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칙서가 광저우에 도달하기 직전, 그는 미리 명령을 내려, 아편 밀수꾼 60여명을 체포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아마도 광저우에서는 아편에 대한 일이 공공연한 비밀이라, 관련자들의 명단이 있어 체포의 의지만 있다면 바로 잡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여하간에, 도착하기전부터 60여명을 잡은 임칙서는 광저우에 도착하고나서 9일이 지나자, 공행에 두 개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공행의 대표는 여전히 오소영이었습니다.
당시 60여명을 잡아넣은 일때문에 임칙서에 대한 두려움의 분위기가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공행에 임칙서의 편지가 도착한 것입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편지를 열어본 오소영은 경악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인들에게서 "앞으로는 영원히 아편을 들여오지 않으며, 만약 들여온 사람은 사형을 당하고 화물은 모조리 몰수된다." 라는 서약서를 한문과 외국어로 한 통씩 받아내어라. 이번에 서약서를 받아 내지 못한다면, 너희들이 평소 간사한 오랑캐와 결탁하여 사사로운 욕심을 가져, 바깥으로 눈을 돌렸음을 묻지 않고도 알 수 있다. 본 대신은 즉시 왕명을 받들어 너희들을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할 것이다."
사실상 아편 무역을 종결시키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다른 편지는, 공행이 아니라 외국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였지만, 외국인과 직접적으로 접촉하지 않는것이 청조의 관례라 공행에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우리 황제께서 모든 사람을 하나로 보아, 평등하게 사랑하시어 너희들에게 무역을 허락하고, 너희들은 그것으로 이익을 얻고 있다. 너희들은 은혜를 알고 법을 두려워해야 마땅하다. 제 잇속을 차리기 위해 남을 해하여서는 안된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너희들 나라에서조차 피우지 않는 아편을 우리나라로 들여와, 사람의 재물을 빼앗고, 사람의 목숨을 해치는가? 너희들이 이것으로 중화의 백성을 현혹한 지 이미 수십 년에 이른다. 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얻은 재물을 해하릴 수가 없다. 백성이 하나같이 분개하고 있으며, 하늘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아편무역의 비인도성을 질책하는 말입니다. 동시에 임칙서는 황제 자신의 결단으로 아편을 피우는 사람, 피우는 장소를 제공하는 사람, 아편을 파는 사람을 모두 죽일 것이며, 보유하고 있는 아편은 모두 관에 제출하고, 아편 무역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작성하라고 촉구했습니다.
임칙서가 내건 기한은 3월 21일까지 였습니다. 영국 측은 어물거리다가, 기한을 넘겨 3월 22일에 아편 1037상자를 공출 하겠다고 했습니다. 아마 이것은 요식행위이고, 아편의 일부를 가져다 바치면 적당히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임칙서는 이미 영국 배에 아편이 2만 상자가 넘게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인들의 제안은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눈 가리고 아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영국인들은 서약서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제시한 기한이 지난 상황에서, 영국이 이런 식으로 나오자 임칙서는 아편상인 덴트 상회의 주인 덴트를 체포하라는 영장을 발부했습니다. 체포의 형식은 '초대' 였는데, 영국 측은 이런 분위기에서의 '초대' 가 그다지 긍정적인 의미가 아님을 알고 거절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영국은 청나라 영토 안에서 청나라 법률을 따르지 않게 된 것입니다.
찰스 엘리엇(Charles Elliot)
당시 영국의 무역 감독관이었던 찰스 엘리엇은 38세의 해군 대령이었고, 그 역시 네이피어 못지 않은 강경주의자였습니다. 일단 감독관인 그에게는 거류민을 보호할 책임도 있어서, 덴트를 잡아간다는 이야기를 듣자, 공행에 자신의 의사를 전했습니다.
