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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예그리나
"어머니의 이민신청이 기각됐다고요?“
“죄송합니다. 이민성에서 그렇게 연락왔네요.”
이민 알선 컨설턴트로부터 걸려온 전화에 윤재의 왼쪽 무릎이 팍 꺾였다. 가계에서 생선포를 뜨다말고 그대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반쯤 손질한 멀렛트 생선이 구석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옆에서 생선을 튀기던 아내도 튀김 철망을 든 채 손이 덜덜 떨렸다.
“뿌글뿌글~치이이익~”
펄펄 끓는 기름 솥에서 튀김 생선만이 요란스레 타들어갔다. 세상일에 아랑곳없었다.
***
어제 다녀온 오클랜드 변두리 요양 병원이 윤재 눈에 어른거렸다. 정신질환 발작으로 국가 지정 시설에 갇혀 원통해하는 어머니 표정이 싸하게 눈에 밟혔다. 특수 시설 침상에 누운 어머니가 두 눈을 끔벅거리며 토해낸 하소연은 처연했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다냐? 뉴질랜드 외아들 보러왔다가 몹쓸병으로 드러눕다니... .”
생각지도 못한 병마에 까칠해진 어머니 얼굴이 흔들거렸다. 윤재의 속내도 기름에 튀겨지는 생선처럼 타들어갔다. 말은 못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뉴질랜드에 여행 왔다가 쓰러지실 게 뭐람. 팔팔하시던 어머니가 분노조절 문제로 영어의 몸이 될 줄이야. 고국에 돌아갈 수도 없이 치료 감호중이니 얼마나 답답하실까. 한국에 두 여동생이 있는 관계로 부모 초청 이민은 불가하대서 차선책으로 시도한 인도주의적 이민 신청이 기각되고 말다니... .’
윤재의 온 몸 세포 하나하나가 극도의 무력감에 빠졌다. 남태평양의 여름 12월, 녹색의 계절도 무색했다. 부단히도 치열하게 살았던 이민생활이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남섬 크라이스트처치 지진 흙더미에 매몰된 느낌이었다.
***
윤재는 벌컥벌컥 냉수를 두 컵이나 연달아 마셨다. 내팽개친 생선을 한쪽으로 던져놓고 장갑을 벗었다. 대충 손을 씻고 근처 현지인 성당으로 발길을 급히 옮겼다. 고해실로 총총 들어갔다. 외국 신부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몇 마디 꺼내기도 전에 그만 눈물샘이 터져버렸다. 입술까지 얼어붙어 벙어리가 되었다.
도저히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도망치듯 고해 실을 뛰쳐나왔다. 성당 밖 녹슨 철조망을 붙잡고 어깨를 들썩였다. 알 수 없는 격정의 분출은 활화산 마그마처럼 뜨겁게 온 몸을 녹여냈다. 이민생활, 갈 곳 모를 노모의 불법체류(?). 쉼 없이 온몸을 쏟아 부었던 노동, 어디로 출구를 찾아야 할지 막막해 몸통이 폭발하고 말았다. 은발의 노신부님이 수단을 입은 채, 뒤따라 나왔다. 사제의 손으로 망가진 철망 옆 진구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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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에게 그 날의 생생한 절규는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다. 이후 숨 막힌 날들이 흘렀다. 뉴질랜드 이민 세월의 강물이 남태평양에 녹아들었다. 10 여년간 해왔던 생선가계 일은 강물처럼 변함없이 흘러내렸다. 하루 50여 마리씩 생선 포 뜨고 손질하며 꼬박 보냈다. 그 숫자만도 수 만 마리를 넘었다. 쌓아놓으면 큰 산더미였다. 어머니는 성한채로 기다려주시지 않았다.
생선 더미위에 쏟은 땀과 눈물 그리고 피가 좋은 열매로 영글길 원했다. 알알이 맺힌 결실의 정수 속에 어머니의 이민승인이 되길 간절히 빌었다.
*******
20년전, 직장에서 퇴근하고 들어오는 윤재 발걸음은 낙지처럼 흐물거렸다.
“우리도 내려놓고 이민을 가지. 이 상태로 계속 살다가는 일찍 죽겠어.”
윤재의 뜬금없는 푸념에 아내가 눈을 동그랗게 치켜세웠다.
“웬, 이민이야. 당신이 회사에서 과로 탓에 뇌출혈로 쓰러져 걱정은 되는데.”
“이민 간 후배 녀석, 김 대리가 내 소식을 들었나봐. 연락이 왔더라고.”
윤재가 중요 프로젝트로 쉴 새 없이 일하다 비상 회의중 통나무처럼 쓰러졌다. 곧바로 병원에 실려 갔다. 뇌졸중 초기로 판명이 났다. 간신히 생명은 부지되었다. 생사를 넘나든 경험은 결단을 촉구했다. 윤재 부부에게 뉴질랜드 이민은 새로운 탈출구였다. 상황에 몰려 우여곡절 끝에 뉴질랜드로 왔다. 후배 도움으로 적응하다, 조그만 생선가계를 인수해 자리를 잡았다.
생선가계 이름을 바꿨다. 딸아이 수아의 제안으로 원래 이름 Yeah에 Grina를 덧붙였다. 고국 외할머니 댁 평창 동네 이름, 예그리나가 인상적이었다고, 엄마 아빠에게 그 뜻까지 설명해 주었다.
“예그리나란 이름엔 사랑하는 우리 사이란 뜻이 있대요.”
딸아이의 기특한 마음을 들어주었다. 이민까지 왔으니 만나는 사람끼리 그렇게 되길 당연히 바라던 터였다. 상호 명에 넣어두니 왠지 든든한 감이 들었다. 상서로운 비장의 무기를 간판에 숨겨둔 느낌이었다.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손님들은 물론 이웃 가계와 만나는 모든 뉴질랜드 사람들에게도 그 이름값이 펼쳐지길 바랐다.
