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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모양이 없기 때문에 같은 연[同緣]을 멀리 여의었고, 많은 모양이 없기 때문에 다른 연[異緣]을 멀리 여의었다. 이런 이치 때문에 진여라고 한다. 이와 같은 진여는 두 가지의 깨끗한 지혜로 친히 내증(內證)할 바다. |
다시 진(眞)과 여(如)에도 각각 열 가지 씩의 뜻이 있다. 첫째 뿌리라는 글자와 일의 진[根字事眞]으로부터 열째의 통틀어라는 글자와 일의 진[總字事眞]까지이다. 이와 같은 열 가지 진은 열 가지 본(本)의 뜻과 상응하고 똑같이 존재하여 서로가 버리거나 여의지 아니한다. 그 때문에 같은 이름으로 표시했을 따름이다. |
무엇이 열 가지의 여(如)라 하느냐 하면, 첫째의 거울이라는 글자와 일의 여[鏡字事如]로부터 열째의 깨달음이라는 글자와 일의 여[覺字事如]까지이다. 이와 같은 것은 열 가지 각(覺)의 뜻과 상응하며 똑같이 존재하여 서로가 버리거나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같은 이름으로 표시할 따름이다. |
왜냐 하면 열 가지 진(眞)의 도리에는 본래부터 존재하는 법신이기 때문에 덕의 방편[德方便]이 있으며, 열 가지 진여(眞如)의 도리에는 살바야의 지혜와 각의 방편[覺方便]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치 때문에 다시 거듭된 말로 이렇게 지어서 보인 것이다. |
이 안에서 말한 바의 두 가지 진여 중에는 무슨 진여에 해당하느냐 하면, 청정한 진여를 말한 것이요 염정의 진여가 아니다. 염정의 진여에 관한 글자와 일의 차별된 그 모양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
“청정한 진여의 도리는/제 성품을 지키지 아니하기 때문에/물들음과 훈습을 잘 받나니/염정의 진여라 이름한다네.” |
논(論)에서 말하기를 “청정한 진여는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평등하고 평등하며 제 성품이 청정하여 나지도 아니하고 없어지지도 아니하며 가고 오는 것도 없고 머무는 데도 없다. 그러나 진여의 도리 성품은 제 성품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연(緣)을 따라 움직이고 옮는다. 이 때문에 염정의 진여라고 한다”고 했다. |
이와 같은 진여는 두 가지 염정의 지혜[染淨智]로 친히 내증할 바며, 상응하고 같이 존재하며 서로가 버리거나 여의지 아니한다. 이와 같은 등의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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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는 앞에서 말한 바의 종류들을 자세히 살피면서 알아야 된다. |
무슨 이치 때문에 억지로 허공(虛空)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글자와 일의 차별된 그 모양은 어떠한가? 허공에는 열 가지의 뜻이 있다. 그 체(體)는 비록 같으나 이치의 일은 저마다 차별되기 때문이니, 걸림 없다[無礙]는 따위의 일들을 말한다. |
논(論)에서 말하기를 “성품인 허공의 도리에는 열 가지의 뜻이 있다. 첫째는 막거나 거리낌이 없다는 뜻이니 모든 물질의 법[色法] 안에서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두루 하다는 뜻이니, 이르지 않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셋째는 평등하다는 뜻이니, 가리거나 고름이 없기 때문이다. 