습니다.
여기에다 후에 성문서(케투빔)에 대한
정경화 작업이 완료되어 첨부됨으로써....
현재와 같은 구약성경이 완성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다’는
아브라함의 대답은 ‘그들에게 성경이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으니까
그 말씀을 잘 들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듣는다’는 말은 히브리어로는 ‘샤마’인데,
여기에는 ‘듣는다’는 뜻과 ‘순종한다’는 뜻이 함께 있습니다.
이것을 개역 성경은 ‘청종(聽從)’이라는
단어로 번역하는데 아주 잘된 번역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기만 하면
지옥에 떨어질 걱정은 없다는 게 아브라함의 대답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다시 간절히 부탁합니다.
30절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부자는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사실일까요? 아닙니다.
이 부자는 “표적과 기사 중심”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하는 말은
성경 말씀보다 더 큰 능력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나사로가 죽었는데 살아서 다시 간다면,
이 표적을 보고 자신의 형제들이 믿으리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끊임없이 요청했던 것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이었습니다.
그러면 주님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이 부족했습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표적은 충분한 계시가 되었습니다.
요한복음1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나사로와 동명이인(同名異人)인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 나사로를
부활시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부활한 나사로를 보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지요.
그러나 모든 사람이 믿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는 일이
더욱 진행되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요11:53).
그렇습니다. 부활한 사람을 본다고
회개하고 믿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입을 통해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31절“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사랑하는 성도님들 !
이 말씀은 우리의 신앙이 철저히 기적이 아닌
말씀에 근거해 있어야 함을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실상을 알릴레야 알릴 수 없는
‘영적 고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맺는 말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는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을
책망하기 위하여 주신 비유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탐욕과
위선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저와 성도님들에게
큰 도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누리는 부와 명성과
지위는 이 세상으로 끝납니다.
호화롭게 즐기며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그것을 잘 활용하여 영원을 준비하십시오.
말세를 준비하며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믿음의 지혜입니다.
저와 우리 금산교회 온 성도들은 !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이든(재물, 시간, 은사 등등) 나의 탐욕을 채우고....
자랑하고 즐기는 데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날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듣고......
천국에서 다시 만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