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충렬왕조의 이광봉 조의 아버지라는 이순지는 정확히 고려 말 조선 초기의 인물 이었다
함평이씨 족보에 시조는 1세 가상의 시조 이언이고, 그 아들은 210년 뒤에 2세인 이화이고(이계선 작성:함평이씨 상계세계 고찰 편 참조), 30년 뒤 3세 이상문이 태어나고, 42년 뒤 4세 이순지가 태어나고 , 그리고 5세는 이순지의 큰 아들인 이림이고, 둘째는 고려 충열왕조의 재신인 광봉 조라고 기록했다.
1세 이언-2세 이화-3세 이상문-4세 이순지-5세 이림
-5세 이광봉
위 기록으로 말하자면 고려사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조에 11번 등장하는 이 광봉 조가 역사적으로 확실한 기록을 갖고 있으니 그 선대인 이림, 이순지 이상문 이화 이언은 고려 충렬왕 이전 인물이 되어야한다.
위에서 족보의 기록이 역사적으로 정당하려면 논리적으로 계차가 합리적이어야 한다. 족보를 호구변의 등으로 지금까지 세탁하고 注와 附記 등도 개조시켜 허위족보의 대명사를 피하기 위하여 거짓말 족보를 정당화 하는데 근래까지 함평이씨 측은 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러나 함평이씨 족보는 2014년 현재의 족보기록이 정확히 역사적으로 잘못된 곳이 아직도 두 군데 있다.
첫째: 이순지의 벼슬이 檢校興威衛 大將軍 이라고 함평이씨 족보 는 그대로 기록했다. 檢校는 고려말 조선초 명예직 벼슬 이 름 이었다. 고려말 이순지가 고려 충렬왕조의 이광봉 조의 아버지라고 함평이씨 족보는 기록하고 있다. 강아지가 웃을 일이다.
충렬왕조의 이광봉은 함평이씨발간 인물보감에 정확히 고려사를 인용 고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조의 인물이라고 명시했다. 국사편찬 위원회 질의회시에도 고려사를 인용 위와 같은 인물임을 증거 했다. 족보에도 확실히 기록 되어있다. 그러나 부인이신 금성나씨 족보를 위조하는 데는 고려 말 사람의 딸을 부인으로 상정했다. 죽은 백골과 처녀가 결혼했다는 논리다.
이것도 당시에 살지 않은 우리들에게는 그 진위를 혼돈스럽다.
그런데 무식하게도 고려 충렬왕조의 이광봉 조의 아버지라는 이순지의 부기에는 정확히 고려 말 조선 초 사람이라고 적어놓았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이순지의 벼슬은 개성왕씨 성원록 종족별기의 마지막 왕손 계창의 사위로서 벼슬이 검교흥위위 대장군이다.
여기서 검교란 말은 고려말 조선초 벼슬임을 확실히 증거 한다.
검교(檢校)란 말은 고려말기부터 조선 초기에 걸쳐 정원 이외 임시로 증원할 때나 실제 사무는 보지 않고 이름만 가지고 있게 할 때에 그 벼슬이름 앞에 붙이던 말이다.
또 조선 영조와 정조 때, 규장각(奎章閣) 제학(提學)이나 직각(直閣)의 벼슬을 맡고 있는 사람에게 사고가 있을 때 임시로 그 사무를 맡는 사람의 관직명 앞에 붙이던 말이기도 했다.
둘째: 이순지는 함평이씨 족보 부기와 개성왕씨 종족별기 부기가 똑 같다. 충익의 사위로서 충익의 아버지(계창) 할아버지 (섬) 이름도 벼슬도 한자도 틀리지 않고 일치한다.
종족별기는 고려말 왕씨성을 전씨나 옥씨 등으로 바꾼 종친 의 족보로서 당초에는 그 姓을 기입했으나 이제는 삭제한다 고 명기했다. 이런 이순지를 충렬왕 이전사람으로 함평이씨 족보는 기록하고 있다.
고려말 이순지를 그대로 차입해다 함평이씨족보에 짜깁기하여 놓고 고려 충렬왕조의 이광봉 조의 아버지로 기록했다.
이는 당시에 향리에 모두가 함풍부원군 후손이란 말이 수 백 년을 회자되어 내려와 이를 합리화 시키려고 가짜시조 이언을 함풍군이라 했다.
그 이유는 이순지가 개성왕씨의 정통 사위로서 그 영귀로 아버지를 제치고 할아버지를 제치고 오직 증조인 이언 에게 함풍군에 봉해졌다는 족보의 억지 기록으로 설정했다. 각본이 그럴 듯하지만 너무 비약적인 거짓말이었다. 아들의 영예가 아버지에게 미치지 증조에게만 영예가 돌아간다는 것은 억지 거짓이다.
그래서 함평이씨 가상의 시조 이언이 함풍군이라고 기록한 함평이씨 족보의 기록은 거짓말이다.
이 권행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