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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파람 부는 사람 메리 올리버(1935~ ) [서문]
독자는 이 책을 에세이 모음집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여기 담긴 모든 글이 그런 건 아니지만 많은 글이 진정한 에세이답게 하나의 주제를 가운데 두고 그것을 넘어서고자 했다.
새뮤얼 존슨 식의 글쓰기,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설득과 논리가 아닌 반추와 대화를 생각했다. 그의 반추와 대화는 뛰어난 식견과 활기를 보여주며 기지가 넘치는 가운데서도 친절하다. 그리고 널리 확장될 때나 날카롭고 유쾌한 익살로 환히 빛날 때나 늘 헌신적인 문화인이었다.
이 책 속의 모든 글은 자전적 의미에서 진실이다. 상상이나 창작이 아닌 명상과 기억에서 나온 글들이다. 물론 기억이란 것은 편파성을 갖게 마련이어서 내 기억을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다. 어쨌거나 나는 이 글에서 보다 계획적인 예술의 경우처럼 행이나 단락의 요구에 따르기보다는 내 삶의 체험들에 충실했다.
[집짓기]
-집짓기
1 나는 뭐든지 만들 수 있는 청년을 알고 있다. 내, 울타리, 부엌 찬장, 탁자, 헛간 그리고 집까지 못 만드는 게 없다.
나는 목공 작업을 즐기긴 하지만 뭔가를 완벽하게 만들어 낸 적은 없다. 아니, 아주 잘 만든 적도 없다. 그러나 아직 다 끝난 건 아니다. 세월이 이런 저런 장애물을 실어와 내 앞에 펼쳐놓긴 했지만 말이다. 손가락은 뻣뻣해지고 눈은 먼 것에서 가까운 것으로 쉽게 이동하기를 거부해 해가 갈수록 작아지는 못대가리에 망치질하는 일이 녹록지 않다.
사실 나는 집을 지은 적이 있다. 담쟁이덩굴과 일일초가 우거진 뒷마당에 자리한 방 하나짜리 초소형 단층집으로 거의 다 재활용 자재를 썼다. 그래도 문이 하나 있고 창문도 네 개나 된다. 게다가 기적이라 할 정도의 뾰족지붕이라 방 안에서 걸어 다닐 수도 있다.
시를 쓰고 언어의 상자 속에서(아니면 언어의 날개라고 해야 할까?) 생각과 감정을 다루는 일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움직임의 생명체니까, 오직 부차적이고 자연스럽지 않은 상태, 곧 사색, 기쁨, 슬픔, 기도, 혹은 공포의 순간에만 우리는 깨어 있는 동안에도 의도적으로나 불운해서나 비 활동의 자세가 된다. 하지만 그것이 가련한 노동자인 시인의 자세다. 무용수는 춤을 추고 화가는 붓에 물감을 묻혀 칠한다. 작곡가는 적어도 옥타브를 넘나들며 악보를 그린다. 하지만 시인은 가만히 앉아 있는다. 건축가는 설계도를 그리고 측량을 하고 채석장에 가서 반짝이는 돌 사이를 돌아다닌다. 시인은 고요히 앉아 있거나, 유동적인 순간이라 할 때에도 종이에 몇 개의 단어들을 휘갈겨 쓸 뿐이다. 시인의 몸은 이런 비존재의 압력 아래에서 마치 근육처럼 오그라들기 시작하며 불평을 해댄다. 그러한 해결 불가능한 부조화, 정신은 뜨겁게 불타는데 몸은 너무도 오래 움직이지 않는 순간은 조만간 혁명을 일으킨다. 행동을 요구한다! 나는 여러 해 동안 내가 블랙워터라고 부르던 숲을 걸으면서 시를 썼다.
작은 비명소리와 함께 완벽한 보금자리를 향해 회전하며 들어가는 나사들로 말이다.
