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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풍광에 담은 삶의 비의秘義
김종회
1. 불교적 세계관과 깨달음의 통로
하순명은 전남 진도 출생으로 1997년 『교단문학』, 1998년 『문예사조』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지금까지 모두 4권의 시집을 상재했고 이번에 내는 『물의 입, 바람의 입』은 다섯 번째 시집이다. 그동안 여러 차례의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여러 문인 단체의 임원을 역임한 바 있다.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심장에서 통증이 자랄 때마다” 들꽃이 되고 나무가 되며 “물의 입”과 “바람의 입”으로 말한다고 했다. 이렇게 객관적인 자연 풍경을 소재로 하여 시를 쓰고, 그 “시를 안고” 세상을 건너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만나고 관찰하는 자연은 단순한 객체가 아니라 시인의 적극적인 의식이 반영된 세상살이의 거울이다. 1부에 실린 시는, 특히 이를 불교적 세계관으로 응시하며 새로운 각성의 통로를 연다.
북적이던 어느 상가喪家에서
적막이 지금 떠나는 중
바람이 불고 조등이 흔들리고
높은 가지에서 한 생生이 아무도 모르게
흰 소리로 내려온다
찰나, 비에 젖다 가는 시간을 전송하며
생애의 울음을 멈추어 버렸다
뒤따르는 슬픔이 떨어진 흰 꽃송이에
눈물처럼 내려앉는다
―「흰 동백」 전문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동백꽃은 대개 진홍의 붉은 색이며, 그 꽃말은 “뜨거운 사랑”이다. 흰 동백꽃은 흔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아주 보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그 꽃말이 사뭇 특이하여 “비밀스러운 사랑”이다. 흰 동백을 들여다보며 시인은 인생의 한 국면을 떠올린다. “높은 가지에서 한 생生이 아무도 모르게 흰 소리로” 내려오고 있으니, 아마도 낙화(落花)의 순간인 듯하다. 하지만 시인은 이를 훨씬 증폭하여 “북적이던 어느 상가喪家에서 적막이 지금 떠나는 중”이라고 말한다. 꽃이 지는 질박한 광경이 어느결에 “생애가 울음을 멈추는” 절체절명의 경점(更點)으로 전화(轉化)된 형국이다. 이처럼 자연스럽게 의미의 확장을 도모할 수 있는 솜씨는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도솔암 계곡의 나무 한 그루
길을 찾아 허공을 더듬어 올라갔다
마디를 이어 그 끝에 초록의 눈을 짓고 바람과 교신했다 //
저편의 하늘이 이동하는 날 쏟아지는 구름의 무리와 손을 잡고
우기에는 머리 위로 지나가는 바람의 통로마저 암기하였다
지상에 깊이 뿌리를 묻는 동안 기립하여 손을 올리고
나무초리로 밀고 올라가는 뜨거움에
으스러지도록 세상을 껴안았다
길이 사라진 계절에도 잎새 한 장 허투루 떨구지 않고
때를 기다려 온몸을 찬찬히 비워낸
수.행.자
묵묵히 눈을 감고 서서 다시 봄을 빚고
온몸으로 길을 열어 온전한 나무가 되었다
―「수행자」
자연의 경관 가운데서 깨달음의 이치를 찾아내는 시적 기량은, 이 시인의 사상적 기저라 할 만한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도솔암 계곡의 나무 한 그루”나 “길을 찾아 허공을 더듬어” 올라가는 길 그리고 “바람과 교신” 같은 언사들은 불교의 구도(求道)나 공(空) 사상을 함축한다. 이와 같은 도정(道程)에 있는 행위의 주체는 “수행자”다. 그 수행자는 “길이 사라진 계절에도 잎새 한 장 허투루 떨구지 않고 때를 기다려 온몸을 찬란히 비워낸” 존재다. “온몸으로 길을 열어 온전한 나무가” 되었으나, 어느 누구도 그를 하나의 나무로만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무가 곧 시적 자아이고 시적 사유(思惟)의 주관자다. 이렇게 물아일체(物我一體)가 가능한 세계가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은 세계 인식의 방식 그리고 자연 친화의 글쓰기는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에 해당한다. 시인은 홍매화가 지는 자리에서 “발밑에 쓰러져 바닥에서 편안함을 느낄 때가 완성”(「홍매화 완성」)이라고 단언한다. 그러한 심성을 앞세웠기에 “안과 처방을 받은 후 두 눈을 봉하고 지내는 한동안”에 “보이지 않던 내가 또렷이”(「소요유(逍遙遊)」) 보이는 터이다. 이것은 다변과 달변이 가져다줄 수 없는 지경의 언어다. 지난날 “고통의 진리를 몰랐던 나”는 “지껄이는 모든 말들이 말없음표가 되기를”(「말없음표처럼」) 기구(祈求)한다. 이 시인이 개척한 통로를 따라가자면, 우리의 영혼 저 밑바닥을 두드리는 대오각성(大悟覺醒)이 그렇게 어렵지도 멀리 있지도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것이 이 시편들의 저력이기도 하다.