"나는 덴트 씨를 성 안으로 보내는 데 동의한다. 다만, 영국 무역 감독관인 나도 동행할 것, 또한 흠차대신(임칙서)이 날인한 명백한 문서에 의해, 두 사람이 잠시도 격리당하는 일이 없다는 보장이 있어야 한다."
엘리엇의 주장에는 사실 교묘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일단 덴트를 보호하는 일은 둘째치고, 만약 이 주장대로 된다면 그는 영국 관리로서 최초로, 광저우성 안으로 들어가 청국의 관헌가 직접 접촉할 기회가 생기게 됩니다. 네이피어가 그렇게 난리를 치고도 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임칙서는 이미 그들이 기한을 넘겼기 때문에, 모든 외국인을 추방하라고 공행에 편지를 다시 전했습니다. 다시 외국인은 청나라 영내에서 부동산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13행가라는 곳에서 주인이 중국인인 사무실 등에 묶고 있었습니다. 그 중국인들은 대부분 공행이었으므로, 공행 더러 집에서 영국인들을 내쫒으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엇이 순순히 나가주진 않았습니다.
그러자, 임칙서는 자신이 공연한 위협만 하는게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병사 1천여명을 동원하여 13행가를 포위했습니다. 당시 그곳에서는 모두 275명의 영국인이 있었습니다. 엘리엇이 '농성' 할 태세를 보이는 사이, 임칙서는 그들이 머무는 건물에 자신의 주장을 적었습니다.
"첫째, 천리(天理)를 논해 보자."
"집을 떠나 와 수만리, 그 사이는 망망한 대해다. 거기에는 무서운 번개와 사나운 바람에 의한 재앙이 있는가 하면, 상어와 고래에 의한 횡액도 있다. 천벌은 무서워해야 함이 마땅하다. 우리 대황제의 위엄은 하늘과 같으며, 지금 그 뜻이 아편을 근절하고자 한다. 즉, 하늘의 뜻이 아편을 근절하려는 것이다. 하늘이 꺼리는 바, 누가 감히 이를 거역할 수 있겠는가? 일찍이 영국의 대반 로버트가 마카오를 점령하려다(1809년) 마카오에서 죽었다. 도광 14년(1834년)에는 네이피어가 호문을 넘었으나, 귀국해 근심 속에서 죽었다. 그때 암약한 모리슨도 같은 해 죽었다. 아편 상인 매니액은 자살했다. 천조의 뜻을 어김은 이와 같이 무서운 법이다."
"둘째, 국법으로 논해보자."
"우리 대황제는 아편을 몹시 증오하여, 이를 근절하고자 하신다. 앞으로 내국 백성으로서 아편을 판매하는 자뿐만 아니라 흡음하는 자까지 사형에 처해진다. 대청률례에는 외국인이 죄를 범하면 율령에 따라 단죄한다, 라고 되어 있다. 아편을 팔아 재물을 모으고 남의 목숨을 해친다면, 그 폐해는 한 사람, 한 집안에 그치지 안흔ㄴ다. 이 죄, 죽어야 마땅한지 그렇지 않은지 깊이 생각해 보라."
"셋째, 인정으로 논해 보자."
"너희들은 광도에 와서 통상을 하고 그 이익은 세 배에 이른다. 아편을 팔지 않아도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아편 때문에 무역이 정지된다면, 너희들은 생계를 꾸릴 방도가 사라진다. 너희들 나라에서는 찻잎, 대황은 물론이요, 명주, 백당, 빙당, 계피, 은주, 백반, 장뇌 같은 것이 없어도 살 수 있는가? 반대로 중원은 물산이 풍부하여 외국의 화물을 구태여 구하지 않는다."
"넷째, 일의 추세로 논해 보자."