3
집이 인간의 감정과 몸에 어떤 존재이든, 피난처든 안락함이 든 사치든 정신에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다 그러하다. 우리의 꿈들이 상상이라는 집 안에 얼마나 빈번히 자리를 잡는지 생각해보라! 이따금 그 집은 무시무시하고 음울하고 폐쇄된 곳이다. 다른 때는 밝고 창이 많이 나 있으며 잘 가꾸어진 상태로 손님을 환영하는, 혹은 종종 길도 없고 야생 상태인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다. 우리의 꿈속에 나타나는 그런 집들은 영혼의 상태 혹은 정신의 상태를 나타낸다. 부동산은 꿈의 관심거리가 아니다. 꿈이 관심 갖는 건 우리의 내밀하고도 진정한 모습이다. 꿈을 꾸고 상쾌하게 잠을 깼다면, 밤에 꿈속 집에서 행복했다면 잘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잠이 깨서도 답답한 감금 상태, 공가도 안 통하고 빛도 없는 방들, 열기가 힘들거나 아예 안 열리는 문, 신경 쓰이는 무질서함이나 파괴의 기억이 남아 있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런 (꿈의)집들은 바람 센 산속에 자리하여 창문을 열고 야생의 알록달록한 새 떼를 불러들인다. 좁은 부빙 위에 웅크리고 끝도 없이 펼쳐진 검은 물 위를 떠돈다. 삐걱거리는 집들, 노래하는 집들, 밤새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에 대한 답을 달라고 우리가 애원해도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 집들.
죽은 지 한 달 정도밖에 안 된 남자의 집에서 실려 온, 크리스마스카드를 모아놓은 봉지도 발견했는데 거의 모든 카드에 1달러 지폐가 들어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필요한 건 모두 찾아냈다. 반쯤 찬 상자에서 모래 속으로 쏟아진 못까지 다. 부족한 건 마룻대 하아였는데, 그건 찾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한 내 인내심 부족 탓이었다. 마룻대는 우리 지역 목재회사에서 현금으로 샀으니 집 짓는 데 든 비용은 총 3달러 58센트인 셈이다.
내 집은 낡은 철도 침목으로 된 토대 위에 헌 목재와 헌 합판으로 된 뼈대를 갖추고 타르 방수 종이, 옅은 색 지붕널을 이고 우뚝 섰다.
나는 실내에 반 고흐의 풍경화와 블레이크의 시, 그리고 M이 색분필로 그린 그림을 걸었다. 집 모퉁이에는 새들이 둥지를 쳤다. 나는 램프를 켰다. 집짓기가 끝났다.
4
사람들에게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열성적이고 웅변적으로 이야기해도 그것이 해외 뉴스 정도에 그치지 않도록 잘 전할 수가 없는 소식이 있다. 사람들은 그걸 기꺼워하지도 공감하지도 않는다. 그건 개인적인 늙어감에 대한 이야기다. 단 하나뿐인 정ㅈ머을 향해 올라가고 거기 도달하면 반대의 길로 접어드는 것, 그 길 역시 즐겁지만 이전의 길과는 확실히 다르다. 그건 내리막길이다. 아무도 거기서 예외가 될 수 없고, 무슨 말로도 그 경로를 바꿀 수 없다. 우리의 시간은 이미 꽤 지났고, 남아 있는 시간은 아주 활동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우아하고 세심하게 보내야 한다. 이제 마을 배관ㄱ오들은 우리의 옛 배관공의 아들들이다.
나는 그 집을 거의 쓰지 않았다. 그래서 그 집은 원예용구와 이런저런 상자들을 보관하는 장소가 되었다. 거기서 시를 한 편이라도 썼을까? 그렇다. 몇 편 썼다. 하지만 그 집의 목적이 생각을 위한 은신처였던 적은 없다. 나는 그 집을 짓기 위해 지었으며 그 집 문지방을 넘어 떠나버렸다.
나는 아직 늙거나 성장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생관은 바뀌었다. 이젠 몸을 바삐 움직이고 싶은 갈망은 줄었고, 정신의 묘기에 관심이 더 많아졌다. 또 쓸모없는 목재에 새로운 애정이 생겼다. 버려진 자리에 조용히 남아 그저 존재만을 유지하는 것들 말이다.
