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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창조와 하나님의 경륜
(창세기 1~ 11장)
창조 → 타 락→ 홍수→ 바벨탑
선악과는 굉장히 중요하다!
선악과 결론은?
십자가 결론은?
답은 → ,,순종이다,,!
마22장 29절에 나오는 말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였도다"
♡영의 역할♡
(1) 영은 영존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2) 직감으로 하나님을 인식하며 그 뜻을 분별하는 능력을 가졌다.
(3)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지었을 때 영은 죽은 상태가 된다.
♡아담과 혼의 역할♡
① 영은 직감적으로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분의 뜻을 분별하고
② 혼은 .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③ 육은 영이 인식하고 분별한 하나님의 뜻을 혼은 그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을 모색 하고 육은 그 실천, 행동을 한다.
④ 아담이 죄를 범하기 전에는 ( 영)이 (혼)을 지배하고 혼이 (육 )을 지배했다.
그러 나 범죄하므로 말미암아 영이 죽어 혼과 육이 남았으나 육이 혼을 지배하게 되었다.
요14:17에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성령을 받지 못한 자연인]은 능히 그를 받지 못 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영존(永存) - 영원히 존재하는 것, 천국과 지옥에서 영존한다
영생(永生) -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존재하는 삶
미래시대 교육을 준비하는
통일시대를 준비하는 통일선교회 통일학교 교육 자료에
절대적주권 관련 자료가 있다.
,,절대적주권,,
인간의 자유의지(타율적 순종, 자율적 순종)
만물 중에서 인간은 생각할수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만든 생각하는 피조물이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고 죄인이 된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사랑때문에 이땅에 예수를 통해
인간을 구원 하시고자 기간을 주시고 기다리고 계신다.
예배는 삶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교회 나온다고 다 예수를 믿는것이 아니다.
이시대 복음의 지유함이 없다.
,,영,, 영존하는 능력
영생(천국), 영멸(지옥)
,,성령,,
직감적인 하나님을 인지하는 능력
성령(성령의 열매)
영이 열려지기 전에는 못믿는다.
(다음주 예습자료)
전도서 주석 1장 내용분해
1. 저작자에 대한 말씀(1절).
2. 세상이 헛되다고 함(2-11).
3. 인간 의 지식 행위가 헛되다고 함(12-18).
해 석
❶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솔로몬이 여기서 자기를 가 리켜 "다윗의 아들"이라고 한 이유는, 그의 교훈이 자기 부친 다윗의 유 훈(遺訓)대로(대상 28:9) 하나님 중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 부친의 신앙 유산(信仰違產)의 상속자임을 영광으로 생각한 것이다. "전도자"란 말(n???)은 지혜 자체를 가리킨다. 그런고로 전도서는 지 혜 자체의 교훈이 란 의의 (意義)를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정경성 (正經性)을 가진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E. W. Hengstenberg. A Commentar/ on Ecclesiastes, Sovereign Grace Publisher, 1960. p.41). "전도자"란 말 (n노경P)은 회집케 하는 자 (assembler)란 뜻도 있다. 회집케 하는 자도 공 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백성을 모으는 것인 만큼 전도자의 내용 을 가진다. 2-11. 이 부분에서는 영원을 사모하는(3 : 11) 인간을 만족시킬 것이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이 사실이 여기 몇 가지로 표현되어 있다.
(1) 인간의 수고의 결과가 그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다고 함(3-4).
(2) 자 연계의 현상도 늘 같은 일을 되풀이하므로 단조하다고 합(5-10).
(3) 인 간의 역사는 길지 못하다고 함(11 절)이다.
20 전도서 주석
❷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개역할 수 있다. 곧, "전도자가 가로되 헛된 것들 중에 헛되 도다 헛된 것들 중에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헛된 것들 중 에 헛되도다"란 말은 가장 헛되다는 뜻이니, 그 이상 헛될 수 없다는 뜻 이다. 이런 말을 거듭한 목적은 저작자 자신의 경험과 실갑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 이른바 "헛되다"는 히브리어 (7급식)는 입김(breath)을 의미한다. 그 것은 견고하고 지구성(持久性) 있는 것과 반대되는, 덧없는(無常한) 것을 비유한다(시 90:9). 사실 인생이 그러스도 밖에서는 덧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다윗은 말하기를,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라고 하였고(시 39 : 5), 또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틀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라고 하였다(시 62 : 9) . 롬 8 : 20 을 보면,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였다고 한다. 인생과 만물이 이렇게 된 이유는 그 선조 때부터 범죄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까닭이다.