"너희들은 멀리 대양을 건너 이곳에 와서 무역을 경영하므로, 주민과 화목을 도모하고 분수에 맞게 몸을 지키고 해를 주지 않고 이익을 얻어야 한다. 그런데 너희들이 아편을 팔기 때문에, 백성들 사이에서 불평의 소리가 높다. 백성의 분노 거역하기 어려우니 깊이 우려할 일이다. 해외에 나와 사람이 기댈 곳은 오직 신의뿐이지 않는가. 현재 우리 관리들이 너희들에게 신의를 보이고 있는데도 너희들은 조금도 신의가 없다. 팔지 말아야 할 것을 팔지 못하게 하는 것이므로, 조금도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아편은 너희들 나라에서는 흡음하지 않으므로, 싣고 돌아가지도 못할 것이다. 만약 공출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두어다 어디에 쓸 것인가? 공출하면 그 뒤에 무역은 더욱 활발해질 것이다. 거리낌 없이 권하건대, 화와 복, 영과 욕, 그 어느쪽을 취할지 스스로 선택하라."
'팔지 말아야 할 것을 팔지 못하게 하는 것' 이므로, 조금도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편이 독극물이라는 사실은 이미 충분히 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편을 팔러 온 자들입니다. 이런 식의 논리가 먹힐 대상들은 애시당초 아니었습니다.
엘리엇은 꼬박 이틀을 버텼지만, 48시간이 지나자 결국 굴복했습니다. 논리에 굴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물과 식량이 떨어졌고, 275명이 굶어죽게 만들 권리가 엘리엇에게는 없었습니다. 엘리엇은 울며 겨자먹기로 20284상자의 아편을 임칙서에게 모두 보냈습니다.
임칙서는 이 막대한 아편을 한 곳에 모았습니다. 호문의 광장에 튼튼한 목책을 둘러치고, 옻칠을 한 뚜껑을 덮어서 임시 창고를 만들어 그 안에 보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변을 12명의 문관, 장교 10명, 병졸 100명으로 24시간 감시했습니다.
처음에는 이것을 베이징으로 보내 일의 성과를 알릴 계획이었지만, 생각을 해보니 그대로 쌓으면 100미터도 넘을 이 아편들을 머나먼 베이징까지 보내는것은 공연히 힘만 낭비하는 일로 생각되었습니다. 임칙서는 '다 처분하라'는 베이징의 지시를 받고, 1425톤의 양에 달하는 대량의 아편을 처분할 방법을 궁리했습니다.
이 악마를 먼저 기름을 넣어 태워보았는데, 타고 남은 찌꺼기를 조사해보자 2할에서 3할 가량의 아편이 다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임칙서는 아편의 성분을 여러가지로 조사했는데, 실험 결과 아편은 소금과 석회에 약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임칙서는 해변가 높은 곳에 연못 두 개를 파게 했습니다. 사방 약 50여미터의 인공 연못이 만들어지자, 다시 아편이 스며드는 것을 막기 위해 사면에는 판자를 대고, 바닥에는 돌을 깔았습니다. 그 후, 바다에 면한 곳에 수문을 만들고, 반대쪽을 물을 끌어들이는 도랑을 팠습니다.
그리고 6월 3일부터 6월 25일까지, 단 하루를 제외하고는 매일매일 아편 처분을 실시했습니다. 바다에 면한 수문을 닫고, 반대쪽에 있는 도랑으로 물을 인공 연못으로 끌어들여, 거기에 대량의 소금을 투입하고, 상자에서 꺼낸 아편을 네 덩이로 잘라 계속 연못에 던져대는 것입니다. 이렇게 반나절 가량 아편을 투입하고 난뒤, 대량의 석회를 투입했고, 화학 변화가 일어나 연기를 내며 끓어오르는것처럼 되었습니다. 이를 썰물에 맞추어 바다로 흘려 보내는 겁니다. 일이 끝나고 나면 판자와 바닥을 깨끗이 닦아 아편 찌꺼기 하나 남지 않도록 했습니다.
영국인들은 돈이 바다로 흘러가는 광경으로 여겨졌는지 이를 보러 나오지는 않았고, 다만 미국인 C. W. 킹이라는 인물만이 그 모습을 구경하러 나왔습니다.
