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 717] 쪽 |
|
종경록 제6권 |
|
|
연수 지음 |
송성수 번역 |
|
|
종경(宗鏡)에서의 본 생각은 그 도(道)를 논할 뿐이다. 설령 빠짐없이 글과 뜻을 진열한다 하여도 뭇 기류(機類)에게 널리 은혜를 입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지남(指南)과 같아서 끝내 따로의 뜻이 없는 것이니, 남몰래 글에 의지하여 그 종취(宗趣)를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약 그 도를 깨친다면, 이어받을 수도 있고 옷을 전할 수도 있다. |
어떤 사람이 남전 화상(南泉和尙)에게 물은 것과 같다. |
“황매(黃梅)의 문하(門下)에는 5백 사람이 있었는데, 무엇 때문에 노행자(盧行者) 혼자만 옷과 발우[衣鉢]를 얻었습니까?” |
스님이 말하였다. |
“499인은 모두가 불법(佛法)을 알았을 뿐인데, 노 행자 한 사람만은 불법은 모르고 그 도(道)를 알았을 뿐이다. 그 때문에 옷과 발우를 얻었느니라.” |
물었다. |
“그러한 도를 어떻게 압니까?” |
대답하였다. |
“본사(本師)께서는 ‘여래가 도량(道場)에서 얻은 법은 법이로되 법이 아니며 또한 법 아님도 아니다. 나의 이 법에서는 지혜로도 행할 수 없고 눈으로도 볼 수 없으며 행할 곳이 없어서 슬기로도 통달하지 못할 바요 총명으로도 알 수 없는 바며 물어도 대답이 없다’고 하셨다. |
또 옛 사람이 말하기를 ‘이 일은 공(空)한 것 같지마는 공하지 아니하고 |
|
|
[143 / 717] 쪽 |
있는 것[有] 같지만 있지 아니하며 은은하게 늘 보이는데 그 처소를 구하면 얻을 수 없을 뿐이다’라고 했다. |
그러므로 만약 결정코 공이라 하면 단견(斷見)에 돌아가고, 만약 실제로 있다 하면 상정(常情)에 떨어지며, 만약 처소가 있다 하면 그 경계[境]를 이룰 것이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이 일은 마음으로 측량할 바가 아니요, 지혜로써 알 바가 아니다.” |
향엄(香嚴) 화상의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앞뒤를 헤아리고 중간에 놓아두어도/깊은 샘에 빠져들어 한 법도 얻지 못하리라./도무지 이러하여 나와 나의 앞에 나타나지 않나니/시방의 학자(學者)들은 어떻게 참선(參禪)할꼬./만약 이렇다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
그러므로 옛 사람이 말하기를 “바로 미묘하게 회통(會通)하여야 비로소 옳다”고 했다. 이야말로 회통하지 않는 회통이어서 미묘하게 그 속에 계합한다. |
그러므로 선성(先聖)의 오도송(悟道頌)에서 말하기를 “있다ㆍ없다ㆍ간다ㆍ온다는 마음이 영영 쉬어서/안팎과 중간에 통틀어 없구나./여래의 참 부처의 처소 보려 하거든/돌 염소[石羊]가 망아지를 산 채로 잡음을 보라”고 했다. |
이렇게 미묘하게 통달한 뒤에도 도(道)는 오히려 존재하지 않거늘, 어찌 다시 안다 모른다는 망상(妄想)을 논할 수 있겠는가? |
고덕(古德)의 게송과 같다. |
“그대에게 권하나니 도를 배우되 탐구(貪求)하지 말라./만사가 무심(無心)이면 도는 끝[頭]에 합하리니/무심해야 비로소 무심의 도 체득하며/체득한 무심의 도 또한 쉬리라.” |
옛날 동산(洞山) 화상의 게송에 이르기를 “이것[者箇]도 오히려 옳지 않거늘/하물며 장삼 이사(張三李四)이겠는가?/진공(眞空)과 비공(非空)을/가지고 오되 서로 비슷하지 않으며/분명하여 마치 눈앞의 것 같지만/털끝 만큼의 헤아림도 용납되지 않네”라고 했다. |
이것[者箇]이라 해도 오히려 옳지 않다 했거늘, 하물며 그 밖의 미친 근기들의 잘못 앎이겠는가?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기를 “마음은 도(道)를 잡아매 |