❸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여기 "해 아래서"란 말은 윗세계 곧, 하나님의 세계와 대조되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이 이 밖에도 여러 번 나온다. 이 말은 하나님을 제외한 이 세상의 죄악 사회를 가리킨다. 전도서에서 헛되다는 것은 하나님을 제외한 인간의 생활이나 활동이 헛되다는 것이다. "무엇이 유익한고. " 여기 이론바 "유 익"이란 말(117.)은 남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업적은 그의 사후(死後)에 납을 것이 없다는 것이 이 귀절의 의미이다.
❹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사람이 땅 위에서 영 원히 살듯이 욕심을 부릴 것은 없다. 욕심이 임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 성하면 사망을 낳는다(약 1 : 15). 사람은 하늘에서 살기를 힘써야 된다. 꿀 3 : 1에 말하기를, "위엣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 에 앉아 계시느니라"고 하였다. "땅은 영원히 있도다"란 말은 땅의 수명 이 영원 무궁하다는 의미가 아니고, 다만 땅이 비교적 영구히 존속한다는 의미 뿐이다.
❺~ 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곧, 세상 사람들 이 의기 양양하여 한평생 활동하지만 변 수 없이 디끝로 돌아간다는 뜻이 다. 시 19 : 5 에 말하기를,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러기 기뻐하는 장사" 같다고 한다. 사람들이 청춘 시절에는 해와 같이 자신만만하게 움직인다. 그러나 그것이 몇날 동안인가? 바랍의 활동이 요 탄하나 얼른 지나가고 마는 것처럼 인간의 출세도 길지 못하다. 벤건 1 : 24-25 에 말하기를, "모든 육체는 풀파 같고 그 모든 영광이 졸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고, 시 39 : 5-7에 말하기를,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 름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 뿐이니이다(셀라) 진실로 자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쌈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 나이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라고 하 였다. 7~8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 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 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곧, 바다가 언제나 홀 러오는 물로 차지 못합 같이 사람의 욕십도 만족을 모른다. 잠 27 : 20 에 말하기를, "음부와 유명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 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무엇에나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 차라리 사람은 소원을 적게 가짐이 행복하다. 다윗은 한 가지 소원만 가졌으니 그 것은 여호와를 사모합이었다(사 27:4).
❾~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 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 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곧, 이 세상에는 새 것이 없고
22 전도시 주석 전 것을 거듭하는 것 뿐이기 때문에 사람이 만족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 다. 새로운 생명의 역사는 하나님께만 있다. 이 세상에 만족이 없는 그 사 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도록 만든다. 3 : 14-15 참조,
① 이전 세대를 기억합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후세의 사람들이 이 시대 사람을 기억합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은 헛되다 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뽐내고 교만하지만 남는 것이 무엇인가? 옛글 에도 말하기를, "성인이라는 공자나 악인이라는 도척이 다 같이 티끌 속 에 물인다"(孔丘益拓俱塵埃)라고 하였다. 사자(獅子)가 살았을 때에는 산중 의 왕이지만 죽은 다음에는 그 뼈를 개가 물고 다닌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소망은 하나님 밖에 없다(시 39 : 7).
⓬~⓭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 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순 인간적인 지식이 괴로운 것이 되었 다는 말씀은 부슨 뜻인가?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은 그것은 마귀의 말을 순종한 행동이었고, 또 지식을 얻으려고 한 것이었 다(창3:4-6), 그 걸과는 그들에게 수고와 죽음을 가져왔다(창 3 : 19). 하나님을 떠난 지식과 지헤는 우선 하나님을 무시한 교만이고 사실상 어두움이다.
인간의 교만과 어두움은 결국 괴로움을 가져온다. 그것은 철학사(哲學史)가 잘 증명해 준다. 철학사는 간단히 말해서 인류의 고민의 역 사이다. 신 28 : 29 에 "네가 백주에도 머듬고 네 길이 형통치 못하여"라고 한 것 같이, 인류는 교육을 받아 무엇을 아는 것 같아도 사실상 인생 문제 는 해결하지 못하고 고민할 뿐이다. 이것이 이렇게 된 이유는, 그들이 조 상 때에 하나님과 같이 지혜로위지려고 하나님을 반역하였기 때문이다(창 3:4-6), 이 사실과 관련된 말씀은 고전 1 : 19 에 나온다. 곧,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멀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고 하였다. 석 가모니가 인생 문제를 연구하여 깨달았다는 것이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인생에게 대한 그의 비관주의 (pessimism)이다. 그는 인생의 구원질을 깨닫지 못하였다.
