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st of Youth - 두 번째 이야기
"비정상의 정상성과 그 역, 그리고"
학생들이 기말시험을 한창인 시간, 나는 아침에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건너다 강물에 반사되며 눈부시던 햇살을 마주보며 곰곰 생각하던 이 영화에 대한 몇가지 단상을 끄적거리고 있었다. 조지아, 마태오, 줄리아, 그리고 니콜라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정상(성)과 비정상(성) 그리고 그 사이에 작동하는 폭력이었다.
우선, '정상(성)'이 가하는 '비정상적 폭력'에 대한 비판. 이는 당대 정신병 치료 시스템이 정신병원이라는 장치를 통해 환자들에게 치료라는 명목으로 가하던 다양한 폭력을 보여주면서 제시된다. 정신병에 대한 규정과 그에 대한 서로 다른 치료방식의 대조는 니콜라를 중심으로 한 영화 전체스토리 전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환자를 사회에서 소외 혹은 격리해야 할 비정상적 주체로 규정하고 그들에 대한 비인간적이며 폭력적인 치료방법의 적용을 당연하게 여기는 기존의 치료방식은 의학적 치료라는 명목으로 전기충격, 감금, 구타 등의 비인간적 폭력을 당연한 듯 수행한다. 이런 입장에 반대하는 니콜라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주체들은 치료의 대상이 아니라 또다른 정신 세계를 소유한 주체로 인정하며 그들의 정신이 자유롭게 활동하는 가운데 치유나 치료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극도의 비인간적 폭력 행위가 치료라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병원들을 조사하고 시정, 폐쇄하거나 법원에 고소하는 일까지도 직접 수행하는 니콜라를 따라가며 영화는 정신병원에서 행해지는 폭력적 장면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영화 전반부에서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있는 조지아는 폭력적 기존 치료방식의 대표적 피해자였지만 니콜라가 되찾은 후반부에 이르면 그녀는 니콜라의 방식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는 주체로 변화해 가며 소위 '정상적' 삶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정신병 치료에 대한 이와 같은 대조적인 태도는 사회에서 소위 '정상적'이라고 범주화된 행동이나 체계가 '비정상적'이라 규정하는 그것들에 대한 극도의 '비정상적인' 폭력을 얼마나 정당화하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다음은 폭력에 대응하는 폭력의 비정상성. 영화는 마태오와 줄리아를 통해 또다른 폭력의 비정상성을 보여준다. 마태오가 경찰이 되어 국가권력의 폭력성을 대표하는 모습으로 변화하는 데는 아이러닉하게도 그 반대편의 폭력이 작동한 결과이다. 마태오 일행이 시위 현장 진압에 투입되었다가 시위군중사이에 고립되었을 때 일단의 시위대가 가한 무차별적 폭력으로 인해 그의 동료는 하반신 마비상태에 빠지고 이는 마태오가 과격한 경찰이 되는 결정적 동기로 작용한다.
폭력적 체제에 저항하는 주체들의 과도한 폭력성의 분출은 줄리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학생운동에서 노동운동으로 그리고 과격한 사회주의 운동가로 변신하던 줄리아는 마침내 암살과 폭력, 폭파 임무까지 수행하는 정도에 이르게 된다. 물론 이 시도는 직전 단계에 노출되어 성사되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그 폭력의 준비 과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묻는다. 비정상의 폭력에 대해 저항하는 마찬가지의 비정상적 폭력이 정상인가 혹은 정당한가?
그렇다면 이러한 양측의 비정상적 폭력에 대한 영화 혹은 감독의 입장은 무엇인가? 영화는 둘 어느쪽의 손도 들어주지 않는 대신 그러한 폭력을 비판하는 '비판적 관찰자'의 시점과 폭력의 희생자들을 보듬어안는 '치유자의 입장'을 택하는 것 같다. 관찰자의 시점은 마태오의 연인 밀레나가, 치유자의 입장은 영화의 주인공 니콜라가 대변한다.
밀레나의 카메라가 포착한 마태오의 인상적인 모습, 그리고 현재적 시점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저항의 순간순간들에 대한 그녀의 현장 기록은 그러한 순간을 우리가 놓치거나 잊어서는 안 된다는 감독의 메시지이며, 자유로운 치유방식을 통해 환자들 속에서 그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사회적 공간 속에서 활동 가능한 주체로 인정하는 니콜라는 치유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밀레나와 니콜라가 결합하는 것은 그러므로 상징적이다. 비판적 저항의 시각을 견지한 치유자. 어느쪽이건 과도한 비정상의 폭력이 답이 될 수 없기에 영화는, 감독은 그 절충점을 이렇게 제시하는 것 같다. 비이성적인 국가나 체제의 폭력에 반대하지만 그 반대쪽의 과격한 폭력에도 동의하지 않는 이 영화는, 그리고 감독은 그러므로 무난한 온건주의 혹은 점진적 개량주의의 입장을 취하는 듯 하다. 그 세계는 정상이건 비정상이건 과도하지 않은 지극히 이성적 세계 속에서 대체로 평안하고 안전하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보여주는 해피
엔드의 세계, 영화도 감독도 그런 세계를 지향한다. 그런 세계를 원치 않는 주체가 어디 그리 많겠는가. 그러나 또 그런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가. 보라. 지금 여기, 2016년 대한민국을. 비정상이 정상인 것 같은 이 과도한 부조리의 세계를.
그리고--니콜라와 마태오 두 형제는 한 동일한 주체의 분신(alter ego)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길은 한 주체로서 우리가 동시에 걸을 수 없는 "가지 않는 길"을 걸어간 주체들이며, 영원히 함께 혹은 동시에 갈 수 없는 다른 길을 향한 갈등과 욕망을 품은 한 동일한 주체의 두 자아이다. 마지막에 딱 한 번 등장하는 환상적인 장면에서 새벽 산책을 나선 밀레나와 니콜라의 맞은편에서 걸어와 두 사람 사이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한참을 나란히 걸어가는 마태오. 서로에 대한 사랑을 품고 있으면서도 마태오라는 존재로 인해 마음을 열지 못하고 망설이는 밀레나와 니콜라 두 사람을 이어주는듯 그들 사이에서 한참을 어깨동무를 하고 걷던 마태오는 이윽고 걸음을 멈추고 나란히 걸어가는 두 사람을 아련한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며 서있다. 그 뒤로는 마태오의 길이, 니콜라와 밀레나의 앞에는 그들이 함께 걸어갈 길이 끝없이 뻗어있다. 밀레나에게 시동생이자 남편, 마태오의 아들에게는 삼촌이자 아버지가 된 니콜라, 결국 그는 마태오이기도 했던 것이다. 우리가 젊은 시절 한때 가보지 못한 곳에 두고 온 나의 분신이 어딘가 길 위에 서 있듯 마태오는 니콜라의 마음 속에 그렇게 서있을 것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173F35058537BC414)
![](https://t1.daumcdn.net/cfile/cafe/26756E4958537BC117)
![](https://t1.daumcdn.net/cfile/cafe/2601784A58537BC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