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루스퀘어 신한카드홀, 큰아들내외와 함께
토요일 저녁 7시 30분 공연, VIP석 객석 1층 15열
큰아들 내외가 어렵사리 12월 24일 저녁 뮤지컬 『물랑 루즈』 티켓을 끊었다고 알려왔다. 물랑 루즈라는 단어는 내 기억 저편에도 없는 말이다. 물랑 루즈? 그래서 먼저 인터넷을 뒤적이며 그것이 어떤 뮤지컬인지를 더듬거렸다.
소개하는 글 첫 머리는 간단했다. “화려하고 비극적인 스토리.” 물랑 루즈는 파리 몽마르트 언덕을 오르는 곳에 있는 공연장 이름이라고 하는데 100여년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공연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물랑 루즈』는 프랑스어로 빨간 풍차라는 뜻이라고 했다.
몇 해 전에 파리를 여행했었다. 그리고 바로 그 몽마르트 언덕을 올라가 보았지만 가이드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다 보니 그의 설명이 없는 곳은 그저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지나친 곳은 기억나지 않는 법이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런 멋진 곳을 그냥 지나치다니.
공연장을 들어서자 무대가 온통 붉은 색이 몽환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첫 무대는 공연장 바깥 로비에 그대로 재현을 해놓아 관객들이 기념사진을 찍도록 해놓았다. 무대 왼쪽 위로는 풍차가 천천히 돌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물랑 루즈라는 말이다.
그리고 반대편 오른쪽 높직한 곳에 코끼리가 한 마리 올라서있었다. 사틴이 크리스티앙과 밀회를 즐기던 방이다. 자리를 잡고 앉자 얼마 지나지 않아 무대에서 배우들이 아주 느린 몸짓으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움직이고 있었다.
물랑 루즈가 유명세를 탄 것은 전후 어지럽던 시대에 그곳에서 세상을 위로하려 캉캉 춤을 추었다고 한다. 젊은 무희들의 발랄한 춤을 보기 위해 보헤미안, 귀족, 사업가 등이 모여들었다.
캉캉 춤은 형형색색의 레이스 장식이 가득한 치마를 위로 들어 올리며 다리를 시원하게 들어 올리며 추는 춤이다. 그러니 뭇 남성들의 시선은 모두 한 곳으로 모였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뮤지컬의 초반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사진 자료 : 다음
몽환적인 분위기가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무대 앞을 가리고 있던 ‘물랑 루즈’라는 영어 자막이 위로 올라가며 무대는 흥과 활력으로 넘치기 시작한다. 그곳 물랑 루즈에 다이아몬드라 불리며 단연 돋보이는 캉캉 춤 댄서가 바로 사틴이었다.
사틴은 돈 많은 후원자를 찾아 몸을 주고서라도 더 큰 스타가 되고 싶어 한다. 마침 극장 운영도 자금난에 허덕이는 처지였다. 그래서 물주가 필요했다. 결국 뮤지컬 최고의 가수 사틴과 물랑 루즈 단장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셈이다.
그리고 물주로 그들은 돈 많은 공작을 끌어들이기로 한다. 다행히 공작 역시 돈으로라도 사틴을 자기 연인으로 삼고 싶었던 터여서 일이 성사되는 것을 어렵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세상일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세상일이 모두 그렇다면 문학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그때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낭만파 시인인 청년 크리스티앙이 글을 쓰기 위해 파리로 왔다. 그리고 곧 유쾌한 극단 사람들을 만나 우연하게도 바로 친구다 되고 마침내는 극작가 일을 맡게 된다. 그리고 클럽 최고의 스타인 사틴을 섭외하기 위해 물랑 루즈로 간다.
크리스티앙이 물랑 루즈에 나타나자 사틴은 그가 돈 많은 공작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크리스티앙은 보헤미안을 동경하고 실제 그렇게 행동하려 애썼다. 보헤미안.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들. 그러므로 어떤 속박도 거부하는 자들이며 규범과 장소에 얽매이기를 거부하는 자들이다.
물랑 루즈는 바로 그런 자들이 자유를 만끽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캉캉 춤 역시 구속을 거부하는 격렬한 몸짓이다. 그런 점에서 보헤미안과 닿아있겠다. 사틴은 크리스티앙을 공작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유감없는 끼를 드러내며 유혹한다.
크리스티앙은 자기는 공작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사틴을 보는 순간 금방 사랑에 빠져들고 물랑 루즈라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온다. 그러나 곧 사틴은 그가 공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때 공작이 나타나고 상황은 복잡해진다. 공작이 그 둘이 함께 있는 것을 의아해했다.
