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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제(眞諦)와 속제(俗諦)>
부처님께서는 설법을 하심에 진제(眞諦)와 속제(俗諦) 두 가지 진리로 나누어 설하셨다. 이 두 가지 진리를 합쳐 이제(二諦)라 하는데,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부처님이 설한 교설의 깊은 진실을 이해할 수가 없다.
‘제(諦)’란 진리라는 뜻이다. 그리고 진제는 절대적 진리, 세속적 입장을 초월한 진리, 즉 궁극적 관점에서의 진리를 뜻하며, 일명 승의제(勝義諦) 혹은 제일의제(第一義諦)라고도 한다. 절대적인 진리인 진제에는 반야바라밀, 공(空), 진여(眞如), 해탈(解脫), 열반(涅槃) 등이 이에 속한다.
이에 비해 속제는 세속제(世俗諦) 혹은 세제(世諦)라고도 하며,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세속적인 진리, 여러 가지 차별이 있는 현실 생활의 실상에 따라 알기 쉽게 세속의 도리로 설해진 진리, 즉 현실의 인과법이 적용되는 일상적 관점에서의 진리를 뜻하는데, 이와 같은 속제에는 무상(無常), 무아(無我), 고(苦) 등이 이에 속한다. 따라서 무상. 무아. 고는 속제에서는 진리이지만 진제에서는 진리가 아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늙어 죽는다는 사실은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이러한 현상의 이치가 속제에 해당한다. 그러나 진제의 세계에서는 늙음도 죽음도 없다는 초자연적인 것을 말한다. 인간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늙어 죽어가는 모든 과정이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반야의 도리에서는 그 일체가 없다는 것이다. 즉, 그 모든 과정의 다 하고 끝남도 텅 비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불교도 기독교처럼 천국에 대한 개념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속제에 해당한다. 부처님께서는 해탈이 어려운 중생에게는 천상 세계에 가게끔 계율을 지키고 선행을 할 것을 강조하셨다. 5계를 지키고, 착한 일을 하면, 그 과보로써 천상계에 태어난다는 내용이다. 헌데 이것은 세속적 진리에 입각해서 설하신 것이다. 진제에 있어서는 천상도 없고, 지옥도 없으며, 윤회도 없다. 천상에 태어나야 할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아함경(阿含經)을 보면, 부처님께서는 처음엔 주로 속제로 설하신 듯하다. 그래서 계율에 ‘불사음(不邪淫)’, 즉 삿된 음행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있다. 음행을 전적으로 금한 것이 아니라 삿된 음행만 금하신 것이다. 하지만 진제인 절대적인 진리의 세계로 나아가려면, 즉 해탈을 하려면, 음욕을 완전히 끊어야 한다. 제대로 수행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해탈을 위해서는 반드시 색욕을 끊으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속제와 진제가 구분된다.
그런데 부처님은 왜 속제에 해당하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삼법인(三法印)을 설하셨을까.
우선 무상(無常)을 왜 설하셨는지에 대한 것부터 검토해보자.
부처님께서 무상을 설하신 것은 중생이 모든 게 영원하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먼저 그 전도몽상(顚倒夢想)을 깨버리려고 방편으로 설하신 것이다. 무상하다 함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속제의 차원에서 보면 태어나는 것도 있고, 죽는 것도 있다. 몸이 태어나고, 또 몸이 죽는 것을 생사(生死)라고 한다. 이처럼 속제에서 살펴보면 모든 게 무상하다. 영원하지 못하다. 그래서 결국 사람은 죽는다. 이와 같이 속제에서는 죽음이 있고, 윤회가 있고, 그로 인해 천상계와 지옥이 있다.