|
|
[144 / 717] 쪽 |
지 아니하고 또한 업(業)을 맺지도 아니한다”고 하셨다. |
도조차도 오히려 잡아매지 않거늘, 하물며 이것을 알 수 있겠는가? 종경(宗鏡) 안에 들면 저절로 계합하리라. |
[문] 각의 체[覺體]는 옮기지 않고 거짓 이름에만 다름이 있을 뿐이다. 범부와 성인이 이미 평등하거늘 중생은 어찌하여 깨달아 알지 못하는가? 만약 미혹함이 없다고 말한다면, 교(敎) 안에서 무엇 때문에 미혹과 깨침[迷悟]이 있다고 말하는가? |
[답] 다만 본각(本覺)의 진심(眞心)으로 인하여 불각(不覺)을 일으키게 되고, 불각으로 인하여 시각(始覺)을 이를 뿐이다. 마치 땅으로 인하여 넘어지고 방향으로 인하여 미혹함과 같으며, 또 땅으로 인하여 일어나고 방향으로 인하여 깨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깨닫는 때에 비록 깨쳤다손 치더라도 깨친 처소는 언제나 공(空)이요, 깨닫지 않으면 미혹한 것 같으나 미혹한 때 본래 고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미혹과 깨침이 한 즈음[一際]인데 정상(情想)이 저절로 나누어져서, 허망한 마음이 있게 되었으므로 도리어 허망한 약을 베푸는 것이다. |
경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기를 “내가 3승(乘) 12분교(分敎)를 말한 것은, 마치 빈주먹으로 어린아이를 속인 것과 같다”고 하셨다. 이 일을 모르면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
조사(祖師)의 게송에 “여래의 온갖 법은/나의 온갖 마음을 제거하는 것이다./나에게 온갖 마음이 없거니/어찌 온갖 법이 필요하겠는가?”라고 했다. |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자기 눈이 뜨이면 참 광명이 저절로 나타나서 다스릴 대상[所治]인 미혹과 깨침에는 소견의 병이 벌써 없어졌을 것이고 능히 다스림[能治]의 방편권도와 진실[權實]에는 법의 약이 저절로 쓸모없어질 것이다. |
이 법을 깨치는 것은 다른 이의 지혜와 다른 기술을 빌리지 아니한다. 혹은 바로 보는 이는 마치 광을 열어서 보배를 취하고 조개를 쪼개서 진주를 얻는 것과 같아서 광채가 가슴 속에서 나타나고 그림자가 법계(法界)를 머금으리라. |
경의 게송에서 “마치 사람이 보배광을 얻게 되어/영원히 가난의 고통을 여 |
|
|
[145 / 717] 쪽 |
의듯/보살이 부처의 법을 얻으면/때[垢]를 떠나 마음이 청정하여진다”고 하였는데 혹시 깨치지 못한 이는 저절로 장애가 생긴다. |
그러므로 『통심론(通心論)』에서 이르기를 “참되고 항상하여 변하지 않건마는 생멸에 막힌 이는 지극한 진리의 원만한 통달에서 저절로 멀어지고, 모나고 둥근 것에 고집하여 막히게 되었다. 이것은 모두가 제 성품[自性]을 미혹하여 의통(依通)을 따르는 것일 뿐이니 자기 눈이 뚜렷이 밝아져서 남을 따르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
융(融) 대사의 게송에서 “눈먼 개가 우거진 띠풀을 보고 짖자/소경은 도둑이며 범이라고 외치네./소리 따라 본래 헷갈리게 되었거니/진실한 눈으로 봄이 없는 탓일세”라고 했다. 만약 마음이 열리고 진리를 비추는 때가 되면, 모든 소견이 다 끊어져서 불법이 옳다고도 보지 아니하고 세간법이 그르다고도 보지 않으리니, 제 성품 안에서는 말과 생각의 길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
예를 들어 “옳은 것 없는 이것이 바로 보리(菩提)니, 부처의 보리를 옳은 것이 있는 이 극단[邊]에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니 지금의 그대로요 편히 놓아 둘 필요가 없을 뿐이다. 체(體) 스스로가 비고 현묘함은 마치 유리보배가 있는 곳을 따라서 본성은 잃지 않는 것과 같다. 만약 이 일을 알아 얻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 |
