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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228
11월29일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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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종말 설교의 핵심은 정확한 종말 예상 날짜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반드시 그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2019년 교회전례력이 종착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에 따른 성경 말씀 역시 세상 종말에 대한 묵시문학적 서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루카복음사가는 종말에 다가올 대재난이 끔찍한 묘사를 통해 잠자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종말 대재난에 대한 루카복음사가의 가르침을 들으면서 마음이 불안해지고 걱정이 크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종말에 대한 묘사가 너무 끔찍하고 무시무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평생토록 주님 말씀 안에 살아온 사람들, 언제나 깨어 기도하고 계신 분들에게 있어 주님의 다시 오심은 결코 위협적이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로 파괴적이지도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희망과 구원의 날이 될 것이기에 가슴 설레며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물론 세상의 종말은 무시무시한 끝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원수들과 악인들에게만 그러하며, 평생토록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열성을 다해 기도하며 준비해온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날은 해방과 기쁨의 날이 될 것입니다.
팔레스티나 지방에는 봄이 거의 없습니다. 겨울에 이어 바로 여름이 옵니다. 생각이 올바른 사람이라면 무화과 나무에 잎이 돋아나기 시작하면 즉시 여름이 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님의 날을 잘 준비한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종말 표징을 즉시 알아볼 수 있는 은총이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종말 설교의 핵심은 정확한 종말 예상 날짜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반드시 그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오늘이 그날이라고 여기고 잘 준비하는 것입니다.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하루를 견뎌내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충만한 하루를 사는 것입니다. 갖은 인상 다 쓰면서 하루를 억지로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기쁘고 환한 얼굴로 하루를 축제로 엮어가는 것입니다.
종말과 주님의 재림, 구원과 하느님 나라는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밀접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고는 종말입니다. 그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권세와 모든 권력과 권능을 파멸시키시고 나서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드리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잡아다 놓으실 때까지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할 원수는 죽음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될 것입니다.”(1코린토 15장 24~28절)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의 기간이 아무리 길다하여도, 이 세대 인류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완전한 성취와 관련된 모든 일, 주님의 재림, 최종적인 구원,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결정적인 출범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모든 일은 반드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종말에 대한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상 날짜가 아니라 회개에로의 호소요,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삶이요, 철저한 준비입니다.
때로 종말과 새하늘 새땅에 대한 가르침들이 전혀 현실성 없는 것처럼 비춰질 때도 있습니다. 미사여구처럼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초세기 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각 신자들 사이에서는 ‘왜 하느님께서 이리도 더디 오시는가? 왜 하느님께서 즉각적으로 움직이지 않으시는가?’ 하는 불평불만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기다림이 끝도 없는 것처럼 보이고, 참고 견디는 것도 힘듭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할 것 한 가지! 주님의 말씀은 결코 그 힘과 빛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영원할 것처럼 보이는 우주도 사라지겠지만 그분의 말씀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영원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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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당신은 하느님입니다>
1800년대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생각으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주장하여 조선 정부에 의해 체포되고 참형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입니다.
당시 조선 말기는 유학을 바탕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득권들은 유학의 본래 가르침보다는 벼슬을 팔아 자기 잇속을 챙기며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고 있었습니다. 돈을 주고 벼슬을 산 관리들도 본전을 뽑기 위해 백성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거두어들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백성이 살기 힘들고 의지할 곳 없을 때 최제우는 우리 모두가 하느님과 하나가 되면 우리도 하느님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란 사상은 농민, 천민, 유생 할 것 없이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기득권들은 용납할 수 없는 사상이었고 사학을 가르치는 최제우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최제우는 죽었지만 그의 사상은 죽지 않았습니다.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그가 설파한 교리는 이후 지방 관리들의 약탈과 횡포에 신음하던 농민들이 봉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녹두장군 전봉준을 필두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게 만드는 불씨가 되었습니다.
당시 동학 농민군이 조선 정부에 요구한 것은 ‘탐관오리를 쫓아낼 것, 노비 문서를 불태울 것, 과부의 재혼을 허락할 것, 일본과 내통하는 자를 처벌할 것, 인재를 골고루 등용할 것’ 등의 지금 눈으로 보면 지극히 정당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득권자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그들을 제압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내가 하느님임을 믿으면 무엇이 좋을까요? 세상에서는 박해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태인들은 역사상 자신들이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주장하여 수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에 “내가 하느님이오.”라고 말하면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을 잃게 되는 순간부터 그 사람 안에서 진리를 발견할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진리가 그것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느님이니 우리 모두도 하느님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다 기득권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고발하던 이들의 주장은 이러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소. 이 율법에 따르면 그자는 죽어 마땅하오. 자기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였기 때문이오.”(요한 19,7)
예수님은 당신도 하느님의 자녀라 해서 죽임을 당했지만 당신을 따르는 모든 이들도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전파하셨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요한 20,17)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하느님이시기에 우리 아버지도 하느님이십니다. 아버지가 하느님이면 자녀도 하느님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자녀이니 그리스도께서 하셨다면 나도 할 수 있다고 믿는 한 사람으로부터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시니 자신도 걷겠다고 나선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이 된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이기에 나도 하느님이라는 믿음이 없으면 아직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왜 자신을 하느님이라고 믿어야하느냐면 믿는 만큼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늑대에게 키워져 늑대라고 믿으면 늑대만큼만 크고 아버지를 사람이라 믿으면 사람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아버지라 믿어야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이 됩니다.
유태인에게서 특출한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 이유는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금붕어가 어항에 있으면 손가락만큼 자라고 강에 풀어놓으면 사람 크기만큼 자랍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누구냐는 믿음이 자신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머리는 좋지만 아직 하느님이라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노벨상을 타기까지 성장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만 바꾸면 우리나라 사람들도 역사에 길이 남는 많은 인물들이 탄생할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자신의 자녀라고 믿게 만드는 욕심만 버리면 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 성모님을 어머니라 믿게 만들어야 역사를 바꿀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부모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때 자녀는 더 큰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유태인들은 바다를 가를 생각을 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뗏목을 만들 생각만 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물 위를 걸을 생각을 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하느님임을 먼저 믿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의 크기는 자기를 누구라고 믿는가의 크기입니다. 이 믿음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죽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하느님이라 말하는 것이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이라 믿지 않는 것이 교만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엄마, 나 개지?”라고 말하는 것이 겸손일까요?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처럼 되기 위해’ 죄를 지었습니다. 만약 이미 하느님임을 믿었다면 하느님이 되기 위해 선악과를 따먹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죄는 오히려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 믿지 않는 데서 옵니다.
