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현불문사화집 해설(2011. 1. 6)
불교와 시
-대구현대불교문인협회 시인들의 시를 읽고
1.
근래『휴머니스트를 위하여-경계를 넘어선 세계지성 27인과의 대화』(바를뢰벤 대담편집/강주헌 역. 사계절 2010) 라는 책을 읽었다. 제목처럼 편집자 바를뢰벤(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 교수)이 생각하는 세계적인 지성급 27명과 대담한 내용을 적은 책인데 분량도 570쪽이나 되는 제법 두툼한 책이었다. ‘문명의 충돌’ 저자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새뮤얼 헌팅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나딘 고디머, 월레 소잉카, 구조주의 학자로 알려진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등 다양한 인물들이 이 대담을 통해 자기 사상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가운데 특히 내가 주목을 했던 이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이다. 프랑스 출신의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20세기 대표적인 지성이었다. 1955년에 펴낸『슬픈 열대』를 출발로 해서 많은 저서를 남겼고, 인류학, 민족학 등에 구조의 개념을 처음 도입했으며, 구조주의를 하나의 학문으로 정초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1973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는데 그가 작고했을 때 전 세계 언론이 주목했다.
그가 이 책의 대담에서 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말미에 가면 대담자 바를뢰벤이 인간이란 존재는 죽음이라는 별 아래서 살아갈 뿐이라는 전제를 한 후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릴까요? 자연과학은 이런 의문에 대답하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이 결국에는 한 줌의 재에 불과하다는 불길한 생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라고 묻는다. 그러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아흔 살을 넘겨 죽음의 문턱에 바싹 다가간 사람에게는 적절치 않은 질문이라고 조크하면서 “나는 삶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믿습니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말해달라고 한다면, 내 생각이 불교의 관점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바를뢰벤이 의아해하면서 “불교요?”라고 되묻자, 레비스트로스는 “불교에서는 신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불교는 어떤 것에도 의미가 없고, 궁극적인 진리는 의미의 부재에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서양 문화의 자장 아래서 성장했고, 자신의 지적 역량을 키운 세계적인 지성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아흔 살이 넘어 가진 대담에서 불교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죽음과 삶의 의미에 대해 자신은 불교와 같은 입장이라고 말하고 있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당대 서구 최고의 지성이 흔히 동양의 종교라는 불교에 감응하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그러면서 불교가 크긴 크구나하는 생각을 은연중에 가지게 되었다.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불교는 어떤 것에도 의미가 없고, 궁극적인 진리는 의미의 부재에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이라는 이 말은 불교의 진리관과 통한다.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가지다보면 임제어록과 만나게 되는데 그 유명한 구절 “안으로나 밖으로나 만나는 것은 모조리 죽이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친척이나 권속을 만나면 친척이나 권속을 죽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어떤 것에 얽매이는 순간 그것은 부처도 아니고, 진리도 아니라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불교란 무엇일까? 이 논리에 의하면 불교는 무엇이라고 지칭되는 순간 이미 불교가 아닌 게 된다. 역시 진리란 그것이 무엇이라고 말하는 순간 진리의 영역에서 벗어나게 된다. 말 그대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경지. 있음으로 없고, 없음으로 있는 그런 경지에 해당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과연 불교란 무엇일까?