1 : 특별 참고
그는 하나님을 제외하고 인생을 잘못 보았기 때문에 인생의 존재를 괴롭게 여겼다. 그는 인간 존재 자체가 피로운 것이라고 하었다.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면 모든 것에서 괴로움을 느낀다.
특별참고 불교의 허무 사상.
1. 존재론적 염세주의.
불교의 연세주의는 어디까지나 존제본적이다. 다시 말하면 불교에 의하여 인간 이 께 닫는 대로의 모든 존재는 허무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번뇌와 고통은 존재 그것 때문이며, 존재에서 해방된 것이 곧 열반(Nirvana)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람이 존재에서 벗어나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라고 한다. 그 이유는 사람이 죽으 면 또 다시 윤생 (輪生)의 원리에 의하여 다른 것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윤생에서 해탈되기 위하여 많은 불교도들은 현실을 등지고 참선 공부를 힘 쓴다. 우리는 블교가 얼마나 윤생(輪生)에 대하여 많이 말하는 것을 불경(佛經)에서 찾 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비유 경전에 있는대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곧, 석가모니 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어떤 곳에 가니 아름다운 처녀가 있었다. 그가 그 처녀에게 물 기를 "그대는 전생에서 무엇을 하였기에 이렇게 미인이 되었는가?" 하였다. 그때 에 그처녀가 대답하기를, "나는 전생(前生)에 불가의 정사(亭舎)가 밤중에 어두워 진것을 보고 불을 켜 놓은 일이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이 세상에 미인으로 태어났다" 라고 하였다. 이같이 모든 사람들은 과거의 많은 윤생을 경유하여 현재의 사람이 되 었다고 하는 것이 불교의 사상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현재 살고 있는 한 사람의 과거 윤생 회수는 거의 무한하다고 보며, 이때까지 한 사람이 윤생해 온 몸들의 더 를 모아 쌓는다면 세계에 가득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어미에게서 열어 먹은 젖을 모아 놓는다면 네 가지 큰 바다보다 많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부모되었던 자가 다시 그 후손으로 태어나기도 한다고 하니, 조상이 다시 후손이 되기도 한다 는 이론이다. 불교에서 육식(肉食)을 하지 않는 이유도 자기 조상이 그 집승일 수 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입능 가경의 말). 그런데 이 소위 윤생은 얼마나 두려운 법인가? 불교의 교훈에 의하면 사람의 잡 념 한 가지가 좋지 못한 업보를 받아 후세에 다시 한 몸으로 태어난다고 하며 하루전도서 주석. 에 수만개의 잡념이 오고 가는데 그것이 모두 후세에 입보를 받아 봄으로 태어난 타고 한다. 죄복 보충경에 말하기불,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얼굴이 추하고 더러운이 유는 전생에서 얼굴을 찡그리고 화를 많이 낸 까닭이며, 사람이 이 세상에서 범어 미가 된 것은 전생에서 사람들을 비방한 까닭이라고 하며, 이 세상에 큰 뱀으로 배 어난 것은 전생에 권모 술수에 의하여 사람들을 많이 농탁한 이유라고 한다.
그리 고 사람이 이 세상에서 철병에 걸려 있는 것은 전생에 남들을 때리기 좋아한 연고 라고 한다. 또 업보 차별경에는 말하기를, 사람이 이 세상에서 단명하게 되는 것 은 전생에 살생을 많이 한 까닭이라고 하며, 사람이 이 세상에 언청이로 태어난 것 은 컨생에서 낚시질을 많이 한 까닭이라고 한다. 위에 소개된 윤생설(論生說)이 극히 상상적이고 기피한 것입은 독자들도 밝히 알 수 있는 것이다.
