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인들은 풍부한 종교적 표현을 하는 민족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너무 지나치게 그들의 종교를 표현하기도 한다. 이렇게 좋지 못한 종교적 표현의 형태는 점차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정신은 지속될 것이며 다른 형태를 통해 분출되게 될 것이다. 인도인들의 이런 특징이 기독교의 틀을 통해 나타난다면 더욱 풍성한 의미로 표현될 수 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도의 기독교는 인도인의 기독교로 남아있어야 한다. 인도인의 기독교는 인도의 문화와 삶에 뿌리를 박고 스스로 굳건히 서야 한다. 그들의 기독교는 서양인의 기독교가 아니라 동양인의 기독교로 자리잡아야 한다. 물론 서양의 삶과 사상에서도 배울 만한 좋은 점들이 많다. 인도의 기독교가 이런 모든 것을 부정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인도가 자신의 토양에 깊게 뿌리를 내리면 안테나를 높이 세워 다른 음성도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의 토양에 맞는 기독교를 뿌리는 내리는 것이 먼저이다. 무엇이든 보편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특수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창의적인 표현이 가능해진다. 메아리가 아니라 확실한 자기의 음성이 되는 것이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살아있는 인도인을 만드는 것이다. 인도의 과거, 인도의 가능성, 인도의 종교적 본질에 민감한 인도인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할 때 인도의 기독교는 자신만의 형태를 지니게 될 것이다. 인도의 기독교는 아직 기독교 신학에 크게 공헌한 바가 없다. 이것은 인도가 자신의 형식을 버리고 서양의 형식을 따라 생각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인도인은 물 밖에 나온 물고기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제 인도는 깨어났고 스스로 이것을 깨닫고 있다. 세상의 모든 나라는 기독교를 이해하는데 있어 저마다의 공헌을 남겼다. 사람의 아들은 인간성의 한 부분이나 한 인종만을 들어 완전히 설명할 수가 없다.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기독교의 많은 부분이 수정되고 보완될 것이다. 언젠가는 세계가 새로운 형식을 요구하게 될 것이기에 새로운 형식을 준비해야 한다. 그것은 아트마(Atma) 즉 인도의 영혼이다. 이 아트마라는 단어는 노래의 후렴구처럼 인도의 모든 것에 따라 다닌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인도인들은 영적인(Atma) 삶의 본질을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다. 그들의 발은 거의 지상에 닿아있지 않을 지경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영혼에 맡기기 때문이다. 인도는 이 영적인 삶과 함께 모든 사물의 내면을 관통하는 통일성과 조화를 보여줄 것이다. 속죄(atonement)는 조화(attunement)를 의미한다. 하루는 한 힌두교인이 말했다. 자신의 삶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불협화음을 내며 시끄럽게 울리는 종과 같다. 그는 자신의 내적인 평화와 조화가 하나님의 본성과 화합하는 속죄라고 믿고 있다. 내면의 불협화음이 아닌 조화를 가져오는 것, 바로 그것이 속죄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각 문화와 배경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양한 형태와 특성은 성령 안에서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이 조화를 향하여 우리는 이 땅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