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태평천국의 옥새는 정방형의 각 변이 20.5cm이며, 대략 1860년에서 1861년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옥새의 문구는 각 행의 첫 글자를 맞추면 말이 되는 이합체(二合體)의 형식이어서, 이 옥새의 문구를 해석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격렬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제시한 방식은 옥새의 상반부에 있는 중앙의 글자에서 시작하여, 옥새 하반부를 교차해가며 읽어나가다가(중앙에서부터 바깥쪽으로 읽어가며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읽어나감), 옥새 상반부 바깥쪽에 있는 비교적 작은 글자로 끝이 나는 형태입니다.
'은혜로운 조화와 즐거운 평화는 계속 되리' 라고 말하면서도, 이 문구를 새겨넣기 9년 무렵의, 이제 막 영안을 점령한 홍수전은 자신이 아직 여유로운 상황이 되지는 못한다는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영안 성 주민과 주변 마을 사람들 대다수는 객가 출신이었지만, 이질적인 태평군에 대해서 공포심을 감추지 못했고, 또한 의심스런 눈초리로 쳐다보았습니다.
태평군 지도부는 자기들이 백성을 해칠 생각은 전혀 없으며, 다만 요괴를 죽이고 하늘에 계신 주님의 계명을 따를 뿐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또한 영안 성과 마을의 시장이 이전처럼 유지될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으며, 억지로 그들을 군대에 가담시키지 않겠다고도 선언했습니다. 물론, 태평군의 병사들에게 약탈 금지와 같은 명령을 내리는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태평군에게 충성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상당수의 군사가 파견되어 그들의 집을 습격했고, 곡식창고, 가축, 소금과 식용유, 그리고 의복까지 모든 것을 빼앗아 갔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지주의 땅에서 곡물을 수확하기 위해 부대를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홍수전은 태평군 내의 모든 양사마들에게 명령을 내렸는데, 그들 휘하의 25인의 오장과 그들의 개인적인 명령을 따르는 병사들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었습니다. 일종의 '성적표'인 이것은 전투 중에 용맹을 발휘하고, 명령에 복종한 행위에 대해서 남녀 각각의 이름 옆에 동그라미 표시를 했습니다. 반면, 비겁한 행위를 한 사람들에게는 가위표를 그렸는데, 이것들은 상급자에게 전달되고, 최고 점수를 받은 사람은 태평군이 마침내 '지상낙원' 을 건설할때 최고의 관직으로 보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상낙원이 언제, 어디에 건설될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습니다.
홍수전은 밀린 일을 처리하려고 열심이었고, 이 시간을 이용해 새로운 역법도 발표했습니다. 물론 이 역법은 풍운산이 만든 것입니다. 이 역법으로는 1년이 366일이고, 1년은 열 두달로 나뉘어져 있으며, 1주일은 7일입니다. 그리고 홀수 달은 31일, 짝수 달은 30일입니다.
약탈금지, 지상낙원으로 향할 사람들의 기록, 역법의 발표. 뒤이어서 발표된 것은 계급적 신분에 대한 조서였습니다. 각 지도자는 물론 그들의 자녀들에게도 사용될 호칭들이 정해졌고, 홍수전의 아들 홍천귀(洪天貴)는 유주만세(幼主萬歲), 즉 만년 동안 재위하실 어린 군주로 불려졌습니다. 또한 배상제회의 최고 지도자 5인에게도 명예 칭호가 부여됩니다.
이제 홍수전은 천왕의 봉작을 받고 만세지주(萬歲之主)로 추앙됩니다. 양수청은 동왕(東王)으로 봉해지고 구천세(九千歲)로 불렸습니다. 소조귀는 서왕이자 팔천세로, 풍운산은 남왕이자 칠천세로, 위창휘는 북왕에 봉해지고 육천세로 불립니다. 아직 20세 초반에 불과하지만, 전투에서 거듭 공훈을 세운 용맹스런 석달개는 익왕(翼王)에 붕해지고 오천세로 불리게 됩니다.
규율이 잡혀가는 듯한 ─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들이 "타도" 를 외쳤던 구체제와 더욱 비슷해지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홍수전은 아직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영안은 이전 근거지인 계평보다 훨씬 넒기는 하지만, '견고' 한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영안성 주변에 방어용 흙벽을 쌓고, 부대를 모으고, 망루를 세우는등 방어 태세를 견고하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오란태가 이끄는 청나라 부대는 그들을 추격해와서 계속해서 교전을 벌였습니다.
