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곤, 현실을 사유하는 유목적 리얼리스트

[이영준]

김은곤, 현실을 사유하는 유목적 리얼리스트

이영준 

큐레이터, 김해문화의전당 전시교육팀장

프롤로그

김은곤과 나와의 인연은 매우 각별하다. 고교시절 같은 미술학원에서 수학하면서 선후배로 만났으며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술친구로 지내왔기 때문이다. 물론 서로 연락을 못하고 지내던 시간이 있긴 했지만 서로를 너무나 잘 아는 지인이다. 그의 작품을 지켜봐왔던 나로서는 이 글이 무척 부담스럽다.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할까하는 의문과 오히려 가까워서 보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너무 많은 것은 아닐까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큐레이터의 입장에서 오랫동안 작가의 작품을 지켜본 사람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차마 작가가 세상에 대해 하지 못한 말을 내가 대신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용기를 내본다.

작가의 작품을 시리즈별로 거칠게 정리해 보면 초기 리얼리즘 시리즈, 방황의 시기,  동구릉에 정착하면서 만났던 인물들을 형상화 했던 인물초상시리즈, 꽃 시리즈, 들풀 시리즈 그리고 최근의 도마시리즈로 정리가 가능하다. 주제나 소재 면에서 급격한 변화를 보이고 있는 작가의 작업스타일은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작가의 기질 탓도 있거니와 작품과 세상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작업에서 일관되게 발견 할 수 있는 부분은 시대와 현실에 대한 성찰과 반영이다.  

초기 리얼리즘 시리즈(1991-1993)

김은곤은 고교시절에서부터 탁월한 묘사력과 뛰어난 색채감각으로 당시 그림을 그리는 학생들 사이에서는 늘 화제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이다. 작가의 작품은 기성작가 이상의 테크닉을 자랑하며 선후배들에게 관심의 대상이었다. 김은곤은 초기 현실과 소통의 문제를 집요하게 형상화해왔다. 91년에 창립되었던 그룹<해빙>의 멤버로 김민섭, 김성룡, 박은국, 방정아, 부이비, 손문익, 심점환, 양호규, 이석금, 이인철, 전창래 등과 활동하였고 이들은 민중미술의 과도한 정치성을 비판하면서 일상성의 회복과 지역성을 의제화하는데 주력하였던 단체였다.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 강했던 작가는 90년대의 사회문화적인 패러다임의 변화에 대해 나름대로 대응하고자하는 의지가 강했다. 그는 바로 작고한 故양호규선생을 찾아가 그룹 활동을 제의하게 된다. 이때 뜻을 같이하던 작가들이 의기투합해서 만든 그룹이 바로 해빙이다. 당시 부산지역화단의 분위기는 민중미술계열의 작가는 비제도적인 실천을 중심에 두었기 때문에 지역미술계 내에서 담론을 주도하고 있진 못했으며 형상미술이라는 다소 포괄적인 미술흐름이 지역미술을 주도하고 있었다.

해빙과 더불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나가면서 작가는 다음해에 처음으로 개인전을 개최하게 된다. 송정의 끝자락 구덕포에서 둥지를 틀고 있던 시절로 당시의 작업들은 공중전화, 시계, 자전거 바퀴, 밥상 등 오브제와 이미지가 결합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민중미술의 어법을 따르면서도 다양한 형식적인 실험의지를 보여주고 있었으며 정치적인 프로파간다에서 벗어나 ‘일상성의 회복’을 추구하고 있었다. 어두운 색채로 묘사된 당시 민중들의 표정들은 작가의 순발력 넘치는 필획을 만나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또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브제를 이용한 작업들은 최근 도마시리즈와도 밀접한 연관을 보여주고 있으며 어쩌면 최근의 작업을 가능하게 한 실험적인 모색기라고 판단 할 수 있다. 당시 제작된 작품 중에 1991년에 제작된 “아버지-봄”은 매우 뛰어난 수작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은 탁월한 서정성과 작가의 특징적인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다. 멀리 보이는 산들과 굽이진 시골길을 따라 자전거를 끌고 가는 아버지의 모습은 농촌의 전형적인 풍경과 삶의 국면을 탁월하게 서술하고 있다. 너무도 평범해 보이는 장면이지만 민중미술의 과도한 정치성을 벗어나려 했던 작가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던 작품이다. 