간판 상단에 ‘Yeah Grina’로 쓰고, 그 아래 ‘Fish & Chips’를 덧붙였다. 그 뜻을 이민생활하면서 재현해보기로 했다. 상호에 호기심을 느낀 손님들에게 그 뜻을 알려주니 한층 친근감이 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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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딸이 수의대에 간다고? 신기하네. 강아지와 양들이 그렇게도 좋니?”
“엄마, 아빠! 하늘에서 나를 뉴질랜드 동물 치료해 주라고 보낸 것 같아.”
하나 있는 딸아이는 어릴 적부터 동물에 남달리 관심이 많아 전공으로 수의대를 염두에 두었다. 공부에 집중 몰입해 소망대로 더니든에 있는 수의과대학에 진학했다. 뉴질랜드는 동물 가축들이 많아 할 일이 많았다. 뉴질랜드 국민은 가정마다 애완견이나 반려견을 데리고 살아서 수의사의 손이 절대적이었다. 수백만 마리 양과 소 그리고 개들로 수의사의 손이 필요했다. 당연히 가축의 병을 치료하고 예방하는 수의사의 역할이 필수였다. 섬나라 뉴질랜드에는 동물 전염병이 돌게 되면 엄청난 국가적 손실이 뒤따랐다. 가축을 정기적으로 점검한 덕에 방역체계가 잘 정착된 나라였다.
수아는 수의과 대학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딸과 진구 부부는 두세 달에 한번 정도 만났다. 주로 방학 때였다. 의대 전 학년 과정 6년간을 떨어져 살게 되었다.
수아는 쉬는 날도 가축 농장이나 동물 병원에 나가 실습하는 걸 좋아했다. 말 못하는 소나 양 그리고 개들도 함께 살아가는 생명이라 여기며 애정을 쏟았다. 딸은 동물을 친구처럼 대하며 무언의 말을 나눴다. 서로 생명감을 나누는 사이, 예그리나였다. 수의사가 되려면 강인한 체력이 필수 조건이었다. 40~50 kg쯤 되는 양 한 마리 쯤은 번쩍 들어 검사대 위에 올릴 체력은 되어야 했다. 그런 힘이 없으면 실기 면접에서 불합격 처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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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에 두고 온 장모님이 교통사고로 운명했다는 비보를 접했다. 날 벼락같은 소식에 그만 윤재와 아내는 망연자실했다.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르며 급히 고국 행 직항 비행기 표를 구하려고 동분서주했다. 시각을 다투는 상태였다. 성수기라서 겨우 한자리밖에 없었다. 우선 아내만이라도 먼저 고국으로 떠나도록 서둘러 수속을 밟았다. 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생선가계도 문제였다. 누구하나 자리비우기가 어려웠다. 아내 빈자리에는 단골손님인 마오리 남자가 아르바이트식으로 거들게 되었다.
아내가 장례식과 삼오 제까지 다 치르고 시어머니를 찾아뵈었다. 시어머니가 뉴질랜드 아들을 보고 싶다고 애원하다시피 청하며 뉴질랜드 한번 가게 해달라고 졸랐다. 여러 가지로 마음이 쓰여 고민이 따랐다. 몇 차례 윤재와 전화하던 아내가 마음을 정해버렸다.
나이 들어 소원이 아들 만나보고 싶다는데, 이번에 이를 거절하면 평생 후회거리가 될 것 같았다. 그래도 몸 성할 때, 만나 함께 밥도 먹고 오클랜드 주변이라도 모시고 구경 좀 시켜드리고 싶었다. 일이 바쁘다고 효도를 나중에 한다하고 노모를 뒤로 놔두었다가 막상 세상을 뜬후 후회 하는 이가 많았다. 양가 부모님중 살아 계신 분은 시어머니 한분이었다. 살아생전 서로 나누는 사이도 머잖아 끝이 올 것 같았다.
결국 출국 준비를 도와 시어머니를 아내가 모시고 뉴질랜드에 왔다.
어머니는 석달짜리 여행비자로 들어오게됐다. 생선가계에 나와서 보고 주변을 호기심 찬 눈으로 구경도 했다. 된장국 저녁밥을 차려놓고 기다릴 때도 있었다.
수아도 주말에 올라와 함께 온가족 오클랜드 근교 구경에 나섰다. 어머니가 들판에 양떼들을 보며 신기해하는 모습이 어린아이같았다. 수아가 할머니에게 동물 의사될거라며 학교생활 이야기를 재밋게 들려줬다. 바닷가 미션베이 맛집에 들러 큰 대접에 수북한 특산 홍합 요리도 함께 먹었다. 뉴질랜드산 투이 맥주를 들며 함께 잔을 부딪쳤다. 어머니가 맥주맛에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막걸리마시는 것 같다고 했다. 뉴질랜드에서는 일하다 중간에 막걸리처럼 마시며 힘을 얻는다고 얘기 드리자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식으로 특산 모뵌픽 아이스크림도 사서 먹었다. 어머니가 아이스크림을 조금씩 아껴들었다. 껍질 부분 콘 맛을 음미하며 어릴 적 즐겨먹던 샘베과자 맛이라고 좋아했다.
“외국에 나와 살아도 이렇게 서로 나누며 사는 모습이 보기 좋다. 이런 게 복 아니냐. 이거면 됐지.”
어머니 말에 윤재의 어깨가 흔들의자처럼 움직였다. 그런 윤재를 보는 아내가 살포시 웃었다. 딸아이가 일어나 돌아가며 등뒤에서 할머니 엄마 아빠 등을 토닥여줬다. 홈런치고 베이스에 들어와 선수들 손바닥을 두드리는 퍼포먼스 같았다.