넷째는 넓고 크다는 뜻이니, 분한과 끝이 없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모양이 없다는 뜻이니, 물질의 모양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깨끗하다는 뜻이니, 티끌의 허물이 없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요동하지 않는 다는 뜻이니, 이루어지거나 무너짐이 없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유공(有空)의 뜻이니, 한량 있음[有量]이 소멸되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공공(空空)의 뜻이니, 집착을 여의기 때문이다. 열째는 얻음이 없다[無得]는 이치이니, 붙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열 가지라 한다”고 했다. |
이와 같은 열 가지 일은 뜻의 용[義用]의 차별인데, 만약 그 체(體)에 의거하면 차별이 없을 따름이다. 이 허공의 도리도 두 가지 청정한 지혜로 친히 내증할 바며, 상응하고 같이 존재하여 서로가 버리거나 여의지 아니한다. 두 가지 허공중에서 어느 허공이어야 하느냐 하면, 청정한 허공이요, 염정의 허공이 아닌 것이다. |
염정의 허공에 관한 글자와 일의 차별된 그 모양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
“청정한 허공의 도리가/제성품을 지키지 아니하기 때문에/훈습을 잘 받은 것이니/염정의 허공이라 이름한다네.” |
논(論)에서 말하기를 “청정한 허공은 열 가지 덕을 두루 갖추었으며, 더러움의 모양도 없고 깨끗한 모양도 없다. 그러나 허공의 성품이 제 성품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염정(染淨)의 훈습을 받고 연(緣)을 따라 유전한다. 이 때문에 염정의 허공이라고 한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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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기신론소(起信論疎)』에서 말하기를 “본각(本覺)이란 시(始)에 대(對)하기 때문에 그를 설명하며 본(本)이라 한다”고 하였다. |
‘생각을 여읜다[離念]’고 함은, 망령된 생각을 떠나서 불각(不覺)이 없어지는 것이 나타난다. ‘허공 등과 같다’고 함은, 불각의 어둠이 없을 뿐만 아니라 큰 지혜 광명의 뜻 등이 있기 때문이다. |
허공에는 두 가지 뜻이 있어서 본각에서와 같이 비유한다. 첫째는 두루 하다[周遍]는 뜻이니, 가로는 삼제(三際)에 두루 하고 세로는 범부와 성인에 통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두루 하지 않는 바가 없다’고 한다. 둘째는 차별이 없다[無差別]는 뜻이니, 얽매임에 있거나 장애를 벗어나는 성품이 항상 둘이 없기 때문에 이르기를 ‘법계(法界)는 한 모양이다’고 한다. |
깨달음[覺]의 뜻을 밝히고자 하여 얽매임[纏]을 벗어나는 모양으로 나타내기 때문에 이르기를 ‘바로 이것이 여래의 평등한 법신이다’라고 하며, 이미 법신의 깨달음의 도리가 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르기를 ‘이 법신에 의하여 본각이라는 것을 설명한다’고 했다. |
『무성섭론(無性攝論)』에서 말하기를 “때가 없고 걸림이 없는 지혜[無垢無慧礙智]를 법신이라고 한다”고 한 것과, 『���금광명경(金光明經)』에서 “대원경지(大圓鏡智)를 법신이라 한다”고 한 것 등이, 모두 이런 뜻이다. |
‘무슨 까닭인가’라고 함은 그 이름 붙인 것을 책망하는데 두 가지로 책망하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이르기를 ‘위의 문장을 전개하는 가운데는 바로 각(覺)이라는 뜻으로 말했으면서, 무엇 때문에 이제는 맺으면서 이에 본각(本覺)이라고 말하는가’라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이르기를 ‘이 안에서 이미 본각이라 일컬었으면서, 무엇 때문에 논(論) 중에서는 바로 각이라고 말하는가’라는 것이니, 진(進)과 퇴(退)로 책망하고 있다. |
해석하여 보자. |