그러나 진제에서는 죽음도 없고 윤회도 없다. 모든 게 다 무상하다면 해탈, 열반도 무상하다는 뜻이 된다. 해탈. 열반이 무상하다면 그것은 해탈. 열반이라고 할 수가 없다. 따라서 무상이라는 것은 절대 진리인 진제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세속제이다. 즉, 무상이란 진리로 접어드는 문일 뿐, 그것 자체가 절대적 진리는 아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나오는 ‘역무노사진(亦無老死盡)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라는 구절을 이해하지 못해서, 왜 불교에서는 윤회가 있다고 했다가 없다고 하는가 하고 볼멘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현상 역시 진제와 속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속제는 연기법(緣起法)에 해당하고, 진제는 공성(空性)에 해당한다. 부처님께서는 어떨 때는 윤회를 한다고 하시고, 또 어떤 때는 윤회하는 주체가 없으므로 윤회가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둘의 차이가 바로 진제와 속제이다. 속제에서는 윤회가 있다. 그게 육도윤회(六道輪廻)이다. 그러나 진제에서는 윤회가 없다. 윤회하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확실히 이해하려면 진제를 깨우쳐야 한다. 진제와 속제, 이 둘을 잘 이해해야 중도(中道)를 지켜나갈 수 있다. 그래야 단멸론이나 상주론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헌데 공(空)은 한 번에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무상으로 접어들어야 한다. 그래서 삼법인(三法印)에 무상의 진리가 첫번째에 등장한다. 무상의 진리를 배우다가 진제인 공(空)을 터득해야 한다. 무상이라는 것은 방편이다. 모든 게 영원하다는 집착을 없애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속제로서 무아(無我)를 설하셨다. 이것은 고정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아(我-아트만)가 없다는 뜻이다. 무아는 무상(無常)이 ‘나(我)’에게 적용됐을 때 깨닫게 되는 경지로서 연기법에 대한 공간적인 해석을 의미한다. 모든 것이 고정된 변하지 않는 그러한 실체가 없듯이, ‘나’라는 존재 또한 무수한 인과 연들에 의한 작용,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말이다. ‘나’라는 것은 이 몸과 마음에 의해서 이름 붙여진 것에 불과하다. 무아라는 것은 본래 있던 나를 없애서 무아가 된 게 아니고, 원래 ‘나’라는 건 없다는 의미이다.
부처님 당시 인도 전통 종교인 브라흐만(Brahman, 梵)에 있어서의 가장 기본적 개념이 아트만(atman=我相)이었다. 이 아트만은 인간 존재의 영원한 핵, 변치 않은 실체, 또는 변치 않는 자아(自我), 변치 않는 본질이라는 뜻으로 죽은 뒤에도 살아남아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했다. 당시 인도 사회는 이런 고정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아트만 사상에 빠져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아트만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아상(我相) 타파를 위한 속제로서의 설법이 바로 무아 교설이었다.
그리고 무아의 ‘내(我)가 없다’는 것에서 ‘나’라는 것은 ‘나’ 개인뿐만 아니라, 인간을 넘어서 사물까지, 이 세상의 일체 모든 존재를 의미하는데, 사람이나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 나무나 풀이나 돌이나 지구, 태양, 우주 또한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이고,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 사건들,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온갖 일과 사람들의 감정들까지 모든 것이 고정적인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 우주법계에 존재하는 일체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모든 생명과 모든 사물들은 변치 않는 실체가 없어서 끝없이 변한다. 따라서 생명체 역시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는 없다고 하는 것이 무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인도 사회뿐만 아니라 오늘에 있어서도 변함없이 중생들은 이 아상(자아)에 집착하고 있다.
이 몸과 마음을 가지고 ‘나’라고 생각하고, 이 몸뚱이에 나의 본질적인 근원을 설정하고, 그러한 ‘나’에게 집착한 나머지 재산과 명예와 권력이 영원히 제 것으로 착각해서 탐욕을 부리고 남을 억압하며 서로 다투고 있다. 이와 같이 아상에 집착한 자기중심의 행태를 떨쳐버리기 위해 속제로서 무아가 설해진 것이고, 이러한 무아의 개념이 진제에 있어서는 공(空)으로 발전한다.
‘나(我)’란 존재는 무상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원한 것도 아니다. ‘나’라는 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왜냐면 불생불멸이기 때문이다. 본래 태어난 게 없기 때문에 죽을 수도 없는 것이고, 본래 뭐가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영원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사라져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본질적인 자아(自我)도 사실은 실체가 없는 것임을 의미한다. 공(空)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것도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봐야 한다. 생(生)과 사(死)가 같다는 것은 진제의 측면에서 설명해야 한다. 진제는 불생불멸을 말한다. 따라서 태어난 게 없다는 것과 죽는 게 없다는 것이 같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연기로써 존재하며, 연기라는 것은 상호 인연화합을 말하는데, 그러므로 독립적인 실체가 없다. 그러므로 무아이며, 이 무아가 발전한 것이 공(空)이다. 이처럼 공은 무아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지만, 그보다 더 철저히 발전된 개념이다.
