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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플레비언나비공동체 원문보기 글쓴이: 남산
◇ 박유미, 박종수 목사와 호주 멜버른에서 즐거운 한때
2001년 2학기부터 나는 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과 교수로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약 15년간의 미국 이민 생활과 교수로서 4년간 호남신학대의 시간을 뒤로한 후였다. 서울로 삶의 터전을 옮기고 가족은 창동에서 나는 광장동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임용 당시에는 서정운 총장과 기독교교육과의 선배 교수들(고용수, 임창복, 사미자, 양금희)이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리고 곧바로 나는 세부 전공 분야인 기독교교육사상사를 가르치게 되었다. 그때 처음으로 마주한 학생들이 기독교교육과 99학번 학생들이었다. 40대 초반의 젊고 푸르던 시절의 나는 그때가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었다고 되돌아보며 회상하곤 한다.
학생들은 저마다 앞다투어 내 수업에 참여하려는 열의를 보여 눈가에 미소를 짓게도 했다. 그런데 나는 그토록 아름다웠던 때가 다시 오지 않을 행복한 시절임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쏜살같이 시간이 가는 와중에도 박유미(박종수의 아내), 최정기, 김옥경과 같은 학생들이 캠퍼스 커플이 되어 나에게 자신들의 결혼식 주례를 맡아 달라고 할 정도로 따스한 친밀함을 나눴다. 이제는 함께 늙어가는 처지이지만 나는 학생들과 더불어 하나님이 허락해주신 매우 즐거운 관계를 누리며 행복했던 것은 확실하다. 훗날 박종수와 유미는 호주 멜버른에 유학하던 중 목사 안수를 받아 오늘까지 호주 현지인 목회사역을 하고 있다.
최정기 목사(연신교회)와 박종수 목사(호주 현지인교회)는 기독교교육과 출신의 자랑스러운 제자 목사로서 두 자녀의 아버지, 목회자로 보람 있는 사역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박유미 목사는 두 딸 양육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신학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더니 결국 호주 현지인교회에서 안수받고, 현재는 호주 현지인교회의 담임으로 목회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안수식 겸 취임 예배에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참여(줌 실시간 중계)해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소중한 경험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안수식 중에 박유미 목사는 자신을 가르쳐 준 ‘김도일 교수’에게 감사의 마음을 섬세하게 전달해 나를 얼마나 감동시켰는지 모른다.
2000년 학번이었던 유가람은 같은 과의 조항진과 결혼하게 돼서 나는 그들의 주례자로 서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과의 사진이 다행히도 싸이월드 사진첩에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항진, 유가람 목사는 현재 훌륭한 목회자 부부로 멋지게 사역하는 것을 소셜미디어를 통해 종종 소식을 접하며 나는 그들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요즘도 가끔 제자들을 만나면 기독교교육사상사 수업에서 나누었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는 소회를 나누곤 한다.
◇ 2015년 기독교교육과 창립 50주년 기념학술대회에서 학과 교수들과 함께 발제하는 모습.
나는 존경하는 주선애 교수님의 후배 교수로서 장신대 기독교교육과에서 가르치고 일하는 게 얼마나 큰 영광인지를 자주 되새기곤 한다. 고용수 교수님의 리더십과 임창복, 사미자 교수님의 열정과 헌신 그리고 바로 위 선배 양금희 교수님 같은 분들의 기독교교육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가슴 깊이 느끼며 감사를 표하게 된다.
내가 장신대 교수로 들어온 다음 학기에 PSCE에서 학위를 한 박상진 교수가 함께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장신근, 고원석, 이규민, 신형섭, 김성중 교수까지 합류하게 되어 가히 지구최강(?) 기독교교육과의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 물론 그사이에 관록 있는 고용수, 임창복, 사미자 교수는 은퇴하시게 되어 깊은 아쉬움도 느껴야만 했다.
◇ 경기도 이천 도자기 박람회에 교수들과 다녀오다. 몇 년도인지 기억은 없다.
물론 장신대에서의 삶이 기독교교육과에서만 이루어진 건 아니다. 지나고 보니 홍인종, 한국일, 임희국, 노영상, 임성빈, 주숭중, 윤철호 교수님과 같은 인품과 학문이 출중한 여러 교수와의 만남도 너무 소중했다. 어쩌다 한 교수가 지니고 있던 옛 사진을 보아 반가운 마음에 핸드폰으로 그 순간을 간직하게 되었다.
지나고 보니, 장신대는 정과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였다. 매년 두 편 이상씩 전문 학술 저널에 기고하여 게재 허락을 받기 위해 치열하게 학술 활동을 하는 것 외에도 각종 기관에서의 특강과 설교 그리고 번역과 저술이 몹시 버거웠지만, 그것도 열심히 살게 하는 원동력이었음을 부인할 길이 없다. 의미 있는 삶으로의 몸부림을 가능하게 한 촉진제가 되어주었다.
무엇보다 선후배 동료 교수들과의 코이노니아는 행복한 인생의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한번은 교수들이 힘을 합쳐 교수음악회를 해 보자는 의견이 나와 우리는 결기 있게 해 보기로 했다. 그때 한국일, 김도일, 박보경, 김은혜, 김성중, 곽재욱은 “강남스타일”을 패러디하여 “장신스타일”로 개사해 무대 위에서 한 판 놀아보기로 한 것이다.
◇ 2018 가을, 교수음악회에서 강남스타일을 개사하여 ‘장신스타일’을 함께 추다.
그런데 싸이가 만든 강남스타일은 보기와 달리 제대로 추기에는 까다로운 춤이었다. 학생들 몇은 소위 ‘말춤’이란 것을 교수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고, 누군가는 음악 녹음실을 섭외하여 “장신스타일”을 지하 녹음실에서 녹음하기에 이르렀다. 학창 시절에 좀 놀아본(?) 경험을 총동원하여 한국일은 드럼을, 곽재욱은 전기기타를 김도일은 가수 겸 세컨드 기타를, 김성중은 키보드를 다시 잡았다. 박보경과 김은혜는 멋진 춤솜씨로 학생들과 함께 신나게 말춤을 추었다. 어떤 학생이 찍은 동영상이 얼마 전까지 유튜브에 올라와 있었는데 지금은 찾기가 어렵다. 이제는 같이했던 교수와 학생들의 기억 속에만 그 시절의 이야기로 남아 있어 아쉬웠는데, 다행히 어떤 분의 제보로 영상 스크린샷을 구해 올린다.
기억을 따라오다 보니 이번 글은 유난히 사진이 많아졌다.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그 순간 생동하는 느낌과 분위기를 잘 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에 적은 이때까지의 장신대 생활은 교수와 목사로서의 왕성한 강의, 외부 특강, 설교, 집필, 그리고 주요 보직자로서 책임 수행까지 적어도 1인 3역을 감당했던 벅찬 시간이었지만, 즐거운 일들이 수없이 일어나 나를 춤추게 하고 주님을 향해 진심 어린 찬양이 끊이지 않도록 해준 찬란한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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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일은 장신대 기독교교육학과 교수로 한국기독교교육학회 회장을 역임하며 다음 세대를 세우고, 가정교회마을연구소 공동소장으로 이 땅 위에 하나님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에 힘쓰고 있다. 이 지면을 통해 삶 속에 구체적으로 역사하시며 이끌어 오신 그분의 발자취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김도일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cnews1970@naver.com
출처 : 주간기독교(http://www.cnews.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