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입구 외 4편
금기웅
백화점에서 가슴에 빈 지갑을 넣고
눈으로만 진열상품들을 구경하고 나왔다.
밤의 광장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자
검은 밤, 하늘에서 웃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문득 흰 색 대형백화점건물이 흰 페인트를 칠한 유람선으로 보였다
광장의 나무들은 모두 알록달록한 알전구 옷으로 껴입고
전기고문을 당하듯 한 줄로 서 있었다.
내 몸도 나무들처럼 알전구들로 칭칭 감긴 것 같았다.
그녀가 내게 요구한 시어(詩語)들을 생각해 보았다.
그녀의 바람대로 써내려가지 못하는 내가 씁쓸해졌다.
몸이 조금씩 떨려왔다.
나는 시의 해답을 깨닫지 못한 채
저 휘황한 도시의, 백화점의, 거대자본에게 고문당하다가
결국은 광장의 나무들 같이 서서히 말라갈지도 몰랐다.
내 몸으로 알전구들의 미세한 전류가 흘러들어오며
문득 백화점 광장이 선착장으로 보였다.
바로 그녀가 떠나갔던 선착장이었다.
선착장의 밤을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하늘에서 웃고 있었다.
온 몸이 떨려왔다. 나는 지하역 입구 속으로 빠르게 내려갔다. 마치 지하역입구가 거대한 유람선 입구로 통하는 계단인 듯 뛰어 내려갔다. 나는 떠나는 배를 잡기위해 뛰고 있었다. 그녀의 요구에 따르기 위해 뛰고 있었다. 아니 그녀의 바람에 저항하듯 도망가고 있었다. 광장의 나무에 칭칭 감겨있는 천 개의 알전구들이 비웃는 것 같았다. 알전구들이 거대한 입으로 모아져 커다랗게 웃고 있었다. 나는 달의 입구 속으로, 시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순간 네온 속에 떠있던 유람선이 떠나고 있었다.
달의 말
그녀 몸 주변은 늘 흐릿했다
그녀는 여행 할 때 가끔 다리 위에서 쉬어갔다
언제나 안개 낀 날을 골라 다니는지
그녀는 빛이 통과해 버린 감광지같이 희뿌연 했다
그녀가 다리위에 적어놓은, 누군가에게 묻는 것 같은 말
‘안개(霧氣)?’
그녀 말은 늘 나를 생각 속에 빠지게 했다
의도를 알지 못하는 이상,
나는 애매한 그녀 어법에 늘 혼란스러웠다
가끔씩 중얼거리는 몇 마디 말 때문에 해석에 힘이 들었다
지상의 운무를 내려다보던 그녀가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 흰 종이에 의문형 글귀를 적어 내게 보여주었던 그녀의 짧은 말을 보며. 문득, 그 말은 그녀 자신에게 묻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늘 자신에게 묻고 혼자 대답하곤 했던 말. 그녀는 그런 식으로 물으며 갔던 것이다
혼자 성지를 순유(巡遊)하는 순례자같이, 늘 자신에게 질문하며 걸어갔다.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도 그녀의 그런 점에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질문했지만, 실은 아무에게도 질문하지 않았다. 늘 그렇게 지내는데 익숙한 것으로, 아마 본인은 모르는 것 같았다. 어투는 언제나 쓸쓸하게 보였다. 말들을 볼 때마다, 나는 단지 그녀 주변부를 떠도는 한 마리 나비일 뿐이었다.
달의 사진
사진 속에 맑은 그녀가 들어 있었다
사진 속, 엄지와 검지 사이에 들어있던 동그란 그녀가
고향 하늘에 떠 있던 그녀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그녀에게 부탁하고 싶었다.
그녀가 아득하고 쓸쓸한 도시의 구석구석을 비추는
수고와 고통을 덜어달라고 빌고 싶었다.
수시로 저혈당을 몰고 오는 허기를 없애 달라 빌고 싶었다.
해 지면 늘 처연해 졌다.
그녀가 골목 귀퉁이를 힘들게 비추며 지나가는 것같이
나도 어둔 도시 한 귀퉁이로 흘러들어와 떠돌았다.
문득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나는 해종일 비추던 태양이 사라질 때 되면 힘이 빠져나갔다. 희망은 희미한 별빛과 함께 어둠속으로 가라앉았다. 세상에서 찾고자 했던 것들, 찾지 못하고 떠날 것 같아 불안해졌다. 아니 처음부터 내가 이곳에 있기나 했던 것인지 의심이 들었다. 무릎을 꿇었다. 그녀를 보살펴달라고 기도했다. 어쩌면 내 자신을 위해 기도한 것 같았다.
달의 꿈
잠을 자면서 그녀의 꿈을 꾸었다.
혼자 포구에서 비를 맞고 서 있었는데
비는 녹슨 배들 위로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배들은 옆구리에 충격 방지용 폐타이어들을 다닥다닥 붙인 채
조용히 정박해 있었다.
배들은 물결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었다.
비는 비릿한 냄새를 풍기는 물속으로 끊임없이 낙하했다.
비는 마치 성수 병을 든 성녀가
물을 정화하기 위한 희생처럼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국방색 비옷을 입은 선부들이 배 구석구석을 누비는 모습이 보였다.
닻줄을 잡아당겨보거나 공구를 들고 선실 안을 분주히 드나드는 꿈이었다.
다시 꿈을 꾸었다. 혼자 걸어가는 꿈이었다. 길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떠오르자 안개 속의 길은 스펙트럼으로 빛이 났다. 나는 꿈속에서 현실처럼 걸어갔다. 빛이 약하게 비추었고, 하늘은 흐릿했다. 꿈을 꾸면서도 아마 꿈속일 거라 생각했다. 나는 걸었다. 여름장마 때 안개비로, 뿌연 공간속으로, 새벽에는 온몸을 땀에 흠뻑 적신 채 깨어났다. 그녀의 꿈을 두 번씩이나 꾸었다. 내가 그녀를 꿈속으로 불러들인 것 같기도 했다.
달의 문
운구차는 병원 1층 현관문 밖에 세워져 있었다. 시신침대를 운구차 안으로 옮겼다. 운구기사가 시동을 걸었다. 운구차량이 천천히 직진해 나아갔다. 차량이 깜박이를 켜고 오른쪽으로 향했다. 나는 운구기사에게 허리를 깊숙이 굽혀 작별인사를 했다. 밤색 도리구찌 운구기사는 왼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오른손으로 밤을 몇 번 흔들어주었다.
순간 밤이, 그녀의 빛이, 운구차량 위로 내려왔다. 밤이 까맣게 익어가고 있었다. 차량 뒷 깜박이가 붉은 빛을 흔들었다. 그녀가 닫힌 밤의 문을 열고 들어가고 있었다. 먹먹해졌다. 나는 그녀의 문으로 들어가는 운구차량이 사라질 때까지 혼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