오솔길 근처에 키 큰 단풍나무 한 그루가 쓰러져 있다. 지금은 초봄이라 주름진 적갈색 꽃잎이 피어나기 시작한 상태다. 쓰러질 때 받은 충격으로 나무껍질이 여기저기 갈라져 있다. 하지만 그 단풍나무는 서 있을 때와 거의 다름없는 모습으로 누워 있다. 예전처럼 바람 그물 노릇을 잘하진 못하지만 말이다. 이제 그것은 무엇일까? 어떤 의미를 지닐까? 나태함은 결코 아니고 여전히 야망과 견줄 수 있는 무언가일 것이다. 그걸 휴식이라고 부르지. 나는 그 단풍나무 가지 하나에 앉는다. 나는 한가함을 누려도 괜찮다. 나는 만족스럽다. 내 집을 지었으니까. 부전나비라고 불리는 청색 나비들이 비밀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반짝거리며 날아오른다. 나비들은 작은 청색 옷을 입고 나뭇가지 사이로 나풀거리며 날다가 내게 단풍나무와 크게 다른 존재로 인식되지 않는다. 육중한 몸으로 땅에 누워 햇살을 듬뿍 받으며 행복하게 반쯤 잠들어 있는, 잎사귀에 감싸여 바람이 울부짖는 소리를 내는 이 나무 궁전과.
[거북이 자매]
1
시인 셸리는 나뭇잎과 과일만 먹으며 자신의 몸이 결국 지성의 온순한 하인이 되리라 믿었고, 나는 셸리의 열렬한 숭배자다.
나는 근심에 짓눌려 산다. 쓰라린 미래를 맞이할 새끼 양에 대한 근심, 내 몸에 대한 근심, 그리고 특히 내 영혼에 대한 근심. 자기 자신은 얼마든지 속일 수 있어도 영혼은 속일 수 없다. 이 근심쟁이로서는.
육지 가장자리에는 물의 궁전들이 있다.
[백조]
여러해 전에 나는 스스로 세 가지 규칙을 정했다. 내가 쓰는 모든 시는 진짜 몸과 진정한 힘, 정신적 목적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시든 세 가지 조건 가운데 하나라도 만족하지 못하면 퇴짜를 놓고 다시 쓰거나 과감히 버렸다.
나는 내 시가 무언가를 묻기를, 그리고 그 시의 절정에서 그 질문이 응답되지 않은 상태로 남기를 원한다. 질문에 답하는 건 독자의 몫임이 작가와 독자 간의 약속에 명시되어 있음을 분명히 해주기를 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내 시가 고동침을, 숨차 오름을, 세속적인 기쁨의 순간을 담기를 원한다.
백조는 이런 몇 가지 특성을 갖췄다. 또한 비밀스러운 유머도 갖췄다. 시를 시작할 때, 즉 그 시를 구상해 몇 줄 적을 때 백조가 아닌 기러기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최근 기러기에 대한 시를 썼던 터라 그 시의 표현을 강화하여 내가 보고 있는 이 아름다운 새의 형상에서 기러기보다도 더 멋진 것을 창조해 낼 작정이었다. 나는 그게 무척 재미있었고, 그래서 편안하고 즐겁게 묘사를 이어갔다. 그 사실은 독자에겐 알려지지 않겠지만 , 내가 그런 기분 덕에 작품과 더 잘 어우러졌다면 나로선 전혀 놀라울 것 없는 일이며, 분명 그랬을 거라고 확신한다. 형식은 문제가 없었다. 긴 문장을 짧은 시행으로 나누고 , 약간의 앙장브망(앞 행의 끝 구절이 다음 행에 걸치어 계속 이어지는 기법)으로 움직임을 표현하면서도(백조가 움직이고 있으니까) 과하지도 않게 하여 시행들이 백조처럼 위엄을 지키며 과감하게 나아가도록 한다. 그리고 쉼표 일부 생략한다. 이건 매끄러움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세상의 거의 모든 시가 지나치게 천천히 흐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다음에 일단 사실 묘사가 이루어지면 독자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은 이유를 말하기 시작하고, 독자들이 단순히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하고 그것이 무엇일지 마음속으로 생각해보도록 유도한다. 