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우선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많은 것을 판단하게 된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가치 평가가 달라지기도 하지만 겉모양 에만 치중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우리는 안다. 마치 황화담스님의 행적처럼 말이다.
화담스님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스님의 생몰연대도 확인된 것은 없으며 '화담'이라는 법호도 무슨 자를 썼는지 알 수 없다. 19세 때 금강산 장안사로 출가했으며, 속씨가 황씨였기 때문에 '황화담'스님으로 불렀다고 한다.
처음 출가할 때 미타염불을 하는 염불당이 인연이되어서 평생 미타 염불로 수행 정진했다. 스님의 세속 나이 서른쯤에 금강산에서 수행하다 뜻한 바가 있었던지서울로 올라왔다. 평생 아미타불을 염하였던 스님은 아미타불의 이름 한 번만 들어도 한 없는 공덕을 짓고, 아미타불의 글자만 쳐다보아도 업장을 소멸하고선근을 심는다는 옛날 어른스님들의 말씀을 듣고, 당신 몸에 아미타불이라고 쓴 천을 두르고 목탁을 두드리면서 서울 구석구석을 다니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스님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으며, 해방 직후부터는 이미 '타락자'로 낙인 찍혀 불교계에서 배척을 당하였다. 그래서 아예 큰 방에는 들어갈 생각도 안하고 적당한 자리에서 밥 한 술 얻어먹는 것으로 만족하고 곁방에서 주로 생활했다. 스님을 보는 사람 누구건 술이나 마시고 그냥 저냥 절밥이나 얻어 먹는 사람으로 취급했고, 아무도 스님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해인사 원당암을 염불당으로 삼고 있을 때 일이다. 그 날도 여느 날처럼 마을에서 약주 한 잔을 하고 올라오다 계곡에서 목욕하는 스님들을 보고 들어가서 같이 목욕을 했다. 그런데 장난기가 발동한 몇몇 스님들이 아직 물속에 있던 스님들의 옷을 감추고서 빨리 나오지 않으면 옷을 모두 물에 넣겠다고 소리 쳤으나, 약주에 취해 있었던 화담스님은 그것도 모르고 계속 시원 함을 즐기고 있었다.
나중에 물에서 나온 스님은 옷이 젖어 있음을 알고 그 옷을 입고 해인사로 가서 조실 스님에게 "스님이 젊은 스님들을 잘 못 가르 쳐서 이런 행동을 한다"면서 크게 호통을 쳤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안 대중들이 조실스님에게 데려다가 무릎을 꿇게 하고, 매질을 가하는 가혹한 행위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일을 당하고도 스님은 이렇다 저렇다 할 변명이나 책망의 말도 하지 않았다.
스님은 모두가 '타락자'라고 손가락질을 하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어도 "좋지! 좋지! 허허허"웃을 뿐이었고, 그저 조금이 라도 도움을 받게 되면 아이든 어른이든 상관않고 "이 공덕으로 꼭 부처님 되십시오."라고 하면서 꼬박꼬박 절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호스님이 회상하는 화담스님은 그런 분이 아니었다. 언젠가 청도 적천사 객실에서 스님을 만난 적이 있는데, 저녁 예불시간에 법당에는 들어가지 않고 객실 방에서 정중하게 가사장삼을 수하고 정성스럽게 절을 하고는 두 시간 동안 염주를 들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한다. 다음 날 새벽에도 마찬가지로 도량석 시간에 맞춰 일어나서 세수하고 또 정성스럽게 가사장삼을 수하고 법당을 향해 절을 하고는 염주를 들고 앉아 있었다 한다.
나중에 다른 스님이 들어오자 평소의 흐트러진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타작자라면 그럴 수는 없는 것이라고 회상하였다. 스님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는 무섭게 정진을 했으면서 왜 남들에게 술로 타락한 것처럼 보이게 했을까? 스님은 30대에 이미 견성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으나'어떤 스님, 어떤 스님'하면서 사람들이 따르면 공부에 방해될까봐 당신의 자취를 감추기 위해서 일부러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것이 아닌가 하고, 화담스님을 기억하는 분들은 말한다.
스님은 6.25사변 이후 부산 범어사(동산스님이 주지시절)에 있었는데,당신이 열반할 날을 3개월 전에 미리 말했는데도 아무도 귀담아 듣는이가 없었다고 한다. 물론 그도 그럴 것이 이미 타락자라고 낙인찍힌 노인네가 그냥 하는 소리쯤으로 여긴것이다. 스님이 가겠다고 한 날 일주일 전, 옆방에 있던 부주지스님을 불렀다.
그때 돈으로 일원짜리와 약간의 오원짜리로만 모은 6만원을 내놓으면서"나는 땅도 없고 집도 없어. 어려운 사중에 보태 쓰게." 또 당신 신고있던 양말목 속에서 3만원을 따로 내 놓으면서 "이것으로 내 초상비는 될 꺼야."하면서 당신 뒷일을 부탁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로 점점 기운이 쇠약해지면서 간다고 약속한 전날에는 손수 물을 길어다가 불 지펴 목욕하고, 평소 입던 옷은 깨끗하게 태워 버리고, 가사장삼을 수하고 자리에 누었다고 한다. 그때서야 부주지스님이 이상함을 느끼고 젊은 스님을 시켜 스님곁에 머무르게 했다.
당신 가시기로 약속한 그 날 사시에 "나, 이제 가야겠어."하니, 옆에 있던 젊은 스님이 "한 평생 중노릇하고 지금 부처님 마지 올리려는데 가시려고 그래요?"하니, "듣고 보니 자네 말도 맞네." 하면서 부축해 달라고 해 일어나 앉고는 법당의 마지쇠 소리도 확인하고, 신중단의 반야심경 소리도 확인하고 다시 눕혀 달라고 하면서 "願共法界諸衆生 自他一時成佛道"를 마지막으로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그제서야 부주지스님은 "거짓 것에 속아 진실한 도인, 진실한 공부인이 옆에 계시는 줄도 몰라 뵙고 법문 한 마디 못 듣고 가르침 한 마디도 못 들었다"고 통곡을 하면서 스님께 너무 소홀했던 것에 대해 눈물을 흘리면서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비단 화담스님 뿐만 아니라, 알려지지 않고 묵묵히 자기 수행에 전념하시다 가신 분들이 많으며, 지금도 곳곳에는 많은 분들이 이렇게 수행 정진하고 계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보여지는 모습에만 치우쳐 정말 '보석'을 놓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생활을 한 번 되돌아보고,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좋은 일을 당하든지 좋지 아니한 일을 당하든지 마음을 편히 하여 무심히 가져서 남 보기에 숙맥같이 지내고 병신같이 지내고 벙어리같이 지내고 소경같이 귀먹은 사람같이 어린아이같이 지내면 마음의 망상은 저절로 없어지느니라. /경허선사
과연 나는 지금 죽는다 해도 내 수행에 부끄러움은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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