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른다’를 못하는 습관
신보미, 청주서부종합사회복지관
이것은 치료가 아니다. 비록 모든 것에서 완전히 회복할 수는 없지만 상황은 반드시 변하게 마련이다.
우리가 함께 일했던 거의 모든 가족들은 도움을 받아 더 나은 살을 위해 전과는 다른 독립적인 길로 나아갔다.
「래디컬 헬프」 (힐러리 코텀)
‘모른다.’는 말은 저에게 금기어였습니다. 이처럼 무책임한 말은 또 없다고 배웠습니다.
거짓말이라도 ‘할 수 없다.’는 말 대신 ‘해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 미덕이라 여겼습니다.
심지어 모른다는 말을 다른 핑계거리로 돌려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을 융통성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동네에서 복지사업을 하며 한계점을 인정하지 못한 일이 많습니다.
나를 방어하기 위해 할 수 있다고 자기암시를 합니다. 지난 크리스마스가 그랬습니다.
동네 할머니들이 동요합창단을 꾸려 공연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 공연 당일 예기치 못한 폭설이 내렸습니다.
교회에서는 공연을 축하한다고 롤케이크를 200개나 예약해주었고 구경꾼들도 이미 모였습니다.
복지관이 언덕길이라 어르신들에게는 위험한 길입니다.
다른 손님들은 모두 왔는데 어르신들은 오기 힘든 상황입니다.
합창단원은 3명만 왔습니다.
저는 공익요원이나 직원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사회사업 선배가 저에게 질문했습니다.
"할머니들은 어떻게 하고 싶대?"
“어르신들, 오늘 눈이 많이 왔어요. 다른 어르신들게 전화해봤더니 모두 위험해서 못 오신대요.
지금 저는 지혜가 없어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복지사가 할머니들께 우리 어쩌냐고 물었습니다. 할머니들은 윷놀던 할머니들을 데려옵니다.
얼른 오라며 갑자기 무대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연동심 할머니는 그것도 우스웠다며 잊지 못할 추억이라고 합니다.
당사자의 일은 당사자가 결정한다는 기본을 자주 잊습니다.
나를 거짓되게 드러내는 것보다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올바른 일임을 우리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사자에게 솔직해지는 일은 어렵습니다.
나는 사회사업가이며 당사자보다 많은 지식을 갖고 있고,
비슷한 경험을 많이 해보았으므로 더 좋은 자원을 연결해줄 수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그러나 그런 무의식조차 나의 자만이 아니었는지요.
나의 마음과 행동 한끝 차이로 당사자와 나의 관계는 달라집니다.
그것은 백지장같이 얇지만 흑백의 판과도 같습니다. 손바닥 뒤집듯 바뀝니다.
내가 도움의 주체이며 새판을 짜줄 수 있다고 오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관계에서 내가 돕는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나의 역량과 한계를 솔직하게 말합니다.
당사자는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도움이 될 만하다고 판단되는 것들을 체스판 위에 얹어둡니다.
그 일이 잘 되도록 나는 돕는 사람입니다.
당사자의 기적과 같은 일, 기쁜 마음,
재미있던 경험을 함께 보고 그 감동을 누리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