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월일거름회의 모태
1979년 8월 입대를 하여 군 생활은 문산 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부대는 독립부대여서 별도로 3명의 방위병이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1명은 취사병, 또 한명은 세탁소, 다른 한명은 이발소에서 근무를 하였는데, 전역을 하면 신병이 그 자리에 들어왔는데 언제 부터인가 충원이 되질 않았습니다.
어느 날 이발병이 전역을 하였는데 충원이 없어 인사계장님이 중대원을 집합시켜 이발할 병사 1명 나오라 하기에, 저에게는 2명의 조수가 있는지라 제가 하기로 했습니다.
이발소에 있는데 곱슬머리에 머리도 둥근 정 일병이 첫 휴가 간다며 머리를 깍으러 왔습니다. 겁이 덜컹 났습니다. 이발이라곤 한 번도 해본적도 없고 가위도 어떻게 잡는지도 몰랐습니다. 어쩔 도리가 없어서 가위를 잡아 보았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머리를 깍아야 하는지 머리가 흰 백지로 되면서 식은땀이 이마와 등 뒤로 막 흘러 내렸습니다. 가위가 잘 드는지 안 드는지도 모른 체 가위와 빗을 잡고 머리카락을 잘랐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가위로 내손가락도 몇 번을 베면서 자르는데 정 일병이 아야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정 일병의 귀에서 피가 많이 났습니다. 대일벤드로 치료를 하고 어떻게 깍았는지도 모른체 깍고 보니 여기저기 쥐가 뜯은 듯한 머리여서 미안했습니다.
처음이 어렵지 2명 3명 깍아보니 요령도 생기고 저절로 터득이 되어갔습니다. 기분도 좋았고 제가 깍아도 참 멋이 나는 스포츠머리의 표본 같아서 자신감도 생겼는데, 가위가 잘 들지 않아서 인사계장님께 이야기하고 문산 시내 일반 이발소에 가서 가위를 갈고 오는 도중 국민은행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은행에 가서 1년짜리 적금과 일반통장을 만들었습니다.
일 년 후 전역 날이 가까워서 적금과 통장의 돈이 13만원이 되었습니다.
군대 3년은 인생의 축소판 이란 말이 있듯이 있는 사람에게는 적은 돈일지 몰라도 저에게는 무얼 하나 이루었다는 자부심이 가슴속에 씨앗으로 자리를 잡아서 13만원이 돈이 아닌 나의 결정체 같은 생각이 들어 의미 있게 쓰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 때 전우신문에 이승복 어린이 유적지 건립한다는 기사가 눈을 통해서 가슴으로 들어오니 심장이 막 뛰었습니다.
유적지 건립에 성금을 내고나니 군생활의 보람이고, 긍지가 생겨 앞으로 사회생활을 하면 조금이나마 환원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다짐을 했습니다.
1. 커피 이야기
1985년 5월 공무원을 기전계 서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침 회의는 커피로 시작 하는데 구내식당 에서 월말에 계산하기로 하고 외상으로
마셨는데 커피 값이 18만원 정도 였습니다.
계장님께 커피는 제가 타기로 하고 커피잔, 커피, 프리마, 설탕 등을 사서 커피를 타며 여름에는 냉커피도 한잔씩 하며 절약도 되고 얼마씩 기금도 마련했습니다.
업체사장님이 오시면 커피를 탔는데 설, 추석 때는 재료비로 성의를 표사하셨는데 2년 정도 모으니 조금의 배풀 수 있을 정도가 되었는데 연말에 형편이 어려운 직원과 일용직 아줌마가 어렵게 사신다기에 매년 10만원씩 20만원을 성금으로 주었습니다.
또 중풍에 걸려 몸의 반이 마비가 되어 경비를 하시던 직원, 1년 후 아들과 단둘이 어렵게 사시던 직원들 에게 도움을 주려고 회람을 돌렸는데 커피로 모금한 돈을 보태어 150만원씩 300만원을 드렸습니다.