2. 세상 만유에 덧입는 마음의 빛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의 의미와 우리 삶에의 적용에 관한 수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동양문화권의 대표적인 고전 『논어』 양화편(陽貨篇)에서 공자는 이렇게 가르쳤다. “시를 배우면 연상력을 기를 수 있고, 인정과 풍속에 대한 관찰력을 향상시킬 수 있으며, 공동의 일을 위한 협동력을 익히고 정의감을 함양할 수 있다. 가까이는 부모를, 멀리는 군주를 섬길 때에 도움이 되며 시에 나오는 새·짐승·초목(鳥獸草木)의 이름을 많이 알게 된다.” 이와 같은 고색창연한 수사(修辭)가 결코 오랜 경전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순명의 이 시집 2부에 수록된 시들은, 1부에서보다 더 구체화하여 만유(萬有)의 물상과 그에 덧입는 마음의 빛깔을 감각적이면서도 정교하게 그려 보인다.
깊어진 가을을 데리고 아차산 능선을 걷는다
어디선가 나직이 산새가 운다
주홍빛 햇살무늬 흔들리는 오후
기억의 창고에서 지워진 시간을 꺼내 읽는다
새벽별같이 빛나던 화양연화일지라도
떠난 자 살아 있는 자
지금은 너도 나도 홀로
가슴으로 읽는 낙엽의 질감은 공평하리라
자연 앞에 푸르던 시간은 어디에도 없다
그저 단풍나무 한 잎 한 잎 저물어
경전 같은 몸들이 수북이 탑을 쌓는다
슬렁거리던 바람도 묵상에 들 준비를 하고 있다
차츰 내 신발의 무게가
쌓인 잎들의 침묵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는다
―「기억의 창고」 전문
이 시의 화자는 “깊어진 가을”에 기대어 “기억의 창고”를 소환한다. “깊어진 가을을 데리고 아차산 능선을 걷는” 오후에 “지워진 시간을 꺼내 읽는” 화자의 운동 범주는 사뭇 깊이 있고 또 단단하다. 그는 마침내 이렇게 언표(言表)한다. “자연 앞에 푸르던 시간은 어디에도 없다.” 가을은 언제나 홍엽과 조락의 계절이다. “신발의 무게”가 “쌓인 일들의 침묵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는” 이 환경 변화의 한 길목은, 시인으로 하여금 시간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사색하게 한다. 낙엽이 지고 나면 꽃이 피기까지 겨울의 혹한을 넘기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아차산 능선의 범상한 산행길에서 소박하지만 소중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 삶의 근본을 보는 눈, 그것이 이 시를 값있게 한다.