제가 ‘나는 왜 교회를 믿는가’, 처음 책을 낼 때는 감히 대놓고 ‘당신은 하느님입니다.’라고 주장하지 못했습니다. 닥쳐올 반대가 두렵고 이해받지 못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번 ‘개정판’은 솔직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썼습니다. 그랬더니 저도 속이 시원하고 읽으시는 분들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개정판이 나와서 여러분이 많이 읽으시고 전파해 달라고 또 홍보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수익금은 가난한 지역 아이들의 교육과 무료급식에 사용됩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오늘 복음말씀은 성전이 허물어진다는 예수님 말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하느님을 모셨다면 우리 모두는 성전입니다. 성전이 허물어지는 이유는 하느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진리이신데,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유일한 진리는 당신을 모시면 우리 모두가 하느님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내가 하느님이라는 믿음을 잃으면 심판 때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박해를 각오하며 이 믿음을 지키고 전해야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이라는 사실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이라 믿게 하기 위해 예수님이 양식이 되셨습니다. 성체는 하느님입니다. 밀떡 안에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성체 안에 하느님이 들어오셔서 그 성체가 하느님이 되는 것이나, 그 하느님이 되신 성체가 인간 안에 들어와 인간이 하느님이 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매번 모시면서도 자신은 하느님이 아니라고 한다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내가 자랑스럽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믿음을 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내가 하느님이라 고백할 수 있어야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것이고 그래야 하느님으로 새로 태어나는 걸음마라도 시작하게 됩니다. 내가 하느님이라는 믿음을 잃으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고 그러면 성전은 허물어집니다. 내가 하느님이라는 진리가 머물지 않는 집은 성전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유태인들이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믿음을 끝까지 지켜냈듯이 우리 또한 하느님이라는 믿음을 끝까지 지켜내라고 말합니다. 이 믿음으로 박해받을 때 땅이 아닌 하늘을 바라봅시다. 그 곳에는 북극성이 있습니다. 그 북극성에는 “너는 내 자녀다.”라는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그분의 말씀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나고야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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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21,29-33: 나무에 잎이 돋으면 여름이 다가온 것을 알듯이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파멸과 세상의 종말에 대한 무서운 말씀을 하시면서 그 시기가 언제인지 미리 알아서 대비하라고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29-31절)하시고 예루살렘의 파멸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때를 미리 알아서 대비하라 하신다.
즉 이 말씀은 우리가 많이 들어온 말씀으로 마지막 때가 언제인지 모르니 항상 깨어있으라는 말씀이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말씀을 들은 그 세대가 가기 전, 70년에 파괴되었지만, 예수님의 재림은 즉 성서가 말하는 세상의 종말은 아직 오지 않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시기의 징표는 알 수 있으나 그 날은 하늘의 천사들도, 사람의 아들도 모르고 하늘에 계신 성부만이 아신다고 하였다.
이 세상 종말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벌로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의 새로운 세계를 완성하시는 과정으로서의 죄 많은 인간들과 세상이 겪어야 하는 진통의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정적인 모습은 마태 25에서 말씀하시듯이 당신이 구원하신 온 세상을 성부께 바치는 날이며 당신을 따른 모든 이들과 함께 새로운 축복의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는 구원의 완성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신경을 써서 걱정해야 할 것은 세상의 종말이 언제 올 것인가를 생각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나 개인의 죽음, 내 자신의 심판과 종말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어떻게 그 종말에 대비하여야 할 것인가를 더 걱정하고 염려해야 한다. 그 날이 언제 오더라도 그 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우리는 지금의 이 순간을 하느님의 자녀로서 신앙인으로서 충실히 살아야 한다. 이것이 종말론적인 삶이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항상 깨어있는 삶이다.
그 때 그 날은 공포와 기쁨, 영광이 이 세상에 함께 있던 것을 분명하게 둘로 가르시는 때인데, 그것은 그 때만의 일이 아니라 지금의 삶의 태도와 계속 연결되어 있는 결과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흥청대며 허송세월을 보낸다든지, 지금의 행동이 초래할 불행을 면하기 위해서는 그 때가 언제인지는 분명히 모르나 번갯불처럼 닥쳐올 것이기 때문에 지금부터 항상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33절)라고 하셨다. 그분의 말씀은 모두 이루어질 것이다. 그 말씀이 이제 우리의 삶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말씀을 구체적으로 살아야 한다. 말씀을 삶으로써 우리의 삶을 언제나 종말론적인 삶으로 이어가도록 항상 깨어있는 우리 되도록 노력하자. 이 깨어있는 삶이 우리를 항상 그분 안에 있게 하고 그분 안에서 진정한 기쁨과 평화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며 사는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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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부산교구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신학사무처장) 염철호 요한 신부님]
제1독서에서 봉독한 다니엘 예언서는 구약 성경의 대표적인 묵시 문학 작품입니다. 요한 묵시록에 많은 소재를 제공한 다니엘 예언서의 이야기 내용상 배경은 바빌론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입니다. 그러나 여느 묵시 문학과 마찬가지로 다니엘 예언서 역시 과거의 배경을 바탕으로 현재의 문제를 비판하는 작품인데, 그 실제 배경은 시리아 임금이 다스리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 예언서는 이야기를 통하여, 시리아 임금이 모든 권력을 다 쥐고 흔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은 하느님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 마지막 대목에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올라가는데,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이 그를 섬기게 될 것인데,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으리라고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니엘이 말하는 사람의 아들과 그 왕국을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모든 왕권이 주어졌으며, 그분의 나라는 세상 종말에 다시 오리라고 믿습니다. 그 때와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르지만, 그분께서는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직접 약속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당신 약속의 말씀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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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무화과나무의 교훈>
복음서에 나오는 ‘종말에 관한 가르침’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종말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써 시작되었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완성될 것이다.(루카 17,21; 21,27)
(지금 이 시대는 종말의 시대이고, 종말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시대입니다.)