1. 어린이 재단에 후원
공무원 초기에 도시락을 싸서 다녔는데 매월 1일 급식비로 1만원이 나왔습니다. 도시락으로 해결하였기에 어린이 재단에 성금으로 7,000원을 내니 초등학생과 결연이 되었습니다. 어머님은 노전에서 생선을 파셨고 아버님은 무릎, 어께 등 모든 관절에서 뚜닥 하는 소리가 크게나서 일을 하시지 못하였고 집안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학생과는 명절, 생일, 크리스마스, 어린이날에 만나서 짜장면, 케잌, 나이키 신발 그리고 새 학기 때는 가방과 학용품을 사주면서 자주 만났습니다. 1년 후 한명을 더 후원하였고 3명까지 후원하게 되었고 지금은 우간다 어린이 까지 후원하게 되면서 2010년에는 개그맨 이홍렬님과 사랑의 리퀘스트 특집에 출연도 하였습니다.
1. 월일거름회 활동
제가 근무하던 사업소에서 전 직원이 버스로 1987년 10월에 산행을 갔는데 산행중 너무 힘들어 산중턱에서 물 한 모금으로 쉬고 있는데 소장님도 힘들어 하시기에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평소에 생각했던 월일거름회(한 달에 하루는 좋은 일 하자)에 대하여 말씀드렸더니 11월17일 5,000원의 회비를 주시면서 좋은 이야기와 격려를 해주셔서 그 용기로 지금까지 행사를 하며 앞으로도 계속할 것입니다.
2년 후 빠듯하지만 회비가 낙도어린이 초청할 정도의 회비가 모금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지도를 살펴보니 전남 진도 섬 지역이 거리도 멀고 방문하기도 힘들 것 같아 그중에서 낙후된 곳부터 초청하기로 결정하고 지인들에게 의견을 물어보았는데 왜, 하필이면, 전라도냐며 다른 지역으로 알아보라고 다들 이야기 하였다. 초등학생들이 무었을 압니까? 천진난만 하고 순수한 어린이들 입장에서 생각해서 진도 어린이들을 초청하고 싶습니다. 라고 의지를 굽히지 않고 추진하기로 하였습니다.
전라도 지방에 가본적도 없이 추진할려고 하니 망막했습니다.
경북 교육청, 전남 교육청, 방송국, 신문사로 문의해보니 직접 가보라는 대답과 풍금이나 사주라는 대답만 들었습니다.
어느 날 전남 광주시에서 우리사업소로 견학을 오신분이 있었는데 업무를 끝내시고 가시는 분에게 차 한 잔 하면서 시간을 조금만 내달라고 하니 고맙게도 시간을 내주셨다. 20명 정도 낙도어린이를 대구, 경주로 초청하여 미래 꿈을 키워주고 싶은데 알아봐 주시면 좋을 듯합니다. 하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20여일 후 한통의 전화를 받았는데 전남 진도군 조도면 외병도리, 내병도리 배광영 선생님께 전화를 해보라고 전화번호를 알려주셨다.
배선생님 께서 안된다고 하시면 어떻게 하지, 어느 단체냐고 물으시면 등등 머리를 스쳤다. 용기를 내어 전화를 했는데 뜻밖에 선생님께서 낙도어린이 초청을 해주신다고 너무나 고마워 하셨다. 눈에서는 기쁨의 눈물이 나도 모르게 흘렀다.
선생님과 대구, 경주 유적지 및 견하지 그리고 일정 조율을 위해 난생처음 전남 광주로 고속버스를 타고 갔는데 선생님과 사모님이 나와 계셨다. 일정은 학생들 수업지장이 없도록 봄방학 때인 2월 말에 하기로 하고 왕복2일, 대구2일, 경주1일(4박5일)로 합의하고 1989년 2월 월일거름회 첫 행사가 시작되었다.
첫 행사는 2월23일 새벽에
외병도리,내병도리(학부형 배) → 성남도 → 팽목항 → 진도터미널(버스) → 광주터미널(시외버스) → 광주고속버스(도보, 택시) → 대구고속버스(88고속도로) →
월일거름회 회원이 마중 → 숙소 (밤 늧게 도착)
아침 먹으면서 도시락도 준비하고 매일신문사 → 백화점 → 달성공원(중식) → 제일모직 → 코카콜라 공장 → 앞산공원 → 숙소 이렇게 시작한 낙도어린이 초청이 끝나고 내, 외병도리에 도착 후 학부형들이 맛 나는 음식을 준비하여 늦은 밤 까지 즐겼다 합니다. 초청행사가 사고 없이 끝나면 보람도 있고 정이 많이 들어 몇일은 패닉현상 같이 멍하니 있는 상태가 되곤 합니다.