방황(1994-2005)

93년까지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작가는 이후 제도권 미술계에서 점점 잊혀져가고 있었다. 호구를 위한 벽화제작, 벤처기업운영, 심지어 택시기사를 마다하지 않았고 거침없이 지리산에서 1년 동안 은둔생활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돌 공장 석공과 산불감시 등을 전전하며 자신을 타박하는 세월을 보내게 된다. 현실주의 미술에 깊이 천착했던 작가는 미술운동에 대한 회의와 삶에 대한 의미를 찾지 못해 오랜 기간 방황하게 된다. 사실 지금의 들풀시리즈와 도마시리즈는 이 시기의 방황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예술적 성취이다. 

초기에는 벽화제작과 미술사 아카이브 사업 등 그림과 관련된 일들을 진행했다. 컴퓨터 실사가 아직 보편화되지 않아 대형매장에는 벽화작업이 요구되었던 시절이라 그런대로 수요가 있었다. 하지만 점점 값싸고 손쉬운 컴퓨터 실사 출력이 대신하면서 이 일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러다 2000년대 초반 벤처기업 열풍을 타고 정부의 많은 지원이 진행되자 작가는 미술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일종의 아카이브 사업을 벌인다. 당연히 돈이 될 리 없었고 이 일도 오래가지 않았다.

변화에 손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강직한 작가의 기질은 필연적으로 세상과의 마찰을 동반 할 수밖에 없었으며 평범한 삶이 죽음보다 싫었다. 그래서 그는 방황을 선택한다. 삶을 뿌리 채 세상으로 내던지는 행위를 통해 작가는 세상과 새롭게 만날 준비를 한 것이다. 택시기사를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기도 했으며 지리산에서 사람과 등을 돌려 보기도 했다. 때로는 석공이 되었고 때로는 나무를 깍았다. 수도승과 같은 시기를 지나 작가는 동구릉을 만나면서 새로운 창작의지를 불태우게 된다.

인물초상 시리즈(2006-2007)

작가는 휴전선을 보겠다며 떠나던 길에 우연히 동구릉에서 안정된 직장(?)을 가지게 된다. 산불감시. 작가에게 주어진 임무였고 월급은 90 여 만원. 비정규직 이었다. 버려진 민가가 주어졌고 작가는 더없이 풍족한(?) 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이 시기 근처에 살고 있던 리영희 선생을 자주 만날 수 있었고 미술평론가 최석태와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이들은 작가에게 창작의 에너지를 제공하였고 참았던 그림에 대한 애정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 애정을 들추었던 것은 바로 ‘사람’이었다. 이 당시 작가는 자신이 만난 사람들을 하나씩 화면에 새기기 시작한다. 리영희선생을 비롯하여 유홍준, 송건호, 오윤, 안창홍, 최민화, 전인권 등의 인물을 제작하였다.

이러한 인물화들은 단순히 초상의 차원을 넘어선 것들이다. 인물이 가지고 있는 정신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이어졌다. 오랜기간 창작활동에 목말랐던 작가는 이들 인물을 통해 그 의지를 불태우게 된다. 또한 이 시기 작가는 최석태의 집에서 수많은 책들을 섭렵하며 인문학적인 소양을 쌓게 된다. 이러한 인문학적 소양은 인물화에 그대로 투영되면서 그 인물이 가지고 있는 삶의 태도와 섬세한 표정을 예리하게 묘사하고 있다. 물고기와 리영희가 만나고 오윤의 그림과 유홍준이 오버랩된다. 꽃잎과 함께 최민화가 등장하고 소나무와 송건호가 한 화면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이중적인 화면구조는 인물들의 삶과 연관된 상징적인 것들로서 작품에 대한 해석의 지평을 보다 확대해 주는 기제로 작용하였다.

하지만 신명들린 작가의 창작의지는 또 한 번 좌절을 맛보게 된다. 작가의 작품에 호감을 가진 서울의 화랑과 전시준비를 진행했지만 수포로 돌아가고 결국 작가는 커다란 상처를 받게 된다. 그렇게 좋았던 비정규직 생활마저 포기해가며 준비했던 전시였지만 세상은 작가를 또 다시 오지로 밀어낸 것이다. 하지만 당시 인물화에 대한 정연한 연구는 최근의 작업으로도 이어져 오고 있으며 특히 2009년 3월부터 1년여 동안 머물렀던 봉하마을에서 故노무현 대통령을 형상화하는 인물작업들의 커다란 밑거름이 된다. 김은곤의 인물시리즈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故노무현대통령을 비롯해 권영국, 선미엄마, 박남식, 이성윤 등 주변의 인물들로 확대되면서 보다 형식적인 완결미를 보여주고 있다.