독자가 시의 화자가 되는 걸 막는 요소가 있어선 안 된다. 그것으로 ㄲ트이다. 마지막 행 기슭에 닿으면 이 시의 핵심이다. 그건 종결이면서도 도착의 시점이기에 새로운 시작이 될 수도 있다. 독자가 자신의 참여자로 느끼지 못하는 시는 건물 속 갑갑한 방에서 불편한 의자에 앉아서 듣는 강의다. 내 시들은 모두 야외에서, 들판, 해변, 하는 아래서 쓰였다. 마무리까지 되진 않았을지라도 적어도 시작은 야외에서 이루어졌다. 내 시들은 강의가 아니다. 중요한 건 시인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독자가 시가 던진 질문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 백조는 거대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시) 백조
넓은 물 가로질러 무언가 떠 오네―가냘프고 섬세한
배, 흰 꽃들 가득한 ― 불가사의한 근육들로 움직이네
마치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런 선물들을 메마른 기슭에 가져다주는 것이 감당하기 벅찬
행복인 것처럼. 이제 검은 눈을 돌리고, 구름 같은 날개를 가다듬고,
암회색 정교한 물갈퀴발을 끌며 오네. 곧 여기 닿겠지.
오 나 어떻게 할까? 저 양귀비 빛깔 부리 내 손에 닿으면, 시인 블레이크의 부인이 말했지
남편과 함께 있고 싶어요 ― 그이는 너무 자주 천국에 있어요. 물론! 천국으로 가는 길은
평범한 땅에 있지 않아. 상상력 속에 있지 네가 이 세상을 인지하는,
그리고 네가 세상을 찬미하는 몸짓들에. 오, 나 어떻게 할까, 무슨 말을 할까, 저 흰 날개들 기슭에 닿으면.
[세 편의 산문시]
1
아, 어제, 그것, 우리 모두 외치지. 아, 그것! 모든 게 얼마나 풍요롭고 가능했는지! 얼마나 무르익고 준비되고 풍성하고 흥분으로 가득했는지 - 그 여름날, 하늘을 질주하는 희고 깨끗한 구름 아래서 우리 얼마나 희망에 차 있었는지. 아, 어제!
2 나는 옛 쓰레기소각장에 있었어 -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 인동덩굴이 여름내 온 세상을 장식할 기세로 습한 맹위를 떨쳤던 곳. 벌새 한 쌍이 여름마다 이곳에 살았지. 대로변 그들의 천국에 그들 종족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처럼. 뜨거운 오후에, 그 파괴된 땅에서 무성하게 자라는 블랙베리 줄기 옆을 걷노라면 거의 항상 야생 벚나무 꼭대기 근처의 높은 횃대에서 밝은 눈과 그보다 더 밝은 목소리로 자신의 왕국을 내려다보는 수컷 벌새를 보게 되었지. 내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오후에, 그 벌새가 고개를 홱 돌렸고 하늘에서 무시무시한 으르렁거림이 들려 왔어. 검은 삼각형 모양의 비행기가 육중한 발톱을 꽉 오므려 덩어리처럼 매단 채 지평선에서 울부짖으며 날아오고 있었어. 곧 좁은 귓구멍을 통해 머리에 고통이 일었어. 나는 빛나는 나무 위 작은새가 이 매 같은 새를, 머리에서 돌진하는 이 악몽을 보려고 초록 머리를 홱 옆으로 돌리는 걸 보았어. 저런 벌새가 움츠렸어. 날개로 몸을 감싸고, 잔뜩 웅크려 떨고 있었어. 신의 반짝이는 화려한 보석. 겁에 질린.
모든 묘사는 은유야.
3
폭풍이 지나간 후 바다는 팡파르도 없이 원래 자리로 돌아갔고, 조수가 눈 덮인 해변까지 밀고 올라왔다가 물러났고, 거기 세상에 있었어. 하늘, 물, 창백한 모래, 그리고 조수가 그날의 목적지에 닿았던 곳에, 눈(雪)이 있었어.
