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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묘(孔庙)NO.1 공묘(孔庙)는 공자를 모신 사당으로 중국 북경 국자감을 비롯하여 중국 전역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의 성균관 대성전, 각 지역 향교 대성전도 이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그 중 북경 국자감 공묘(孔庙)와 함께 공자가 살았던 춘추전국시대 노나라 수도 취푸(曲阜)는 공묘(孔庙)가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취푸의 공묘는 공자가 죽은지 2년 되던 해에 공자가 살던 집을 묘(廟)로 삼으면서 시작되었다. 한고조 유방이 공묘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부터 12명의 역대 황제들이 직접 방문하여 제사를 올렸으며 100명 이상의 황제가 대리인을 파견하여 제사를 올렸다. 현재의 공묘는 북송대에 궁궐 형식의 사당을 건설하였으며 현재의 건물들은 명나라대 크게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취푸(曲阜) 공묘(孔廟)는 곡부읍성 남문에서 시작하여 패방과 문, 대성전을 비롯한 주요 건물들과 정원이 남북으로 1.3km 직선상으로 배치되어 있다. 곡부읍성 남문을 들어서면 공묘(孔廟) 참배가 시작되는데 첫번째로 보이는 것이 패방인 금성옥진방(金声玉振坊)과 출입문인 영성문(棂星门, Ling Star Gate)이다.
입구 매표소 앞에서 여권과 입장권을 나누어준다
공묘에 들어가려면 여권과 티켓을 들고 검색대를 통과해야 한다.
공묘의 첫번째 불 수 있는 패방인 금성옥진방(金声玉振坊)이다. 금성성옥진방은 명나라 가정17년(1538)에 처음 세워졌다. '金声玉振'은 맹자에 나오는 말로 '재주와 지혜가 충분히 조화를 갖추고 있다'를 의미하는데 특히 공자의 완성된 인격을 가리키는 말이다. 현재의 패방은 청나라 강희제 16년(1677)에 중건된 것이라 한다.
첫번째 출입문인 '영성문(棂星门, Ling Star Gate)'이다. 영성문은 명나라 영락제 13년(1415)에 처음 세워졌으며, 청나라 건륭제 19년(1754)에 중건되었다고 한다. '영성문(棂星门)'이라고 적은 세글자는 청나라 건륭제가 직접 쓴 글씨이며, 고대 중국에서는 공자를 하늘처럼 받들었기때문에 영성(棂星)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영성(棂星)은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농업의 신으로 받들어지는 별이다. 중국에서는 한나라때부터 영성(棂星)과 사직에 제사를 지내왔으며, 우리나라에서도 고구려때부터 제사를 지내왔다고 한다. 삼문의 형식을 하고 있는 패방형태로 기둥은 궁궐 입구에 세워진 화표와 같은 형태이다. ' 영성문'은 기둥이 궁궐입구의 화표처럼 생긴 삼문으로 청나라 건륭제가 직접쓴 '영성문(棂星门)을 들어서면 태화원기방(太和元气坊), 지성묘방(至圣庙坊)이라는 2개의 패방이 삼도(三道)에 세워져 있으며 양쪽으로는 측백나무가 빽빽히 심어져 있다. 공묘 두번째 패방인 '태화원기방(太和元气坊)'이다. 이 패방은 명나라 가정 23년(1544)에 세워졌다. 태화원기방이라 쓴 글씨는 청나라때 산동성 순무(巡抚, 지방관)를 지낸 증선(曾铣)이 썼다고 하며 우주처럼 모든것이 영원히 순환하는 공자의 생각을 표현했다고 한다. 똑같이 삼문에 지붕이 있는 패방의 형식을 하고 있다. 기둥 위에는 신령한 동물 조각상을 올려놓고 있다. 공묘 세번째 패방인 '지성묘방(至圣庙坊)'이다. 이 패방은 명나라 홍치13년(1500)에 처음 세워졌으며, 청나라 옹정제 7년(1729)에 중수되었다고 한다. 원래는 패방에 '선성묘(宣圣庙)'라고 적혀 있었는데 청나라 옹정제때 수리하면서 '지성묘(至圣庙)'로 바꾸었다. 삼문의 형식을 하고 있으며, 기둥 위에는 공묘를 수호하는 짐승 조각상을 올려놓고 있다. 공묘의 두번째 출입문은 '성시문(圣时门)'으로 삼문의 형식을 하고 있는 북경 자금성의 오문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으며, 황제의 가마가 지나가는 계단에 놓이는 답도가 설치되어 있다. 성시문 안쪽에서 세번째 출입문인 홍도문(弘道门)까지는 패방은 없고 삼도가 이어지고 있으며 그 끝에는 자금성의 금수(金水)와 같은 성격을 갖은 벽수(璧水)가 흐르면서 공묘와 바깥세상을 구분해 주고 있다. '성시문(圣时门)'은 청나라 옹정제가 지은 이름으로 맹자에서 언급된 공자는 완벽한 인격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취푸 공자묘는 역대 황제들이 자주 방문했던 중국에서는 중요한 공자를 모신 사당으로 성시문 앞 계단 중앙에 용과 구름 등이 새겨진 '답도'가 설치되어 있다. 성시문을 지나면 벽수교(璧水橋, Bishui Bridge)가 나오는데 '벽수교'는 명나라 홍치 13년(1500)에에 세워진 것으로 현재의 것은 청나라때 중건된 것이라 한다. 삼도(三道)의 형식을 하고 있는 공묘에서는 가운데 넓은 다리가 있고, 양쪽에 작은 다리가 놓여 있다. 북경 자금성 다리와 비슷하게 대리석으로 지은 아치형 돌다리이다. 금성옥진방(金声玉振坊)에서 시작해서 지성묘방(至圣庙坊)까지 이어지는 3개의 패방은 출입문이라기보다는 공자의 인격과 업적을 찬양하는 기념비적인 성격을 갖고 있고, 영성문은 출입문이지만 화표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출입문으로 보인다. 반면 성시문(圣时门)은 궁궐 정문의 형태를 하고 있는 출입문으로 취푸 '공자묘(孔子廟)의 정문'이라 할 수 있다. 현재의 공자묘는 명.청대에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하여 북경 자금성과 비슷한 건물배치를 하고 있으며, 성시문은 자금성 정문인 오문과 같은 성격이라 할 수 있다, 성시문은 명나라 영락 13년(1415)에 처음 세워졌으며 청나라 옹정 8년(1730)에 중건되었다. '성시문'을 통과하면 벽수교(璧水橋)와 홍도문(弘道门)까지 박석을 깔아 놓은 삼도(三道)가 이어져 있으며 양쪽 넓은 정원에 측백나무가 울창하게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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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출입문이 북경 자금성을 연상케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