꽃 시리즈(2007-2008)

좌절 맛본 작가는 귀향하면서 꽃을 만나게 된다. 너무도 그리고 싶었지만 왠지 꽃을 그린다는 것이 석연치가 않았다. 상업주의와 결탁한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하고 세상과의 싸움에 대한 포기선언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작가로서의 자존심으로 삶을 버텨왔는데 ‘꽃’은 왠지 ‘백기’와도 같았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로도 작가의 의지를 막을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작가에게 꽃은 한편으로는 ‘희망’과 같은 것이었다. 작가가 그린 꽃들은 화려하지 않다. 현실의 어둠과 같은 검은 호수에서 영롱하게 피어나는 연꽃을 형상화 했다. 맑고 아름다운 꽃이 아니라 마치 검은 기름 위에 떠있는 듯 한 꽃을 그렸다. 그 꽃들은 짙은 어둠과 극적인 대비를 이루면서 선연하게 그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작가는 이 꽃들에게서 자신의 처지를 확인했을 지도 모른다.

이러한 꽃 시리즈를 제작하면서 작가는 1년 동안 3번의 개인전을 개최한다. 그만큼 많은 작품을 제작하였다. 마치 그 동안의 방황을 보상이라도 하듯 작가는 창작에 전념한다. 물론 이 당시 작가가 창작에 전념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아낌없는 지원과 믿음을 가져준 선배 김종세의 영향이 크다. 청년시절부터 김은곤의 가능성을 확신했던 김종세는 매니저 역할을 자청했다. 이로서 작가는 더욱 작품 활동에만 매진 할 수 있었으며 서울에서의 상처를 보다 빨리 잊을 수 있었다.

작가가 이러한 꽃 시리즈를 감행했던 이유는 인물작품과는 또 다른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주의’니 ‘동아시아적 미학’이니 하는 거창한 자각이 아니라 오히려 소박하고 작은 깨달음 같은 것이다. 작가는 이제까지 자신의 작품이 얼마나 ‘어깨에 힘’이 들어간 작업이었는지를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하고 싶은 것을 억누르며 지탱하지도 못할 예술의 무게를 스스로 짊어지고 살았다는 자각, 이러한 자각은 작가의 작업에서 하나의 분수령이 된 ‘들풀 시리즈’를 만나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들풀 시리즈(2009-2010)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김은곤의 작업에서 들풀시리즈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작가는 ‘들풀’을 만나면서 보다 확장된 ‘은유’의 세계를 맛본다. 어쩌면 작가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준 것이 들풀 시리즈다. 이름 없는 들풀과 야생화는 그 자체로 작가가 그동안 그렇게 만나고 싶었던 ‘민중’ 혹은 ‘현실’의 모습이었을 지도 모른다. 들풀은 작가 김은곤의 마음을 호출해 낸 소재이자 실재를 드러내는 통로였다. 들풀을 통해 작가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그가 그린 들풀들은 바닥에 낮게 깔린 풀꽃, 개망초와 노랑어리연, 자운영 등 소박하기 그지없는 들풀과 꽃들이다. 꽃을 그리겠다는 용기를 내지 않았다면 아마 작가는 ‘들풀’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현대미술이 점점 개념화되어가고 있는 추세를 감안할 때 ‘꽃’이나 그리는 퇴색한 작가로 평가되는 것이 두려웠다면 아마 김은곤은 작가로서의 운명을 이어가긴 힘들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들풀시리즈의 작품들은 그저 그린 것들이다. 아스라이 스며드는 햇살, 잎에 맺힌 이슬, 긴 겨울을 이겨내고 싹을 틔우는 잡풀들이 그저 그렇게 그려져 있을 따름이다. 어려운 이야기나 이해하지 못 할 심오함같은 것을 찾아 볼 수 없다. 하지만 아무도 보살피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이어가는 들풀은 우리들 삶을 닮아있기도 하고 자연의 경이로움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목 놓아 외치거나, 혹은 부릅뜬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과거의 작품에 비하면 지금의 그림은 그저 그림일 뿐이다.

어깨에 힘을 뺀, 투사연하지 않은 여유로움은 보는 사람에게도 더 큰 감동을 준다. 김은곤은 들풀을 만나면서 자유로워진다. 무엇인가를 그려야한다는 강박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것을 그림으로써 작가는 더 큰 이야기를 만들게 되고 작품이 가지고 있는 울림을 증폭시킨다. 들풀은 작가에게 그런 존재이다.