이런 교전 중에 소조귀가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는 지난 3년동안 예수의 말을 전했기에 부상 당한다면 이는 큰일이었습니다. 소조귀는 ─ 예수의 음성으로 ─ "그리 심각한 일은 아니니" 안심하고, 아울러 모든 태평군은 "열렬하고 용감하게 전진하고, 마음과 함을 합쳐 요괴들을 없애버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부상은 더욱 심해졌고, 그 후 5개월 동안 '예수' 는 "용기를 굽히지 말고, 기운 내라." 고 몇 마디 중얼거린 것 외에는 더 이상 지상에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의혹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 조너선 스펜스 ─ 어쩌면 소조귀의 입을 다물게 한것은 청군의 포격이나 창칼이 아닌, "양수청" 이었을지 모른다고 주장합니다. 어째서 예수는 과거와는 달리 안심시키거나, 또한 교훈이 되거나, 태평천국의 정책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지 않는 것일까? 양수청 역시 소조귀처럼 병마로 앓아 누운 적이 있지만, 그는 그 뒤에도 너무나 자신 있게 하느님의 목소리르 대신해왔고, 태평군 내부의 숨은 반역자들을 폭로해왔습니다. 혹시 그가 일종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것이 아닐까?
권력투쟁이 실제로 있었다면 물론 승자는 양수청이었을 것입니다. 12월 17일, 홍수전은 '소조귀의 부상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체' 태평천국 지도자들을 각각 북왕, 남왕, 서왕, 동왕, 익왕에 임명했고, 무엇보다 조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동왕 양수청에게 나머지 네 왕을 통제하는 '전권' 을 부여했습니다. 이는 분명, 지상에 있는 태평천국의 위계에서 양수청을 가장 높은 자리에 올린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홍수전은 모처럼 얻은 인쇄설비를 이용해서 군사훈련과 정신교육에 필요한 책자들을 마구 찍어냈습니다. 또한 노래를 통해 성경을 가르치고, 모세의 십계명에 홍수전이 추가로 내용을 더한 "증보판" 등이 사방에 뿌려졌습니다. 하지만 영안성 근처로 모여드는 청나라 '요괴' 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만 가고 있었고, 태평천국 지도부는 '요괴' 들을 피해야 할 시간이 왔음을 느겼습니다.
1852년 4월 5일, 밤 10시 무렵, 태평군의 주력은 청군의 방비가 가장 약한 성 동쪽으로 빠져나와, 산길로 올라간 뒤 북쪽으로 질주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화약과 석탄을 나무관에 쑤셔 넣어 만든 일종의 지뢰를 땅에 뿔여놓았습니다. 그리고 개와 돼지의 몸에 못 쓰게 된 금속조각과 꺠진 그릇을 매달아 놓고, 겁에 질려 연기로 가득한 거리에서 미쳐 날뛰게 하여 청군을 혼돈시키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조취들도 불구, 청군의 추격을 완전히 뿌리질 수는 없었고, 이때문에 2천여명의 태평군 후위가 포위되어 죽어갔습니다. 이때, 이미 전방 산악지대까지 전진했던 태평군 선두는 너무나 많은 동료들이 죽자, 분개하여 원수를 값기 위해 놀랍게도 다시 발길을 돌립니다.
비가 오고 있었습니다.
쏟아지기 시작한 맹렬한 빗속을 뚫고, 다시 되돌아온 태평군은 곧 청군이 올 길에 지뢰를 잔뜩 깔아놓고, 대나무로 얼기설기 마든 바구니에 커다란 돌덩이를 채운 다운, 가파른 산비탈 위의 나무에 묶어놓았습니다. 이윽고 빗속에서 빽뺵한 무리를 지은 청군이 나타났지만, 태평군은 지뢰를 터뜨리고 바구니를 묶고 있던 바줄을 잘라 수백명의 청군을 압사시켰습니다. 이후 태평군이 대포를 쏘며 공격하자, 청군은 완전히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기 바빴고, 무려 5천여명이 사망했습니다.