“불교의 대의란 실로 모든 사람의 영원한 화두이다.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천형이다. 진정한 불교가 무엇일까? 도란 무엇이며, 진리란 무엇일까? 하는 이런 문제의식이야말로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길이다.”(『작은 임제록』23쪽, 무비스님 해설, 염화실. 2008)
“불교는 부처님이 되기 위한 가르침이다. 즉 成佛의 종교로서 우리 모두가 성불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기독교와 회교가 ‘믿음’을 중시하고 ‘구원’을 구하는 종교라면 불교는 그것과는 달리 ‘깨달음’을 찾고 ‘자각’을 추구하는 종교라는 차원에 그 특성이 있다”(『상식으로 만나는 불교』13쪽, 계환 지음, 정우서적. 2007)
“부처님의 가르침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고, 그것을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결코 신이나 전생의 업 또는 물질적인 여러 요소의 결합에 의한 사건에 종속되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 스스로 자신의 운명과 우주의 주인임을 밝히고 주체적인 의지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도록 하는 데 불교사상의 참뜻이 있다 하겠습니다.” (『인간 붓다』35쪽, 법륜 지음, 정토출판. 1990)
“불교의 ‘불佛’이란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 ‘붓다Buddha’의 음사로,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깨달음인가? 바로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다. 불교에서는 누구라도 진리를 깨우치면 부처가 될 수 있다. ... 진리를 깨닫고 행하면서 사는 삶은 얼마나 자유롭고 행복하겠는가. 불교는 바로 이 길을 제시하고 있다.”(『불교입문』78-79쪽,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연구실, 조계종출판사. 2001)
많은 논자와 수행자가 불교의 참 모습에 대해 해답을 구하려고 했지만, 말 그대로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난제 일 수도 있고 의외로 쉽게 그 답을 구할 수 있는 게 불교이다. 그러나 불교와 진리의 이런 추상성에도 불구하고 미욱한 중생들에게 불교(진리)에 대한 범주가 없을 수는 없다. 그것은 자신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것, 스스로가 부처가 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인지 모른다. 고타마 싯달타가 부귀영화와 안락한 궁정생활을 버리고 출가해서 깨달음을 얻고 많은 중생을 구하기 위해 법을 베풀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본다면 우리에게도 흐릿하지만 불교의 모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2.
20세기 미국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비평가인 T.S 엘리엇은「종교와 문학」이라는 자신의 논문에서 종교와 문학의 관계에 대해 깊이 있게 논의한 바 있다. 특히 종교시에 대한 논의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 종교가 어떤 것이든 우리가 종교적인 시라고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시는 마이너 즉 ‘부차적인 시’(minor)가 되고, 종교 시인이란 전체적인 시의 주제를 종교적인 정신에서 다루려는 사람이 아니라, 주제의 제한된 부분을 다루는, 다시 말해 인간의 주요 열정(major passions)이라는 것을 빼버리고, 자기는 그런 열정을 모른다고 고백하는 시인이라는 주장을 한 바 있다. 그래서 이런 시인이 쓰는 시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바 큰 시인에게서 기대되는 총체적(totality) 인식을 결여하고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인식으로 채워진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엘리엇 자신이 바라는 종교문학은 고의적으로 종교의 이념을 의식적이고 조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그리스도교적이 된 문학이라고 주장한다. ( 엘리엇「종교와 문학」『문학과 행동』161-174쪽, 백낙청 편. 태극출판사, 1974 )
엘리엇이 미국에서 태어나 마흔 살이 되던 인생의 중반에 영국으로 귀화한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그의 문학이 철저히 기독교적 문화와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런 사실이 세계문학사에서는 ‘종교와 문학’의 관계에 대한 의미 있는 글을 낳게 한 원인이기도하다. 그러므로 여기서 엘리엇이 말한 그리스도교적 문학이란 특정한 종교의 문학이란 의미보다는 범칭 종교문학의 의미로 읽어야 할 것 같다.