‘시(始)에 대(對)하기 때문에 본(本)이라 한다’고 하여 처음 것의 뜻에 대답한 것이요, 처음[始]은 곧 근본[本]과 같으며, 마음의 근원에 이르렀을 적에는 시각(始覺)이 곧 본각(本覺)과 같아서 두 가지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논(論) 중에서는 그 각(覺)이라고 말했을 뿐이니, 뒤의 것의 뜻에 답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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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본각이 물듦[染]을 따라 시각을 내되, 도리어 이 시각을 상대하여야 비로소 본각이라는 이름 붙이게 된다. 이 때문에 본각이라 하는 것은 시각에 상대하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 시각은 바로 본각에서 이루어지므로 도리어 마음의 근원에 계합하여 동일한 체(體)로 융합되어야 비로소 시각이라고 이름 붙이게 된다. 그 때문에 ‘시각은 곧 본각과 같다’고 말한다. |
[문] 만약 시각(始覺)이 본(本)과 다르면서 시(始)가 이루어지지 아니하며 만약 시가 본과 같으면 시각이라는 다름이 없거늘, 어찌하여 시에 상대하여 본이라는 이름을 설명하는가? |
[답] 지금은 생멸문(生滅門) 안에 있으면서 물들음을 따른다[隨染]는 이치에 의거해서이니, 본래의 불각(不覺)에 대하여 시각(始覺)임을 설명한 것이다. |
그러나 실은 시각이 마음의 근원에 이를 때에 물듦의 연[染緣]은 이미 다하였으므로, 시각과 본각은 다르지 아니하며, 평등하여 말이 끊어져서 바로 진여문(眞如門)에 포섭된다. 그러므로 본각의 이름은 생멸[문]안에 있는 것이요 진여문의 것이 아니다. |
둘째의 시각이라 함은 이름을 풀이하는 것이니, ‘본각(本覺)에 의하여 불각(不覺)이 있다’ 함은 시각이 일어난 소유(所由)를 밝힌 것으로서 바로 이 마음의 체(體)가 무명의 연(緣)을 따라 움직여서 망념(妄念)을 짓되 본각 안의 훈습한 힘 때문에 점차로 조금씩 깨달음이 있고 괴로움을 싫어하고 즐거움을 구하여 마지막에 가서는 도리어 본각과 같게 된다. 때문에 ‘본각에 의한다’고 한다. |
그러므로 본각에 의하여 불각이 있으며 불각에 의하여 시각이 있다. 논(論)에 이르기를 ‘본각이 물듦을 따라 지정상(智淨相)을 낸다’ 함은 바로 이 시각이다. |
이 안의 대의(大意)는 본각은 불각을 이루고 불각은 시각을 이루고 시각은 본각과 같으며 본각과 같기 때문에 곧 불각이 없고 불각이 없기 때문에 곧 본각이 없고 본각이 없기 때문에 평등하고 평등하여 말을 떠나고 생각이 끊어졌음을 밝힌다. 그러므로 부처의 과위는 원융하고 소연하여 붙어 있는 데가 없으며, 오히려 시각과 본각의 다름이 없거늘 어찌하여 삼신(三身)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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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이 있겠는가? 다만 물(物)의 마음에 따라 나타나기 때문에 보화(報化)의 용(用)을 설명할 따름이다. |
또 이제 진여에서 보면 이것은 본각이요 무명에서 보면 이것은 불각이다. |
진여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불변(不變)이요. 둘째는 수연(隨緣)이다. 무명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체(體)가 없어서 그대로가 공한 것이요, 둘째는 용(用)이 있어서 일을 이루는 것이다. |
이 수연진여(隨緣眞如)와 성사무명(成事無明)에는 각각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자기를 어기고 남을 쫓는 것[違自順他]이요, 둘째는 남을 어기고 자기를 쫓는 것[違他順自]이다. |