대승이었지만, 여전히 '지상낙원'은 멀기만 합니다. '하늘' 이 도운 승리의 기세를 이용해 태평군은 재빨리 쏟아지는 비와 진흙탕을 헤치며, 여전히 확인되지 않은 야속의 땅을 찾아 더 깊은 산속으로 행군했습니다.
지상낙원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사실은 지름길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4만의 숫자인 태평군은 광시성의 계림(桂林)으로 나아갔습니다. 광시 남부로 우회하는 길은 청군이 막고 있고, 솽시 서부와 남부의 도시들은 만반의 준비를 갖춘 청군 수비대가 장악하고 있습니다. 태평군은 다른 도시를 공략하기보다, 촌락을 중심으로 마을에서 마을로 이동하며 광시의 중앙부를 관통하여 북진하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이때, 나대강이 계책을 내놓습니다. 우선 자신의 부하 수백 명에게 청군의 복장을 입히고, 청군의 깃발을 나부끼면서 계림으로 나아가, 조금도 의심하지 못한 수비대를 속이고 통과하는 것입니다. 아직 계림에서는 태평군이 영안을 떠났다는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 전략이 실패로 돌아간것은 순전히 우연이었습니다. 전쟁 가능성을 염려한, 그 시대에서는 참으로 드물 청군 관원이 태평군의 이동소식을 전하기 위해 서둘로 계림으로 가다가, 청군 복장을 한 일련의 부대가 지나가는것을 목격한 탓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청군이 그 지역을 지나갈 수도, 지나갈 리도 없었기에 그 관원은 즉시 계림 수비대에게 소식을 알리고 성문을 닫으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태평군인 계림에 대한 공성전을 벌였습니다.
전투는 33일간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승리는 요원해 보이기만 했습니다. 5월 중순이 되어서도 승부가 결착이 날것 같지 않아, 태평군 지도부는 재빠른 판단을 내렸습니다. 또다시 이동하기로 말입니다. 태평군은 그동안 갈고 닦은 기동력을 이용해 육로와 수로로 쏜살같이 철수하였고, 북진했습니다.
놀랍게도 계림 북부로 96km 지역에 있는 싱안(興安)은 거의 무방비 상태로 놓여져 있었기에, 태평군은 5월 23일 전투 한번 없이 싱안 부에 진입하여 한숨 돌리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여유는 없었습니다. 수만이나 되는 청군이 끊임없이 그들을 추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태평군은 쉴 틈도 없이 계속해서 북진해서 다음 날에는 취안저우(全州)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태평군은 머물지 않고 또다시 이동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비극이 일어납니다. 이동하는 행군대열 속에, 가마에 타고 있던 풍운산이 있었습니다. 취안저우 성 위에서 경계를 보던 한 청나라 사수는, 번쩍이는 표정을 겨냥하여, 그 위에 보이지도 않는 사람에게 발포를 했고, 무심결에 쏜 이 한방은 배상제회의 창립자이자 홍수전의 절친한 친구였던 풍운산을 맞추었고, 그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풍운산의 부상은 태평군에 혼란을 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분노만을 안겨준 것입니다. 행군을 멈춘 태평군은 일주일 동안 취안저우 성에 공격을 가했고, 취안저우 성 인근의 청나라 부대는 태평군의 흉악함에 겁을 먹고 전혀 싸우려 들지 않았습니다. 취안저우의 한 지주는 혈서까지 써가면서 정부군에게 당연한 지원을 요청했지만, 부패할대로 부패한 청나라 부대는 성안의 주민들이 몰살 당할 지경에 처했는데도 거들떠 보지 않았습니다.
결국 6월 3일, 성이 함락되었고, 성 안으로 진입한 태평군은 무차별적인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그 이전의 싸움에서도 이런저런 일로 민간에 피해를 끼치기는 했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태평군이 살육전을 벌인것은 이 싸움이 처음이었습니다. 풍운산의 존재는 그토록 거대했던 겁니다. 극소수를 제외한 절대 다수의 취안저우 백성들은 모조리 학살 당했습니다. 학살의 주체에 대해, 진순신은 "양수청의 지시가 아닌가" 라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만약 이게 양수청이 내린 전략적인 판단이었다면, 그 이유는 태평군을 저지한다면 죽음뿐이라는 메세지를 남기기 위해서 였을 것입니다.
