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너더리통신 36/170823]졸혼(卒婚)의 시대?
맨(man)과 우맨(woman)으로 만나 ‘휴맨(human)’으로 사는 게 결혼 아니냐고 반문하는 장면의 어느 주말드라마를 보았다. 허영끼가 있는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졸혼(卒婚)’을 주장하는 정년퇴직한 남편의 심정도 조금은 이해가 갔다. 여기에서 아직도 그 개념이 낯선 졸혼이 무엇인지를 되짚어보자. 최근 탤런트 백일섭씨의 졸혼생활이 방영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수년 전에는 일간지 1면 톱으로 ‘황혼이혼(黃昏離婚)’ ‘대입이혼(大入離婚)’이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졸혼은 ‘결혼(婚)을 졸업(卒)한다’는 뜻으로 부부가 서로를 간섭하지 않고 각자 자유롭게 사는 생활방식을 말한다. 나이 든 부부가 이혼하지 않은 상태로 자신의 삶을 즐기는 결혼 형태, 2004년 일본 작가 스기야마 유미코가《졸혼을 권함(卒婚のススメ)》이라는 책을 내면서 알려졌다. 혼인 관계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황혼이혼과는 차이가 있다. 황혼이혼은 1990년대 초반에 생긴 신조어로 오랫동안 결혼생활을 유지한 50대 이상의 부부가 이혼하는 것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결혼 생활에 만성적인 문제가 있는 상황에서 자녀의 대학 진학이나 독립, 결혼 등을 계기로 발생한다. 심지어 황혼이혼이 신혼이혼을 앞선다는 통계도 있다.
아무리 금실(금슬에서 유래된 바른말이다)이 좋은 부부라도 수십 년을 살면서 어찌 문제 한두 개가 없겠는가? 사소한 갈등 등이 쌓여 결국은 이혼이라는 ‘큰 사건’도 될 것이나, 요즘은 이것조차 큰 사건이 아닌 듯 대수롭지 않게 보는 시각들이 많다. 하기야 한 집 건너 ‘돌싱(돌아온 싱글) 남녀’가 수두룩한 세상이니 그럴 법도 하지만, 이건 좀 그렇다. 얼굴도 한번 보지 않고 결혼한 옛 사람들이 이성지합(二姓之合) 백년해로(百年偕老)를 금쪽같은 신조로 삼고 살았음에 비교하여 너무 경박부조(輕薄浮藻)한 게 아니냐고 하면 “아재”소리 듣기에 딱 알맞을 것이다. 솔직히 “아니면 정말 아닌 것”이 부부생활일 듯하다. 아무리 친하다한들 당사자가 아니면 둘의 속내를 알 수 없는 게 사실일 터. 당장 못살고 갈라질 것같은 일촉즉발의 부부가 언제 그랬냐는 듯 돌아서서 금세 서로 알콩달콩하는 것을 보노라면 부부관계는 정말 알 수 없는 것이구나 싶다.
일전에 지인(知人) 한 분이 고충을 심각하게 토로하는데, ‘이제는 하루도 더 같이 못살겠다’는 것이다. 결혼한 지 35년이 넘었는데, 이제 와서 어쩌란 말인가?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영 아니다’고 판단이 서면 본인의 남은 삶이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백세시대(百歲時代)’에 말이다. 자녀들이 자기 인생을 살아주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무슨 뾰족한 노후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니 상황은 심각했다. 하여, 불쑥 튀어나온 말이 졸혼이었다. 그분은 처음 듣는 말이라 했다. 한참 듣더니 ‘괜찮은 것같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생각해 보면, 그것도 ‘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아무 문제가 없는 부부들도 시도해 보는 노년생활의 ‘한 형태’일 터인데, 문제가 있는 부부의 해결방법치고는 차라리 신선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분이 졸혼으로 합의를 봤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렇게라도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하여 최악의 경우로만 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여기에서 ‘결혼(結婚)’이라는, 오래된, 인류가 발명해낸 최고의 제도에 대해 생각해 본다. ‘결혼은 해도 후회, 안해도 후회를 하니, 어차피 후회할 것, 하고난 후에 후회를 하자’는 말도 있었다. 과연 결혼은 그렇게 정의를 내리면 그만일까? 죽고 못살게 사랑하여 결혼을 해도 ‘사랑의 감정’은 1년을 못가서 식고 만다는 게 ‘학문적으로’ 실증(實證)되었다고 한다. 사랑의 결실인 아들딸 자녀가 있기에, 그들이 쾌락의 부산물만은 아닐 터이므로, 기르고 가르치고 성가(成家)를 시키는 것이 ‘부모(父母)’의 의무와 권리가 아니겠는가. 그러다보면 어느새 지천명(知天命)을 넘어 이순(耳順)이 된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같이 하다보니, 주름살도 닮은 게 부부일 터, 같이 늙어간다면야 얼마나 보기 좋은가. 우리 부모는 고향에서 71년째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데(아, 회혼기념 혼인식을 한 지도 10년이 넘었다), 일등금실이다. 그러나 이런저런 갈등이 쌓일대로 쌓여 배우자를 ‘소 닭 보듯이 하는’ 커플들이 주변에서 자꾸 늘어나고 있다. 우선 나부터도 ‘졸혼’의 개념을 처음 듣고 “굿 아이디어” 박수를 쳤다. 그러기에 지인의 갈등 고백에 ‘강추’을 했던 터였다. ‘좋은 게 좋다’고 무조건 갈등을 봉합만 한다고 대수인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현명한 방법을 서로 머리 싸고 찾을 일이다.