무명 중에서 처음의 자기를 어기고 남을 쫓는 것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능히 반대로 성품의 공덕을 보이고, 둘째는 명의(名義)를 능히 알아서 깨끗한 용(用)을 이루는 것이다. 남을 어기고 자기를 쫓는 것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진리를 덮고, 둘째는 망심을 이루는 것이다. |
진여 중에서 남을 어기고 자기를 쫓는 것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망령된 물듦[妄染]을 뒤집어서 자신의 덕을 드러내고, 둘째는 안에서 훈습한 무명으로 깨끗한 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자기를 어기고 남을 쫓는 것에서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자신의 참된 체[眞體]를 숨기는 것이고, 둘째는 망령된 법을 드러내는 것이다. |
무명 중에서 반대로 보인다는 이치와 진여 중에서 망을 뒤집어서 덕을 드러낸다는 이치로 말미암아 이 두 가지 이치로부터 본각이 있게 된다. |
또 무명 중에서 명의를 능히 안다는 이치와 진여 안에서 훈습한다는 이치로 말미암아 이 두 가지 이치로부터 시작이 있게 된다. |
또 무명 중에서 진리를 덮는다는 이치와 진여 중에서 참된 체를 숨긴다는 이치로 말미암아 근본불각(根本不覺)이 있게 된다. |
또 무명 중에서 망심을 이룬다는 이치와 진여 중에서 망령된 법을 드러낸다는 이치로 말미암아 지말불각(枝末不覺)이 있게 된다. |
각(覺)과 불각(不覺)이 만약 융합되면 한데 포섭되어 생멸의 한 문에 있을 뿐이다. 진여문의 체는 모양이 끊어져 있다는 학설[體絶相說]에서 보거나 본각문의 성품 공덕의 학설[性德說]에서 보거나 하면, 대지혜(大智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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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광명(光明) 등의 이치를 각(覺)이라 한다. 본(本)이란 성품의 뜻이요, 각이란 바로 지혜의 마음이다. |
초석(鈔釋)에 이르기를 “진(眞) 중의 불변(不變)과 망(妄) 중의 체공(體空)은 진여문을 이루고, 진 중의 수연(隨緣)과 망 중의 성사(成事)는 생멸문을 이루며, 온갖 정연(淨緣)의 분제(分劑)인 법상(法相)은 두 가지 각[二覺]에 속하고 온갖 염연(染緣)의 분제인 법상은 두 가지 불각[二不覺]에 속한다. |
또 그 중에서 깨끗한 법의 체[淨法之體]는 본각에 속하고, 깨끗한 법의 용(用)은 시각에 속한다. 또 더러운 법[染法]의 체는 근본 불각에 속하고, 더러운 법의 상(相)은 지말 불각에 속한다. 또 시각은 바로 끝[末]이로되 본각의 근본을 여의지 않는다. 논(論)에 이르기를 ‘시각은 곧 본각과 같다’고 했고, 또 이르기를 ‘실로 시각으로서의 다름이 없으며, 내지 평등하여 동일한 각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
지말 불각은 근본 불각을 여의지 않나니, 논(論)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무명은 온갖 더러운 법을 능히 내나니, 온갖 더러운 법은 모두가 이는 불각의 모양이기 때문이다’고 했다. |
그러나 이 두 가지 각은 바로 체와 용[體用]이 다를 뿐이며, 본말(本末)의 두 가지 불각은 바로 추(麤)와 세(細)가 다를 뿐이다. 어찌 체를 여의고 용이 있겠으며, 세를 여의고 추가 있을 수 있겠는가? |
또 중생의 근본 미혹[根本迷]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법에 미혹한 것[迷法]이니, 무명이 머무는 자리(無明住地)가 법(法)의 체를 미혹하여 가리어진 것이다. 법이란 중생의 마음이니, 가리어진 뜻[敝意]을 말한다. 때문에 이 무명은 참된 것을 미혹하게 하는 시초요, 망령되게 미혹시키는 근본이다. |