잔인한 복수를 마친 태평군은 6월 5일, 다시 이동을 재개 했습니다. 후난 성의 창사(长沙)로 이동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취안저우에서 겨우 8km 이동했을 무렵, 가공할 위협이 그들을 닥쳐왔습니다.
강충원(江忠源)은 지금까지 홍수전과 태평군이 맞붙었던 어떤 부패한 청군이나, 살기 위해 아락바락하는 지주들과는 완전히 다른, 이질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는 많은 재력, 유력한 집안 출신에 넒은 인맥을 갖추었고, 홍수전보다 두살 많은 학자였습니다. 대혼란기의 였던 당대 청나라에서 그는 자신의 가문을 지키기 위해, 더 나아가서 '반란군에 가문의 일원이 가담하는것을 선수쳐 막기 위해' 단련을 조직했습니다. 그 숫자는 수천여명에 이르렀고, 강충원 본인도, 그 친구들도 모두 후난의 엘리트였습니다.
1850년, 강충원은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후난으로 돌아왔고, 그의 능력을 알아본 청나라 지휘관들은 그에게 단련을 소집하여 태평군을 격파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강충원은 청나라 군대가 미적거리는 일에 대해서는 불만을 토로했지만, 전투에는 기꺼이 참전했습니다. 단순히 그가 지방 신사로서 자신의 세력을 보존하기 위해 나섰다고 볼 수는 없는데, 청군의 지시를 이행하자면 그는 다련을 이끌고 자신의 고향 밖으로 나와서 싸워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강충원은 물살이 빠른 강폭에서 조용히 매복했고, 벌목한 나무들을 엄청나게 큰 쇠못으로 연결한 장애물을 강에 설치하여 배가 빠져나갈 수 없게 했습니다. 그리고 서안의 울창한 숲속에 부대를 배치했습니다.
여기저기서 모은 수백척의 배를 타고 강물을 내려오던 태평군의 선봉 함대는 모래톱을 통과하여 강의 만곡부를 돌다가, 나무를 엮어놓은 거대한 장애물과 충돌합니다. 그 순간 포탄이 태평군에게 빗발치듯 쏟아졌고 좌초한 태평군의 배에서는 불길이 치솓았습니다. 뒤따라오던 배들도 미처 멈추지 못하고 앞서가는 밸들을 들이받았고, 속속 몰려드는 배때문에 앞선의 배들은 후퇴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불이 배에서 배로 옮겨 붙자, 태평군의 수군은 허우적거리면서 뭍으로 기어나왔습니다.
만약, 이 시점의 강충원에게 더 많은 병력이 있었다면, 혹은 썩어빠진 청나라 군관 중에 몇사람이라도 제대로 된 이가 있어 강충원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면, 이 시점에서 태평군은 전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했고, 태평군의 사상자는 엄청나긴 했지만 전멸은 피했습니다. 하지만 피해는 너무나도 막대했습니다. 300척의 배가 불타버리거나 나포되었고, 무려 1만여명의 태평군이 물고기 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대부분은 이 싸움이 가장 순수했을 시절, 광시 성의 산속에서 숯쟁이로, 떠돌이 객가로, 날품팔이로 지내면서 작고 조그만 희망을 꿈꾸던 배상제회의 초기 신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풍운산도 있었습니다. 부상을 당했던 그는, 이 싸움에서 전사해버린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패배를 당한 홍수전과 태평군은 남은 함선은 모두 포기했고, 대신 융저우(永州)로 방향을 돌려 그곳을 점령할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청군은 이미 교량을 모두 폭파해 갈 방법이 없었기에, 그들은 다오저우(道州)로 이동했습니다. 갑자기 남쪽으로 움직이는 이동 경로 였기에 다오저우는 전혀 대비가 되어있지 못했고, 태평군은 6월 12일 다오저우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누더기가 된 태평군은 다오저우에 한달 반을 머물렀습니다. 그 동안에도 청군과의 싸움은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이도 청나라의 병폐는 이미 골수에 차 있어, 사방에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은 널려 있었고, 그런 이들이 태평군에 밀려들어왔습니다. 짦은 시간동안, 무려 5만에 가까운 인원이 다시 충원되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태평군의 숫자는 이내 불어났지만, 그에 비례해서 근처의 청군도 점점 숫자가 늘어났습니다. 무엇보다, 풍운산이 죽었습니다. 조력자를 잃어버린 홍수전은 난감한 지경에 빠졌고, 고향인 광서를 떠나온 사람들은 더욱 그러했습니다. 태평군 내부에서 광서로 다시 돌아가자는 말까지 나왔는데, 이 시점에서 문제를 결정지은 것은 양수청이었씁니다.