2) 종말이 완성되는 날을 미리 예고하는 표징은 없다.(루카 17,20)
(그날이 되면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그날이라는 것을 바로 알게 됩니다.)
3) 종말이 완성되는 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마르 13,32)
(인간들이 그날을 마음대로 계산하거나 예측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4) 예수님의 재림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이루어질 것이다.(루카 12,46)
(그날은 오늘일 수도 있고, 내일일 수도 있습니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갑자기 닥칠 것이기 때문에 회개는 항상 ‘지금’ 해야 합니다.)
5) 그날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심판관으로서 오시고, 전 인류를 심판하실 텐데, 그 심판이 바로 ‘최후의 심판’이다.(마태 25,31-32)
(전 인류는 글자 그대로 전 인류입니다. 다른 종교를 믿거나, 아니면 아예 종교가 없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에 대해서 관심도 없겠지만, 그들도 심판 대상입니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루카 21,29-30)
이 말씀은, 언제인지 모르는 먼 훗날에 일어날 일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미루지 말고 ‘지금’ 충실하게 그 날을 대비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당시에는 무화과나무를 계절 변화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무화과나무에 잎이 돋으면 봄이 된 것이고, 여름이 가까이 온 것입니다. (당시 그 지역에서는 여름이 추수철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추수는 심판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써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이미 봄이 시작되었고, 여름이 가까이 와 있는 때입니다. ‘가까이’ 라는 말은, 여기서는 시간 여유가 거의 없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서둘러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저절로 알게 된다.’ 라는 말은, 최후의 심판 날이 언제인지 미리 알려 주는 표징이 없어도, 때가 되면 누구나 저절로 알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데, 예수님의 의도를 생각하면, “너희는 지금이 바로 회개하면서 그날을 대비해야 하는 때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라는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루카 21,31)
여기서 ‘이러한 일들’은 복음서의 문맥 안에서는 루카복음 21장 25절-26절의 표징들을, 즉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일어나는 일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일들은 예수님의 재림과 동시에 일어나는 일들이지 재림을 미리 예고하는 일들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때는, 하느님의 나라, 즉 재림과 심판이 가까이 온 때가 아니라, 이미 와 있는 때인데, 예수님의 말씀은 앞뒤가 안 맞는 말씀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겉으로 보이는 표현만 볼 것이 아니고, 말씀 속에 들어 있는 의도와 뜻을 생각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앞에 있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라는 말씀을 표현만 조금 바꿔서 반복하신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뜻은, “그날은 너희의 구원과 속량(해방)이 완성되는 날이다. 그러니 종말과 심판을 무서워하지만 말고 기뻐하여라. 그리고 그날은 곧 올 것이다. 끝까지 인내하면서 희망을 가져라.”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아직 못 보았으니,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이 아니겠구나.” 라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텐데, 예수님의 말씀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보거든’이라는 말이 아니라, ‘가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가까이 와 있다. 그러니 너희는 곧 그런 일들을 보게 될 것이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루카 21,29-33)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종말과 재림과 심판은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세대’ 라는 말은 해석하기가 어려운데,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 즉 바로 지금의 우리들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그래서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말씀은, 어떤 특정 시기를 가리키신 말씀이 아니라, 종말과 재림과 심판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일이고 누구나 다 대비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뜻하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그 일이 언제 일어나든지 간에...) 우리는 “설마 오늘은 아니겠지...”가 아니라, “바로 오늘일 수 있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종말, 재림, 심판에 관한 말씀뿐만 아니라, 당신의 모든 말씀이 다 ‘영원히 살아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당신의 말씀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허무한 것으로는 영원한 것을 얻지 못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영원히 살아 있는 말씀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무화과나무에 관한 말씀 바로 뒤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4-36) 언제 어떻게 심판의 날이 닥치든지 간에 평소에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잘 대비하는 사람에게는 그날은 ‘덫처럼 갑자기’ 덮치는 날이 아니고, 기뻐하면서 예수님을 맞이하는 ‘기쁨의 날’이 됩니다. 그런 날이 되기를 바란다면 늘 깨어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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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전상규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늘 복음은 큰 재난과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마굿간 구유에 조용히 탄생하신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에는 온 세상이 알 것입니다. 그 날은 큰 고통과 혼란을 수반한다고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구원받을 때가 왔음을 알리는 신호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람이란, 믿음 속에서 생활하고, 믿음 속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 어떤 사람이란,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을 어떤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어떤 사람이란, 순간 순간을 사랑으로 담아온 사람입니다. 그 어떤 사람이란, 아기 예수를 평생을 두고 성전에서 기다린 시므온과 안나와 같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삶은 진지하고, 현실을 느끼는 방식도 다를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대단하다고 평가하는 것을 사소한 것으로 볼 줄 알고, 세상에서 보잘 것 없는 것으로 평가되는 것을 위대한 것으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이든 낡은 것은 언젠가는 허물어지지만, 다른 한편 새로운 것이 서기 위한 준비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몸을 일으켜 머리를 들 사람, 구원받을 때가 온 사람. 그들이 바로 여러분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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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1)그 날의 승리에 함께 하리라>
루카 21,29-33 (무화과나무의 교훈)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날의 승리에 함께 하리라>
짓누름과 빼앗음을 꺾고
섬김과 베풂이
마침내 승리하리니
약육강식의 거친 세파 거슬러
지금 홀로라도 섬기고 베풀어
그 날의 승리에 함께 하리라
독선과 아집을 물리치고
포용과 배려가
마침내 승리하리니
제힘에 잘난 이들 틈바구니에서
지금 작은 품이나마 약한 이 보듬어
그 날의 승리에 함께 하리라
악과 불의를 깨뜨리고
선과 정의가
마침내 승리하리니
악을 일삼는 불의한 이들에 맞서
지금 두려움 없이 정의를 살아
그 날의 승리에 함께 하리라
광기어린 독재를 무너뜨리고
모든 사람이 주인인 민주가
마침내 승리하리니
독재에 맛들인 이들과 결연히 갈라서
지금 민초들과 더불어 힘차게 나아가
그 날의 승리에 함께 하리라
재물 권력 섬기는 우상의 시대를 끊고
하느님만이 주님이신 하느님나라가
마침내 승리하리니
탐욕을 자극하는 검은 유혹을 물리쳐
지금 오롯이 하느님과 함께 하여
그 날의 승리에 함께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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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3명의 아들을 둔 어느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탄절을 앞두고 불의의 교통사고로 큰아들을 잃었습니다. 성탄절 아침, 아직 슬픔이 채 가시지 않아, 모두 말없이 식사하고 있는데, 식탁에서 둘째 아들이 불쑥 이렇게 말합니다.