공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본성이 공하다는 의미이다. 공은 불이(不二) 즉 이원적 대립의 극복으로 요약된다. <반야심경>에서도 공을 부증불감(不增不減)으로 설명한다. 부증불감은 증가와 감소를 동시에 부정하는 것으로 이와 같이 대립되는 개념 전체를 동시에 부정함으로써 공은 새로운 차원의 철학으로 전개된다. 대립과 갈등에서 벗어나 절대평등의 세계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이다.
고(苦)도 마찬가지이다. 고통이라는 것은 제법실상을 몰라서 집착할 때에 발생하는 것이다. 제법실상을 알아서 마음이 오염되지 않는 상태라면 고통이 아닌 게 된다. 해탈하면 고통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고(苦)도 역시 속제에 해당한다.
그리고 <반야심경>에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라고 한 것은 속제인 사성제(四聖諦)를 부정하고 있다. 지혜의 눈으로 우리 인생을 관찰해 볼 때 삶의 근본이라고 하는 몸과 마음은 텅 비어(공이므로) 아무 것도 없으므로 그 몸과 마음을 의지해 일어나는 온갖 고통은 아예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고(苦)의 원인도, 고가 소멸된 경지도, 고를 소멸하는 방법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반야바라밀에는 고집멸도가 본래 없다. 반야바라밀은 불생불멸의 실상으로서 고(苦).집(集)이 없으니 멸(滅).도(道)도 또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을 이루지 못하고 무명의 굴레에서 맴도는 중생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리고 <반야심경>에서는 12인연도 모두 텅 빈 것으로 표현한다. 이것은 인간의 존재 방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텅 빈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없기도 하며 있기도 한 것이다. 있다는 것은 인연에 의해 잠깐 나타난 것이고, 그것은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없기도 한 것이다. 결국 12연기와 윤회를 부정한 것이다. 부처님은 12연기에 연연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해탈을 외치신 것이다.
이래서 진제를 깨달아야만 대승경전이 이해된다. 그 전에는 대승경전이 그냥 허황된 내용처럼 들린다. 그래서 소승에 빠진 사람들 중에 대승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게 바로 속제에만 근거하기 때문이다. 불교를 이해하려면, 진제와 속제를 둘 다 이해하고 병합시켜야 한다.
헌데 속제는 누구나 이해하기 쉽지만, 진제라는 절대 진리는 알기가 어렵다. 이러한 진리는 본인이 직접 체득해야지 말로 설명될 문제가 아니다. 위없는 최상의 깨달음이라고 표현하는 그 깨달음을 직접 깨달아야 진제를 이해할 수 있다. 해탈의 관건은 무상. 무아. 고가 아니라 공(空)이다. 무상, 무아, 고는 속제에 해당한다. 소승이든 대승이든 진리의 바탕은 같다. 진제는 공성을 터득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 해탈은 공(空)에 의해 이루어지지 딴 방법은 없다.
드러난 현실세계는 인연, 즉 연기로써 계속 이어지고. 그 이면은 텅 비어 있으니, 공성에 해당된다. 그래서 초기경전은 주로 진제보다는 속제에 많이 치우쳐서 설해져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승경전은 주로 진제에 속한다. 공성(空性)을 이해 못하거나 보리심(菩提心)이 없는 사람은 대승경전을 이해하기 힘들다. 경을 볼 때는 이 진제와 속제를 잘 구분해서 봐야 한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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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설(二諦說)
용수 스님이 <중론>에서 일체법이 空(공)임을 증명하였는데, 공은 부정의 의미이기 때문에 이에 의해 종전의 불교학설이 모두 파괴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비난이 제기 되었다. 이에 답하는 것이 2종의 진리 즉 이제설이다. 이는 주로 제24장(觀四諦品)에서 논의되고 있다.
반대자는 말한다.