둘째는 이치에 미혹한 것[迷義]이니, 4주(住)의 미혹에 다 통한다. 앞의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인연(因緣)과 무아(無我)의 이치를 잘 모르고, 망령되이 모든 법을 세우되 미혹한 모든 법은 안이 있고 바깥이 있는 것이니, 교만의 삿된 소견 이것은 미혹함에 의한 안의 것이요, 망령되이 나라는 법을 세워서 스스로가 높은 체하고 다른 이를 업신여기며 사랑스레 생각하는 삿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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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견 이것은 헷갈림에 의한 바깥의 것이다. |
망령되이 내 것[我所]과 바깥 경계를 말하면서 탐애(貪愛)를 내는 것은 마치 목마른 사슴이 아지랑이를 보고 달려가고 어리석은 원숭이가 달을 붙잡으려는 것과 같다. 될 수 없는데 잘못 헤아려서 억울하게 괴로움의 바퀴로 들어가는 것이니, 모두 스스로가 마음을 헷갈린 것이요. 다른 이의 허물이 아니다”라고 했다. |
『두정론(杜正論)』에서 이르기를 “마음은 바로 여래의 말씀이라 높이 성인 자리에 미루고, 몸은 곧 보리(菩提)의 설명이라 스스로 범부 무리에 막힌다. 공덕이 한량없되 방촌(方寸)의 가운데 있을 뿐이라 함과, 상호(相好)가 완연(宛然)하되 음계(陰界)의 밖을 벗어나지 않았음을 깨치지 못하는구나”라고 했다. |
또 『비사(碑詞)』에서 이르기를 “법성(法性)은 평등하고 진실한 지혜[實慧]는 비고 꿰뚫었다. 나는 다른 데서 같고 남은 같은 데서 다르며, 유(有)를 무너뜨리지 않고 공(空)을 취함이 없나니, 도(道)는 마음 밖의 것이 아니고, 부처는 곧 마음속이다”라고 했다. |
[문] 망심(妄心)이 원래 자체(自體)가 없음을 깨닫지 못했으나 이제는 이미 깨달았다. 망심이 일어난 때에 처음의 모양이 없으면 온전하게 진각(眞覺)을 이루는데, 이 진각의 모양은 다시 망(妄)을 따라 함께 쫓아보내는 것인가? 처음부터 끝까지 건립되어 있어야 하는가? |
[답] 망(妄)으로 인하여 진(眞)을 설명하므로 진은 제 모양[自相]이 없고, 진으로부터 망을 일으키므로 망의 자체는 본래가 비었으며, 망이 이미 공으로 돌아갔으므로 진 또한 건립되지 아니한다. |
『기신론(起信論)』에서 이르기를 “불각(不覺)이란 뜻은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진여의 법이 하나임을 사실대로 몰랐기 때문이다. 불각의 마음이 일어나면서 망념(妄念)이 있되 스스로 실상(實相)은 없고 본각을 여의지 않는 것이 마치 길 잃은 사람이 방향에 의하여 본래 미혹하였으나 미혹함은 제 모양이 없고 방향을 여의지 않는 것과 같다. 중생들도 그러하여 각(覺)에 의지하기 때문에 불각이 있고 망념은 미혹해서 생긴다. 그러나 그 불각은 스스로 실제 모양은 없되 본각을 여의지 않았으며, 다시 불각을 기다려서 진각을 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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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하게 되며, 불각이 이미 없는지라 각각 또한 쫓아보낸다”라고 했다. |
이것은 바로 진각이란 이름은 망상(妄想)을 상대하여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이니, 만약 불각을 여의면 곧 진각이라는 제 모양조차 말할 수 없다. 여기서 말한 바 진각은 반드시 불각을 상대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만약 상대하지 아니하면 곧 자타(自他)가 없고 타를 상대하면 서 있으므로 또한 제 모양이 없으며, 제 모양이 이미 없다면 어찌 다른 모양[他相]이 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모든 법은 얻을 바가 없다[無所得]는 이치를 드러낸 것이다. |
논(論)에 이르기를 “마땅히 알아야 한다. 온갖 더러운 법과 깨끗한 법은 모두 다 상대(相待)하는 것이므로 제 모양이라고 말할 만한 것이 없다”고 했으며,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이르기를 “만약 세제(世諦)에 털끝만큼의 것이라도 진실이 있다 하면, 제일의제(第一義諦) 또한 진실이 있어야 한다”고 했으니, 이것을 말한 것이다. |