2. 지식론적 염세주의. 불교에서는 삼라만상을 하나의 신기루(mirage)로 간주해야 된다고 한다. 기신론 (起信論)에 말하기를, "일체 모든 법이 오직 방상 하나를 의지하여 차별이 있느니 마 만일 방상 하나만 없이 한다면 일체 경제선이라는 것이 없어질 것이라"고 하였 다. 인생의 눈에 보이는 것이 여름날의 신기루 같다는 사상은 랑카바타라경에 많 이 강조되고 있다(90-96). 그러므로 불교도(佛敎徒)는 이런 허망한 세계판에서 건 집 받기 위하여 참선 공부를 힘쓴다. 블교의 교훈에 의하면 참선 공부에 의하여 마음에 신기무를 면하고 본언에 불아 간 것을 가리켜 집으로 돌아간 상태라고 한다.
이와 같이 된 것은 형이상학적 사 색(形而上學的思索)의 결과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자아(自我)의 발전 혹 은 십리적 창작이 아니다. 참선 공부에 있어서 논리적 십리적 사색은 도리어 견성 (見性)에 방해가 된다고 한다. 참선하는 자가 발견한 불성은 그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자신으로 알려진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불교는 어디까지나 자윤주의 (自 律主義)에 속한다. 이 점에서 붙교는 기독교와 징반대 되는 사실이 드러난다. 참선 공부의 중요한 방법은 정신 통일법으로서 잡념을 물리치는 훈련이다.
그 방법 중하 나는 머리와 몸의 자세를 똑바로 하고 고요히 앉아서 전신의 힘을 하부(下腹)에 집 중시키고 호흡을 고르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보면 불교에 있어서는 사람
1 : 특별 참고
이 자기 힘으로 정신을 봉일시키는 것으로 그 종교의 복적에 도달한다는 것이 드러 난다. 불교에서 정신을 봉일시킨다는 것은 멸상주의(誠相主義)에 도달함이다. 불교는 털상을 인간의 이상적 마음 상태로 본다. 면상주의는 긍정(肯定)이나 부정(否 定)을 다 피하는 정신 상태라고 생각된다. 멸상주의를 알려면 금강경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구제 문제에 태하여 금강경에 다음과 같이 기특되었다. 끝,
"다시 수보리야 보살은 응당히 법에 머무른 바 없이 보시를 행할지니 이른바 색에 머물지 않은 보시이며, 빛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부 딪침과 측량함에 머물지 않고 하는 보시너 수보러야 보살은 응당히 이렇게 보시 할 것이고 상(相)에 주하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한다 (금강경 제4 묘행무주분), 서 가보니의 이와 같은 말은 성경 마 6 : 3-4의 말씀과 비교할 만하다. 거기 말씀하 시기를, "너는 구제한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 합이 은밀하게 하라 은민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러라"고 한다.
그러나 이 들은 서로 다르다. 금강경의 말은 사람이 자기의 전성(見性)을 위한 자율주의적인 반면에, 마태 복음의 말씀은 하나님을 섭기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 참선 공부는 무 엇을 목표한 것인가? 그것은 분론 인간의 직관(直觀)에 의하여 열반(Nirvana)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다. 얼반은 무엇인가? 린 센(Linssen)은 말하기를, "그것은 자 아 사색 발전의 다는 불을 멀절시킴이다. "라고 하였고(Nirvana is the extinction of the flame of the "I process"), 또 말하기를, "열반은 인간을 비인간화(非人間 化) 시키는 것이 아니고 인간 성취의 풍부를 확보한다. "라고 하였다(That is the way we believe that nirvana does not bring a bout the dehumanization of the human, but confirms the plentitude of its accomplishment.-Living Zen, the Mcmillan Company, New York, 1960, p.139). 통양에서 참선(총폐)에 유 명한 사람을 육조 대사(六祖大師)라고 한다. 그는 당나라 사람으로서 그 이름은혜 능이다(Hui-neng一想能 A.D. 638-713). 그가 설법집 (說法集)을 남겼는데 그것 을 가리켜 법보 단경이라고 한다. 육조의 주요 사상을 법보 단경에서 뽑으면 멸상 주의에 불파한 것이다. 에 를 들면,
① "미도 여이고 각도 여이며 진모 제하고 망도 제한즉 불성을 본다"고 한 말(雌迷離覺常生般若除眞除妄即見佛性, -법보 단경, p. 108),
② "만일 법신을 찾고자 할진대는 모든 법상을 여이어 마음을 씻을지니라"고
전모서 주서 . 안 말(若欲當來覺法身離諸法相心中洗。 -같은 채, p.121),
③ 여승이 불경을 불잡고 글자를 불을 때에 그는 데 탑하기를, "모든 부처의 묘한 이치는 문자에 관계 함이 아 니니라"고 한 말(諸佛妙理非關文字.一같은 채, D. 124),
④ "세상 사람이 밖으로 미 하여 상에 착하고, 안으로 미하여 공에 착하거니와 만일 능히 상에서 상을 여이고 콩에서 공을 여이면 끝 이 안과 밖으로 미하지 않음이너라"고 한 말(世人外迷着相 內述着空若能於相離相於空離空即是內外不迷,一같은 책 , p. 134).