문학과 종교와 관련하여 엘리엇은 이 논문에서 주의해서 봐야할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엘리엇이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 특히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평범한 사람들도 인정하는 바이니까 문학을 주업으로 하는 작가가 독서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것은 하등 특별할 까닭이 없다. 그러나 엘리엇의 주장은 문맥의 의미가 조금 특별하다. 훌륭한 비평가(그의 논리에 따르면 책을 읽는 우리 모두는 기본적으로 비평가이다)는 폭넓고 분별력 있는 독서 능력과 날카롭고 끈질긴 감수성을 결합시키는 사람이라고 주장하면서, 폭넓은 독서가 가치 있는 것은 단지 풍부한 지식을 축적하는 사람을 만들어 주는 게 아니라 한 사람 혹은 극소수 몇몇 사람에게 압도되지 않고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인생관을 마음속에 가져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 말은 문학에서 어떤 특정한 도그마에 빠지지 말고(그것이 종교든 뭐든) 폭넓은 세계관을 가지라는 충고와 같다. 그리고 그 폭넓은 세계관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의 주요열정이자 총체성이지 특정 종파의 옹색하고 편협한 도그마는 아닐 것이다. 이 논문에서 인간의 주요 열정이라는 다소 애매한 표현은, 다른 말로하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보편적인 진리개념일 것이다. 그리고 이 개념에는 당연히 현실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총체성도 포함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달리 보면 종교는 기본적으로 현실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게 하는 그런 기제가 아닐까하는 의심도 생기는 게 사실이다. 속단할 수는 없지만 종교는 특정한 프리즘으로 세상을 보게 하기 때문에 자칫 세상을 한쪽 눈으로만 보게 할 수도 있다는 염려도 없지 않다.
종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고 세상을 총체적으로 봐 인생을 풍부하게 살 게 하는 것이라고 할 때 다른 특정 종교와는 달리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 스스로에게 불성佛性이 있다고 설파한 불교의 특징은 오롯해 보인다.
엘리엇이 말한 종교시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궁극적으로 불교문학이라고 해서 단순히 불교 관련 소재나 아니면 시인 스스로가 주관적으로 ‘불교적’이라고 판단하는 주제에 매달릴 때, 어떻게 보면 가장 비불교적인 시가 될 수 있고 자신의 문학행위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인이라면 누구나가 피해야할 마이너 시를 쓰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될지도 모른다.
대구현대불교문인협회(이하 대구현불문)가 사화집『건달바』창간호를 출간한다. 축하할 일이다. 현재 이 단체의 회원은 50여명이 된다. 단순하게 사교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가 아닌 한 어떤 단체를 만든다면 우선은 이념이 같다든가 아니면 지향하는 목표가 같다든가 아니면 세속적인 이익이 같다든가 하는 공통분모가 있다. 아마 대구현불문은 부처님의 법아래서 문학을 통해서 부처님의 법을 실현하고 친교를 나누면서 좋은 문학을 하자는 취지로 만든 모임처럼 보인다.
이 글은 대구현불문 소속 시인 가운데 2009년과 2010년에 개인 시집을 낸 열 분의 시집을 리뷰하는 게 목표이다. 각자 문학적인 개성을 가지고 다양한 시각으로 현실을 보고 사물의 이치를 깨우치고 진리를 향해 달려가는 시인들을 하나의 잣대를 가지고 이야기 한다는 것은 적절치 않은 일이다. 사실 문단에서 관례적으로 행해지는 서평의 관례로 보아서도 한꺼번에 10명의 작품집을 리뷰 하는 것도 반드시 상식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형편을 고려해 무리하지만 여러 분의 작품을 일별한다. 독자의 양해를 바란다.
시인들의 작품집을 읽는 데 우선은 이들이 모두 현불문 소속 회원, 다시 말해 불교를 자신의 작품생활에 (크든 작든) 하나의 지침으로 받아들이고 영향을 입었다는 전제 하에서 읽었다. 따라서 개개의 작품 가운데 불교정신을 뚜렷하게 드러냈거나 불교관련 소재를 취한 작품을 중심으로 일별하겠다.
대상 시집은 다음과 같다.(무순)
정숙『바람다비祭』(시학, 2009),
이종암『몸꽃』(애지, 2010),
차영호『애기앉은 부채』(문학의 전당, 2010),
이해리『감잎에 쓰다』(시와사람, 2010),
김위숙『내 남편 김의부 씨의 인생궤적』(작가콜로퀴엄, 2009),
서하『아주 작은 아침』(시안, 2010),
정경자『수수껍질』(진실한 사람들, 2009),
김미숙『저승톨게이트』(시학, 2010),
정하해『깜박』(시학, 2010),
곽도경『풍금이 있는 풍경』(시선사, 2010)
3.