그리고 사소한 한 가지. 오리, 흰뺨오리 시체와, 그 옆 검은등갈매기, 오리 시체에는, 가슴 깃털 사이로 폭이 1인치쯤 되는 구멍이 있었고, 구멍 속 색깔은 소리치는 빨강이었어. 왜곡된 눈으로 볼 수도 있지만, 누구 탓도 아니었지. 폭풍이 내던지고, 큰 검은등 멀뚱이가 먹고 등등. 그건 한 순간의 일이었어. 구름 다발에서 살짝 고개를 내민 해가 그 풍경에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그 경이로운 빛을 다정히 비추고.
(시) 휘파람 부는 사람
갑자기 그녀가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어. 내가 갑자기라고 말하는 건 그녀가 30년 넘게 휘파람을 불지 않았기 때문이지. 짜릿한 일이었어. 난 처음엔, 집에 모르는 사람이 들어왔나 했어. 난 위층에서 책을 읽고 있었고, 그녀는 아래층에 있었지. 잡힌 게 아니라 스스로 날아든 새, 야생의 생기 넘치는 그 새 목구멍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지쳐가고 , 지저귀고 미끄러지고 되돌아오고 희롱하고 솟구치는 소리였어. 이윽고 내가 말했어. 당신이야? 당신이 휘파람 부는 거야? 응, 그녀가 대답했어. 나 아주 옛날에는 휘파람을 불었지. 지금 보니 아직 불 수 있었어. 그녀는 휘파람의 리듬에 맞추어 집 안을 돌아다녔어.
나는 그녀를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해. 그렇게 생각했어. 팔꿈치며 발목이며, 기분이며 욕망이며, 고통이며 장난기며, 분노까지도, 헌신까지도. 그런데도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알기 시작하긴 한 걸까? 내가 30년간 함께 살아온 이 사람은 누굴까?
이 맑고 알 수 없고 사랑스러운, 휘파람 부는 사람은?
[시인들]
-엘레오노라의 빛나는 눈: 불가능을 되찾으려는 포의 꿈
1 우리도 포와 다르지 않다. 모두가 그런 망상에 질식한 듯한 고통을 느낀다. 어느 정도는. 그리고 가끔은, 정상적인 삶에도 간간이 암울한 기분이 찾아든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확실성을 충분히 경험하며, 형이상학적 우울을 겪을 때 그 경험에 의지해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다. 그러나 포에겐 그런 경험이 없었다.
-프로스트라는 이름의 남자
로버트 프로스트의 서정시에는 거의 항상 뭔가 잘못된 것이, 불만족이나 고통이 들어 있다. 시인은 설명하고 바로잡으려 한다. 하지만 그런 노력은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평온 깨뜨리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에 ㅈ오종 은유적 언어로 이름을 붙인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들은 읽거나 듣기에 무척이나 유쾌하다. 아주 대단히 유쾌하다.
나는 그가 즐기고 있다는 걸 전혀 못 느낀다. 그가 즐기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세상의 무심함과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방식 때문이다. 근느 습관처럼 들판이나 산허리, 숲가에 멈추어 서서 정확하고 종종 상징적인 묘사를 한다. 프로스트의 모든 시에는 한 남자가 사물을 보고 생각하고 느낄 시간을 갖는다. 이것은 프로스트의 작품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세상이 멋지거나 매력적이거나 심오한 장소들로 가득하다고 해도 프로스트라는 화자는 불편한 마음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고통은 결코 순간적인 것이 아니다. 평생 이어진다. 철학적이고 해결 불가능한 것이다. 프로스트의 시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인생은 내리막길이다. 인생에는 본질적이고 기억할 만한 일들이 가득하지만 그 모두가 변화를 겪으며, 살아 갈수록 더 크고 심각한 걱정만이 따른다.’ 이것이 내가 프로스트의 시에서 얻은 메시지다.
(시) 나의 11월 손님 -로버트 프로스트
나의 슬픔은, 그녀가 여기 나와 함께 있을 때 가을비 내리는 이 음울한 날들이 더할 수 없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네. 그녀는 벌거벗은, 메마른 나무를 사랑하네. 그녀는 비에 젖은 목장길을 거니네.