⑤ "생 각이 없으매 생자이 끈 바르고 생자이 있으매 생각이 사특하여지느니라"고 한 말(無念念即正有 念念成邪, -같은 책, p. 138),
⑥ "닦음을 일으킴이 다 망봉이요 주함을 지킴이 전 정이 아니라"고 한 말(起修皆安動守住匪真精,一같은 책 , p. 148),
⑦ "네가 허공이 모양이 있음을 브았느냐 안보았느냐 지상(智常)이라는 중이 대답하기를, 허공은 형 상이 없으니 무슨 모양이 있으리이까 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너의 본성이 오히려 히공과 같아서 마침내 한 물건도 가히 볼게 없음이 이 이름이 정건이요 마침내 한 물건로 가히 알게 없음이 이 이 름이 참 지식이라"고 한 말(彼日汝見虚空有相貌否對 月虚空無形有何相貌彼日汝之本生滑加虚空了無物可是是名見了無一物可知是名眞知 →같은 책, p.151),
⑧ "네가 자기의 본심을 보고 밖의 법상에 착하지 말라"라고 한 말(汝靓白本心莫着外法相.一같은 책, p.155),
⑨ 지성(至誠)이란 중이 도통하 기 위하여 뉴 앉아 있어서 눕지도 않는 것을 표준으로 삼을 때에 그는 대답하기 큰, "마음을 머블고 고요히 보는 것은 병이라, 참선이 아니요.늘 앉아서 몸을 구속 (拘束)함이 이치에 무슨 유익이 있느냐"라고 한 말(住心観靜是病非禪長坐拘身理同 益.-같은 책, p.184) 등이다. 위에 소개된 육조 내사(六祖大師)의 논리는, 인간의 개념에 의한 지식을 모두 착 각으로 문린다. 그는 소위 깨친 마음(인간의 마음 자체)만을 인정하였다. 이와 같 은 지식 행위는 전국 인간의 마음을 진리 관단의 권위(權威)로 여기는 잘못된 것 이다. 인간의 바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였다(볩 17 : 9). 오직 하나님 의 말씀만이 진리 판단의 유인한 권위이다.
3.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점,
(1) 불교는 만물에 대한 창조자가 있음을 부인하나 기독교는 그것을 주장한다. 불교도(佛教徒)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한 필요를 느꼈다면 그런...
1 : 14-15 27 절대자(絕對者)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를 오해한 말이다. 하 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자기의 어떤 부족을 채우시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는 만물이 없어도 자충족자(自充足者)이시다. 그가 만물을 창조하신 복적은 인 뮤틀 위하심이다.
(2) 불교는 구속자(救贖者)와 및 구속의 도리를 믿지 않고 자아(自我)를 발견하 는 것을 그 중교의 목적으로 삼는다. 그와 반면에 기독교는 어터까지나 인간을 죄 인시(罪人視)하고, 그 죄 가운데서 구원 받는 것은 타율주의 (하나님이 주신 방법) 에 의하여서만 된다고 믿는다.