오랜만에 미션베이 나무 그늘 벤취에 앉아 정담을 나눴다. 하늘은 푸르고 바다는 맑았다. 온 세상이 서로 나누는 풍경화였다. 해수욕장 미션베이 벤취에 앉아 멀리 랑기토토 섬을 바라보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즐거운 이야기가 앞에 보이는 남태평양을 건너 고국으로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모처럼 함께한 오클랜드 가족 휴일이 꿈속을 넘나들었다. 오붓한 시간에 모두 흐뭇해 했다. 예그리나의 꽃이 만개한 날이었다.
어머니는 소일거리를 찾아 손길을 넓혀갔다. 무성한 집 텃밭도 가꿨다. 상추, 풋고추, 된장에 삼겹살까지 구워 저녁상을 차려주기도 했다. 어머니를 뉴질랜드에 잘 모시고 왔다고 윤재와 아내가 위안을 느꼈다. 가계에서 고단하게 일해도 어머니를 보면 노곤함이 싹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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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뉴질랜드에 온 지 열흘째였다. 안타까운 사달이 벌어졌다. 윤재가 아내와 종일 일하고 퇴근해 집에 들어서는데 어머니 표정이 울그락붉으락하며 정상이 아니었다. 급기야 도마를 내 던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데크 유리창이 산산조각이 났다. 유리조각을 치우던 아내의 손등에 검붉은 피가 솟았다. 광기어린 어머니를 윤재가 등뒤에서 감싸 안았다. 어머니가 거세게 뿌리쳤다. 폭발적인 힘에 그만 윤재가 내동댕이쳐졌다. 어머니는 실성한 채로 목놓아 울부짖었다. 광란의 상태로 집안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옆집에 사는 현지인, 키위가 뛰어와 보더니 위급상황을 진정시키려고 111 에머전시에 신고했다. 얼마후 경찰차와 구급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들이닥쳤다. 어머니는 경찰과 구급요원의 손에 제압되었다. 바로 구급차에 실려 노스쇼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여러 검사와 응급 치료가 병행되었다. mental disorder로 판명이 났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다 분노 충동이 일어나면 조절이 불가한 상태라했다. 가족이나 이웃에 해를 끼칠수 있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어 24시간 집중 관리와 치료가 필요한 상태라고 경고를 주었다.
뉴질랜드는 국민안전을 위해서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부었다. 자국민은 물론 여행자들도 뉴질랜드내에서 안전사고가 나면 무료로 치료해주고 지원을 해주었다.
어미니가 병원에 입원한 지 한달이 돼갔다. 윤재 부부는 생선가계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여행차 와서 이런 변고를 치른지라 앞 날이 까마득하니 아물가물했다. 딱히 병 중상이 차도가 없었다. 치료가 두달째로 들어서자 혹시 모를 병원비 청구라도 나오면 어쩌나 은근히 걱정되었다. 어머니가 세달이 넘으면 한국으로 추방된다는 얘기도 돌았다. 영어하나도 안되는 어머니가 병원 시설에 갇혀 치료를 받는다는 게 힘들어보였다.
윤재 부부는 매일 새벽 6시에 북쪽 알바니 집을 나서서 남쪽을 향해 하버브리지를 건넜다. 서둘러 센트럴 다운타운 시마트 옥션장을 찾았다. 싱싱한 횟감 생선을 골라 큰 플라스틱 박스 두 개에 가득 담아 나왔다. 이어 어머니가 머물고 있는 서쪽 뉴린 지역, 특수 요양 병원으로 향했다. 하루 먹을 음식 세끼분을 넣어드렸다. 간호원한테 끼니마다 잘 챙겨 드리라고 간곡한 부탁도 했다. 먹을 것을 우리 음식으로 매일 갖다 대며 얼굴이라도 보니 조금은 어머니가 위안을 삼는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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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가계는 오클랜드 남쪽 지역인 오타라 상가지역에 있었다. 섬나라 사람들과 원주민 마오리들이 많이 살았다. 출퇴근만 해도 100km가 넘었다. 예그리나-피시 앤 칩, 윤재 생선 가계는 이름 값을 톡톡히 해냈다. 가계 주인과 손님간에 서로 나누는 관계가 좋았다. 풍성하고 맛 좋은 피시와 감자 튀김 그리고 싱싱한 생선 포가 잘 팔렸다. 고생을 해도 일단 돈이 벌렸다. 그맛에 그나마 어느정도 피로감이 누그러졌다.
옆집에는 중국인이 하는 돼지고기, 로스트 포크 음식점이었다. 훈제해서 기름기 뺀 돼지고기를 국수나 밥위에 얹어주었다. 음식 양이 많아서 힘쓰는 노동자나 덩치가 큰 이들이 주로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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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 신분으로 뉴질랜드에 왔다가 정신질환으로 병원에 입원한 어머니는 외로운 섬으로 남았다. 부부가 일하는 중에 어머니를 돌볼 없는 상황에 국가가 나서서 성심성의껏 무료로 치료를 해주는 게 무척 고마웠다.
성실히 일해 벌수 있는 만큼 더 벌고 더 많은 세금을 내는 게 두 부부의 목이라 여겼다. 자신들이 못하는 부분을 국가가 해주니 열심히 벌어 병원 치료 비용을 세금으로 보탰다. 그렇게 사는 게 사람사는 도리라 여기니 사심이 없었다.
주변에 보면 돈 잘 버는 일부 자영업자들이 세무신고 누락으로 몇 년후 세금폭탄을 맞곤 했다. 뉴질랜드에서 세무를 담당하는 IRD(In Rand Avenue)는 한국의 국세청과 같았다. 막강한 조직과 체계를 갖춘 터라 불의를 과감히 척결하고 정의를 바로 세웠다. 온 국민으로 부터 신뢰받는 정부 기관이었다.
