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구미 “한국 먹여 살린다” 자부심
사상 최고의 유가, 끝없는 불황, 외국으로 빠져 나가는 기업들, 여기에 날씨는 왜 이리 무더운지…. 불쾌지수를 끝없이 높이는 뉴스가 넘쳐나던 8월 중순. 인터넷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오래간만에 시원한 기사거리를 발견했다. 요즘 경북의 한 귀퉁이에 있는 구미가 제법 잘 나간다나? 혹시 ‘박하사탕’ 같은 뉴스가 있을까 싶어 주섬주섬 장비를 챙겨들고 구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편집자 주>
▲ 낙동강을 끼고 조성돼 있는 경북 구미 공단 전경
지난 8월 12일 정오쯤 도착한 구미는 여느 지방의 중소도시와 마찬가지로 조용했다. 뜨거운 햇살을 피해 시민들은 집과 사무실로 숨어버렸고 거리에는 원자재를 운반하는 화물차들만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오후 5시가 넘어서면서 조용하던 구미시가 갑자가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공장 입구에서 자동차들이 하나둘씩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더니 이내 6차선 도로를 가득 메워버렸다. 근로자들을 가득 태운 통근버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조용하던 시내 중심가 식당들도 이내 왁자지껄한 근로자들의 목소리로 가득찼다.
구미에서는 이런 장면을 하루 세 번 볼 수 있다고 한다. 공단에 입주한 대부분의 공장 생산라인은 24시간 돌아가고 근로자들은 3교대가 일상적이다. 때문에 아침, 오후, 밤 교대시간이 되면 갑자기 도시가 분주해진다. 한 식당 주인은 “구미를 처음 찾은 사람들은 아침부터 술기운이 도는 젊은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곤 하는데 밤 근무조가 퇴근하면서 맥주 한잔 걸친 것뿐”이라고 일러주었다.
매달 900명씩 인구 증가 평균 연령 30세
▲ 지난 7월20일 일본 아시아히글라스와 구미시의 투자 조인식이 열렸다. 구미의 인구 구성도 특이하다. 도시의 전체 평균 연령은 30세에 불과하다. 대부분 직장을 찾아 외지에서 찾아온 젊은이들이다. 그만큼 도시 전체가 젊은 분위기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전국의 지방도시 대부분이 인구가 줄어들고 있지만 구미는 정반대다. 지난 6월 구미의 인구는 36만명을 돌파했다. 한 달에 900명씩 꾸준히 늘고 있다.
“대한민국 전체 수출 흑자 중 80% 이상이 구미 한 도시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요즘 같은 불경기에 우리나라에서 구미만큼 제대로 굴러가는 곳도 없을 겁니다.”
구미공단에 입주해 있는 하이닉스공장 입구에서 만난 김영철(28)씨는 외지인을 보자 구미 자랑을 늘어놓았다. 나라 곳곳에서 경기 불황의 암울한 신호들이 감지되지만, 경북의 중소도시 구미가 쏟아내는 뉴스는 시원하다. 구미시는 지난해 수출 207억달러로 기초자치단체로서는 처음으로 수출 200억달러를 돌파했다. 지난 한 해 무역수지 흑자만 124억달러로 전국 흑자의 80%를 기록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길은 끄는 곳은 구미 국가4공업단지. 이곳은 전자·화섬업체들이 있는 구미 1,2,3 공단이 들어 선 이후 새로운 성장 동력을 형성하기 위해 중앙정부와 구미시가 205만평 대지 위에 함께 개발하고 있는 첨단산업단지다. 4공단에는 외국인 기업 전용단지가 조성돼 있다. 하지만 비싼 인건비와 물가 때문에 한국 기업들도 중국과 동남아시아 국가로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마당에 한국으로 들어오는 외국 기업이 있을까.