"일체법이 공이라면 석존께서 설하신 사성제 등의 진리는 허무하게 되며, 따라서 정법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또한 번뇌를 끊고 열반을 증득하는 실천도 불가능하게 된다. 나아가서는 불·법·승의 삼보를 파괴하고 선악업을 부정하며, 세간 일체의 언어적 관습을 파괴하는 것이 될 것이다."(위의 품, 제1∼6시구)
이에 대해 용수는 답한다.
"그대는 공의 목적과 의의를 알지 못하므로 무익한 걱정을 하고 있다. 제불은 2제에 의해 법을 설하신다. 즉 일체법은 공이라고 설하심은 최고의 진리인 승의제(勝義諦)이며, 사성제 등 개념·언어를 사용하여 설해진 진리는 세간적인 진리인 세속제(世俗諦)이다. 이 2종의 구별을 모른다면 불교의 깊은 진리를 알 수 없다. 승의제를 언어로 설명하고자 하면 이는 세속제에 의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열반을 증득하는 것은 세속제가 아니라 승의제에 의하지 않으면 안된다."(위의 품, 제7∼10시구).
뿐만 아니라 실천수행은 공에 기초하여서만 성립된다. 즉 제법이 실체가 없는 공이기 때문에 번뇌를 끊고 괴로움을 멸하여 열반을 증득할 수 있다. 만약 제법이 고정적인 실체를 가지며 변화하지 않는 것이라면, 번뇌를 끊고 열반에 이르는 일은 불가능하게 된다(위의 품, 제20∼28시구).
승의제는 진제(眞諦)·제일의제(第一義제)로도 번역되며, 세속제는 단순히 속제라고도 한다. 승의제는 최고·궁극적 의미에서의 진리로서, 언어에 의한 표현을 초월한다. 이에 대해 세속제는 세간일반의 상식·관습적 입장에서의 진리로, 특히 언어활동을 중심으로 하여 표현된 진리를 말한다.
언어는 지식전달의 수단으로 인간사회의 관습·약속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된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활동에 의해 표현된 진리는 이난사회의 관습·약속의 범위에서는 진실이지만, 이것이 궁극적 의미에서의 진리라고 할 수는 없다.
용수의 이제설은 일반적으로 '언교(言敎)의 이제'라고 한다. 궁극적 진리는 공으로서 언어적 표현을 초월한다. 여기에서 언어는 공인 진리의 표현수단으로의 의의를 갖는다. 공도 언어로서는 입시로 언표된 것(假說)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언어로 구성된 모든 불교교의는 진리의 표현수단이라는 의미에서는 가설이다. 용수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다양한 불교사상을 이제설로써 직접적으로 통일하였다.
그러나 이제설이 그의 독창은 아니다. 이는 이미 <반야경>에 언급되어 있었으며, 그는 이를 계승·발전시켰던 것이다.
한편 소승의 유부(有部, 근본상좌부의 분파인 소승의 대표)도 이제설을 말하고 있으나, 이는 <반야경>의 그것과는 다르다. 유부의 이제설은 진리를 실재에 대응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그 내용으로서는 실재를 여러 단계·종류로 나눈다.
유부에 의하면 현상적 존재에 대한 인식이 세속제, 현상을 성립시키는 실재적(實在的) 원인 즉 제법의 구성요소에 대한 인식이 승의제이다. 예를 들어 색·수·상·행·식의 오온(五蘊, 물질·정신을 다섯 종류 나눈 것)의 인연화합에 의해 인간이 성립되며, 수레의 부분의 집합에 의해 수레가 성립될 때, 오온 또는 수레의 부분은 현상으로 나타나 있는 인간 또는 수레의 실재적인 원인이다.
이러한 생각에 대해 용수는 연기론은 궁극시, 실체시되는 실재적 원인을 부정한다. 궁극적 원인이 정립된다고 할지라도 이를 성립시키는 다른 원인이 상정되며, 나아가 그 원인을 성립시키는 그 다음의 원인이 상정되어 무한히 소급된다. 세계는 특정한 원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무수한 원인의 총화로 성립된 것이다. 원인이 무한히 상정되기 때문에 원인은 동시에 결과로도 된다. 그리하여 제법은 상호 유동적인 인과관계로 작용한다는 것이 그의 연기론의 사고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