낙도어린이 초청행사가 2회 3회 하면서 강원도 (철원의 묘장초등, 태백의 철암초등) 충남 서산의 대산초등, 제주도 가파초등, 전남 고흥군의 지죽분교, 신안의 흑산초등, 도초초등, 이세돌 프로기사님의 고향인 비금동초등, 장성군의 분향초등, 완도의 넙도초등 등 수많은 학교를 2016년 3월27부터 30일 까지 31회 984명을 초청하였고 10월에는 전남 고흥군의 영남초등학교 초청을 준비 중에 있으며 1,000명 이상을 초청하게 되는 월일거름회의 뜻깊은 해이며, 앞으로는 전국적으로 초등학생 들을 매월 학교별로 소수의 학생들을 초청할 계획이며, 다문화가정 어린이, 몸이 불편한 어린이도 초청할 계획에 있으며, 1996년 에는 20회 청백봉사상도 받았습니다.
1. 나봉은회 시작과 활동
2010년 9월 시설관리소에서 가창정수사업소로 전보 되었는데 노래를 매우 좋아하고 잘하는 최무근씨 와 인사하고 몇 번 생맥주 마시면서 낙도어린이 초청을 24회에 774명을 초청했다고 하니 한 두 번은 누구나 할 수 있는데 20년 이상 계 속 하기는 쉽지 않는데 하면서 월 10,000원씩 회원이 되어 주면서 열심히 하라고 하였다.
이야기를 한 조에 있던 윤영기 씨가 같은 조에 있는 나한테는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고 다른 조에 있는 친구에게 말했다고 기분 나쁘다고 한다. 사실은 이야기 를 잘못 받아들이면 이야기 안 한 것 보다 못하고 서로의 입장만 난처하다 라고 했다. 윤영기 씨는 알았다면서 다른 곳에 후원금을 넣다 끝이 난 것을 월일거름회 회비로 한다고 하여 많이 기뻤다. 영기, 무근 친구랑 생맥주를 자주 마시며 이야기도 많이 하곤 했는데, 무근 친구가 노래로 어르신들을 즐겁게 해드리고 싶다고 하여 그럼, 우리 셋이 모임을 만들어 실천하자고 하였더니 모두 좋다고 했다. 2010년 12월 31일 식당에서 월 50,000원 봄, 가을 연 2회 행사를 하기로 하고 회 명칭은 영기 친구가 나봉은(나눔, 봉사, 은혜)으로 하기로 했다.
1회 행사는 2011년 7월 13일 성가 요양원 어르신들 을 모시고 관광버스로 합천 일원으로 나들이를 갔다.
휠체어에 몸을 맞기신 분, 부축을 해야만 하는 분, 목발을 하신 분 등 40여명을 모시고 합천시내서 점심을 대접하고, 합천 땜 아래 영상테마파크에 입장하여 경성역, 영화관, 마차, 1970년대의 서울거리 등 사진도 찍으면서 즐겁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합천 땜을 바라보면서 수박, 과자, 떡, 고기, 포도 등 준비한 음식으로 많은 이야기하면서 나봉은 1회 행사를 마무리하고, 5월18일 고령에 있는 대창양로원에 선풍기 6대등 60여 만원의 경비로 각종 음식과 노래와 오락 등으로 어르신들을 1시간30분 동안 즐겁게 해드렸으며 월일거름회, 나봉은회 후원금이 114,500,000원 정도로 세월이 흘렀다.
또 2월 8월 매년 2회에 성요셉 장애재활원에 치,맥행사 하기로 하였고, 나봉은 행사와 치,맥 행사는 월일거름회 와 석이벤트가 함께 하기로 하여 앞으로 더 열심히 재미있는 봉사가 되도록 노력하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