진분홍 입술 겹겹
비에 씻겨도 더욱 붉어지는
봄비의 볼이 붉어졌다
마침내 비 그치고
설핏한 빛 속에
고개 들어 활짝 웃지 않아도
환해진 뜨락
사랑한다는 말 머금었네
―「만첩홍매」 전문
겹겹이 모인 “진분홍 입술”의 꽃잎, 붉은 매화의 얼굴이다, 시인은 여기에 “만첩홍매(萬疊紅梅)”란 고풍스러운 명호(名號)를 내걸었다. 홍매화는 홑꽃도 있고 겹꽃도 있다. 홑꽃은 화려하고 매혹적인 느낌이지만 겹꽃은 풍성하고 복스러운 분위기를 두른다. 비슷하게는 우리 돌담이나 야산에 무리지어 피는 천엽황매화도 있으나, 이 홍매는 겨울을 이긴 봄의 화신(花信)이다. 그러기에 “비에 씻겨도 더욱 붉어지는 봄비의 볼”을 가졌고, “고개 들어 활짝 웃지 않아도” 뜨락이 환해진다. 시인은 이 정황을 두고 “사랑한다는 말 머금었네”라고 단정지었다. 이렇게 하순명의 시들은, 자연의 모습에서 그 내면에 잠복한 중층적 관념들을 시의 표면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겨울 산을 보고 “함께 모여서 더 큰 혼자인 숲”(「여럿이면서 혼자」)을 도출하는가 하면, 겨울 강을 보러 간 곳에서 “나도 저 강물처럼 곧 일어설 것”(「겨울 강에서」)이라고 다짐한다. 자기 발견과 그 승급의 구도를 이루고 있는 이 시들은 활기차고 건강하다. 그리하여 “다시 찾아온 봄”이 되면 “숨 막히는 마스크의 터널을 지나”서, “메마른 자리에 그리움”(「다시, 봄」)을 돋아나게 하는 자연의 질서 또는 우주의 섭리를 만난다. 이렇게 우주 자연과 면대할 수 있다면, 시인은 그야말로 행복한 존재다. 이와 같은 구도적 시 쓰기는 그것이 어려워서이기도 하고 잘 알 수 없기도 하여,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길이 아니다. 이 시인을 언필칭 “행복하다”고 규정하는 이유다.
3. 가족사의 슬픔 또는 아픔의 깊이
사람은 누구나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난 이가 없다. 그를 구성한 가정환경과 가족사가 있고, 그것은 일생에 걸쳐 강고하게 그의 생애를 간섭한다. 동시에 가족을 향한 친화의 감정은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것이며, 인류 문화사의 많은 예술가가 이를 기록하거나 노래했다. 한국 현대소설에 있어 일제 강점기나 6·25동란이 남긴 상처들은, 대체로 가족 이야기를 동원할 때 그 실감의 강도가 한결 강화된다. 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가족을 매개로 하여 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영혼의 동통(疼痛) 만큼 우리를 공명(共鳴)하게 하는 경우는 만나기 어렵다. 하순명의 이 시집 3부는 바로 그와 같은 가족 간의 절절한 담화를 시의 문면(文面)에 담고 있다.
국립중앙미술관 오백 나한 전시회에서
만 가지 웃음을 만나고 오던 날
집에 오니 우리 집에도 나한 한 분 계신다
그의 등을 바라본다
비스듬히 누워있는 등이 한없이 적막하다
모든 걸 껴안은 듯 모든 걸 마무리지은 듯
깊은 숨소리를 바라본다
그는 등이 얼굴이다
등만 바라보아도 알 수 있는 표정
말하지 않는 침묵이 수많은 말을 하고 있다
눈짓만 해도 말이 통하는 남자
세상에서 무엇보다 제 핏줄을 사랑하는 남자
등에 두른 나이테가
불꽃처럼 살아왔던 시간을 정박하고
붉은 해가 지도록 앞산 흰 구름 한 점 응시한다
당신은 당신으로부터 자유스러운 적 있었나요
꼭 닮은 나한의 표정 하나가
그의 등에서 미소 짓는다
―「나한상」 전문
나한(羅漢)은 불가(佛家)의 용어다. 불제자 중에서 번뇌를 끊고 지혜를 얻어 세상 사람들의 공양을 받는 성자(聖者)를 일컫는다. 그런가 하면 이미 생사를 초월하여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게 된 단계로, 부처를 달리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나한상(羅漢像)은 당연히 나한을 새긴 상, 곧 조각된 불상이다. 시적 화자는 “국립중앙미술관 오백 나한 전시회”를 관람하고 귀가한다. 집에 오니 “우리 집에도 나한 한 분”이 있다. 화자의 남편이다. 화자는 그 남편을 할 수 있는 모든 생각을 동원하여 따뜻하게 바라본다. 이 상념이 응결된 어휘가 그날 보고 온 나한상이 된 셈이다. 중요한 것은 시의 언술 전체가 그 관찰의 대상에 대해 최상의 공경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상대방을 바라보는 시선은 당연히 가족 구성원 전체에도 적용된다. 항차 내 생명의 근원인 어머니에 있어서야 더 첨언할 나위가 없다.