마음대로 이 온갖 범부ㆍ성인과 훌륭함ㆍ하열한 빛이며 그림자가 그 안에서 나타나되 그 성품은 동요하지 않는데, 이 일을 모르는 사람은 곧 앞의 빛깔이 변화함에 따라 곱고 누추함을 분별하면서 기쁨과 슬픔을 낸다. 그런 까닭에 조사가 이르기를 “흐름[流]에 따라 성품을 알면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느니라”고 했다. |
『기신론(起信論)』에서 이르기를 “마음의 생멸문[心生滅門]이란, 여래장(如來藏)에 의지하여 생멸의 마음이 굴리게 되나니 생멸하지 않는 것과 생멸하는 것이 화합해서 동일한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것을,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한다. 두 가지의 뜻이 있는데, 능히 온갖 법을 포섭하고 능히 온갖 법을 내는 것이다. |
또 두 가지의 뜻이 있는데, 첫째는 각(覺)의 뜻이요, 둘째는 불각(不覺)의 뜻이다. 각의 뜻이란 마음의 첫째가는 이치의 성품[第一義性]으로서 온 |
|
|
[146 / 717] 쪽 |
갖 망념(妄念)의 모양을 여의며 온갖 망념의 모양을 여의기 때문에 허공의 경계와 같아서 두루하지 않는 바가 없으며, 법계의 일상(一相)이 그대로다. 이것은 온갖 여래의 평등한 법신(法身)이며, 이 법신에 의지하여 온갖 여래가 본각(本覺)임을 설명하고 시각(始覺)을 상대(相待)하여 본각을 세운다. 그러나 시각일 때에 곧 이것이 본각이라 따로 각(覺)의 일어남이 없다. |
시각을 세운다는 것은 본각에 의지하여 불각이 있음을 말하며, 불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시각이 있다고 설명한다. 또 마음의 근원을 깨닫기 때문에 구경각(究竟覺)이라 하고, 마음의 근원을 깨닫지 않기 때문에 비구경각(非究竟覺)이라 한다. 내지 망상의 마음이 있게 되기 때문에 능히 명의(名義)를 알며, 진각(眞覺)을 말하게 되거니와 만약 불각의 마음이 없으면, 진각이라는 제 모양을 말할 수 있는 것조차 없다”고 했다. |
소석(疎釋)에 이르기를 “만약 물듦[染]을 따르고 흐름[流]을 따라 불각을 이루면 세간의 법을 포섭하고, 가령 변하지 않은 본각과 흐름을 거스르는 시각은 출세간(出世間)의 법을 포섭한다”고 했다. |
초해(鈔解)에 이르기를 “본각과 시각의 두 각(覺) 중에서 포섭하는 법으로 논한다면, 가령 본각을 포섭한 바는 바로 대지혜 광명의 이치[大知慧光明義]요, 법계를 두루 비춤의 이치[遍照法界義]요, 진실하게 앎의 이치[眞實識知義] 등이다. 만약 시각의 포섭한 바라면, 바로 3명(明)ㆍ8해탈(解脫)ㆍ5안(眼)ㆍ6신통(神通)ㆍ10력(力)ㆍ4무외(無畏)ㆍ18불공법(不共法) 등이다. 그러나 이것을 진실에 의거하면 곧 같고, 뜻으로 말하면 또한 다르다. |
그러므로 소(疎)에 이르기를 ‘생멸문(生滅門) 안에서 흐름을 따르면 불각(不覺)이요 흐름을 거스르면 시각(始覺)이다’라고 했다. 뜻의 용(用)에서라면 포섭하는 법이 같지 않거니와, 만약 진여문(眞如門) 중에서라면 녹아서 하나로 포섭되므로 더러움[染]과 깨끗함[淨]이 다르지 않다. 한 진여(眞如)의 이치가 그를 융합하여 더러움이 곧 더러움이 아니게 하고 깨끗함이 곧 깨끗함이 아니게 하므로, 더러움 그대로가 깨끗함이어서 깊이 한 맛이 되기 때문에 다르지 아니하다”라고 했다. |
논(論)에서 “온갖 모든 법은 본래부터 언설(言說)의 모양을 여의고 명자 |
|
|
[147 / 717] 쪽 |
(名字)의 모양을 여의고 마음으로 반연하는[心緣] 모양을 여의어서 마침내는 평등하여 변하거나 달라짐이 없고 파괴할 수도 없나니, 이는 한 마음일 뿐이기 때문에 진여라고 한다”고 했다. 이것으로 각과 불각의 반연을 따라 더러움과 깨끗함을 내는 것 같지만 연생(緣生)에 성품이 없고 더러움과 깨끗함이 다 함께 비었음을 알게 된다. |