아편은 이미 예전부터 금지된 품목이었습니다. 다만 공공연하게 거래되고 있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영국은 금지된 물건을 불법으로 중국에 팔았고, 중국에서는 그 불법적인 제품을 몰수하여 정당하게 처분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대로 압수해도 문제는 없었겠지만, 임칙서는 아편 한 상자에 찻잎 5근 씩을 보내주었습니다.
하지만, 찰스 엘리엇은 "영국인의 재산" 이 "부당하게 몰수" 되었다고 여기면서, 길길히 날뛰었습니다. 그는 영국인 상인들이 모두 퇴거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일종의 항의 표시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광저우에는 영국말고 미국의 상인들도 있었습니다. 엘리엇은 그들에게 협조하여 같이 퇴거하자고 권했지만, 미국 상인들의 대표자였던 올리펀트라는 인물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올리펀트는 아편같은 비인도적인 제품을 취급한 적이 없었기에 "쫄릴" 것이 없었고, 그가 보기에 영국기 겪고 있는 문제는, 불법 독극물을 함부로 취급하다 영국이 손해를 입는것은 순전히 자업자득이었습니다. 아편이라는 "마약" 몰수에 "항의" 하는 엉터리같은 일에, 동조를 맞춰줄 이유 따윈 없는 것입니다.
영국 상인들은 모두 배를 타고 바다로 떠났습니다. 설사 모든 외국인이 떠나더라도 청나라는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겠지만, 아편을 팔지 않던 미국인들은 모두 멀쩡히 광저우에 남아서 찻잎, 비단, 도자기 등 아편 이외의 물품을 정상적으로 거래하면서 아무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또, 임칙서가 말했던 "아편을 취급하지 않겠다는 서약서" 에 대해서, 영국인들은 엘리엇의 지시로 아무도 서명하지 못했지만, 미국인들은 모두 서명하여 아무런 문제 없이 장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엘리엇의 요구에 따르는 다른 영국 상인들만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마침 영국 배는 바다에서 체류하던 중, 페리의 구룡 방면의 어촌에 잠시 내렸는데, 밑도 끝도 없이 현지의 마을 사람들과 싸움을 벌였다가 중국인 한명을 때려죽였습니다. 당시 살인을 저지른 영국인은 완전히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청나라는 즉시 엘리엇에게 살인자의 인도를 요구했습니다. 집단 난투 사건이었던 만큼, 목격자도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엇은 '범인이 확실치 한다.'는 헛소리를 하며 잡아떼었고, 다음과 같은 통고를 보냈습니다.
"첨사취 주민이 한 사람 살해된 사건에 관련해, 나는 본국 왕의 명령에 따라, 죄를 범한 자의 인도가 허락되지 않고 있다. 본국 법률에 따라 철저하게 조사하고, 공정하게 심판하여, 만일 진범이 판명된다면 사형에 처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삼가 진실을 말하건대, 이 사건의 진범은 찾아낼 수 없었다."
엘리엇은 청나라 관리들이 영국 법 따위는 모를 것이라고 생각해서, 외국에서 자국인이 범죄를 저질렀을 떄, 범인은 인도하지 않는다고 제멋대로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엘리엇은 임칙서를 너무 우습게 여겼습니다.
일반적인 청나라 관료라면, 물론 영국의 법 따위에 대해 알 수 있을리가 만무합니다. 하지만, 임칙서는 엘리엇이 상상 할 수 있는 이상으로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중국 밖 해외 연구에 열의를 보였고, 그 지방에서 발행된 영여 신문인 '차이니즈 리포지토리' 를 번역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외국 여러 문헌과 국제법까지 요점을 추려 번역하였습니다. 임칙서의 이러한 자료가 같은 선남시사 동호원인 위원에게 전해졌고, 이 이원은 해국도지를 작성했으며, 해국도지는 막부 말기 일본의 지식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일본의 근대화에도 임칙서가 일정부분 기여한 것입니다.