지난 달에도 스시가계를 10여년 하면서 지점까지 두 개 낸 사람에게 IRD로부터 거의 백만달러 이상의 벌금이 강제 추징되었다. 은행에 있는 잔고가 어느날 다 빠져 나가버렸다. 거기에 더해 향후 5년간 자신의 이름으로 비즈니스도 못하고 은행 어카운트도 못 열게 되었다. 당사자에겐 천지가 무너지는 고통이었다. 이민자들이 하는 소규모 업체에도 세무사찰의 칼날이 다가왔다. 세금낼때, 현금수입을 누락한 몇몇 식당, 빨래방, 여행업체, 건강식품점등이 세금 폭탄을 맞고 줄줄이 도산되었다. 과도한 욕심이 부른 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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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허리야!”
윤재가 이마에 땀을 훔치면서 허리를 간신히 폈다.
“오늘 오전에 웬 횟감이 왜 그리도 많이 나가지?”
아내가 옆에서 시원한 진저비어병을 따서 윤재에게 건네며 말을 받았다.
“그러게 오늘 마오리들 씨족 잔치가 열린대서 엄청 주문들 하네.”
“이렇게 장사가 잘 되면 돈은 쌓이는데, 몸이 축나겠어.”
“그래도 그게 어디야. 장사 안될땐 힘들었잖아.”
바쁜 가게 일에 손놀림이 빨라진 윤재와 아내의 얼굴에 땀이 흥건했다.
현지인 키위들과 남태평양 섬나라 사람들과 원주민 마오리들이 주 고객층이었다. 멀렛트, 스내퍼, 가와이, 트라벨리 등의 생선을 즐겨 찾았다. 우리말로 치면 송어, 도미, 고등어, 존도리 쯤 되었다.
원주민 마오리들은 멀렛트란 생선을 유독 좋아했다. 멀렛트는 보기에도 도톰하니 살이 많이 붙은 생선이었다. 이 생선포를 사다가 집에서 온갖 양념을 해 훈제식으로 불에 익혀 먹었다. 양념 향기도 좋고 뱃속이 든든하게 꽉 찼다. 땀 흘려 일하고 푸짐한 생선을 즐기며 큰 부자가 된 느낌을 누렸다. 신선도 높은 횟감은 한쪽에 진열돼 단골들에게 팔렸다. 나머지 생선은 포를떠서 피시 앤 칩 튀김 음식으로 만들었다. 그 일은 아내가 맡아 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수많은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이민와서 이룬 나라, 뉴질랜드는 서로 나누며 사는 지구 공동체였다. 윤재는 가계 이름 예그리나를 떠올렸다. 함께 서로 나누며 사랑하는 사이. 예전에 읽은 뉴질랜드 통계 기사에 세계 176개국에서 온 이민자의 나라가 뉴질랜드 현주소였다.
예그리나 가계에서 두 블럭 떨어진 곳에 현지인 성당이 있었다. 윤재가 자주 찾는 곳이었다. 그곳에 세인트 피터스 스페셜 스쿨이 토요일 날 운영되었다. 정신 발육에 불편이 따른 자폐아 들을 위한 특수학교였다. 본당 사제이신 톰 신부님이 만든 학교였다. 톰 신부님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어릴 때 이민온 분이었다. 열 댓명 정도의 자폐아들이 교육을 받아왔다. 많은 봉사자들이 나와서 아이들을 지도해주었다. 언젠가 딸 수아 또래의 여대생이 점심으로 먹을 거라며 15인 분 피시앤 칩을 주문하러 왔다. 음식을 만들며 사정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자폐아를 위한 특별 식사로 월 마지막 주는 생일 파티를 합동으로 해주는 날이었다. 피시 앤 칩을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선물처럼 줄 요량으로 보였다. 그 말에 아내가 깊은 감동을 받았다. 자신도 그 봉사나눔에 함께 할 거라고 다짐했다. 기쁜 마음으로 아내는 더 푸짐하게 음식을 마련해 주었다. 그날 음식 값은 받지 않았다., 매달 마지막 주는 무료로 줄 테니 와서 배달만 해가라고 약속했다. 그러길 벌써 3년째 이어나갔다.
윤재가 간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잔 터라 피곤이 몰려왔다. 잠시 밖에 나가 쪼그려 앉아 냉수를 들이켰다. 단골손님인 아일랜드 출신 피터가 가계에 들어오다 깜짝 놀란 얼굴로 윤재에게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윤재는 겸연쩍게 웃었다. 피터가 여러 번 채근하기에 윤재가 그간의 어머니 사정을 들려줬다. 한달 지나면 세달 여행자 비자 기한도 만료되는지라 추방당하는 건 아닌지 걱정을 내 비쳤다.
추방돼도 한국에서 치료해줄 돈과 보호자가 마땅치 않아 걱정이었다. 두 여동생이 있는데 큰 여동생은 최근 큰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중이었다. 둘째 여동생은 나약한 몸으로 병을 달고 살았다. 자기 몸 하나 간수하기도 힘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뉴질랜드에 모시고 살며 모든 정성을 기울여 돌보고 싶었다. 어머니가 뉴질랜드 영주권을 받기를 간절히 원했다. 부부가 생선가계일은 열심히 하면 어머니는 모시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뉴질랜드는 노약자들한테는 아주 정성을 다하는 서비스를 제공해주어 믿을 만했다. 피터가 한참을 듣고 나더니 한마디 툭 내뱉었다.
“Humanitarian Immigration!”
윤재가 귀를 쫑긋하며 물었다.
“Humanitarian Immigration?”
피터가 부연 설명을 해줬다. 모든 형제들이 뉴질랜드에서 영주권 받고 살면 부모를 초청 이민으로 할 수 있는데, 윤재한테는 해당되지 않았다. 여기에 다른 방법이 딱 하나 있다고. 바로 인도주의적 이민이라는 카테고리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우선 인도주의적 이민 업무를 잘 하는 변호사를 알아보라고 귀뜸해줬다. 피터도 수소문해 유능한 변호사를 알아보겠다고 깊은 관심을 보였다. 윤재 눈이 번쩍 뜨였다. 피터가 주문한 횟감위에 스내퍼횟감을 수북하니 더 얹어 주었다. 교민지 맨 뒷부분 직업란에서 이민 변호사를 찾아보고 일일이 전화를 했다. 자신있게 해보겠다는 이민알선 업체가 없었다. 마지막이다 싶어 전화한 회사에서 할 수 있다 해서 다음날 약속을 잡았다.