극장 단장은 자칫하면 투자는 물론이고 모든 일이 틀어질 것을 걱정한다. 사틴은 그녀 나름으로 물주를 멀리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것이므로 사태를 수습하고자 한다. 그런 위기의 상황에서 크리스티앙과 사틴은 순간적인 재치로 즉석에서 짜낸 대본으로 공작을 속인다.
이하 4장의 사진 : 다음
즉석에서 짜낸 대본이기는 하지만 공작은 그 대본을 마음에 들어 하며 투자를 결심하게 된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은 공연 준비를 하는 틈틈이 공작과 단장의 눈을 피해 밀애를 즐긴다. 그러나 곧 둘의 밀회는 공작에게 알려지고 공작은 투자 철회를 선언한다.
단장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공작이 투자를 하도록 해야 함으로 사틴을 설득한다. 결국 사틴은 극장 단원들이 뿔뿔이 거리로 나앉아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현실이 그녀로 하여금 크리스티앙에게 사랑한 적이 없노라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게 된다.
공연장 사진 촬영은 금지되었다.
공연은 크리스티앙과 사틴의 사랑에 공작이 끼어드는, 말하자면 그 흔한 삼각관계로 이루어지지만 그 흔함은 배우들의 열연으로 아름다움으로 포장되고 있었다. 사틴은 사실 오래 전부터 폐병을 앓고 있었는데 병세가 점차 심해져 동료들이 입원을 권했지만 공연 준비를 강행했다.
한편, 사틴은 크리스티앙을 살리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지만, 공작은 크리스티앙을 살해하려고 결심한다. 마침내 오래도록 준비한 쇼를 공연하는 날 공작은 그 공연을 보면서 크리스티앙을 총으로 쏘려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공연 중에 사틴은 크리스티앙을 아직 좋아한다는 말이 담긴 노래를 부르자 크리스티앙이 무대로 뛰어든다. 쇼가 끝나자 쓰러져 크리스티앙에게 안긴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의 진심을 크리스티앙의 품에 안겨 전하며 마침내 죽음을 맞이한다.
사실 물랑루즈는 스토리보다는 거대하고도 화려한 무대 장치를 주목하게 한다. 지상최대의 화려한 쇼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공연 시작 전의 무대는 붉은 색 하트 모양의 세트가 관객들을 압도했다.
물랑 루즈는 호화롭고 낭만적이며, 웅장하고 스펙터클하다는 말은 그저 하는 말이 아니었다. 모두들 자리를 잡기 무섭게 스마트폰을 치켜들고 사진을 찍어댔다. 모든 스마트폰들은 풍차와 코끼리와 무대로 향하고 있었다.
한 세기 전의 서양인들에게 코끼리는 신비로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런 신비로움이 몽환적인 무대장치와 어울려 관객을 압도하고 있다. 공연 중 두 사람이 밀회를 즐기던 곳이 바로 코끼리 방이었다.
거기에 남녀 주인공의 인 크리스티앙 역의 이충수와 사틴 역의 김지우의 열연은 공연이 끝날 때까지 무대를 압도했다. 그들의 폭풍 성량에 놀랐고, 배우로 다져진 연기력에 또한 놀랐다. 아울러 극장 단장 지글러 역의 이정열 역시 맛깔 나는 연기로 흥을 돋우었다.
공연이 끝나자 우리 얼굴은 저마다 가벼운 흥분으로 가득했다. 자료를 보니 이 뮤지컬은 2001년 개봉한 배즈 루어먼 감독의 뮤지컬 영화 ‘물랑 루즈’를 원작으로 하고 있으며, 아시아에서 초연되는 것이라고 한다.
모처럼 연말에 멋진 공연에 흠뻑 취해서 따로 연말 건배를 들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공연 시간이 긴 탓에 집으로 돌아오니 자정이 다 되었다. 아들 내외 덕분에 멋진 크리스마스이브를 즐겼다.
뮤지컬을 시작하기 전에 오랜 벗들로부터 사진 몇 장이 전송되어 왔다. 모두들 노래방에서 한바탕 신나게 노래를 부르는 사진이었다. 뮤지컬 공연이 끝나자 문득 지금 그들에게는 그곳 노래방이 바로 물랑 루즈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몽마르트 언덕을 오르는 길이 아니더라도 물랑 루즈는 어디에나 있을 것이다. 서로를 바라보며 노래에 흠뻑 취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 그렇다. 캉캉 춤은 아니더라도 서로 흥이 고조되면 블루스라도 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노래방은 물랑 루즈임이 분명하다.
그들이라고 보헤미안 랩소디를 읊조리지 말란 법이 어디 있겠는가. 뚝배기 같은 노랫가락에 그들 나름의 아름다움과 자유로움과 그들만의 사랑을 담을 수 있다면 그게 곧 그들만의 보헤미안 랩소디일 것이 분명하다. 내게 지금이 멋진 시간이듯이 그들 또한 그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