시인 문정희님의 '공항에서 쓸 편지'라는 시를 보자. '결혼안식년(結婚安息年)'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또 어떠한가. 그럴 듯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동안 내조(內助)하느라 애쓴 아내에 대한 배려도 생각해 볼 일이다. 남편도 예외는 아니겠지만.
‘여보. 일년만 나를 찾지 말아주세요/ 나 지금 결혼안식년을 떠나요/ 그날 우리 둘이 나란히 서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하겠다고/ 혼인서약을 한 후/ 여기까지 용케 잘 왔어요. /…/하지만 일년만 나를 찾지 말아주세요/ 병사에게도 휴가가 있고/ 노동자에게도 휴식이 있잖아요/ 조용한 학자들조차도/ 재충전을 위해 안식년을 떠나듯이/ 이제 내가 나에게 안식년을 줍니다/ 여보. 일년만 나를 찾지 말아주세요/ 내가 나를 찾아가지고 올 테니까요.”
연전에 TV 드라마 '엄마는 뿔났다'를 기억하시리라. 김혜자의 '휴혼(休婚) 선언'. 휴혼은 결혼생활을 휴업한다는 것이다. 이것도 생각해 볼만한 테마가 아닌가. 참 여러 가지다.
‘비폭력(非暴力)의 성자(聖者)’ 마흐트마 간디의 예가 생각난다. 성욕(性慾)이 충만하던 신혼 시절 ‘어먼’ 짓을 하느라 아버지의 임종(臨終)을 보지 못한 불효(不孝)가 내내 마음에 걸렸는데,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동지(同志)의 아내가 동등한 인격체(人格體)로 보이지 않고 자꾸 여자(女子)로만(말하자면 성적性的으로만) 보이더라는 것이다. 하여 37세때 아내에게 제안을 했다고 한다. “우리 이제부터 ‘解婚’합시다” 해혼은 또 무엇인가? 결혼 자체를 풀어버린다는 뜻이니, 부부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얘기일 것이다. 운우지정(雲雨之情)의 맛을 아는 나이의 아내는 1년을 넘게 반대하다 남편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끝내 동의했다고 한다. 그 후부터는 무슨 회의에서든 아내가 동지로, 동등한 인격체로 보였다는 ‘자서전(自敍傳)’의 한 대목이 기억이 났다. 간디선생처럼 ‘성(섹스)의 해탈’ 그렇게만 된다면 불륜(不倫)이네, ‘내로남불’(나는 로맨스, 남은 불륜), 데이트폭력, 가정폭력, 치정, 살인 등 어떤 사회문제가 일어날 것인가?
그런가하면 ‘비혼식(非婚式)’이란 단어를 들어보았는가? 비혼식은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 표현의 세리머니를 말하는데, 실제로 일가친척, 친지, 지인들을 모아놓고 비혼식을 치렀다는 사례를 들었다. 그동안 수없이 지불한 ‘고지서 없는 세금’이 아까워 모두 거둬들이려 한 것일까? 독신으로 살겠다는 의지를 대외적으로 나타내는 ‘자기 다짐’일까, 모를 일이다. 영화속 같은 이야기이지만, 이제는 각 나라에서 ‘동성결혼’의 합법화가 트렌드처럼 이뤄지고 있으니, 비혼식이야 토픽감도 안될 터.