임칙서는 이미 국제법의 아버지로까지 불리던 스위스 법률학자, 에머리히테 바텔(Emerich de Vattel)의 저서 국제법(Law of Nation)을 입수했고, 이를 미국인 선교사에게 부탁하여 번역 하게 해서, 국제법의 대략적인 추세를 모조리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임칙서는 자신의 지식을 바탕으로 엘리엇에게 반론했습니다.
"영국에서는 어떤 나라로 무역을 하러 가면, 그 나라 법률에 따라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을 터이다. 왕이 이번 사건의 범인 인도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하나, 영국 여왕은 수만 리 밖에 있다. 사건이 발생 한지 아직 한달도 지나지 않았다. 엘리엇은 어떻게 이 사건에 관해 여왕에게 보고하고, 또 명령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불충한 범죄자를 비호하면서, 그 책임을 여왕에게 돌리고 있으니, 불충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다."
"그런 그가, '만약 진범이 밝혀지면 사형에 처하겠다.' 라고 해도 누가 믿을 것인가? '이 사건의 진범은 찾아내지 못했다.' 라는 말은 사람을 기만하는 말이다. 엘리엇은 사건이 있고서 두 번이나 스스로 첨사취에 가서 조사를 하였다. 만약 진범을 찾아내지 못했다면, 그는 멍청이가 아닌가?"
"사실은 범인을 알고, 그를 몰래 배 안에 숨겨 놓고 있는 것이다. 만일 범인을 인도하지 않으면, 죄인을 은닉했다는 이유로 엘리엇에게도 같은 죄를 물어, 본 대신과 본 총독은 법을 집행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말이 폐부를 찌르는 말이었고, 핵심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청나라의 관리들이 모두 임칙서와 같았다면 청의 쇠퇴는 훨씬 늦어졌을 것입니다. 당시 광저우에 머물던 영국인은 대부분 마카오로 이동했는데, 임칙서는 마카오에 머무는 영국인에게 식료품 공급을 중단시켰습니다.
마카오는 사실 소재가 상당히 불분명한 곳으로, 포르투갈 인들이 관리하고 있었지만, 정식으로 '할양' 받은 땅이 아니라, 명나라 시대부터 포르투갈이 적당히 중국에 재물을 바치고 중국 쪽에서 눈 감아주는 형태에 가까웠습니다. 따라서, 공식적으로는 중국의 영토이므로, 임칙서가 저러한 요구를 하면 포르투갈은 영국인들을 보호 해줄 수 없었습니다. 포르투갈 총독은 8월 24일, 앨리엇에게 다음과 같은 통고를 했습니다.
"이제는 여러분들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
나가라는 말이었습니다. 결국 마카오에 머물던 영국인들은 여자와 아이까지 모두 떠나게 되었고, 총 50여 가구에 달했습니다. 여기에 엘리엇은 해상을 순찰중인 청나라 병선에 투덜거리는 불평을 제기했습니다.
"여기에 수천 명의 영국 국민에 대한 식량의 정상적인 공급이 차단되었다. 만일 이 상태가 앞으로 계속된다면, 앞으로 분쟁이 자주 발생하리라는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 경우, 귀간은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한다. 이것은 평화와 정의의 말이다."
임칙서 역시 대꾸했습니다.
"오랫동안 배에 머무르며 굶주리고 있는 것은, 그 쪽이 멋대로 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청나라는 영국 배의 광저우 입항을 금지시킨 적이 한번도 없다."
임칙서가 금지시킨것은 지극히 비인도적이고, 또한 불법 제품인 아편의 매매를 금지시킨 것일 뿐입니다. 아편이 불법 제품인 만큼, 이를 압수하고 단속하는 일 자체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그런 불법 제품을 매매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외국 상인은 광저우에서 장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당장 미국만 해도, 아편을 취급하지 않기에 아무런 문제없이 광저우에서 상인들이 거주했습니다. 청나라는 영국이 광저우에서 떠나라고 한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다만 마약을 팔아 먹던 엘리엇이 스스로 화가 나서 나갔을 뿐입니다.