“형은 하늘나라에 가서 첫 크리스마스를 지내겠지.”
그러자 이 말을 들고, 막내아들이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형,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하늘나라에서는 하루하루가 크리스마스야! 매일 예수님과 함께 있잖아!”
그래서 큰 형은 매일 크리스마스를 지내고 있는 거야. 어린 막내아들의 말에 형제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 동안 잊고 있었던 것을 기억나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큰아들은 늘 예수님께 함께 있다.”라는 것을...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바라보라고 하시면서고 비유 말씀을 하셨습니다.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하느님 나라가 좋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왜냐하면, 그곳에 예수님이 계시고, 성모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고운님들 모두는 앞의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기억해야 할 일 있습니다. “큰아들은 예수님과 성모님이 계시는 하느님 나라에 있고, 매일 크리스마스를 지내고 있다.”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일본의 엔또 슈샤쿠의 작품에 <침묵>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천주교 신자인 농부 두 사람이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자 합니다. 예수님 믿는 신앙을 절대 버릴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그만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됩니다. 십자가 형틀에 두 농부의 몸을 비끄러매어서 밀물이 들어오는 바닷가에 세워놓았습니다. 물이 점점 불어나서 급기야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배신하라고 협박합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끝까지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이제 물이 점점 허리에서 어깨로, 목으로 자꾸 올라옵니다. 그것을 지켜보던 로드리고 신부님이 너무너무 괴로워서 하느님께 호소합니다.
“하느님이여, 저들을 도와주시옵소서. 능력을 나타내 주시옵소서. 어찌하여 침묵하고만 계십니까?” 하고 울부짖습니다. 그때 신부님의 귓가에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옵니다.
“나는 침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외면한다고 생각하지만), 저들과 고통을 함께 하는 것이다.”
그때 “그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평화를 느낄 수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묵시록 21장 22-23절에서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영광과 어린양의 등불이 고운님들에게 특히,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간호하는 이들, 그리고 자녀들에게 은총과 치유와 회복의 은총으로 자비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 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우리가 사는 이곳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과 성모님을 붙잡고 시작하면서, 언제나 고운님들 안에, 옆에, 그리고 때론 고운님들을 업고 함께 해주고 계심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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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330)
♧♧ 시편 64편 2절….
"하느님, 비탄 속에서 부르짖는 제 소리를 들으소서. 원수에 대한 두려움에서 제 생명을 지켜 주소서."
* 하느님, 비탄 속에서 부르짖는 제 소리를 들으소서...
여기서 ‘비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시아흐’라는 말은 ‘근심’ 또는 ‘수풀’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는 비탄하는 자의 마음 상태가 빽빽한 수풀과 같이 복잡한 상태임을 나타내줍니다. 한편 다윗의 ‘비탄’은 하느님의 진노의 심판을 당해 멸망할 것을 두려워하는 악인의 비탄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 가운데서 살고자하는 신앙인의 비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단순히 비탄에만 그치지 않고 ‘하느님’이라고 외치는 가운데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하느님께 아뢰고 해결책을 강구하는 하느님 중심적인 신앙 자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 원수에 대한 두려움에서 제 생명을 지켜 주소서...
시편 64편은 아마도 압살롬이 다윗에 대한 반역을 꾀하였던 사건을 저작 배경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집니다. 이러한 압살롬의 반역 음모로 인해 다윗은 결국 임금의 자리에서 폐위뿐만 아니라 생명의 위협까지도 느끼게 되었을 것입니다(사무엘 하권 15장 14절, 17장 2절. 참조)
♧♧ 시편 64편 3절….
"악한 자들의 음모에서, 나쁜 짓 하는 자들의 폭동에서 저를 숨겨 주소서."
* 악한 자들의 음모에서...
이는 압살롬의 무리가 반란을 도모하고 있는 상황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압살롬은 다윗의 왕권에 도전하기 위하여 사전에 은밀하게 많은 백성들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일을 진행했습니다.(사무엘 하권 15장 1-12절. 참조)
* 나쁜 짓 하는 자들의 폭동에서...
‘폭동’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리그솨’의 원 뜻은 ‘군중’ ‘무리’입니다. 이는 ‘악한 자들의 음모’와는 대조적으로 은밀하게 가 아니라 공개적으로 많은 무리를 동원하여 다윗에 반란을 일으킨 사실을 묘사한 것입니다. 즉 이 구절은...압살롬이 은밀히 반란을 계획하다가 급기야 반란을 일으키기까지의 반란 전개 과정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 시편 64편 4절….
"그들은 칼처럼 혀를 벼리고 독한 말을 화살처럼 시위에 메겨..."
* 칼처럼 혀를 벼리고...
반란자들이 자신들의 반란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다윗을 비방하고 모함한 행위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 독한 말을 화살처럼 시위에 메겨...