대답은 “그래도 구미에는 있다”는 것이다. 구미시는 올해 들어서만 10억2000만달러 이상의 외국인 기업 투자 유치 실적을 기록했다. 지난 7월 20일에는 일본 굴지의 기업인 아사히글라스(Asahi Glass)가 구미 국가4공단에 6000억원을 들여 공장을 짓기 위해 입주계약을 체결했다. 일본의 대형 반도체 회사인 오키(OKI)사도 LG㈜와 합작법인 ‘루셈(LUSEM)’을 설립하는 데 1200만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그 외에도 구미 국가4공단 외국인 전용단지에 마이크로하이테크(일본·10만달러), ZF렘페더코리아(독일·1000만달러), 도레이(일본·4억달러) 등이 구미에 투자할 것이라고 밝혔다.
‘50년 토지 무상 제공’ 걸고 투자 유치
왜 외국 기업들이 한국으로 몰려드는 것일까. 구미 시청 문화공보담당관실 이창희씨는 “구미의 경우 단단한 암반지대 위에 조성돼 있기 때문에 IT, 반도체 등 정밀산업의 공장 부지로는 최적일 뿐 아니라 물이 넉넉하고(낙동강), 내륙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정밀제품에 치명적인 염분 피해가 거의 없다”며 구미의 산업 입지를 자랑했다.
하지만 이 같은 조건만으로 구미로 외국 기업들이 밀려드는 기현상(奇現象)을 설명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이씨의 말이다. 구미시의 공무원들이 해외자본유치팀을 만들어 직접 발로 뛰어 다닌 것도 큰 보탬이 됐다. 구미시는 국가4공단에 외국 기업을 끌어들이기 위해 ‘간도 쓸개도’ 모두 다 내놓고 뛰어 다녔다. 구미시 투자유치기획단 박종우 팀장은 아사히글라스 투자 유치 과정을 이렇게 소개했다.
“투자유치기획단이라고 하니까 듣기는 좋지만 사실 ‘몸종’이나 다름없었죠. 공장 부지를 실사하기 위해 아사히글라스 측에서 30대 초중반의 대리, 과장급 실무진들이 한국으로 들어오면 밤마다 밥 시중, 술 시중 드는 게 일이었습니다. 일본에 가서도 마찬가지였죠. 6000억원 들고 들어오겠다는데 못해 줄 것도 없는 것 아닙니까.”
아사히글라스가 공장부지를 물색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전세계 각 지방자치단체가 달겨들었다. 일본의 지방자치단체는 물론 중국, 미국에서도 경쟁을 벌였다. 구미시는 50년 토지 무상 제공은 물론, 시청 본관에 아사히글라스 공장부지 실사단의 사무실까지 마련해주고 ‘유혹’을 했다.
‘원스톱서비스(One Stop Service)’를 제공하기 위해 아사히글라스 측 실사단의 요구가 있을 때마다 4공단 부지 조성 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한국수자원공사, 한국전력공사, 가스공사, 소방서 등 공장 입주와 관련된 11개 기관 실무자들이 모여 투자 유치에 열을 올렸다. 박 팀장은 “외국 기업 하나를 끌어들이기 위해 너무 저자세로 나가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을 수 있지만 현장에서는 이보다 더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다”고 말했다.
토지를 무상으로 제공하면서까지 외국 기업을 유치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특히 구미 4단지의 경우 입주 조건이 첨단하이테크 산업으로 제한돼 있기 때문에 입주하는 외국 기업들도 한국보다 뛰어난 첨단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구미공단에 입주해 있는 ‘도레이새한(사장 이영관)’의 박용철 과장은 외국 기업 공장 유치에 적극적인 찬성론을 펼쳤다.
“외국 기업들의 공장을 유치하는 것은 증시를 통해 투기성 자본이 유입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외국 기업들의 공장이 들어올 경우 고용, 세수도 증가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 유입입니다. 예를 들어 극세사(極細絲)와 같은 첨단섬유 분야에서는 아직까지 한국이 일본의 기술을 따라가기 힘듭니다. 그러나 일단 공장이 들어오면 기술 이전은 불가피한 것이죠.”