또한, 임칙서는 현재 중국인과 영국인이 거래를 하는 일에 대해, 서약서를 쓰기 전까지는 금지하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해상에서 굶주리고 있는 영국인들에게 중국인 어선들이 식량을 팔고 있었고, 청나라 군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모른채 했습니다. 이는 임칙서의 묵인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엘리엇은 '평와와 정의의 말' 을 언급했지만, 임칙서 쪽이 훨씬 인도적이었습니다.
게다가, 엘리엇의 배가 해상에서 정처없이 둥둥 떠있을 무렵, 폼페이에서 온 영국 배 한 척이 10월 11일 마카오 부근에 등장했습니다. 이 배는 상선 토머스 카우츠호였고, 정기적으로 면화를 취급하던, 아편과는 관련이 없던 성실한 무역선이었습니다. 당연히 토머스 카우츠호는 아편을 취급하지 않는다는 서약서에 사인을 했고, 아무런 문제없이 장사를 했습니다. 그 뒤를 따라, 자바에서 쌀을 가지고 온 영국 배 로열 색슨호도 나타나서 서약서를 사인하여 광저우에 입항하려 했습니다.
여기서 영국이 취한 태도는 믿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엘리엇은 로열 색슨호를 추격하여, 자국 군함 두 척으로 이를 위협하여 돌아가게 했습니다. 아편을 취급하지 않고 정직하게 무역을 하려는 국내의 상선을, 이를 보호해야 할 영국 군함이 협박하여 쫒아낸 것입니다. 정신나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엘리엇은 이렇게 되자, 최후의 수단까지 쓰기로 했습니다. 그는 우선 영국인이 육지에서 안전하게 머무려면, 청나라가 적대 행위를 멈추어야 한다는 의견을 전했습니다. 청나라 입장에선, "서약서에 사인만 하면 되지 않는가." 하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엇은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성의 있는 답변을 받지 못했다."
이를 구실로, 영국의 군함들이 불을 뿜었습니다. 청나라의 병선은 29척이 출동했지만, '전투'가 끝난 후, 29척 중에 고작 3척만이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영국 군함은 포탄이 바닥나자 물러났지만, 임칙서는 일단 이것을 '승리' 라고 도광제에게 보고했습니다. 도광제는 임칙서가 마음대로 일을 벌여도 좋으며, 다만 움츠리지만 말라고 격려했습니다. 이제 서약서도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먼저 포문을 연것은 영국이었고, 여기에 대해 모든 영국 배를 국외로 쫒아내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여기에 대해 임칙서는, 어디까지나 아편을 금지하면 되는 일이고, 건전한 무역 자체를 금할 필요는 없다고 자신의 의견을 전했습니다. 심지어 임칙서는 서약서에 사인을 한 다른 나라 상인들의 경우에는, 오히려 청에서 우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임칙서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측근들에게 영자지와 외국의 지리지를 번역하게 했으며, 완전한 쇄국은 세계의 조류를 역행하는 행위이므로, 영국 배 케임브리지 호를 하나 구입하여, 이를 연습선 삼아 해군의 근대화를 꿰하는 움직임까지 보였습니다. 만약 임칙서가 50년을 늦게 태어났다고 해도, 그는 중국에서 가장 근대적인 인물임에 분명했을 것입니다.
또한, 1839년 케임브리지대학 신학교수인 텔웰이라는 인물이 '대중국 아편무역 죄악론'이라는 저서를 집필하였고, 여기에서 아편 무역이 영국 국기를 더럽히는 것이라고 단언했습니다. 임칙서는 광저우에서 이 논문을 재빨리 입수하여, 번역을 하게 의뢰했습니다.