매화 피고 나니
산수유 피고
또 벚꽃이 피려고
꽃맹아리 저리 빨갛다
화개花開 지나는 중
꽃 피고 지는 사이
내 일생의
웃음도 눈물도
행行,
다 저기에 있다
-이종암「봄날, 하동」전문
지난해(2010년) 출간한 시집 가운데 적어도 내가 본 시집 가운데는 이종암의 시집이 가장 우수한 시집 가운데 하나이다. 현실을 보는 깊이 있는 안목, 그것을 드러내는 방법으로서 절제된 감정, 뛰어난 서정성, 그리고 시집 곳곳에 배어있는 불교에 대한 관심을 특히 불교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지침서가 될 것 같다.
인용한 시는 “매화 피고/산수유 피고/또 벚꽃이 피려고”하는 봄에 섬진강변 화개花開를 지나가면서 인생의 의미에 대해 성찰하는 시이다. 여기서 화개는 전라남도에 있는 구체적인 지명이기도 하지만, 생물학적 나이 40대 초반이 이종암 시인 인생에서도 한창 꽃이 피는 화개의 시기, 문학에서건 개인사이건 40대 중반이면 굳이 시인이 아니더라도 대부분 사람에게는 사업이 발전하고 가족이 안정되는 인생의 절정을 구가하는 찬란한 시기인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꽃이 피고 지는 것처럼 인간의 인생도 꽃이 피고 지는 것처럼, 웃음과 눈물 속에서 흘러간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행行 속에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불교서 말하는 무상無常의 또 다른 이름인 것이다. 이는 불교의 삼법인三法印 가운데 하나인 제행무상諸行無常을 통해서도 널리 알려진 개념인데, 쉽게 말하면 이 세상에서 항상하는 것, 다시 말해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정신이든 물질이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시간의 변화에 따라 변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몸이 생겼다(生)가 없어지는 것(滅)처럼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변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 인생은 덧없다, 허무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존재가 변한다는 사실을 바로 알고 인생의 실체를 바로 보고(正見) 참된 삶을 살자는 의미이다.
금강경(金剛般若波羅密經) ‘오고 감이여!威儀寂靜分’ 편에 대해 육조 혜능 대사는 “여래는 오는 것도 아니고 오지 않는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고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앉는 것도 아니고 앉지 않는 것도 아니다. 눕는 것도 아니고 눕지 않는 것도 아니다. 행行, 주住, 좌坐, 와臥의 네 가지 위의威儀 중에 항상 공적空寂에 있는 것이 여래다” 이 말처럼 “깨달음의 세계는 태어나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죽어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무엇에 의해 더렵혀지지도 않고 더렵혀진 것이 깨끗해지는 것도 아니며, 누가 사용한다고 해서 줄어드는 것도 아니며 무엇을 더 가져 놓는다고 해서 늘어나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대로 있을 뿐이”(『금강경강의』300-301쪽, 김성규 지음, 자유출판사, 2010) 라는 진리를 이종암이 행行 속에서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이종암의 시집『몸꽃』을 읽어보면 시인 자신보다 어린 남동생이 갓 돌 지난 조카를 두고 일찍 죽고, 일곱 살이 된 조카와 목욕탕에서 시인은 동생을, 조카는 아버지를 그리며 나누는 대화나(「초생달」「사천왕사터」), 일자무식 농삿군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뜨고(「답장」) 또 친하게 지내는 선배의 아들이 지체장애를 갖고 있는 현실에 대해(「몸꽃」) 시인은 담담하게 말하고 있는데, 인용 작품「봄날, 하동」이런 인생사 희노애락과 슬픔을 일찍 겪은 시인의 철학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정숙의 「자비보시慈悲普施」, 정하해의「깜박」은 보시에 관한 시이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실천행동 가운데 육바라밀이라는 게 있다. 일종의 여섯 가지 행동 지침을 이르는 덕목인데 잘 알려진 것처럼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바라밀이다. 육바라밀 가운데 가장 앞서 있는 게 보시布施이다. 보시는 쉬게 말해 남에게 베푼다는 뜻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보시는 단순히 남을 돕는다는 시혜의 차원을 넘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탐욕, 이기심 등을 함께 버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물론 금강경에서 말하는 무주상보시無住想布施는 내가 댓가를 바라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내가 베풀었다는 생각까지도 잊어버리는 보시인 것이다. 인간들의 생활에서 남을 위해 베풀고 헌신하는 행위, 그리고 댓가를 바라지 않고 베풀었다는 사실마저도 잊어버리는 정신의 공력이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그리고 대단한 만큼 얼마나 힘든 과제인가?