윤재는 설레는 마음으로 다음날 일 중간에 시간을 냈다. 상황이 촉박한지라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겠다는 기대를 가지고 그 업체에 갔다. 뚱뚱한 몸에 뱃살이 볼록 나온 이가 명함을 건네주었다. 이민 컨설턴트 대표라 써 있었다. 모든 이야길 듣더니, 할 수 있다며 조건을 바로 제시했다. 선수금 8천달러에 총 진행 비용 4만 달러, 도합 4만 8천 달러를 우선 입금하라고 했다. 윤재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일도 해보기전에 4만 8천 달러를 먼저 달라니? 교민지와 교민 신문에 전면 광고를 내며 요란을 떠는 것도 미덥지 않았는데, 다짜고짜 돈부터 내라니 왠지 신뢰가 가질 않았다.
이민을 떠나올 때, 호주에서 살다 온 선배가 신신당부한 말이 툭 생각났다.
‘이민자의 약점을 잡고 사기 치는 브로커들 조심해. 급하게 결정 하지 마. 많이 알아보고 신중히 결정해. 의외로 신뢰를 갖는 현지인들도 많아. 잘 알아봐.’
실망한 채 한 시간 면담비로 200 달러를 던져주고 사무실을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근처 구멍가게에서 산 시원한 콜라를 들고 공원 나무아래에 앉았다.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쉬지 않고 계속 마셨다. 한 병을 다 목 안에 털어넣었다.
그때였다. 휴대폰이 울렸다.
“Humanitarian Immigration 변호사를 찾았어요.”
피터한테 온 전화였다. 자기 나라 아일랜드 출신 변호사라고 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고 귀뜸 해주었다. 윤재 가계와 10분도 안 걸리는 거리였다. 팬뮤어 5거리에 있는 상가건물 2층에 있었다.
피터 소개로 만난 이민 변호사 안드레아는 2m가 넘는 후리후리한 키에 얼굴도 시원스러웠다. 옛날 기아농구단에서 종횡무진 활약했던 장신 한기범 선수를 연상케했다. 기린처럼 선한 눈매에 신뢰가 묻어났다.
윤재의 사정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었다. 이후 윤재가 간략하게 정리한 서류를 건네자 꼼꼼히 살폈다. 10여분 기다리라 하고선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룹 팀 회의를 한 모양이었다. 팀원들의 의견과 경험을 듣고 확신에 찬 얼굴로 나왔다.
윤재와 안드레아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1시간 쯤 애기를 나눴다. 안드레아는 이민성에 인도주의 이민을 신청해 좋은 결과를 안겨드리겠다고 약속했다. 어머니에 대해 갖는 간절한 아들의 효성도 존중해주었다. 하늘의 도움도 필요할 거라 덧붙였다. 착수금으로 2천 달러를 제시했다. 나머지는 그대 그때 일하며 비용청구를 하는데, 시간당 200에서 300 달러 정도로 생각하라고 얘기해 주었다.
결과가 승인될 때 좀 추가 청구를 하겠다고 했다. 윤재는 흔쾌히 승낙했다. 믿음이 갔다. 진행하며 과정별 수고비를 내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였다.
윤재와 안드레아는 어머니의 인도주의적 이민 신청 준비를 착실히 해나갔다. 변호사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다 알려줬다. 관련 서류도 한국에 요청해 영어로 공증해 제출했다. 무엇보다도 한국민의 정서를 파고들어 인도주의적 선처를 호소했다. 모든 서류를 올려 이민 신청을 마무리했다. 무려 1년 6개월이 훅 지나갔다. 결과를 기다렸다. 한 자락 희망을 걸었다. 하루하루 고된 일을 하면서도 혹시 하는 기대로 버텼다. 결과는 기각이었다.
욱하는 마음에 키위성당 신부님을 찾아가 하소연했던 일, 울먹이다 고백성사도 제대로 못하고 뛰쳐나왔던 순간도 허망하게 느껴졌다.
조용필의 ‘꿈’ 노래 가사가 반추되었다.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타국은 고향의 향기를 들을 수가 없었다. 어깨가 파도소리 따라 들썩이려던 차, 벌떡 일어났다. 멀고도 외로운 길, 다시 걸어야했다.
상심이 깊던 며칠후, 피터가 가계에 찾아왔다. 안드레아 변호사를 만나 윤재 어머니 이민 기각에 대한 대책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다시 시도해보는 게 어떨까 의사를 개진했단다. 윤재가 다시 안드레아 사무실을 찾아갔다. 안드레아가 윤재에게 새롭게 보충할 내용을 알려주며 이민성 승인에 재도전을 다짐했다. 부족하다 싶은 부분을 보완해가기로 했다.
먼저 윤재가 10여년간 피시 앤 칩을 열심히 하며 착실히 세금을 납부한 점과 주변의 공적인 분야 사람들의 추천서를 첨부했다. IRD 여직원의 추천 문서와 현지인 키위 성당 사제의 추천 레터도 덧붙였다.
다불어 한국인의 정서, 특히나 아들을 의지하는 노모의 심정을 간절히 알려주었다. 윤재가 먼저 한글로 장문의 글을 썼다. 늦은 나이에 한국 문단에 등단한 교민 후배에게 주어 고쳤다. 긴 문장을 줄여 짧고 감명깊게 다시 썼다. 이어서 오클랜드 대학 교수로 있는 교우에게 영문 번역을 부탁했다. 절절한 탄원서같았다. 키위 영문 번역을 한 뒤 공증 변호사의 서명을 받아 추가 자료로 첨부했다.