‘독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르’는 원래 쓴맛을 뜻하는 단어인데, 이 문장에서는 ‘말’과 결합해 남의 심령을 상하고 아프게 하는 포악스런 말을 의미합니다. 이는 구체적으로 압살롬이 백성들의 마음을 다윗에게서 돌이키게 하기 위해 다윗을 비방하고 중상 모략한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사무엘 하권 15장 1-6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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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외부로 강의를 하러 가면 근처 카페에 들어가서 강의할 내용을 점검합니다. 그런데 언젠가 지방으로 강의 갔는데, 근처에 들어갈 카페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시간은 남아 있고 그렇다고 특별히 갈 곳이 없어서 고민하던 중에, 근처에 공원을 발견했습니다. 이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강의할 내용을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공원 벤치에 앉아있었는데, 바로 제 앞에서 마음이 훈훈해지는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특별한 장면이라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한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주는 평범한 장면이었으니까요. 아이는 자전거 안장에 앉아있었고, 아버지는 뒤에서 자전거가 넘어지지 않게 잡아주고 있었습니다. 잔뜩 긴장하면서 자전거 페달을 밟던 아이는 점점 재미를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순간에 아버지는 잡고 있던 자전거에 살짝 손을 뗍니다. 아이는 넘어지지 않고 자기 힘으로 쭉쭉 앞으로 갑니다. 제가 처음 자전거를 배울 때를 떠올려 보면 자전거 안장에 앉아있는 것 자체가 커다란 공포였습니다. 자전거 안장 위가 마치 높은 빌딩 위에 올라간 것처럼 높게 느껴졌고, 그래서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지면 크게 다칠 것 같은 생각에 두려워서 긴장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이 자전거를 제대로 타지 못하게 만들지요. 하지만 이 두려움을 물리쳤을 때, 자전거를 타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서 그 아이가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요? 바로 뒤에서 잡아주던 아버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안심하고 페달을 밟을 수 있었고 이 믿음이 넘어지지 않고 자전거를 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것입니다. 믿음은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는 자신감을 심어줍니다. 특히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믿음을 통해 가장 큰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특히 주님의 말씀은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하늘과 땅이 사라질지라도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믿음을 두고 있는 곳은 과연 어디일까요?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믿음을 갖게 되면 이 세상을 살아갈 자신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자신감을 통해 세상을 즐기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믿음을 두기보다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믿음을 두면 늘 불안한 마음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어집니다. 세상의 것들은 진짜 믿음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대상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어디에 믿음을 두느냐에 따라서 나의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에서 벗어나, 기쁘고 행복하게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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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우정을 주님과 함께....}
저의 SNS 친구는 3만 명이 훨씬 넘습니다. 적지 않은 숫자의 친구가 인터넷이라는 공간 안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과 진정한 우정을 나누고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서로의 필요로 맺어진 관계일 뿐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도 거의 모르지만 단지 ‘친구’라는 이름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물론 이 안에서 우정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익명성을 보장하기에 가짜 우정, 가식적인 우정이 더 많습니다. 진짜 우정으로 맺어지는 관계는 어떤 것일까요? 성경의 황금률에서 제시하듯, ‘남이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가 있을 때 가능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관계로 다가오십니다. 어쩌면 이를 뛰어넘어 우리가 바라는 대로 해 주기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해 주시는 분으로 다가오십니다. 주님과 진짜 우정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커다란 힘을 얻고, 우리가 몸담은 이 세상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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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
연예인 스케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연예인들은 부르는 곳이 많기에 시간을 분 단위로 활용한다고 합니다. 정치인 스케줄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정치인은 가야 할 곳이 많기에 시간을 분 단위로 활용한다고 합니다. 워낙 바쁜 일정이기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 옆에서 일정을 조정해 줍니다.
저도 이곳 뉴욕에 와서 분주한 하루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누가 부탁하면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도 한몫했습니다. 비자 갱신으로 한국으로 가신 신부님, 1년 만에 처음으로 휴가 가는 신부님, 본당 행사가 있는 신부님들이 미사를 부탁하였습니다. 시간은 아침 9시, 낮 12시, 오후 5시 미사였습니다. 같은 시간이면 거절할 수 있지만, 시간이 달라서 하겠다고 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었지만 다행히 늦지 않게 다녀왔습니다.
우드사이드 한인 성당은 정감이 있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의 관심과 열정을 느낄 수 있는 주보를 보았습니다. 제대 뒤의 천사 그림도 아름다웠습니다. 약간 빠른 성가대는 경쾌했습니다. 처음 가는 성당이었지만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롱아일랜드 한인 성당은 정갈했습니다. 마치 노아의 방주처럼 지치고 힘든 사람은 모두 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미사 후에는 이탈리안 식당에서 노래를 들으며 점심을 먹었습니다. 내리던 비도 그치고 그린위치 성당으로 향했습니다. 20명 남짓의 적은 인원이 저를 기다려 주셨습니다. 본당의 조직은 갖추어지지 못했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분들의 마음은 뜨거웠습니다. 처음 본당 신부를 하였던 적성 성당에서의 아름다웠던 추억이 생각났습니다. 몸은 조금 피곤했지만 감사한 하루였습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께서 만드시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습니다. 세상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무대입니다. 태양, 구름, 바람, 꽃, 새와 나비, 바다와 물고기들은 모두 하느님께서 만드신 소품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사울, 다윗, 솔로몬, 에스텔, 롯, 요셉, 마리아, 빌라도, 베드로, 바오로 이 모든 사람은 하느님께서 만드시는 ‘구원의 역사’라는 드라마의 출연진들입니다. 물론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주어진 사명과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 세상에 드러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좋은 배우는 어떤 사람일까요? 젊고 매력 있는 외모의 배우도 있습니다. 뚱뚱하고 나이든 배우도 있습니다. 악역을 맡는 배우고 있고, 선한 역을 맡는 배우도 있습니다. 좋은 배우는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배우입니다. 감독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표현하는 배우입니다. 외모, 체력, 나이, 성별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출연하는 것도, 짧은 시간 출연하는 것도 큰 문제는 아닙니다. 얼마나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 있고, 선과 악 사이에 있으며 중간자입니다. 또한, 인간은 천성을 따르는 존재입니다. 천성을 따르는 사람은 인성을 갖는 것이고, 이 인성을 잘 닦는 것이 ‘道’입니다. 이 도를 알아 과는 과정은 ‘敎’라고 말을 합니다. 인간은 단순히 유전자를 전달하는 유기체가 아니라, 하늘의 뜻을 따라서 도를 공부하는 성품을 지닌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더욱 큰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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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난 강론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의정부에 계시는 어머니께 잠시 다녀왔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좋아하는 굴비를 맛있게 준비해 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여전히 굴비의 머리 쪽만 드시고, 살은 제가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아침을 두 그릇이나 먹으니, 어머니께서는 무척 좋아하십니다. 아들의 나이가 50이 넘었어도, 세상에서 제법을 일을 하여도, 어머니의 눈에는 늘 아이처럼 보일 것입니다.