또 게송에 이르기를 “부처님이 도량에 앉아 계실 때/한 법도 진실임을 얻지 않았나니/빈주먹으로써 어린아이 속이듯/꾀어서 일체 중생 제도하셨네”라고 했다. |
또 진망(眞妄)을 세우되 모두 이것은 다른 이의 뜻을 따라 말로 교화하는 [문]안에서 그친다. 만약 단박에 견성(見性)한 사람이라면 누가 이런 일을 논하겠는가? 지금처럼 바로 한 마음을 깨치지 않은 이는 모두가 사곡(邪曲)이 되며, 바깥으로 부처의 과위를 구하는 이도 모두가 바르지 아니하다. |
한산자(寒山子)의 시(詩)에서 “남아의 대장부가/일을 짓되 소홀하게 하지 말라./곧장 철석(鐵石)같은 마음을 빼내어/바로 보리(菩提)의 길을 취하라./삿된 길은 가도 소용없어서/가면 갈수록 고통만 심하나니/부처의 과위 구하려 말고/심왕(心王)이 주인임을 알아 취하라”고 했다. |
이것이야말로 만약 구할 만한 법이 있거나 행할 만한 도가 있다고 보면, 모두가 심왕인 자종(自宗)의 이치를 잃게 된다. 만약 바로 종경(宗鏡)에 들면 만사를 쉬고, 범부와 성인의 정(情)이 다하여 편안하고 즐겁고 미묘하며 항상하리니, 이 타고난 마음을 여읜다면 모두가 고달프고 고통스럽게 된다. |
이 때문에 부 대사(傳大士)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
“동쪽 산은 물 위에 뜨고/서쪽 산은 가며 머무르지 않누나/북두(北斗)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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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염부제(閻浮提)가/바로 참된 해탈의 처소일세. |
가는 길은 쉽다/길은 쉬운데 사람들이 모르고서/한밤중에 해의 끝이 돋아 밝을 것임을/깨치지 못하니 참으로 고달프네.” |
또 동산(洞山) 화상의 오도게(悟道偈)에서 말하였다. |
“종전대로 물건 위에서 통달을 구함은/애초부터 종(宗)을 몰랐기 때문이니/지금처럼 환히 보아 온전히 일 없어야/비로소 온갖 법이 본래 공함을 알리라”고 했다. |
[문] 진제(眞諦)는 그릇되지 아니하고 본각은 헛된 것이 아니거늘, 어떻게 망(妄)과 한꺼번에 함께 버리는가? |
[답] 미혹함으로 인하여 깨달음을 세우고 망령됨을 설명하여 참됨을 드러낸다. 모두가 근기의 마땅함에 따르되 저마다 자체가 없다. 세속에서 보면 있지만 실제(實諦)에 의하면 없다. 상대의 이름을 제거할 뿐이요, 한 신령한 성품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성품은 상대가 끊어졌으나 일[事]에는 다스림이 있다. |
쓸어 없애는 것은 집착한 정(情)을 깨뜨리기 위해서요, 이룩하여 세우는 것은 단견(斷見)을 제거하기 위해서며, 고행(苦行)은 모든 외도를 항복 받고 신통은 저 어리석은 이들을 교화하며, 삼매(三昧)는 뭇 하늘 악마를 항복시키고 공관(空觀)은 그 서로 얽어매는 것을 버리며, 괴로움을 보고 쌓임을 끊는 것[見苦斷集]은 증상만인(增上慢人)을 대치하기 위해서요, 사라짐을 증득하고 진리를 닦는 것[證滅修眞]은 모두가 쓸모없는 이론을 주장하는 이를 위해서이다. 이것은 모두 권지(權智)로 이 종(宗)에 끌어들인다면 하나의 법도 일으킬 만한 것이 없고 하나의 법도 버릴 만한 것이 없어서, 4마(魔)가 줄일 수 없고 대각(大覺)이 불릴 수 없으며, 마음을 돌리면 의리(義理)가 완전히 소멸되고 뜻[旨]을 회통하면 명언(名言)이 저절로 끊어진다. |
[문] 이미 진심(眞心)은 자취가 끊어졌고 도리[理]는 있고 없음을 벗어났다 하면서, 어떻게 교(敎) 중에서 무생(無生)과 무상(無相)의 뜻을 널리 말하는가? |
[답] 한 마음[一心]의 문은, 미묘하여 연구하기 어렵고 공덕이 두루 갖추어져서 이사(理事)가 원통하며 알음알이[知解]로 궁구하기 어려우며 분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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