법구경에서도 보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고 있다. “인색한 사람은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어리석은 사람은 베풀 줄을 모른다./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베푸는 것을 좋아하나니/그는 그 선행으로 인하여/더 높은 세상에서 행복을 누리게 된다.” 보시를 하면 더 높은 세상에 가 닿는 다는 말인데 그 어려운 과제에 대해 다음 두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게 아래 인용한 시이다.
버린다, 버린다 말만 하다가 바람의 무심천에서 마
지막 살 한 점까지 미련 없이 다 세상에 베풀고 돌아가
는 길
-정숙「자비보시慈悲普施」전문
꽃과는 상관없이 붉어진 문살에, 가만히 부처 손 얹
언 놓고 그 위 나를 잠시 바쳤다가, 그렇게 꽃을 빠져
나오는 바람처럼 대웅전 나서는데
쟁그랑 내 몸에 운판 닿는 소리 생에 우레 들었다,
부위 마다 떼어 보시하고 싶다던 조금 전 말이, 뻔하다
는 걸 안다는 듯, 아득하고 어지러워라 아직은 삶의
몸을 빌려 산다는 너라는 것 깜박했었다
-정하해「깜박」뒷부분
“마지막 살 한 점까지 미련 없이 다 세상에 베풀고 돌아가”(정숙)겠다는 각오와 “내 몸/부위 마다 떼어 보시하고 싶다”(정하해) 는 각오만큼 불보살의 결의를 다지는 말이 어디 있겠는가? 불자로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서원이라 할 수 있는 보시에 대해 자신의 살 한 점까지, 몸의 각 부위(장기)까지 떼어서 바치겠다는 두 시인의 이타적인 각오를 지켜보는 것도 두 시인의 문학적 행로와 연동되면서 한층 높아진 문학 정신을 향수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참고로 보시에는 물질적인 재물을 보시 이외에도 진리릐 길로 인도하는 法보시, 고락을 함께 나누는 무외無畏 보시라는 게 있다.
김위숙 시인의「엄마, 열이틀 달」, 정경자「어머니」, 차영호「신원사* 초행初行」은 각각 인연에 대한 시이다.
여든 하나 된 울 엄마 만나고 돌아오는 길은
육십 넘은 나이에도 어김없이 눈물 난다
서른 넘은 내 딸도
지 엄마 보러 오면
쿵덕 문턱에서 넘어진 어린애 마냥
엄마! 하곤 그렁그렁 달라붙는 안부도 털어내기 바쁜데
눈물 많은 나도 괜히 들킬라
딴전 보듯 건너편 열이틀 달만 바라본다
그렇다 이 삼 대가 펼쳐가는 한 내력들
얼마나 깊은 탯줄 끌고
달빛 출렁이는 강 건넜으면
지상에서 가장 깊고 질긴
모녀지간이란 이름 얻었을까
나는 보름달보다 더 따끈따끈한
고구마 속같이 폭신하고 더운 김 내리비추는
열이틀 달처럼 보송 솟은 딸
내 딸의 딸도 보송 솟은 딸
열이틀 밤하늘을
보송 솟은 달딸들이
빼곡이 채운다
-김위숙「엄마, 열이틀 달」전문
겨우내 움 속에서 아픔을 키운
무를 잘라 부엌 창가에 두었다
잘린 상처를 딛고
살가운 몸 하나 사방을 살피더니
연두빛 혀를 빼물고
어느 날 샛노란 봉오리에
놀랍게도 보랏빛 자잘한 꽃을 피웠다
마지막 순간까지 피어나는 생명력으로
나를 꽃 피우셨던 아픔
오래 참으시어
이젠 당신의 몸 썩히시며 날마다
길 떠날 채비하시는 모습
눈 아리게 다가온다
-정경자「어머니」전문
절집 모롱이 은행나무 발가벗은 채
물동이 이고 겨울비를 긋고 있다
목천 이씨 우리 증조할머니, 손 시렸겠다
안동 김씨 우리 할머니 손, 시렸겠다
-밖에 누구요?