겨울 따뜻하게 지내시도록 내의를 드리고, 기도하실 때 켜시라고 초를 갖다 드렸더니 너무도 좋아하십니다. 어머니의 눈은 늘 사랑의 눈이고, 믿음의 눈이고, 희망의 눈입니다. 그 마음에 사랑과 믿음과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방에 있는 피아노의 건반을 만져봅니다. 예전에 기타를 쳤기 때문에 주로 코드를 중심으로 피아노 연습을 합니다. 코드는 우리의 귀에 익숙한 음악의 길입니다. 코드와 다르게 피아노를 치면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리곤 합니다.
정해진 코드에 따라서 건반을 만지면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피아노를 반주하는 것도 정해진 길과 규칙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 정해진 길과 규칙을 꾸준히 연습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는 분들은 굳이 악보를 보지 않아도, 마음속의 음들이 손을 통해서 피아노의 건반을 움직이게 할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볼 수 없는 길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도, 버스를 기다릴 때도 사람들이 질서 있게 줄을 서는 것을 봅니다. 그것이 더욱 빠르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우리들의 의식에 타인에 대한 배려가 커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무조건 먼저 타려고 밀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영화도, 야구도 암표가 성행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모르는 사이에 아이들이 커가듯이, 우리들의 시민의식도 성숙했다고 생각합니다.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다섯 가지 특징을 지닌 존재라고 합니다.
첫째, 인간은 욕망을 지닌 존재이지만, 그 욕망은 절제되어야 합니다. 둘째, 인간은 모순된 삶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 모순된 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사랑하니까 헤어지는 것’도 인간이고, 남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것도 인간이고, 자신의 욕심 때문에 타인을 죽이는 것도 인간입니다.
셋째, 인간은 사이에 있는 존재입니다. 선과 악 사이에 있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는 존재입니다. 혼자서 살 수 없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넷째, 인간은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 영원을 생각하는 초월적 존재입니다. 명상과 묵상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는 존재입니다.
다섯째, 그래서 인간은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나그네가 언젠가 집으로 돌아가듯이, 인간은 삶의 여정을 통해서 죽음이라는 문을 넘어서야 하는 존재입니다.
생명은 죽음이 있기 때문에 생명이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다가올 죽음을 거부하거나, 두려워하기 보다는, 주어진 삶에 충실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찾아야 합니다.
하늘과 땅이 사라질지라도, 변하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며, 그것은 죽음을 넘어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의 전례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될 것입니다. 막힌 곳은 시원하게 뚫어주고, 골이 깊은 곳은 사랑으로 메워주고, 앞서가는 사람은 뒤에 오는 사람의 손을 잡아 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우습게 아는 곤충들도 우리보다 훨씬 먼저 이 지구별에서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순간을 감사드리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작은 발걸음이라도 디딜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매일 이렇게 묵상 글을 이웃들과 나눌 수 있으면 더 바람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은혜를 베풀어주신 주님께 노래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주님 이름 찬양하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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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카르페 디엠carpe diem>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삽시다-
모든 것은 다 지나 갑니다. 제행무상입니다. 그러나 하느님만은 영원합니다. 다 지나 사라지지만 하느님과 함께 사는 자는 영원합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살아야 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오늘 말씀 묵상 중 떠오른 성녀 아빌라의 대 데레사 작품인 <아무 것도 너를>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성녀가 기도서에 끼워놓고 늘 보았다는 기도시입니다. 원문을 잘 요약한 다음 시는 성가로도 널리 불리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 만으로 만족하도다”-
초겨울 배밭사이를 산책하면서도 실감하는 진리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끊임없이 흐르는 세월입니다. 다 흐르지만 언제나 하늘과 산은 그대로입니다. 한결같은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언제나 그 자리의 정주의 하늘과 산입니다.
하느님만으로 행복한 자가, 만족한 자가 진정 부자요 자유로운 자입니다. 흐르는 세월에, 이런저런 사건들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항구한 인내로 그 자리에서 한결같은 정주의 삶을 삽니다. 바로 제1독서의 다니엘과 복음의 예수님이 그 모범입니다. 참으로 보이는 현실을 꿰뚫어 영원하신 분을 바라봅니다.
다니엘의 환시체험을 통해 그가 늘 깨어 살았던 현자임을 봅니다. 하느님은 깨어 있는 이들의 눈을 열어 주시어 신비 환시 체험을 선물하십니다. 네 마리의 짐승의 환시가 의미심장합니다. 다 지나가는 제국을 상징합니다. 영원할 것 같은 제국도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진리를 보여줍니다.