한국 어머니로서 겪은 일제치하 식민지 생활, 6 25 전쟁 참화, 아버지가 북한 군의 총을 맞아 다리를 잃은 아픔, 당시 참상을 담은 흑백 사진도 덧 붙였다. 인도주의적 접근에 최선을 다했다.
노모는 뼈빠지는 고생으로 가정을 일구어 냈다. 아버지가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어머니 홀로 아들과 두 딸을 키우며 고생한 이야기를 생생하게 썼다. 두딸이 어머니를 모시기 어려운 여건, 병원기록과 진단서 그리고 의사 소견도 첨부했다. 한국의 전통적인 정서, 아들이 부모를 모시고 사는 풍습도 덧붙였다. 아들에게 의지한 어머니의 고독함과 인생말년에 아들과 살다 마무리 하고픈 심정등등... . 참고 자료지만 정성껏 준비했다.
아일랜드 출신인 안드레아의 부모님은 아일랜드에서 영국 식민통치하에 말 할 수 없는 핍박과 고난을 받은터였다. 한국이 일제 식민 지배를 당한 심정을 이해했다. 부모가 겪은 참상은 트라우마로까지 번졌다.
가족을 제외한 모든 외부 사람들이 두려웠다.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몰랐다. 결국 죽으나 사나 가족밖에 없었다. 사는 동안 함께 먹고 자는 것, 그리고 죽을 때 곁에 있어주는 것을 가장 바랬다. 기본적인 욕구였다. 그런 정서로 자랐기에 진구와 노모 로사가 한 집에 살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사명이라도 된 듯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뉴질랜드는 다른 국가 사람들이 모여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이민자의 나라였다. 다행히 나누고 어려운 사정을 보듬어 주고 서로 챙겼다.
안드레아가 아주 생생한 내 이야기처럼 모든 문건을 정리하고 검토했다. 최종 자료와 함께 2차 신청 서류를 이민성에 올렸다. 안드레아 역시 나머지는 하늘에 맡기기로 했다. 98%까지는 사람이 하니까 최선을 다하면 되었다. 나머지 2%는 화룡점정 같은 것으로 하늘 몫으로 남겨 두었다. 하늘도 감동하면 역사가 쓰여질거라고 믿었다.
***
“모든 것이 합하여 마지막에 선을 이루어준다는 말이 우리 예그리나 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아.”
윤재의 말에 아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응대했다.
“그러게. 세상엔 공짜없다는 말도 있잖아.”
“2차 이민 신청에 IRD직원과 키위 사제의 추천서까지 첨부된 것, 우연만은 아닌 듯 해. 세상 참 고맙네.”
“수아가 바꿔준 우리 가계 이름, 예그리나가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어.”
추천서를 써준 IRD직원과 키위 사제가 어머니의 이민신청은 걱정하지말라고 격려해주는 며칠 전 일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아내가 출근하다 요양병원에 들러보니, 시어머니는 불안으로 화병이 도진 상태였다. 생선가게에서 일하는 중에도 그 일이 자꾸 눈에 걸렸다. 시어머니 생각에 속이 아팠다. 펄펄 끓는 기름통에 밀가루 양념한 생선을 튀기던 중이었다.
“핫! 뜨거!”
아내 입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딴 생각하다 생선 반죽을 덩어리 통째로 기름 솥에 넣다보니 첨벙하며 기름이 확 튀어 올랐다. 그게 왼쪽 얼굴에 튀어 작은 화상을 입고 말았다. 바쁘게 일하다보면 가끔 겪는 일이었다. 평소 화상 입었을 때 하는 것처럼 덴 부위에 응급조치를 했다. 아내가 가계 한쪽에 있는 화분에서 알로에를 잘라 그 즙으로 얼굴에 문질렀다. 화상약도 발랐다. 상처 부위가 따가웠다. 순간 눈물주머니가 툭 터져버렸다. 주책 모르게 흘리는 눈물이 그칠 줄 몰랐다.
그때였다. 중년의 키위 여성 손님이 들어서다말고 움찔했다.
“무슨 일 있어요?”
눈이 퉁퉁 부은 아내 두 손을 꼭 잡았다. 흐느끼는 아내를 의자에 앉히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덴 부위를 소독약으로 닦아 주었다. 그 위에 다시 약을 발라 문질렀다. 아내가 운 게 화상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여성 손님이 딱 알아챘다. 그간의 시어머니와 관련한 인도주의 이민 신청 사정 이야기를 잠자코 들었다. 시어머니의 난감한 여건에 공감을 보냈다. 듣다말고 그녀는 노트북을 꺼내 들었다. 키보드로 뭔가를 쉴 새 없이 쳐 내려갔다. 윤재 가계 컴퓨터에 USB를 꽂더니 프린팅을 했다. 아래에 서명을 하고는 윤재에게 건넸다. 2차 이민 신청시 필요하다면 레프리, 추천 서류로 추가하라고 알려주었다.
윤재가 얼떨떨한 채 서류를 받아보니 서명 위에 IRD 스탭이라고 적혀있었다. 신뢰하는 공기업 IRD, 국세청 직원이 써준 레프리는 큰 힘이 될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윤재가 자주 들르는 현지인 성당 사제께서 가계에 불쑥 들어오셨다. 손에 든 하얀 봉투에서 서류를 꺼내 윤재에게 건네주었다. 어머니 이민 신청 2차 서류 접수시 레프리 추천서로 쓰라고 했다. 함께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기운이 윤재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정성을 다해 준비한 서류와 추천 레프리까지 첨부했다. 변호사 안드레아가 꼼꼼한 검토후 보완했다. 거의 완벽한 상태로 만들어 이민성에 2차 접수를 마쳤다.
최종심 결과를 기다리며 또 다른 준비도 구상했다. 만약 이번에도 안되면 뉴질랜드 총리인 헬렌클라크에게 호소문 탄원을 넣기로 까지 마음먹었다.