"이미 호랑에 등에 탔다. 어찌 다시 뒤돌아보는 것을 허용할 수 있겠는가. 오늘의 상책은 광서 - 광동을 버리고 뒤돌아보지 말고 직진하여 장강에 이르고, 이를 따라 동으로 내려가 성보를 공략하고 요새를 버리고 오로지 뜻을 금릉(남경)에 두어 근거지로 삼는 것 빼고는 없다. 그런 다음 군대를 보내 사방으로 나아가게 하여 남북을 어지럽히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황하 이남은 우리의 소유가 될 것이다."
홍수전은 양수청의 대전략에 동의했습니다. 북상을 결정한 것입니다. 홍수전이 북상하기 시작했을때, 장사의 방비가 아직 허술하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이에 소조귀는 2천명 이하의 병력을 거느리고 선봉대로 장사를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성벽과 성문은 견고했고, 수비대는 능숙하게 협력했습니다.
그리고, 관복을 걸치고 펄럭히는 깃발 아래 있는 서왕은 적군의 눈길을 끄는 목표물입니다. 9월 17일, 소조귀가 한차례 공격을 주도하고 있을때, 성벽 위의 사수 한 명이 총 한방으로 그를 쏘아뜨렸습니다. 남왕에 이은 서왕의 사망이었습니다. 나중의 이야기지만, 포로를 통해 소조귀가 묻힌 장소를 알아낸 청군은 그의 시신을 훼손시켰습니다.
홍수전은 일주일이 지나서야 그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충격을 받은 태평군의 천왕은 장사를 포위하기 위해 전군을 이끌고 북진했고, 10월 초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소조귀가 공격해올때 1만명 이하의 수비병만 있던 장사는 이제 5만이라는 엄청난 대군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장사 수비대는 후난 순무 낙병장(駱秉章)이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공고롭게도 그는 홍수전의 도향인 화현 출신이었습니다. 그리고, 홍수전이 실패한 모든 것을 이룬 인물이었습니다. 현시, 향시, 회시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거 시험에 합격했고, 1832년의 회시에서는 최고 학위인 진사를 획득했습니다. 그는 스물일곱 번째의 성적이었는데, 광둥 성 출신으로는 최고 였습니다. 그 이후 베이징의 한림원에 선발되어 한림원 학사로 근무했습니다.
홍수전이 꿈을 꾸고, 설교하고, 유랑하고, 강도를 만나고, 신도들을 모을때, 낙병장은 청의 관료제에서 승진을 거듭했습니다. 홍수전의 용포를 걸치고 봉기를 일으킬때, 낙병장은 황제로부터 후난 순문에 임명되어 장사에 부임되었습니다.
만약, 운명의 수많은 갈림길이 조그만 뒤틀렸더라면, 장사성 위에서 "반란 분자"를 막아내는것은, 낙병장이 아니라 홍수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운명은 실로 기묘합니다.
석달개가 성의 서쪽으로 접근하는 청군을 차단하는 동안, 홍수전은 장사성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습니다. 땅굴을 파고, 북을 두들기고, 성벽을 공격하지만, 장사는 너무나 완강하게 버텼습니다. 수비대 병력은 5만이 넘어섰고, 이에 비해 태평군은 숫자가 부족했습니다.
1852년 11월 말까지도 승리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홍수전은 그런 전투의 사이에 수천대의 배들을 확보하자, 또다시 미련을 버리고 공격을 멈추고는, 비를 틈타 이동했습니다. 악주(岳州)로 떠난 것입니다.
악주를 지키던 호북 제독은 태평군이 다가온다는 소리를 듣자 성을 버리고 도주했고, 12월 13일 태평군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악주를 점령했습니다. 그들은 다시 움직여서 우창(武昌)으로 향했습니다. 1853년 1월 12일, 마침내 방어선은 붕괴되고, 이 거대한 성은 함락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태평군이 거둔 승리 중에서 가장 거대한 승리였습니다.