3포(연애, 결혼, 출산 포기), 5포(3포+집 장만, 인간관계 포기), 7포세대(5포+꿈, 희망 포기)의 불행한 시대 우리 젊은이들에게는 실감(實感)조차 나지 않을 이야기인가? 결혼 연령조차 갈수록 높아가고 있고 출산절벽, 인구절벽 등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어찌할 것인가? 결혼해 살고 있는 우리 기성세대들은 이혼, 졸혼, 해혼 등 '배부른 소리' 말고 '찍소리말고' 조용히 '행복'을 구가해야 하는 게 답일까? 아지 모게라(알지 못하겠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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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첨 : ‘졸혼 정립 십계명’
웹 검색 중 ‘졸혼정립 십계명 ’을 발견했다. 흥미롭다. 하지만 이것도 머리 골치가 심히 아프다. 졸혼은 아무나 하나? 하지만 참조하시라.
- 부부간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 민법은 부부 간에 동거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특히 상처가 있다면 치유하고, 문제가 있다면 해결한 후에 가족의 동의도 얻을 필요가 있다. 상처의 치유 없이 행한 졸혼은 이혼의 수순을 밟는 단계로 전락할 수 있다
-경제적인 형편이 선행되어야 한다: 졸혼은 두 가정을 운영하는 경우다. 가사유지비가 두 배로 들어간다. 어느 정도의 경제적 자립은 필수다. 경제활동을 유지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 독자적으로 자립하는 힘을 갖춰야 한다: 졸혼은 실질적인 독신생활, 즉 싱글라이프를 의미한다. 독자적인 신변처리 능력(세탁 청소 밥짓기 분리수거 등)이 필요하다. 신변처리 능력 여부는 ‘삶의 질’에 영향을 주는 변수가 된다.
- 나름대로의 목표설정이 필요하다: 졸혼기간 중 봉사여행 혹은 교육 등 어떤 삶을 살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있어야 한다.
- 기존 결혼관계의 근간을 흔드는 사안에 대해 사전합의 또는 동의가 필요하다: '새로운 이성과의 교제‘ 및 거액사업의 투자 등의 빌미는 상대에게 이혼의 빌미로 작용할 수 있다. 배우자 상호간의 신뢰와 관련된 부분이다. 필요시 혼전 계약서처럼 ‘졸혼 계약서’를 작성한다.
- 상황에 따라 ‘수시’ 또는 ‘일정기간’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가정 내 복귀’를 목표로 두어야 한다: 평소 연락하는 방법(메일/화상전화 등)을 활성화하고, 주기적인 가족행사 모임을 계획한다. 졸혼은 가까이서 도울 수 있는 친밀한 존재와 떨어져 지내는 상황이다. 질병이나 사고시 근처에 의지할 사람이 없거나 외부에 이혼한 것처럼 보여져 체면에 손상을 줄 수 있다. 이런 상황이 발생시 수시 또는 일정기간, 아니면 영구 복귀를 통해 부부와 가족으로서 역할을 다 한다. 졸혼 설계시 최종적인 영구 ‘귀향(가)’ 시간을 못 박는 것도 한 방법이다.
- 결혼 초기부터 생애설계를 통해 ‘졸혼타임’을 설정하는 것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100세 수명시대이다. 하지만 상대방 동의가 필요한 게 졸혼이다. 이런 문제는 교제 초기 혹은 결혼초 함께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 졸혼기간 목표설정과 경제적 자립(특히 여성), 가사수행(특히 남성)은 장기적인 계획이나 생활습관이 필요한 부분이다.
- 단계적 졸혼 방식을 적용해볼 필요가 있다: 졸혼을 위한 경제적 정서적으로 준비시간이 더 필요한 경우에는 우선 부분적인 졸혼방식(‘가정내 별거’)을 통해 ‘역할 바꾸기(집안일) 연습’ 등 함께 준비할 필요가 있다.
- 삶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을 높이는 계기로 생각한다: ‘별거’는 몸과 마음이 멀어져 상대로부터 일방적인 분리를 선언한 것이지만, 졸혼은 상대의 ‘동의’를 통해 결혼관계를 훼손하지 않는 상태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비록 이런 취지와 다른 비자발적 졸혼(사실상 이혼 직전의 도피처)의 모습이라 하더라도 상대도 나와 같은 ‘불완전한 인간’임을 인식하고 자녀들이 있다면 자녀들을 위해서라도 졸혼을 통해 마음치유시간을 갖고 재결합의 계기로 활용한다.
- 각 부부에 적합한 ‘구체적인 룰’은 수시로 만들어 나간다: 부부들이 처한 상황은 각각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실제 현장이나 여건에 맞는 ‘우리 부부에 필요한 규칙’은 수시로 만들어 나간다.
출처: http://stepfamily.site/2929 [재혼헬프라인(Stepfamily Help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