▲ 구미 LG필립스의 공장 내부
외국 공장 들어오면 기술도 따라와
그러나 외국 기업들이 구미에 구미가 당기는 것은 이유가 있다. 현재 구미공단에 들어와 있는 대표적인 기업은 국내에서도 최고의 기술과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LG필립스, 하이닉스 등이다. 외국 기업들이 구미를 찾는 데에는 기본적으로 국내 대기업들과의 연계성을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시장에서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고 있는 삼성의 휴대폰은 구미 한 곳에서만 만들어진다. 지난해 삼성전자 구미사업장에서는 애니콜 5570만대를 판매, 110억8300만달러의 매출을 기록했다. TFT-LCD(초박막액정표시장치), PDP(플라즈마 디스플레이 패널) 등 첨단 영상기기의 디스플레이 장치를 개발하고 있는 LG필립스의 경우에도 지난 7월 8일 디지털TV 전송 방식이 결정되면서 최고의 호황을 누리고 있다. 아사히글라스의 경우에도 LG에 디스플레이 장치를 납품할 예정이다.
그렇다고 구미에는 온통 장밋빛 그림만 넘쳐나는 것은 아니다. 전자산업단지와 함께 전통적인 구미의 산업인 화학섬유업체들이 섬유 생산 비중을 줄이고 전자 소재 등 첨단고부가가치 제품 생산으로 방향을 트는 구조조정을 추진하면서 몸살을 앓고 있다. 대표적인 섬유업체인 코오롱은 지난 6월 23일 파업을 시작한 이래 50일이 넘도록 공장 가동이 중단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저기 발견되는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도래이새한의 박용철 과장은 구미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구미처럼 근로자, 기업, 관(官)이 궁합이 잘 맞는 곳도 없을 겁니다. 각자가 최대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필요한 만큼 협조를 하니 도시 전체가 경쟁력을 갖게 되는 겁니다. 나라 경제 사정이 나아지면 구미도 좀더 빨리 성장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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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의 역사] 박정희 전 대통령, 수출전략 산업으로
공단 조성… 컬러TV 생산 이후 고속성장
고(故) 박정희 전(前) 대통령을 빼놓고 구미를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0년대 후반부터 전자공업을 수출전략 산업으로 지정하고 구미공단 조성 계획을 구체화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구미공단 조성 배경을 두고 박 대통령의 고향이기 때문에 부지로 선정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오히려 “개인적으로 고향에 공단을 건설하는 것은 좋지만 공인으로서 고향이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부정적인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최근에는 박 대통령 생가를 찾는 관광객이 매일 1000명을 넘어서고 있다.
구미산업단지는 1971년 11월 구미면 신부동(현 신평동) 일대 315만평의 토지를 매입해 구미국가전자단지 제1단지를 조성한 것이 시초였다. 수출 200억달러를 기록한 거대한 산업도시로 성장한 구미는 공단이 조성되던 1971년에는 경북 선산읍에 속한 일개 면에 불과했다.
구미공단에 최초로 입주한 업체는 당시 국내 최고의 전자업체였던 금성사(현 LG전자)였다. 구미공단이 급속하게 성장하게 된 계기는 컬러TV의 보급이 결정적이었다. 구미공단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환경오염 사고로 기록돼 있는 페놀유출사고(1991) 때문에 위기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구미는 페놀 유출 사고 이후 ‘최초의 환경운동 발생지’라는 명칭도 얻게 됐다. 현재 구미공단은 1,2,3단지 528만평, 농공단지 10만평, 2006년 완공을 목표로 4단지 205만평 등 743만평으로 이루어져 있고 전체 공단 내 1389개사가 입주해 있으며 8만6287명의 근로자들이 종사하고 있는 대한민국 최대의 공단이다.
(주간조선에서 옮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