독수리가 상징하는 바빌론 제국, 곰이 상징하는 메디아 제국, 표범이 상징하는 페르시아 제국,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짐승이 상징하는 알렉산더 대왕의 그리스 제국입니다. 이 제국들이 다 사라진후 나타나는 영원한 제국, 하느님의 나라, 그리스도 왕국입니다. 오늘 다니엘서의 마지막 대목이 은혜롭습니다.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속에서 앞을 내다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앞의 제국들과 현존하는 작금의 제국들과는 너무 대조적인 그리스도의 왕국을, 하느님의 나라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다 사라지는 것들 속에서도 이미 이런 하느님의 나라를 살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은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통해 바로 오늘 여기 지금이 종말의 때임을 일깨웁니다. 참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살아야 할 하루하루의 날임을 깨닫습니다.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바로 예수님 당대는 물론 오늘 우리 세대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늘 깨어 오늘 지금 여기를 살라는 종말의 표징들입니다. 이런 이들은 저절로 임재臨在한 하느님의 나라를 삽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주님의 말씀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 영혼이 주님 말씀과 일치가 깊어질수록 영원한 삶임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바 하느님의 나라는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입니다. 제가 썼던 요셉수도원 설립25주년 회고사 결론 부분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바로 지금 여기가 하느님을 만나는 구원의 자리이자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이에겐 늘 새로운 시작이 있을 뿐입니다. 과거의 업적에 안주하거나 미래를 앞당겨 걱정함이 없이 오늘 지금 여기만 삽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가지만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사는 이에겐 늘 영원한 현재만 있을뿐입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현재를 살아야 합니다. 과거와 미래는 하느님께 맡기고 오늘 새로 시작할 때 하느님 친히 미래가 되어 주십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듭시다. 우리의 구원이 가까웠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충만한 기쁨과 행복을 살게 하십니다. 아주 오래 전에 써놓고 자주 애송하며 ‘영적 전의靈的 戰意’를 새로이 했던 ‘이제 다시 시작이다’라는 자작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작년 가을/붉게 타오르다 사라져갔던 담쟁이
어느 새 다시 시작했다
초록빛 열정으로/힘차게 하늘 향해/담벼락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붉은 사랑으로 타오르다/가을 서리 내려 사라지는
계속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제자리 삶에도 지칠줄 모르는 초록빛 열정
다만 오늘 하늘 향해 타오를뿐
내일은 모른다
타오름 자체의 과정이 행복이요 충만이요 영원이다
오늘 하루만 사는 초록빛 영성이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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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앞을 볼 수 있는 눈>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새로운 싹이 트면 계절의 변화를 느끼듯 세상의 여러 혼돈과 징표를 보거든 그것의 의미를 알아들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하나의 혼돈은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데 꼭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 하나의 풍파가 몰아치면 그것을 계기로 새로운 틀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므로 “혼돈과 어둠 속에서 움터 오르는 새 하늘, 새 땅의 창조와 광명을 내다보는 눈”(이현주목사), 혜안을 가진 이는 행복합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혼돈은 사라지고 하느님의 나라가 우뚝 선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또한 구원 받을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마음 설레게 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마음 한구석엔 두려움이 있습니다.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께서 ‘각자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성직자를 떠 바쳐 위하고 거룩하게 보지만 그 속을 알면 누구보다도 부끄러움이 많고 자비를 간구해야 할 사람입니다. 맑고 깨끗한 마음의 소유자로 부끄러움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들은 언제나 살아있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는 영적인 삶과 육적인 삶의 대조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들었으면 그에 걸 맞는 삶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모든 것이 사라질지라도 가슴에 남는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세상 것은 사라지지만 주님의 말씀을 차지한 사람은 영원합니다. 나자렛 예수는 사라질지라도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영원한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나 자신의 한계 속에 내 옆에 계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얼마나 의식하고 있는가를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일상 안에서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면 뻔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서도 걸려 넘어지고 나서야 후회를 하고 새로운 다짐과 시작을 합니다. 마지막 날이 언제 올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명한 것은 “그 날이 오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 날이 오늘 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 때에 주님을 떳떳이 만날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말씀 안에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청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내 마음 안에서 주님의 말씀이 살아 있기를 희망합니다. “당신 말씀은 제 발의 등불, 저의 길에 빛”(시편 119,105)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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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종말의 표징과 구원의 약속이 차례로 제시됩니다.
"저절로 알게 된다."(루카 21,30)
어제까지 종말과 심판의 날에 대한 긴 담화가 이어진 뒤, 예수님께서는 우선 자연의 이치를 비유로 드십니다. 학문적으로 많이 배운 사람이 아니어도 본능과 경험을 통해 인식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은 지식들이 쌓이게 마련이지요. 가장 흔한 것이 주변 자연 현상을 통한 예측입니다.
"저절로"라는 말씀 안에는 사실 땀흘려 일하시는 성부 하느님의 노고가 숨어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당연한 것이지만, 창조주 하느님을 의식하고 사는 이에게는 매순간의 경이로움이지요. 아무튼 고대의 지혜는 이런 경험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긴 세월을 통해 축적된 경험을 소유한 원로, 노년층이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루카 21,31)
사람의 아들이 오시기 전에 일어날 표징들은 이미 며칠 전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지요. 하지만 현상을 현상으로, 사건을 사건으로 그냥 지나친다면 축적된 지식도 별 소용이 없을 겁니다. 어둡고 공포스럽고 잔혹한 재난과, 대혼란이 야기될 재해들 자체에 자지러지고 무너져 버린다면 자연의 순리와 인과관계에서 얻은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닥쳐올 징벌의 날이 언제가 될지, 견뎌야 할 기간이 얼마나 될지, 누가 살아남을지 아무도 모르지만 단 하나 확실한 사실이 있습니다. 뒤이어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징벌의 날은 공포와 두려움으로 막을 내리는 "끝"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가 오고 있다는 예고이고 표징이 될 겁니다. 결국 거기에 희망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루카 21,33)
설령 천지가 뒤흔들리고 뒤집히며 전쟁과 살육이 만연하고 서로가 서로를 적대하고 증오하도록 악이 판을 치는 시기가 오더라도, 그래서 그 때문에 하늘과 땅마저 사라지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십니다. "말씀"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은 만물을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지혜요 힘입니다. 그러니 잠시의 어둠을 견디면 고대하던 빛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제1독서는 다니엘이 본 무시무시한 환시로 시작됩니다. 등장하는 거대한 짐승 네 마리는 묘사만으로도 끔찍스럽습니다. 지난 화요일에 "순금, 은, 쇠, 진흙으로 된 상"이 파괴되는 꿈 해석과 비슷한데, 이 네 짐승들 역시 바빌론, 메디아와 페르시아, 그리스를 상징하지요. 이 왕국을 이어받은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국의 열 임금이 "열 개의 뿔"(다니 7,7 참조)로 나타나고, 끝까지 거만하게 떠드는 "열한 번째 뿔"(다니 7,8.11)이 가장 잔인했던 악한 임금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를 가리킵니다. 여기까지는 암흑이고 절망이고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한가운데입니다.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다니 7,9)
분위기는 대반전됩니다. 말씀을 읽는 우리까지도 불쾌하고 혐오스런 공포로 압박하던 표상들 앞에 대법정이 차려지고 만물의 주인께서 "자리"를 잡으십니다. 이제 사랑으로 창조하셨던 세상 만물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암흑의 세계를 지나 제 자리가 잡힐 것입니다.