덕德자字 해海자字는 우리 할아버지 함자,
제가 용득龍得이 아들입니다
난리통에 화들짝 굴 밖으로 튕겨나간 멧토끼
강림도령 거풋대던 이 길이 눈에 밟혀
밤마다 하얗게 헛기침으로 밝혔답니다
저만치 비껴선 삼층석탑이 합장을 한다
고즈넉한 인연 켜켜이 받쳐 든
밀양 박씨 우리 어머니처럼
-차영호「신원사* 초행初行」전문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에 있는 사찰. 사사로이는 나의 원적지 임.
법화경에 맹구부목盲龜浮木 이라는 일화가 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일망무제一望無際한 망망대해의 밑바닥에 한쪽 눈이 먼 거북盲龜 한 마리가 살고 있는데 이 거북이는 백만 년에 한 번씩 잠깐 바다의 표면에 떠올랐다가 다시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고 한다. 망망대해의 거센 파도에 휩쓸려 이리저리 떠도는 한 조각의 나무판자浮木가 있고 그 나무판자에는 조그마한 구멍이 뚫려 있는데, 백만 년마다 한 번씩 바다 위에 떠오르는 눈 먼 거북이가 거센 파도에 휩쓸려 떠도는 그 나무판자의 조그마한 구멍에 자신의 목을 넣는 것만큼 어려운 게 인간의 만남이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인간들의 만남, 인연의 소중함을 일러주는 일화이다. 이런 인간의 만남 가운데 “지상에서 가장 깊고 질긴” 만남은 아마 부모와 자식 간의 만남이 아닐까? 특히 어머니와 딸과의 만남은 이 세상 어떤 인연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그런 관계이다.
김위숙 시인은 서로에게 딸이 되는 딸 3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고, 정경자의 시는 잘라서 부엌에 창가에 둔 무에서 피는 꽃을 보면서 자신의 몸을 바쳐 자식들을 키워낸 어머니의 사랑에 감사하고 있다. 차영호의 시는 증조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헌사이다.
서하 시인의「목탁소리」, 곽도경 시인「부석사에서」, 김미숙 시인의「법정 스님」은 각각 시의 소재를 불구, 사찰, 스님 등 불교와 관련된 것에서 얻고 있다. 그만큼 시인들의 불심도 깊어 보인다.
서하 시인의 “무모하게 두드려 맞는 것만이 내가 사는 일/얼마나 더 아파해야/내 이야기/좀 더 멀리 보낼 수 있을는지”와 같은 구절은 목탁에 대한 비유인 셈인데, 주지하디시피 목탁은 독경이나 염불을 할 때 사용하는 불구佛具이다. 밤낮 눈을 감지 않는 물고기의 형상을 딴 모양새인데, 그 만큼 끊임없이 정진하라는 경책의 의미가 있다. 무모하게 맞으면서 아파하면서도 자기 성찰을 게을리 하지 않을 때 시인의 이야기가 멀리 갈 수 있다는 주장은 공감이 가는 대목이다.
곽도경 시인의 시는 화엄사찰로 유명한 경상북도 영주시에 있는 부석사 창건 설화를 시의 소재로 삼았고, “제 몸 뼈속까지/다 긁어내야만/비로소 맑은 소리/온 누리에 울려 펴지게 하는 목어처럼” 속을 비워야 맑은 소리가 난다는 철저한 비움, 무소유의 정신을 이야기 하고 있다.