놀랍게도 임칙서는 해상에서 조난당한 영국인들도 매우 인도적으로 구조하여 보호했고, 아편 무역에 관여하지만 않았으면 다른 배가 와서 그 신병을 인수하러 갈 수 있게 조치했습니다. 하지만, 엘리엇은 런던에 '이런 대화가 통하지 않는 무리들에게는 강경책이 가장 좋은 해결책' 이라는 요지의 내용을 계속 전달했고, 같은 시기 런던에서도 강경론이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엘리엇의 보고 뿐만 아니라, 광저우에서 아편을 팔아먹던 상인들도 런던에 와서 청나라를 응징해야 한다는 정치적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임칙서의 활약으로 아편이 근절되면, 더이상 짭짤한 아편 장사는 해먹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외무부 장관이 된 파머스턴에게 압력을 주었는데, 파머스턴 역시 확장론자라 강경책에 솔깃 하였습니다.
1840년 2월, 자유당 내각은 마침내 청나라 원정을 결의했습니다. 다만, 의회에서 전쟁 비용 지출이 승인되어야만이 파병이 가능했고, 4월에 의회가 열려 이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제국주의적 감상이 의회를 휩쓸었고, 의원들 자체도 제국주의적 인물들이 태반이었습니다. 왕년의 전쟁 영웅, 아서 웰링턴은 이렇게 발언했습니다.
"50년 공직 생활에서 영국 국기가 광동에서 당한 것과 같은 모욕을 본 일이 없습니다."
또한, 토머스 배빙턴 매콜리(Thomas Babington Macaulay)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엘리엇은 포위된 상관 발코니에 드높게 영국 국기를 게양하라고 명령했다……그 국기를 보면, 죽음에 임박한 사람들의 마음도 굳게 되살아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에게 패배도, 항복도, 굴욕도 모르는 나라에 자신들이 속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플라시의 들판(1757년)에서 블랙홀 희생자(1756년 6월)의 원수를 값은 나라다. 위대한 섭정이 영국인의 이름을 일찍이 로마 시민이 그러했던 것 이상으로 존경받게 하겠다고 맹세한 이래, 퇴보를 모르는 나라다. 적에게 둘러싸여 대양과 대륙에 의해 모든 구원의 손길이 격리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머리카락 한 올 이라도 위협하는 자는 처벌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저기서 말하는, 영국 국기를 발코니에 드높게 게양한 일은, 임칙서가 마약인 아편을 내놓으라고 하자 엘리엇이 버티면서 이를 내놓지 않던 일을 말합니다.
바햐으로 세계제국이 마약을 팔아먹기 위한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 양심을 버리지 않는 드문 몇명 중에 일부인 윌리엄 글래드스턴은 아직 젊었지만, 이러한 주장에 대해 반대의 의견을 내었습니다.
윌리엄 글래드스톤(William Ewart Gladstone)
"……그 원인이 이다지도 부정한 전쟁, 이다지도 영속적인 불명예가 될 전쟁을 나는 지금껏 알지 못했고, 읽은 적도 없습니다. 지금 나와 의견을 달리하는 신사는 광저우에서 영광에 가득 차 휘날렸던 영국 국기를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그 국기야말로, 악명 높은 금제품의 밀수를 보호하기 위해 펼쳐진 것입니다. 현재 중국 연안에 게양되어 있는 것처럼만 그 깃발이 휘날린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그것을 보기만 해도 공포를 느끼고 전율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목적이 인도적인 차원에서건, 백인 우월주의로서 '야만적인' 중국인들에게 아편을 팔아먹는 일에 대한 부끄러움에서건, 어찌되었건 간에 자신들의 양심을 완전히 버리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연설은 크게 작용하여, 당초의 압도적인 전쟁 분위기와는 달리 찬반 투표 결과는 271대 262, 9표 차이로 전쟁을 치룰 것이 결의되었습니다. 영국의 양심이 262표였습니다.