그녀의 기쁨은 나를 머물게 하지 않을 것이네. 그녀는 이야기하고 나는 기꺼이 들어주네. 그녀는 새들이 떠난 걸 기뻐하네. 그녀는 자신의 소박한 잿빛 털실 옷이 안개가 맺혀 은빛으로 변한 걸 기뻐하네.
쓸쓸한, 버려진 나무들 빛바랜 대지, 무거운 하늘 그녀가 진정으로 보는 아름다움들 그녀는 내가 그것들을 보는 눈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 이유가 뭐냐고 성가시게 물어대네.
내가 눈 내리기 전 벌거벗은 11월의 날들의 사랑스러움을 알게 된 건 어제의 일이 아니라네. 하지만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건 헛된 일 11월은 그녀의 찬양에 더 잘 맞는다네.
-기도로서의 시, 장식으로서의 기도: 제라드 맨리 홉킨스
홉킨스는 예수회에 들어가면서 과거에 쓴 시들을 모두 파기했다. 더 이상 시를 쓰 않을 작정이었던 것이다.
-휘트먼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
1 윌리엄 제임스는 <종교적 체험의 다양성>이란 저서에서 신비적 체험의 네 가지 특징을 이야기한다. 그중 첫째가 그런 체험은 “표현이 불가능해 그 내용을 말로 적절히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휘트먼은 1855년에 12편의 시와 서문이 하나의 작품으로 합쳐진 <풀잎>을 출간했다. 그는 이후 다른 시를 쓰지 않고 계속해서 <풀잎>의 개정 증보판을 냈다.
[겨울의 순간들]
-겨울의 순간들
지금 내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겨울에는 어둠이 많기도 했다. 자연의 어둠, 사건의 어둠, 정신의 어둠, 무질서하게 퍼져나가는 알지 못함의 어둠.
[Review]
30년 넘게 함께 살아온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전에는 들어 본적이 없는 휘파람을 불며 집안을 돌아다닌다면 분명 기분 좋은 일이 있다고 남편은 생각 할 것이다. 그러나 아내의 휘파람은 남편 생각하는 그런 기분과는 거리가 멀다. 자신(아내)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남편에 대한 항변이었다.
"나는 그녀를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해. 그렇게 생각했어. 팔꿈치며 발목이며, 기분이며 욕망이며, 고통이며 장난기며, 분노까지도, 헌신까지도. 그런데도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알기 시작하긴 한 걸까? 내가 30년간 함께 살아온 이 사람은 누굴까?
이 맑고 알 수 없고 사랑스러운, 휘파람 부는 사람은?“
그녀는 또 다른 산문집<완벽한 날들 >에서, 왜 글을 쓰는가? 라는 스스로의 질문에 ‘글은 자신의 삶에 대한 외침’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아침마다 '너는 여기 살아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라고 외치는 질문으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했다.
누군가 자신을 완벽하게 안다고 할 때, 그래서 내게는 더 이상 보여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너무나 허전하고 슬픈 일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을 한꺼번에 다 드러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조금씩만 드러내고 살아간다. 그것은 다른 사람(사물)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소중한 것 들은 속속들이 파헤치지 않고 조금씩 남겨 둔다. 황금빛 모래밭에 거북이 몰래 숨겨놓은 알을 꺼내 올 때도 그녀는 스물일곱개의 알 중에서 열 세 개만 꺼내고 나머지는 남겨두었다. 그리고 그 알들로 스크램블을 만들어 맛있게 한 끼 식사를 해결했다.
그녀는 그렇게 절제된 삶의 동력으로 40년 넘게 동일한 장소‘프로빈스타운’에 살면서도 매일의 삶을 새로운 경이로움으로 지낼 수 있었다. 그녀는 삶의 의미를 멀리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서, 새로운 물건보다는 오랫동안 사람이 가까이했던 버려진 쓰레기 더미에서 찾았다.