‘무소유’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얼마 전 열반에 드신 법정 스님이다. 나는 법정 스님을 2008년 10월 19일 길상사 가을 법회에서 한 번 가까이서 뵌 적이 있다(그때 법문 내용이 ‘일기일회’라는 표제 제목으로 출간된 스님의 법문집이다). 법회를 마치고 점심 공양 후 스님이 잠시 휴식을 취하는 다실茶室에서 동료 몇 사람과 가까이서 말씀을 들었다. 사실 나는 고등학교 졸업 무렵인 70년대 후반 스님의 명저『무소유』를 읽고 그 뻔한 듯한 계몽성(?)이 싫어 스님의 책을 거의 읽지 않았는데, 근래 스님께서 작고하신 후 새삼 그 분의 많은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 특히 그날 법회 하기 위해 오대산에서 서울 길상사까지 소형승용차를 손수 몰고 오시던 모습이 강렬하게 남아있다.
김미숙 시인의 시는 스님의 무소유 정신을 섬돌 위에 놓인 스님의 ‘먹고무신’ 이미지를 통해 잘 드러내고 있다.
새 내의를 갈아입은 듯한
아침 산사 山寺,
소리의 강이
당신과 나의 가슴을 타고 흐릅니다
바람은 더 낮은 곳으로 불고
세상일 혼자만 알고 있는 햇살은 자지러집니다
무모하게 두드려 맞는 것만이 내가 사는 일
얼마나 더 아파해야
내 이야기
좀 더 멀리 보낼 수 있을는지
언제나 들리는 듯 사라지는 것뿐
흔들리는 발목 휘감는 물소리
빈 하늘엔 뭉게구름 섞입니다
잠든 것들이 버린 길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이슬 안고
벼랑의 꽃처럼 깨어 있습니다
언제나 아침은 처음이고
옷 갈아입는 나무 위로하지 못하지만
빨랫감처럼 두들겨 맞으며 맞으며
나를 감고 있는 묵은 생각들
둥글게 풀어낼 뿐입니다
-서하「목탁소리」전문
줄지어 선 은행나무들
마지막 잎새
한 장도 남기지 못하고
훌훌
알몸으로 칼바람과
맞서 싸우고 있다
사랑할 수 없는
한 사람을 사랑하다
그를 지키기 위해 끝내 용이 되어버린
한 여인 애끓는 마음
부석사 서쪽 마당
큰 바위 아직도 들고 서 있다
제 몸 뼈속까지
다 긁어내야만
비로소 맑은 소리
온 누리에 울려 펴지게 하는 목어처럼
-곽도경「부석사에서」전문
댓돌 위
말갛게 벗어 둔
고무신 한 켤레
법당 안 스님은
홀연히 떠나시고
산문 밖
사바세계는 제 몸보다 무거운
먹고무신 끄는 소리
아직도 요란하고
-김미숙「법정 스님」전문
이해리 시인은 대구의 중견시인이다. 인용시는 동백꽃을 “마음의 한 사람”과 사랑의 상처에 대한 비유로 노래하고 있다. 앞 서 언급한 바처럼 “여래는 오는 것도 아니고 오지 않는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고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앉는 것도 아니고 앉지 않는 것도 아니다. 눕는 것도 아니고 눕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말처럼 사랑 역시 어쩌면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닌 일종의 환영이고 착시인지도 모른다. 부디 사랑 때문에 가슴 아파하지는 말 것! 우리 모두가.
보고 싶을 때 아 주지 않는 사람은
너를 버린 사람이라 생각했다
와 주지 않는 사람이 맺힐 때 마다
너는 너의 꽃을 던져버렸다
시뻘건 너, 붉으락푸르락한 너,
돌부리에 입술이 터진 너,
많은 사람들이 곱다 곱다한들
마음의 한 사람이 찾지 않는다면
헛것이란 생각 빨갛게 사무쳤다
꽃 진 후에도 예쁘고 싶어
통째로 졌다 믿고 싶지 않구나
너에게도 자학 없이 견딜 수 없는 시간이
저리 많았구나.
-이해리「수북히 꽃 떨군 동백나무」전문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