2차 이민신청후 좋은 결과 통보를 기다렸다. 생각이 많아졌다. 시간은 더디 흘렀다.
어머니 이민 신청 결과를 생각을 하며 윤재가 생선손질하다 그만 칼이 빗나갔다. 왼쪽 팔목 깊숙이 찔렸다. 검붉은 선혈이 도마위로 낭자했다. 엄청 많은 양의 피를 쏟았다. 급히 도착한 111 구급요원이 서둘렀다. 응급조치후 진구를 앰뷸런스에 싣고 오클랜드 남쪽에 위치한 미들모어 에머전시 병동에 후송했다. 특별 진료와 시술후 가까스로 긴급상황이 수습되었다. 팔에 붕대를 동여맨채 침대에 누워 지긋이 눈을 감았다. 쉬지 않고 달려온 이민 생활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할 일은 많은데, 자신이 왜 이러고 있나? 어머니는? 가계는?
요즘 아내도 부쩍 잦은 실수로 넘어졌다. 튀는 기름에 데이기까지 했다. 윤재까지도 부창부수였다. 주의력이 산만해져 한 것을 또 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어제는 자동차를 후진하다가 옆 차를 긁어 먹기도 했다. 작업장에서 안전사고까지 나니까 불안했다. 불쑥불쑥 울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혹시 어머니 같은 분노 조절 장애 병세로 고생하는 건 아닌지, 방정맞은 생각까지 들었다. 언제까지 이런 불안정한 날들이 계속되려나~?
상념에 젖어있는데, 다급하게 뛰어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병실 문이 확 열렸다. 아내였다. 상기된 얼굴이었다.
“여보!”
울컥이는 목소리로 윤재에게 달려들었다. 손에 뭔가를 들고 있었다.
“어머니, 이민 승인됐대!”
아내 목소리가 떨렸다. 이어 내민 건 어머니 인도주의 이민 승인 서류였다. 윤재가 벌떡 일어났다. 산타가 따로 없었다. 아내의 손을 꼭 쥐었다. 성탄 선물이었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리는 12월, 주말이었다.
그날, 교민신문에는 대문짝만한 큰 뉴스가 떴다. 이민 컨설팅 회사가 파산 신청을 내고 호주로 종적을 감췄다는 기사였다. 이민 신청을 처음 상담한 그 회사였다. 이민 신청을 볼모로 한 대 규모 사기극이었다. 사기당한 교민들이 엄청난 절망과 낙담에 빠졌다. 일말의 기대를 갖고 간절한 심정으로 이민 신청을 원하는 이들 뒤통수를 친 거였다. 거액의 선수금을 받아 챈 뒤 잠적한 대표 얼굴이 악마로 떠올랐다. 그 때 기억에 철렁했다. 하늘과 땅이 뒤집혔다. 4만 8천 달러를 고스란히 날릴 뻔 했다. 진구의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며칠 후, 옆 가계 중국로스터 포크 식당 여주인이 울먹이며 들어섰다. 10년을 함께 일해 온 식당이었다. IRD로부터 청천 벽력같은 세금 폭탄을 맞았다고 망연자실했다. 그동안 쎄 빠지게 일해 번 돈이 다 날라갔다고 울었다.
전에 그 가계에서 일하던 종업원이 IRD에 신고했다는 후문을 들었는데 그 직격탄을 맞은 모양이었다. 주인이 임금을 제대로 안주고 일만 혹사시켰다고 항간에 나돌았다. 세금을 제대로 안내고 착복한 것을 폭로해서 IRD가 예의주시하며 조사에 착수했던 게 분명했다.
아내가 끓는 기름에 얼굴 화상을 입은 날도, 손님으로 가장한 IRD 여직원이 그 가계에 암행순찰을 왔던 거였다. 손님처럼 음식을 시키고 카드 영수증을 받아갔단다. 나중 세무신고 때 제대로 하나 확인했다나. 그러기를 무려 6개월간 지속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옆 가계와 비교하려고 세금 납부 내역을 두 가게 것을 미리 확인했다는 것. 나중에 두 가계 세금 신고 내역을 보여주기까지 했단다. 피시앤 칩 가계와 로스트 포크 식당의 수입과 세금 내역은 천지차이였다.
윤재네 생선가게는 성실 신고한 것으로 판명됐고, 중국 로스터 포크 식당은 터무니없게 축소 신고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두 가계가 천지 차이였다. 힘들고 어려운 모든 것이 합하여 마지막 좋은 결과를 이뤄냈다. 윤재가계에 들러 써준 레프리 추천서가 이민성 제출 서류에 포함돼 좋은 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되었다. 똑같은 사람의 판단 기준이 한 가계는 세금 폭탄을 투하했다. 다른 가계는 엄청 큰 지원화력이 되었다. 선은 결국 빛을 발했다. 이민사회의 흑백이 갈렸다. 선진국은 공정분배를 하는 대신 불의엔 철퇴를 가했다.
윤재 어머니는 요양병원에서 말을 잃었다. 시도때도 없이 불쑥 치솟는 분노와 경련에 모든 걸 쏟아부었다. 팔순 나이에 몸도 맘도 기력이 빠져갔다. 처음 몇 달은 서구식 식단이 너무 낯설었다. 빵과 우유 그리고 과일은 보기만 해도 이골이 날 정도였다.
음식을 못먹으니 몸이 버텨날 수가 없었다. 다행이 그 뒤로 아들과 며느리가 매일 생선가계에 출근하다 들러 전해주는 한국 음식에 그나마 정을 붙였다. 매일 쓰는 생활영어를 한 개씩 익혔다. 떠듬떠듬 입을 뗐다. 며느리가 수첩에 한글로 영어발음을 써준 걸 어머니는 중얼거렸다. 굳모닝, 워터, 토일렛, 핸드, 헤드, 푸드... .