집 뜰에 장난감처럼 작고 뾰족한 지붕으로 된 집을 만드는데 그녀가 지출한 돈은 3달러 58센트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근처에 있는 폐자재 모음 장소에서 주어왔다. 톱으로 판자를 자르고 모래 속에 파묻힌 못들을 주어다가 나무들을 연결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그 집이 완성되면 창문을 열고 야생의 알록달록한 새 떼를 불러들인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낡은 철도 침목으로 된 토대 위에 헌 목재로 뼈대를 세우고 방수 종이로 지붕을 덮던 날, 실내에는 고흐의 풍경화와 블레이크의 시, 그리고 남편이 색연필로 그린 그림을 걸었다. 집 모퉁이에는 새들이 둥지를 쳤고 방안에는 불을 밝혔다.
집을 만드는 동안 뜻밖에 좋은 나무들 벚나무와 호두나무, 오크목을 찾아낼 때마다 그녀는 쾌재를 불렀다. 특히, 황갈색 물결무늬와 선명한 옹이가 있고 질긴 소나무를 자를 때 은은하게 풍겨 나오는 향은 그녀의 심장을 헐떡이게 했다고 표현했다. 그녀는 그 폐자재들 속에서 이제는 자신의 육체도 늙어간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어느 날 죽은 지 한 달 정도밖에 안 된 남자의 집에서 실려 온 크리스마스를 모아놓은 봉지도 발견했는데, 매 카드마다 1달러짜리 돈도 들어 있었다. 지금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죽음 후에는 이렇게 사라진다는 삶의 철학을 쓰레기더미에서 발견한 것일까? 그러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삶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아직 늙거나 성장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생관은 바뀌었다. 이젠 몸을 바삐 움직이고 싶은 갈망은 줄었고, 정신의 묘기에 관심이 더 많아졌다. 또 쓸모없는 목재에 새로운 애정이 생겼다. 버려진 자리에 조용히 남아 그저 존재만을 유지하는 것들 말이다.”
버려진 자리에 조용히 남아 그저 존재를 유지하는 것들에 대한 애정. 물결무늬가 생기고 소금물에 절여진 해변의 널빤지들, 좀 조개가 파놓은 구멍 천지인 말뚝들. 그리고 숲에 떨어진 오크목, 단풍나무, 비바람에 시달린 귀한 소나무 가지들은 그녀에게 시상을 떠올리게 하는 좋은 소재들이었다. 오솔길 근처에 쓰러져 있는 키 큰 단풍나무를 보며, 그것들은 바닥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으름뱅이, 망각의 길을 가는 여행자들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봄이 되자 죽은 듯 누워있던 나무에서 주름진 적갈색 꽃잎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이제 그것은 무엇일까? 어떤 의미를 지닐까? 그것은 나태함이 아니고 여전히 야망과 견줄 수 있는 그 무엇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세상에 아직 다 드러내지 않은 자신을 조금씩 휘파람 소리로 표현하고 있다. 1935년생이니 이제 84세가 된 고령으로 최근까지도 시집을 내며 열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2005년 함께 40년 넘게 인생의 반려자이자 그녀의 작품 활동에 조력자였던 남편과 사별하고 그곳 프로빈스타운을 떠나 현재는 플로리다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 <휘파람 부는 사람 *원제 Winter Hours. 1999년 출간>은 1988년 미국 최고의 에세이로 평가 받은 <거북이 자매>, <집 짖기>와 몇 편의 에세이 그리고 세편의 산문시를 포함한 시가 들어 있다. 모두가 보석과 같이 반짝이는 자연의 속삭임과 같은 글이다. 그리고 시인 ‘에드거 앨렌 포’, ‘로버트 프로스트’, ‘제라드 맨리 홉킨스’‘월트 휘트먼’ 에 대한 평론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메리 올리버는 그의 시 <죽음이 다가 올 때 >에서 '경이로운 마음으로 기쁨으로 그 속으로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얼마나 더 살게 될까? 이런 마음이 들 때는 영혼이 지친 때이다. 우리에게 이런 마음이 들 때 중단 없이 인생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창조하는 저자의 책 속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