이 시기 작가는 봉하마을을 찾게 된다. 봉하마을. 노무현 前대통령의 고향으로 그가 임기를 끝낸 뒤 처소로 삼았던 곳이다. 지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면도 있었지만 역마살은 그를 한곳에 머무르게 하질 않았다. 노무현 前대통령의 측근으로 있던 김정호 선배의 요청으로 봉하마을이 생태를 그리려고 갔지만 이내 더 큰 아픔을 직면 하게 된다. 봉하마을 입구 허름한 슬레트 작업실에서 마을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들풀을 그리는 재미에 흠뻑 빠져있던 여름날, 작가는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후의 작품은 대부분 故노무현 전 대통령의 그림자가 깊게 베여있다. 그가 다녔던 길, 그의 시선이 머물던 연못, 그의 귀향을 무심히 받아주었던 봉하의 자연이 화면에 가득하다. 풀숲에 던져져 있는 밀짚모자와 주인 없이 먼 길을 바라보는 자전거는 노무현 前대통령의 소박한 일상을 떠올리게 만드는 기제이자 그의 상실을 대변해 주는 오브제들이다. 작가는 前대통령이자 젊은 시절 민주화운동 당시 만났던 한사람을 떠나보내는 아픔을 새기고 있었다.

도마시리즈(2010- )

오브제와 이미지의 결합은 이미 92년 제1회 개인전부터 실험적으로 진행해오던 작업방식이다. 하지만 당시의 작업들에서 이들이 그렇게 아름답게 만나지는 못했다. 기계적인 결합으로 인해 이미지와 사물이 거칠게 대립하고 있었고 이야기를 증폭시키기보다 오히려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김은곤의 작업에서 이러한 작업 방식은 그 이후 대상과 상징이 공존하던 초상화에서 보다 발전적으로 진전된다. 인물의 특징적인 국면을 상징하는 화면이 배경으로 혹은 오버랩하는 방식으로 보다 유기적인 관계설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 작가는 도마를 만나면서 이미지와 오브제가 가장 아름답게 만나는 국면을 연출해 내고 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모티브가 되어 시작된 도마시리즈는 생생한 사실감과 더불어 임팩트 강한 물성을 가진 ‘도마’로 인해 흡인력을 가진 화면을 연출해 내고 있다.

세상에 모난 일들이 꼭 오르는 곳이 ‘도마’이다. ‘도마’ 위는 세인의 이목을 받게 되는 처소이자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는 장소가 된다. 또한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먹거리가 틀림없이 거치는 곳이기도 하다. 작가는 그곳에 일상적인 이미지들을 올려놓는다. 고등어와 조기는 물론이고 명태와 아구 그리고 심지어 김치와 오이소박이 까지 올려놓았다. 삶의 편린들이 하나 둘 새겨지면서 김은곤의 도마는 세상이 된다. 이 작업을 두고 이미지와 실재가 어떻고 하는 수사는 그저 수사에 불과하다. 이 작품에서 도마를 제외하면 모두 작가가 그린 것이다. 김칫국물, 생선에서 흘러나온 물기, 갓 씻어낸 채소에서 느껴지는 생생한 습기들은 모두 작가의 손에서 창조된 이미지 들이다.

이 모든 도마들을 작가는 직접 시장사람이나 일반인들에게 수거해 제작하고 있으며 이들은 오랜 세월을 이겨내어 그 자체에 삶의 체취가 가득하다. 수없는 칼질로 형태마저 변형되어버린 것들에서부터 어느 정당의 현판을 ‘용도변경’한 도마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도마들이 사용되었다. 그 도마 위에서 자신의 몸을 헌신적으로 떠나보낸 이들을 작가는 하나씩 호출해 내고 있다. 그들은 대학에 다니는 자식의 등록금이 되어 사라지거나 우리의 몸과 살이 되어 삶의 일부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험한 풍파를 견뎌낼 수 있는 삶의 에너지가 되어 세상을 버티게 해주었다. 그래서 도마는 우리의 몸과 삶을 은유하는 가장 아름다운 오브제이다. 도마는 김은곤을 통해 세상에 ‘존재’로 모습을 드러낸다. 

에필로그  

김은곤은 노마드적인 리얼리스트이다. 정처 없는 자신의 삶이 그러하거니와 하나의 형식이나 양식에 머무르지 않는, 유목적 기질을 가지고 있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오랜 시간을 거쳐 현재에 되돌아 왔다. 하지만 그 방황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그가 또다시 어디로 사라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낯선 곳을 두려워하지 않는 작가의 기질은 분명 또 다른 세상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방황의 크기나 깊이가 결코 헛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아직 작가의 정점을 보지 못했다. 김은곤은 지금까지 이루어낸 예술적 성취보다 더 큰 가능성을 가진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다음 처소가 궁금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