또 이르기를 “언설의 모양을 여의었다”고 하였으니 어찌 말로써 말하며, “마음으로 반연하는 모양을 여의었다”고 하였으니 어찌 마음으로써 헤아릴 수 있겠는가? 실로 마음은 말의 길이 끊어졌고 증득해야만 상응하는 것임을 말한다. |
또 언설이라는 것은 각관(覺觀)으로부터 나며, 이는 공통의 모양[共相]이 어울려서 분별(分別)을 일으키는 것이므로 의식(意識)으로 인하여 나는데 이것은 헤아리고 견주면서 일어난다. |
요약하여 말하면 불각(不覺)의 교관(敎觀)으로부터 따라 나므로 만약 불각의 마음이 없으면 온갖 모든 법 모두가 제 모양[自相]으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방편문(方便門)을 제거하고 그들을 위하여 구경(究竟)을 열어 보이며 말이 없는 도[無言之道]에 지시하여 돌아가게 한다. |
그러므로 논(論)에 이르기를 “만약 불각의 마음을 여의면 일체 모든 법은 제 모양으로서 말할 수 있는 것조차 없다”고 했다. 각(覺)은 불각(不覺)에 대(對)하여 공통의 모양을 설명하면서 구르는 것이니, 만약 불각이 없으면 각의 제 모양은 없다. 마치 한 손바닥으로는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
더러움과 깨끗함의 모든 법에 이르기까지 다 역시 그렇다. 모두가 상대하면서 있게 되며, 마침내 자체(自體)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만약 긴 것을 여의면 어떻게 짧은 것이 있겠으며, 높은 것을 여의면 어떻게 낮은 것이 있겠는가? 만약 종경(宗鏡) 안에 들어가면 저절로 상대가 끊어지리라. |
또 초(鈔) 가운데에서 말하였다. |
“‘생멸과 진여가 저마다 모든 법을 포섭하는데, 모르겠습니다만 이 포섭의 뜻은 다릅니까, 같습니까?’ |
대답하였다. |
|
|
[148 / 717] 쪽 |
‘다르다. 왜냐 하면 생멸[문]중에서는 골고루 포섭한다[該攝]고 하고, 진여[문]중에서는 녹여서 포섭한다[融攝]고 하나니, 골고루 포섭하기 때문에 더러움과 깨끗함이 함께 존재하고, 녹여서 포섭하기 때문에 더러움과 깨끗함이 같이 없어진다. 같이 없어지기 때문에 한 맛으로 나누어지지 아니하며,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차별이 분명하다.’” |
『마하연론(摩訶衍論)』에서는 말하였다. |
“이 두 가지 각(覺)에는 두 가지 문이 있다. 첫째는 간략히 설명한 본각의 안립문[本覺安立門]이요, 둘째는 간략히 설명한 시각의 안립문[始覺安立門]이다. 본각문(本覺門) 중에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첫째는 청정한 본각문[淸淨本覺門]이요, 둘째는 염정의 본각문[染淨本覺門]이다. 시각[문]중에도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첫째는 청정한 시각문[淸淨始覺門]이요, 둘째는 염정의 시각문[染淨始覺門]이다. |
무엇 때문에 청정한 본각이라 하느냐 하면, 본래부터 존재한 법신[本有法身]은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항하 모래보다 더한 덕(德)을 완전히 갖추고 원만하여서 언제나 밝고 조촐하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염정의 본각이라 하느냐 하면 제 성품의 청정한 마음이 무명(無明)의 훈습(熏習)을 받아 생사에 유전하며 끊어짐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청정한 시각이라 하느냐 하면, 무루의 성품인 지혜[無漏性智]는 온갖 한량없는 무명을 벗어나서 온갖 무명의 훈습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을 염정의 시각이라 하느냐 하면, 반야(般若)가 무명의 훈습을 받아 능히 여의지 못하기 때문이다. |