얘야
저녁 풀벌레 소리 들리더냐
가을 온다는 신호 말이다
한낮에 말매미 울음소리 귀가 따가워도 귀를 틀어막지 말아라
귀 열고 애타는 속사정 좀 잘 헤아려 보아라
귀를 열고 속 세상 다 들어 보아라
귀명창 많아지면 허튼소리 내뱉지 못하리라
귀가 있어도 세상 쓴소리 아픈 속사정 들을 귀 없어
허튼소리 입으로 지껄이지
귀를 열어야 할 때 닫고
닫아야 할 때 여는구나
밤새 비 내려 귀를 씻어주고
낮에는 풀숲에 누워 사니 파란 하늘이 찾아오더라
―「풀숲에서 온 어머니의 당부」 전문
그 어머니의 당부는 “풀숲에서” 왔다. 왜냐하면 풀벌레 소리, 말매미 울음소리를 응용하는 당부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귀를 열고 속 세상 다 들어 보아라 귀명창 많아지면 허튼소리 내뱉지 못하리라”라고 가르친다. “귀명창”은 소리를 내어 노래하지는 않지만 듣는 것으로 명창의 수준에 이른, 이를테면 하나의 금도(襟度)를 지칭한다. 구체적으로는 판소리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을 뜻한다. 어머니가 애써 전하는 교훈은 “허튼소리”에 대한 경계다. 어머니를 훈도(薰陶)의 자리에 두는 것은, 사랑하거나 그리워하는 감정의 가장 고양된 지점을 표상한다. 이 어머니는 아마도 가장 먼 곳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화자의 또 다른 자아인지도 모른다.
화자 또한 아들에게는 계대(繼代)의 교사다. 아들에게 “작은 풀잎이 그리도 따뜻하더냐”고 묻기 시작하면서 종내 “밀고 당기기 키 재기 안 하는 그냥 덧셈뿐인 세상”과의 “온전한 화해”(「아들에게」)를 예시한다. 그렇게 어머니는 어디에나 있다. “너무 가엾은 칡꽃 한 송이”(「사모곡」)처럼 살다간 어머니는, 여기 이 화자의 어머니면서 기실 우리 모두의 어머니다. 그 어머니는 “내 가슴에 아직 꽃으로”(「살구꽃 그림자」) 피었다. 가족 공동체가 갖는 강력한 힘은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온상이라는 데 있다. 화자의 품으로 “어느 먼 별에서 찾아온 맑은 빛 하나”(「보물이」)가 들어온다. 첫 손녀다. 모녀손(母女孫) 3대에 이른 이 도식은 가족애의 상징이요 완성이다. 이에 시인은 다시금 행복한 상황의 주인공이 된다.
4. 여행자의 눈에 비친 자아 정체성
거주지를 떠나 객지, 다른 고장이나 국가를 방문하는 일을 여행이라 한다. 대개 일시적인 이동을 말하지만, 역사적으로 타의에 의해 고향 또는 거주 지역을 떠나야 하는 사례도 있다. 근래에 많이 쓰이는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원래 그렇게 해서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했던 유대인의 집단 거주지 또는 그 거주의 상황을 뜻하는 것이었다. 온 세계가 지구촌(Global Village)화하는 오늘날, 이제 여행은 일상적인 생활의 한 방편이 되었다. 사람들은 여행을 통해 견문을 확장하고 또 그 가운데서 타성의 늪에 침몰된 자아 정체성을 회복하기도 한다. 그래서 여행은 장소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편견을 바꾸는 것이라는 표현법도 있다. 이 시집 4부의 시편들은 그에 잘 부합하는 외양을 갖추었다.