패배도, 항복도, 굴욕도 모르는 위대한 나라의 군대가 마약을 팔아먹기 위한 전쟁에 동원되기 위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인도 총독인 오클랜드는 실론에 주둔중인 아일랜드 제 18연대, 켈커타에 주둔 중인 카메로니언즈, 보병 제 26연대, 벵골 공병 2개 중대, 의용병 몇몇 중대, 마드라스 포병 2개 중대 등 4천여 병력의 동원령을 내렸습니다. 군대의 사령관은 엘리엇의 사촌형이었던 조지 엘리엇이 임명되었습니다.
마침내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 임칙서는 런던의 빅토리아 여왕에게 직접 서한을 작성해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 서한이 도착했을때는 이미 의회에서 전쟁이 결의된 후였고, 설사 그 전이라고 해도 전쟁 결의에 대한 영향은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만, 그들의 양심에 타격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폐하의 상인들은 폐하의 나라에서는 불법인 독극물인 아편을 우리나라에 들여와 막대한 이익을 취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이를 허락하셨을 리 없다고 보며, 만약에 허락하셨다면 군주로서 취하실 행동이 아니라 봅니다. (…) 우리는 귀국과의 정상적인 무역을 그만둘 뜻이 전혀 없으며, 아편만 취급하지 않는다면 두 나라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입니다”
첫댓글 어휴 임칙서... 몰랐는데 정말 걸물이었군요.
미국의 저런 태도는 훗날 중국인들에게 긍정적으로 각인시키죠. 서구 열강들이 노골적으로 중국의 이권을 탐 낼 때조차도 미국의 경우 한발 물러서 있었죠.
청나라 망하는거 까지 연재하시나요??
흐음 일각에서는 임칙서를 국제정세를 몰랐던 단순한 원칙주의자라고 보기도 하는데, 이런 일화들을 보면 절대 그런 인물은 아니었군요;;
미국인들이 아편무역에 전혀 관여치 않은 건 아닙니다. 전체 아편교역의 10%는 미국상인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미국 아편상들은 오히려 영국 아편상보다 훨씬 적극적이었습니다. 임칙서가 영국의 아편을 모두 폐기하고 나서 아편의 품귀현상으로 아편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미국 상인들은 그틈을 타서 아편을 비싸게 팔아 큰 이익을 남겼습니다. 1858년에 미국 정부가 중국으로 아편을 수출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미국 상인들은 그 법안을 무시하고 계속 아편을 중국에 수출했습니다. 결국 중국산 아편의 가격이 수입산보다 저렴해지고 품질도 동등해지면서 수입 아편에 대한 수요가 없어진뒤에야 중단됐죠.
본문 중 아편에 대한 미국 상인의 취급에 대한 부분은,
'미국 총영사 피노 스노의 보고에 따르면, 미국인이 실질적으로 보유한 아편은 하나도 없었고, 영국인을 위해 대리판매 하고 있던 것이 1천 500여 상자 있었으나, 모두 앨리엇에게 반납했다고 한다.'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살림'pp86
'앨리엇은 미국 상인들의 대표자인 올리펀트에게 광주 퇴거에 공동 보조를 취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올리펀트는 이를 거절했다. 올리펀트 상회는 아편 한 조각도 취급한 적이 없어서, '성인'의 가게' 라고 불릴 정도였다.'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살림'pp89
을 보고 작성한 부분입니다.
1차 자료는 제 능력 밖의 일로 확인 하긴 힘들고, 지적하신 부분에 대해, 저는 분명한 사실을 파악하기 힘들고, 일단 의문이 갈 부분의 해당 내용 출처는 진순신의 저작을 보고 작성한 내용임을 확인드립니다. 정확한 사실은 다른 분이……
임칙서가 생각보다 인물이군요. 국제법의 추세도 파악하고 있엇다니.. 오..
임칙서 그냥 애국자인줄 알았더니.. 세상에 진짜 50년만 늦게 태어났어도 중국은 지금과는 또다른 나라였겠네요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