이와 같은 모든 각(覺)은 모두가 지혜의 권속인데 무슨 도리[理]를 증득하여 체분(體分)으로 삼아야 하느냐 하면, 성품의 진여[性眞如]와 허공의 도리[虛空理]이다. 이와 같은 두 도리에는 저마다 두 가지가 있다. |
무엇을 두 가지의 진여라 하느냐 하면, 첫째는 청정한 진여[淸淨眞如]요, 둘째는 염정의 진여[染淨眞如]이다. 허공의 도리도 역시 그와 같다. |
무엇 때문에 청정한 진여라 하느냐 하면, 두 가지 청정한 각[淨覺]으로 증득할 바 진여로서 훈습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염정의 진여라 하느냐 하면, 두 가지 염정의 각[染淨覺]으로 증득할 바 진여로서 훈습을 여의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공의 도리 역시 그와 같다. |
|
|
[149 / 717] 쪽 |
어떠한 이치 때문에 억지로 본각(本覺)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글자와 일[字事]의 차별된 그 모양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기를 ‘본과 각에는 저마다 열 가지가 있으며/체(體)는 비록 같으나 글자와 일은/저마다 서로가 다르기 때문이니/뿌리[根] 등으로 박히는 이치가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
논(論)에서 말하였다. |
“본(本)과 각(覺)에는 각각 열 가지씩이 있다. 무엇이 열 가지 본(本)이냐 하면, 첫째는 뿌리라는 글자와 일의 본[根字事本]이니, 본래부터 존재한 법신[本有法身]이 온갖 공덕을 잘 머물러 지님은 마치 나무의 뿌리가 온갖 가지와 잎과 꽃 및 열매를 잘 머물러 지녀서 무너뜨리지도 않고 잃지도 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둘째는 근본이라는 글자와 일의 본[本字事本]이니, 본래부터 존재한 법신은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저절로 성품[性]이 존재하며 어디로부터 비롯했거나 일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는 멀다라는 글자와 일의 근본[遠字事本]이니, 본래부터 존재한 법신은 그 덕(德)이 존재하는 때가 겹겹으로 오래고 멀어서 분한이나 지경이 없기 때문이다. 넷째는 스스로라는 글자와 일의 근본[自字事本]이니, 본래부터 존재한 법신은 나[我] 스스로가 나를 이룬 것이요 남이 나를 이룬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바탕이라는 글자와 일의 근본[體字事本]이니, 본래부터 존재한 법신은 모든 곁가지의 의지(依止)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
여섯째는 성품이라는 글자와 일의 근본[性字事本]이니, 바꾸어지지 아니하는 이치로서 언제나 이룩되었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머무름이라는 글자와 일의 근본[住字事本]이니, 본래부터 존재한 법신은 머무름이 없는 데에 머물러서 가거나 옴이 없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항상함이라는 글자와 일의 근본[常字事本]이니, 본래부터 존재한 법신은 결정코 실제(實際)여서 유전함(流轉)이 없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굳건함이라는 글자와 일의 근본[堅字事本]이니, 본래부터 존재한 법신은 바람의 형상[風相]을 멀리 여의고 견고하여 동요하지 아니함이 금강(金剛)과 같기 때문이다. 열째는 통틀어라는 글자와 일의 근본[總字事本]이니, 넓고 크고 원만하여 두루하지 않는 바가 없어서 통한 체[通體]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열 가지 본(本)이라 한다. |
