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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제무기와 청동기와의 만남은 가나안땅에서만이 아니라 이집트와 히타이트간의 전쟁에서도 볼수있다.그러한 전쟁중 하나인 카데시전투는 이집트의 상대가 철기임이 분명하지만 유일하게 엄청난 희생을 내면서 승리를 거둔 전쟁이다.
그러면 그 이야기속으로 가보겠다.
히타이트의 땅은 소아시아 연안지방에는 해상민족이 빈번히 침입하였기 때문에 번속국(藩屬國)과 조약을 갱신하여 적침에 대비하는일이 있었다. 이 동안 이집트 왕 세티 1세는 히타이트군을 격파하고 시리아로 북상(北上)하여, 히타이트와 맞닥드리게 된것이었다.
히타이트나 이집트나 그당시 경쟁적으로 적수가 돼는 나라가 없었고 서로 빠른속도로 정복사업을 했기때문에 서로간의 대립은 불가피했을지도 모른다. 서로간의 대립의 결정판이 유명한 카데시 전투인것이다. 당시 두나라는 엄청난 양의 물량을 쏟아부어가면서 전쟁을 했다.
기록을 보면 이집트의 경우 전차병을 포함하여 2만 명의 장병을 동원했고 히타이트도 3만 5천 명이나 동원했다. 람세스 2세는 직접 5천 명의 장병으로 구성된 아몬 사단을 지휘하였고 역시 각각 5천 명으로 구성된 라, 프타, 세트로 이름지은 세 개의 사단이 뒤따르도록 했다. 각 사단은 250명으로 구성된 20개의 중대로 나뉘어져 있었다고 기록에서는 알려준다.
람세스 2세는 카데시 남쪽에 있는 산악 지대에서 멈추었다가 북쪽에 있는 샤브투나라는 도시로 진행했다. 그 도시의 남쪽에는 오론테스 강을 건널 수 있는 여울목이 있었다. 이때 두 명의 베두인이 람세스에게 다가와서 투항했다. 그들은 히타이트 군대가 북쪽의 아주 멀리 있는 알레포 부근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람세스 2세의 아몬 사단은 카데시를 통과한 상태였고 나머지 세 개의 사단은 매우 뒤 처져 있었지만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투항한 베두인의 정보로 보아 적은 매우 멀리 있었으므로 람세스 2세는 곧바로 전투 태세를 갖추지 않고 진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베두인은 무왓탈리시가 보낸 첩자였다. 히타이트 군대는 실제로 람세스 2세와 지척인 카데시 북동쪽 성채 안에 집결해 있었다. 그들은 우선 람세스 2세와 후발(後發) 사단을 분리시킬 계획으로 2,500대라는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전차병을 투입하여 아몬 사단을 뒤따르던 라 사단을 급습하였다.
레 사단이 히타이트 군의 공격으로 궤멸되자 무왓탈리시는 곧바로 람세스 2세가 지휘하는 아몬 사단을 공격했다. 이 급작스러운 공격으로 람세스 2세의 아몬 사단 역시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람세스 2세는 곧바로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자신의 신인 ‘아몬’을 의지하여 고함을 지르면서 전투에 참가하여 직접 장병들을 독려했다.
다행하게도 지원군인 나아룬 군과 파 사단이 도착하여 꼼짝없이 사로잡히기 직전의 람세스 2세를 극적으로 구출하였다. 나아르 군은 가나안인 외인 부대 병사들로 구성된 특공대로, 이들의 도착은 람세스가 미리부터 계획해 둔 작전이었는데 절묘하게 그 시기가 맞아 들어간 것이다. 포위망에서 구출된 람세스 2세는 오히려 공격으로 나서 히타이트 전차병들을 카데시 남쪽으로 몰아낸다.
그러나 히타이트의 무왓탈리시는 자신의 군대가 쫓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만 8천 명에 달하는 주력 부대를 투입하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무왓탈리시의 이 이상한 조치를 이미 이집트 군의 일부가 궤멸되었기 때문에 협약으로 끝나는 외교를 예상하고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것으로 추측한다.
즉 자신의 목적은 달성한 데다가 이집트를 궤멸시킨다고 해서 이득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후 전쟁은 피해를 입은 당사자간의 화의로 조약이 체결돼었고 이러한 기록들은 카르나크신전의 비문(碑文)에 기록돼었다. 이 비문에서는 이집트의 승리가 기록되어 있으나, 시리아는 여전히히타이트의 수중에 있었다는것을 볼때 당시 이집트가 엄청난 피해를 입고서 그 지역을 다스릴 병력또한 없었던것으로 볼수있겠다.
아마도 히타이트가 가지고 있던 철제무기의 활약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이 설 뿐이다.
*사진은 가나안지역에서 발견된것으로 측정연대가 히타이트와의 전쟁기간과 일치하여 히타이트인이 하용했다고 말해지는 철제창
첫댓글 자세히는 모르지만 히타이트가 철기문화를 가진 것은 사실일 겁니다. 다만 그 당시에는 철제련술이 발달하지 못했기에 여전히 청동무기가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이 카데시 전투가 '서양전쟁사'첫 수업이었습니다. 멀티자료로는 롬토로 재현한 히스토리 채널을 봤죠.
웰링턴님. 이건 사적인 건데 그 책에 대한 배송비는 조만간 보내드리겠습니다. 아, 그런데 저기서 해상민족이란 어떤 민족을 지칭하는 건가요?
트로이의 후예가 히타이트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는..?(아니면 글을 본건가?)
당시는 트로이와 비슷한 시기였습니다. (트로이는 약 B.C10세기 이전으로 추정) 트로이의 후예라는 나라는 아마 로마일 겁니다.
전략적으론 히타이트 승리, 전술적으론 람세스의 승리라던가=ㅅ=;; 그렇긴 해도 사실상 무승부였고 카데시 전투 이후로는 양쪽 다 쇠락해지니...결국 둘다 삽질한걸까요;;;
아이아네스가 로마의 시조라는 신화를 믿는다면, 여왕 디도의 후예들은 몸도 마음도 모자라서 생활 터전 그리고 생명까지 모조리 로마에게 뺏긴 셈이군요. 디도가 어렸을 때 흑마술을 조금 더 공부했더라면 세계사가 달라졌을지도;;;;
해상민족은 여러가지 견해로 보는데요.. 하나는 도리안인 이라는 설과 다른 하나는 북유럽에서 건너온 바다민족이라 불리는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크레타인이었을 가능성등을 제시합니다.
ㅍㄱ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