우창에는 청나라 관료들의 집에서 발견된, 엄창나게 축적된 재물들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청나라 관료들이 백성들의 피를 뽑았는지, 태평군이 발견한 액수만 은 100만냥이 족히는 넘었습니다. 우창의 모든 주민들은 이제 배상제교를 믿으라고 강요당했고,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분리되었습니다. 이때, 우창의 젊은 여성을 모아 미녀를 가려내어 간부들의 처첩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당시 제국의 황제이던, 그리고 전대의 위대한 황제들과는 "중국인"이라는 정도 외엔 공통점을 찾기 힘든 인물인 함풍제(咸豊帝)는 절망감에 가까운 분노를 느꼈고, 태평군에 패배한 모든 관리를 처형하겠다고 악을 질러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1853년 2월 10일, 태평군은 엄청난 양의 금은보화를 싣고, 수만 명의 남녀 신도를 거느리고 우창을 떠났습니다.
그들의 목적지는 960km 거리에 떨어진 도시, 전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도시 중에 하나인 난징이었습니다. 난징은 중국에서 가장 부유했던 장쑤 성의 심장부이자, 모든 위대한 동아시아 학문들의 중심지이며, 500년전 영광스러운 홍무제가 명제국의 수도로 정한이래, 역사와 영광이 가득한 도시입니다.
당연히 양쯔강을 따라 내려가는 960km의 길에는 청조의 수비대와 요새, 함대, 충성스러운 신료와 장군들이 있고, 청나라 무장함대가 후방에서 태평군을 추격했지만, 태평군은 전혀 아랑 곧하지 않고 움직였습니다. 그들은 점령한 도시에서 물자를 보급하고, 완강하게 버티는 도시는 아예 내버려 두면서 계속 진군을 했으며, 너무 큰 대도시는 그저 강을 건너서 피해버렸습니다.
마침내 우창을 떠난지 한 달 만에 태평군 선발대는 수로로 960km를 떠나 난징 변경에 도착했습니다. 난징은 실로 거대한 곳으로, 그 성벽의 둘레는 거의 40km에 이릅니다. 그러나 성벽이 너무나 거대한 탓에 오히려 빈틈없는 방비가 불가능했습니다.
1853년 3월 19일, 마침내 난징의 서북단 성벽이 뚫렸습니다. 태평군의 전사 수백명이 이 위대한 도시로 진입했습니다. 3월 20일, 태평군은 내성의 뚫린 성벽을 통해 물밑듯이 들어왔고, 성 내부에 있던 5만여 오합지졸 청군은 태평군이 닥쳐오자 불을 지르고 패닉에 빠져 자살하거나, 도망을 쳤습니다. 태평군은 살아 있는 거의 모든 청군 '요괴' 들을 잡아서 척살하면서, 이 역사적인 도시는 며칠동안 비명과 살육이 가득한 곳으로 변모했습니다.
3월 29일, 모든 '요괴'가 척살되고, 더러움이 씻겨나가자, 드디어 준비가 끝나 음악소리가 울려퍼집니다. 황색 용포를 입고 황색 신발을 입은 홍수전은, 16명의 가마꾼이 짊어진 정교하게 장식된 황금색 가마를 타고 입성했고, 성안의 사람들은 길가에 엎드려 절을 하였습니다.
가마 위에서는 5개의 학 형상이 까딱거립니다. 홍수전의 앞에는 승리를 거둔 군대의 긴 행렬이 지나가고 있었고, 그의 뒤에는 말등에 걸터앉아 황금색 양산을 든 32명의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 시점의 홍수전에게 물어본다면, 그는 자신있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이곳이야말로 말로 지상낙원이며, 곧 천경(天京)이라고 말입니다.
첫댓글 회전에서 승리해서 남경까지 간 게 아니었네요. 근데 이동 거리가 엄청나네요!
@jsm1423 4년 8개월이 지난 다음에 답글을 달아주시다니!!!! ^^ 신기합니다.
진짜 무슨 메뚜기 떼 같네요 ㄷㄷㄷㄷㄷㄷㄷ
대장정 ver.1 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