"연로하신 분"의 등장과 함께 이어지는 분위기는 밝고 맑고 정결하며 거룩하고 영광스럽습니다. 장엄하고 조화로우며 힘찹니다. 그 힘으로 인해 "마침내 그 짐승이 살해되고 몸은 부서져 타는 불에 던져졌다"(다니 7,11)고 하지요. 거칠고 험악한 악이 순수하고 거룩한 힘에 파괴되어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새창조의 은총입니다.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다니 7,12.14)
드디어 희망입니다!
성경과 실제 역사가 말해주고 우리의 경험적 인식이 인정하듯 세상 권세는 한시적이고 불완전합니다. 악은 온갖 모습으로 얼굴을 바꾸어가며 인류를 현혹시켜 왔지요. 그 사이사이마다 자행된 살인과 박해와 폭력과 파괴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선한 이웃들을 잃어왔는지요.
사실 요즘도 이게 종말인가 할 정도로 온 우주가 몸살을 겪고 있습니다. 기후변화로 인간의 통제 능력을 벗어나는 재해들이 지구촌 곳곳을 유린하고 있지요. 함께 잘 살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인간의 도리와 예의의 기준을 저열하고 천박하게 끌어내리는 무도한 이들이 인권과 평화보다 민족주의, 국가주의, 차별주의를 내세워 분열을 획책하고 저만 잘 살는 세상을 만들려 하지요. 돈과 물질이 사람의 인격과 가치관을 넘어서 보편적 우상의 자리에 당당히 등극한지는 이미 오래지요. 마치 다니엘 예언서 오늘 대목의 전반부가 지금 펼쳐지는 듯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얼마나 큰 위안의 말씀입니까! 어둠이 짙을수록 새벽이 가까웠다고 하지요. 고통이 깊으면 기쁨도 크다고 하지요. 죽음은 부활로 이어지는 통로라고 합니다. 이 모든 지혜를 충족시키는 하느님의 새창조,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을 깨어 기쁘게 기다리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입니다.
그러니 우리 이 어두운 시기에 함께 기도하며 마음을 모읍시다. 나 중심, 내가 속한 단체 중심, 어떤 색깔 중심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으로 마음을 향하고 거기서 새롭게 출발합시다. 먼저 선취한 하느님 나라의 행복으로 세상의 어둠을 이겨내고 빛으로 오실 주님을 맞이하는 작은 빛이 됩시다.
오늘 저희 프란치스칸들은 모든 프란치스칸 성인성녀들을 기립니다. 시대의 작은 빛으로 산 신앙의 영웅들이지요. 우리도 그 대열에 참여하도록 초대받았으니 함께 기뻐하며 작은 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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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인생은 무거운 것에 기반을 둬야 - 젊은이들에게
인생이 우리의 위에서 덮쳐누르고 그것이 무거운 짐이 될 정도로 깊게 우리 인생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은 쾌락이 아니라 인생입니다.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무거운 것을 사랑하고 무거운 것과 어울리는 것을 배우는 일입니다. 무거운 것 중에는 호의적인 힘이 있습니다. 우리를 재료로 하여 일을 해 주는 손이 있습니다.
무거운 것의 한 가운데야말로 우리는 우리의 기쁨, 우리의 행복, 우리의 꿈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한 깊이를 앞세움으로써 행복도 기쁨도 뚜렷이 부각되고 그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무거운 것의 어둠 속에서만 행복도 기쁨도 뚜렷이 부각되고 그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비로소 알게 됩니다. 무거운 것의 어두움 속에서만 우리의 귀중한 미소는 어떤 의미를 가집니다. 거기에서만이 그것은 깊은 꿈을 꿀 수 있는 빛을 내고 그리고 그것이 일순 펼쳐지는 광명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기적과 보물을 보는 것입니다.
-김홍언 신부 영성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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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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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루카 21,29-30)
<신앙과 불신앙을 나타내는 무화과나무>
무화과나무는 이중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 야성이 길들여진 때와 죄악이 가득 차 있는 때가 그것이지요. 믿는 이들의 신앙처럼 그것은 꽃으로 피어나기 전에 시련을 거치고, 마찬가지로 죄인들은 자기네 범죄행위를 통해 영화를 누립니다. 이쪽에는 믿음의 열매가 있고 저쪽에는 불신의 음탕함이 있는 것이지요. 복음사가는 농부로서 저를 위해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도록 가꿉니다.(루카 13,9 참조.) 우리는 죄인들이 무화과나무 잎 같은 거짓의 겉옷으로 자신을 덮고 양심을가린다 해도 그 때문에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열매없이 잎만 무성한 것은 수상쩍은 것입니다.
-암브로시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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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말씀의 위안>
"하늘과 땅이 사라져도
주님의 말씀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목숨도, 인간의 사랑도
영원하지 않음을 우린 압니다.
누가 실세냐.
누가 많이 가졌냐.
누가 힘이 세냐.
누가 차지하느냐.
재보고 평가를 내리지만 무엇이든
끝나는 지점이 있고 변하고 바뀌고 사라진다.
모두가~ 모든 게 사라져도 주님의 말씀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 큰 위안이 된다.
말씀마져 없다면 어디에 기대고
믿고 의지하며 살겠는가?
주님은 우리를 살리신다.
"당신의 매를 맞아 터진 곳을
낫게 해 주시는 날,
달빛은 햇빛처럼 되고
햇빛은 일곱 배나 밝아져
이레 동안에 빛을 한데 모은듯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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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루카 21, 31)
붉게 타오르는
단풍 뒤에는 언제나
겨울이 먼저
와 있습니다.
언제나
가까이 와 있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진실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이렇게 가까이
와 있음에도
알아 보지 못하는
우리들 믿음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먼저 와 있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를
도와주시려
자녀들에게
오십니다.
누가 오시는
것입니까.
생명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사라지지 않을
말씀과 함께
우리에게 오십니다.
되돌아갈 길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사라지지 않을
하느님 나라가
정녕 가까이
와 있습니다.
사라지는 것이
아닌 가까이 와
뜨겁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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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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