(3) 불교도는 기독교에 대하여 잘못 비평하기를, 기독교의 구원론은 영적 제국주 의(靈的帝國主義)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렇게 비평하는 이유는, 기독교는 하나님의 권위(權威)로 인간의 구원을 성립시키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같은 이론은 구원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알지 못한 오해이다. 불교도들이 말한 대로 불교는 어디까지나 평화롭게 사람들의 마음을 모든 잘못된 사상에서 해방시키기를 원한다 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만이다. 인간 자력(自力)으로써는 자기 자신을 구 원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니, 인간은 권위에 순종하기를 토리어 기뻐해야 된다. 그 것이 신앙이다. 또한 에수님께서 유월전 잡수실 때에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 라"고 하신 그 말씀에 대하여 불교도는 다음과 같이 비평한다. 곧, "진정한 성자 라면 모든 시대 사람들에게 자기를 기념해 달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은 피조물이며 죄인인 사실과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또한 진 리 자체이신 사실을 알지 못하는 무식에서 나온 말이다. 인간은 예수님을 기 역할 수록 진리를 깨달으며 자유와 구원을 얻는다. ⓮~⓯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 이로다 구부러진 것을 끝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도다. 이것은 하 나님을 제외한 지혜와 지식은 결국 헛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런 지 헤나 지식이 사실상 궁극적(窮極的)으로는 아무 문제도 해결해 주지 못하 기 때문이다.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란 말씀이 그 뜻이다. 오 늘날 의학(醫學)이 발달되었다고 하지만 의학으로 질병 문제를 다 해결하
가) 호천신호 28 전도서 주석 지 못한다. 새로운 약이 많이 발명됨에 따라서 전에 없던 새로운 병도 나 타난다. 이것을 가리켜 자연계의 균형 작용(levelling process)이라고 한다. 그리고 파학의 반달에 따라서 핵무기(核武器)가 발명되기도 하였으나 그때 문에 인류의 근심은 머 커졌다. 원자 무기에 의한 전쟁이 일어나면 인류 는 모두 다 멸전될 것이 내다보인다. 선혹 원자 무기를 먼저 쓰는 나라가 일시 그 상대 적국을 패망케 한다 해도 그 승전국 사람들도 그 터뜨린 원 자탄에서 생긴 원자운(原子雲) 때문에 멸망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핵보 유국(核保有國)들도 이 사실 때문에 근십과 걱정을 하고 있다.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도다. "(15절). 이 말씀도 그 상반절의 뜻과 유사 한 것이다. 그것은 불완전한 것을 완전케 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곧, 인간의 지혜로는 망할 인간을 구원할 길이 없다는 뜻이다. 렘 13 : 23 에 말하기를,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러라"고 하였다. 누구든지 자기의 지혜로 자기를 구원할 수 있을 듯이 생각하면 그는 소 맘이 없다. 잠 26 : 12에 말하기를,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 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고 하였다. 그러 나 솔로몬처럼 자기의 지혜를 밑지 않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예수님은 "보지 못하는 자블"로 보게 하시는 구주님이시다(요 9 : 39).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저내라"라고 한 뷔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 사하리로다"라고 하였다(름 7:24-25). 그는 전도할 때에도 사람의 지혜로 하지 않기를 힘썼다(고전 2:1-9).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안다는 것으로 만족을 느끼면 안된다. 루터 (Lu. ther)는 요한복음 9 : 1-41 강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우리가 홀. 륭하다 하고, 즐거워할 만하다 하고, 부요하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은 빈핍하다 하시고, 병적이라 하시고, 약하다 하시고, 무능하다고 하 신다. "라고 하였다(Alles, was wir schön, lustig und reich nennen, heisst er
1:16-18 29 arm, krank, schwach und unvermögend. -Evangelien Auslegung, Vierter Teil, 1961, s. 297).
⓰~⓲ 내가 마음 가운데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큰 지혜를 많이 얻었으므로 나 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자보다 낫다 하였나니 곧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 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 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지혜가 많 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이 귀절들은 위의 말씀 곧, 해 아래의 지혜 (이 세상 지혜)가 헛되다는 것을 거듭 말하며 결론 한다. 여기 이른바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자"란 말은 솔로몬 이전에 예루살렘에 있었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은 참된 지 혜와 반대되는 그릇된 지혜를 말함이다. 참된 지혜에 대한 확신에 들어가 려면 그 반대편의 잘못된 원인이 무엇임을 알아야 된다. 선을 아는 자가 악에 대하여서도 알아야 할 것은, 그것이 왜 악이 되는지, 또는 그 결과 가 어떠한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이런 지식만 가지는 것은 헛되다는 것이 이 부분의 교훈이다. "지헤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서 세상 지 혜만 많이 소유한 자는 교만함으로(고전 8:1) 그 심령에 평안이 없다. 그 뿐 아니라 사람이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거기에 비례하여 그는 자기의 무지(無知)를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그에게는 번뇌도 많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