무엇이 열 가지 각(覺)이냐 하면, 첫째는 거울이라는 글자와 일의 각[鏡 |
|
|
[150 / 717] 쪽 |
字事覺]이니, 살바야의 지혜[薩般若慧]는 깨끗하고 밝고 희어서 티끌의 허물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열다라는 글자와 일의 각[開字事覺]이니, 살바야의 지혜는 통달하고 나타남이 환하여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 셋째는 하나라는 글자와 일의 각[一字事覺]이니, 살바야의 지혜는 홀로 높고 하나뿐이어서 견주어 헤아림이 없기 때문이다. 넷째는 여읨이라는 글자와 일의 각[離字事覺]이니, 살바야의 지혜는 제 성품이 해탈하여 온갖 가지가지의 속박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가득함이라는 글자와 일의 각[滿字事覺]이니, 살바야의 지혜는 저절로 한량없는 갖가지 공덕을 완전히 갖추어서 적은 바가 없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비춤이라는 글자와 일의 각[照字事覺]이니, 살바야의 지혜는 큰 광명을 놓아 온갖 한량없는 경계를 두루 비추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살핌이라는 글자와 일의 각[察字事覺]이니, 살바야의 지혜는 항상 분명하여 미혹함과 어지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나타남이라는 글자와 일의 각[顯字事覺]이니, 살바야의 지혜는 청정한 바탕 안에서 깨끗한 품류의 권속들이 모두 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앎이라는 글자와 일의 각[知字事覺]이니, 살바야의 지혜는 온갖 법에서 깊이 궁구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열째는 깨달음이라는 글자와 일의 각[覺字事覺]이니, 살바야의 지혜가 지닌 바 공덕은 깨달아 비춤이 있을 뿐 하나하나의 법마다 깨달은 것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열 가지 각(覺)이라고 한다고 한다. |
이와 같은 열 가지의 본(本)과 각(覺)에 관한 글자의 뜻은 한 가지 본래 성품인 법신(法身)에 의하여 뜻을 따르면서 해석이 다른 것일 뿐, 그 자체(自體)에 의거하건대 다른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
이 안에서 말한 바의 두 가지 본각 중에서는 어느 본각이어야 하느냐 하면, 청정한 본각이요 염정의 본각이 아니다. 염정의 본과 각의 글자의 뜻의 차별에는 그 모양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
“염정의 본과 각 중에는/저마다 열 가지씩의 뜻이 있으니/앞에서 해설한 열 가지 일 중에서/저마다 여읨[離]의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
논(論)에서 말하기를 “이 본각 중에서도 저마다 열 가지 씩이 있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앞의 열 가지 뜻 가운데서 저마다 제 성품을 지키지 않는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으니, 글자와 일의 배속(配屬)되는 향방을 알아 |
[스크랩] 종경록 제6권 (tistory.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