그림 같은 세방리에서
반나절 동안 그 바다를 눈에 담았다
주거니 받거니
개나리 빛 울금주酒 권하며
가냘픈 솟대도 기다림에 애를 태우더니
드디어 붓을 들어
양덕도 주지도 장도 혈도 가사도 불도를
치마폭으로 휘감으며
홍주빛 서정문을 쓰기 시작한다
건너편 하늘까지 판을 벌인다
가슴이 두근두근
그의 언어를 다 받아 읽기엔 너무 벅차
취한 듯 그 바다에 붙잡혀 있었다
―「세방노을을 기다리며」 전문
이 시에 등장하는 “세방노을”은 전남 진도의 세방리에서 바라보는 낙조(落潮)다. 여기에 두 개의 시비(詩碑)가 서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지금 우리가 공들여 살펴보고 있는 하순명 시인의 것이다. 시인은 이곳의 일몰이 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와 같은 주장에는 정답이 따로 없는 터여서, 우리가 그에 대해 다른 의견을 낼 필요는 없다. 그 노을은 주변의 섬들을 모두 “치마폭으로 휘감으며 홍주빛 서정문을 쓰기 시작한다.” “취한 듯 그 바다에 붙잡혀 있는” 시인의 가슴이 두근거린다. 바로 이 대목이다. 자연의 정취에서 심계(心悸)의 박동을 감각하는 형편이면, 그 낙조를 찾아 떠난 여행은 매우 의미심장하며 마침내 제 소임(所任)을 다했다.
동해에서 설악으로 넘어온 바람이 덮친다
하늘의 줄 하나에 매달려
흑갈색 낙엽처럼 흔들리는 저것들
용대리 황태덕장에 수천 수백 마리의 명태들
차가운 눈과 비, 매서운 바람에 온몸을 내맡긴 채
더러는 여린 햇살에 졸다가 깨다가
꾸덕꾸덕 얼부푼 몸이 되고
노랗고 고슬한 황금빛이 될 때까지
자연의 시간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한 마리의 황태 속에 굳어 있는 생각
생을 이어가는 존재들은 칼바람을 이겨가는 것
덕장에 매달려 모진 아픔에 흔들리며 얻어낸 질문 하나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전문
이 시에서 “용대리 황태덕장”에 매달린 “수천 수백 마리의 명태들”을 바라보는 것은 시적 화자의 눈이다. 그는 “자연의 시간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 한 마리 황태 속에 굳어 있는 생각”을 유추한다. 그리고 마지막 행에 이르러 문득 “덕장에 매달려 모진 아픔에 흔들리며 얻어낸 질문 하나”를 명태의 입으로 발설한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것이다. 어쩌면 강원도 길 지나가다 들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특정한 장소에서 만난 명태의 자기 검증은, 결국 시적 화자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질문의 유형이 된다. 누구나 그렇다. 온전한 주관을 가진 여행자라면, 곳곳에서 “나”의 근본에 대한 검색과 확인의 단계를 놓치지 않는다. 시인은 이러한 시적 문맥의 효용성을 기민하게 알아차리고 있다.
이러한 예화는 이 시집 4부에 여러 모양으로 편만해 있다. “사방 가득 꽃잎처럼 펼쳐진 노을”(「순천만 오후」)에서는 “바람이 글을 읽는다.” 남쪽 끝 제주도의 “항파두리 항몽 유적지 너른 들판”(「붉은 유적지」)에서는 “내 눈물도 붉다.” 해외여행 중에 시상(詩想)을 일으킨 까보다로까, 융프라우, 지중해 등의 땅에서도 시인은 끊임없이 시를 생각하고 인생의 진중한 의미망을 구성하며 그것이 건네는 자분자분한 속살거림을 걷어 올린다.
지금껏 우리가 지속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하순명 시의 자연은 그냥 자연이 아니고 우주 또한 그냥 우주가 아니었다. 이는 방대한 교과서이자 잔잔한 타이름이었으며 때로는 엄혹한 죽비(竹?) 소리였다.
저 남녘 진도 땅에서 태어나 학습의 행로를 따라 문학을 익혔기에, 그의 시에는 순후한 남도의 형용이 잠복해 있다. 또 일생을 교육자로서 사명을 다했기에, 그의 거의 모든 시들이 순방향으로서 시의 역할을 추동하고 있다. 일찍이 독일의 미학이론가 N. 하르트만이 “사실주의는 예술의 건전한 경향”이라고 규정한 그 예술적 경향이, 하순명의 시를 견고하게 그리고 빛나게 한다. 삶의 현장에 밀착한 시어들과 더불어, 소박하지만 품격있고 조촐하지만 소중한 시의 세계가 그의 것이다. 이 새 시집의 맨 얼굴을 원고 상태에서 읽을 수 있었음을 감사한다. 동시에 앞으로 그의 문학적 장도(壯途)가 더 크고 넓게 펼쳐지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문학평론가, 전 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