며느리가 강조해준 말을 써먹었다. 모르면 그림으로 그려서 마음을 전했다. 신기하게도 키위들이 알아채는 것을 보고 내심 기뻤다. 옛날에, 윤재 어머니는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광주리, 보따리 장사하며 빌려준 쌀과 돈을 자신만 아는 방식으로 그림이나 숫자로 적어두었다. 쌀이 몇 가마니인지, 마늘이 몇근인지, 고추가 몇부대인지 등등... . 그 기억을 살려냈다. 말하고 싶은 것을 수첩에 그림으로 그렸다. 그걸 간호사나 같은 병상에 있는 인도, 중국 할머니에게 보여주었다. 다행스럽게도 대충은 의사소통이 되었다. 말은 제대로 못해도 마음을 열어 통했다.
빨간 벽돌 단층짜리 요양병원, 다른 세상이었다. 윤재 어머니가 현관 앞에 나왔다. 벤취에 앉아 우두커니 화단과 나무를 바라봤다. 턱을 괴고 비스듬히 퍼져오는 햇살을 쬐었다. 한국에서 늦은 나이에도 바스락대며 일하던 습관 때문인지, 일어나 주변을 왔다갔다했다.
서성거리는 모습에 간호원이 나와서 손을 잡아서 벤취에 앉혔다. 어머니는 불쑥 화가 도질뻔했다. 하는 일이 제지당했다고 생각했다. 간호원이 두손을 꼭 쥐어줘서 간신히 누그러졌다. 간호원이 안으로 들어가자 다시 일어나 서성거렸다. 오후 해질녁이라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림자를 밟으려고 바삐 움직였다. 그림자는 앞서 도망갔다.
어머니는 화단 끝 모퉁이에 이르러서 땅에 쪼그리고 앉았다.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다 떨어져있는 나무 이파리를 주워들었다. 어디서 많이 본 모양새였다. 가드닝하고 가던 정원사가 흘리고 간 이파리였다.
‘뭐 드라~? 아~! 바이올렛... .’
어머니는 고국에서 바이올렛 잎을 따서 꺾꽂이하던 추억이 떠올랐다. 그 위에 이파리를 눌러 심었다. 물을 끼얹었다. 침대 머리맡 테이블위에 컵을 올려놓았다. 매일 바라보며 물을 줬다. 가끔 밖에 내다 놓기도 했다. 햇살과 물 그리고 손길이 주어졌다. 며칠이 지나자 이파리 아래로 뿌리가 뻗어 내렸다. 새싹이 한 잎 두 잎 솟아났다. 바이올렛 꽃말, 영원한 사랑, 양원한 우정이 다시 살아났다. 어머니의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어머니는 말못하는 바이올렛과 서로 뭔가를 나누는 사이였다. 새 생명 기운이 어머니 몸과 맘에도 뻗쳐올랐다. 서로 통한다는 것, 사물과 미물일지라도, 그건 나눔이었다. 속 털어놓는 친구였다.
***
어머니의 세월은 바이올렛과 함께 흘렀다. 병원에서의 반복되는 생활도 아랑곳없이 지나갔다. 뉴질랜드에서 어머니에게도 강산이 한번 바뀌었다. 훌쩍 10년을 넘어갔다. 바이올렛 화분을 침대 곁에 두고 어머니는 편안한 모습으로 눈을 감으셨다. 바이올렛 잎처럼 사그러져 흙으로 돌아갔다.
윤재 부부는 생선가계를 접고 직종을 바꿨다. 모텔 사업이었다. 방 10칸 자리 모텔이었다. 나이 들어가는 부부가 운영하는 데 괜찮은 일이었다. 역시 이 모텔 이름도 바꿨다. 스타 모텔에서 예그리나 모텔로 고쳤다. 뉴질랜드는 여행 선진국이라서 세계 여행객이 끊임없이 몰려왔다. 더불어 나누는 삶,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길 기대했다.
생선가계 일에 비해 육체노동은 적었다. 단지 24시간 끼고 하는 일이라 신경은 항상 쓰였다. 세월이 말없이 흘렀다. 드나드는 손님을 맞이하며 나누는 일이 즐거웠다. 특히나 노부모를 모시고 여행 온 가족을 보면 반가웠다. 자신들이 못한 일을 하는 이들이 부럽기도 했다. 물심양면으로 응원해 주었다.
그 모텔을 10여년 운영한 뒤, 윤재 부부에게도 은퇴 시간이 다가왔다. 딸애도 수의대를 졸업하고 어엿한 수의사가 되었다. 두 내외의 삶에 한 자락 여유의 꽃이 피었다. 남은 인생 조용히 보내며 못 다한 여가 생활과 사람 사는 도리를 더 하고 싶었다. 특히, 가족 중에 몸이 아파 힘드는 경우는 찾아보고도 싶었다. 모텔을 매물로 내놓았다. 마침 잘 알고 지내온 지인이 그 모텔을 사겠다고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결국 그 들에게 넘기게 되었다.
그즈음, 아내 여동생이 유방암 투병으로 힘든 상황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이번엔 망설이지 않았다. 결단을 내렸다. 아내는 고국으로 가서 여동생을 한달쯤 돌보기로 했다. 윤재는 모텔 운영을 한 달간 오버랩 지도해 주는 시기였다. 마음에 두워 왔던 고국 내 산사기행 한 달 계획은 뒤로 미뤘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도보 여행 한 달도 그 다음에 하기로 마음먹었다.
윤재가 오클랜드 공항에 아내를 내려주고 돌아왔다. 하버브리지를 건너 북쪽으로 올라오다가 화원에 들렀다. 장미 다발을 샀다. 한국산 소주도 한 병 구했다. 어머니가 계신 오클랜드 공원묘지로 향했다. 아주 홀가분한 시간이었다. 살아서 함께 해주지 못한 시간, 이렇게라도 챙기게 되었다. 예그리나를 곱씹어보는 시간이었다.
윤재구가 노스쇼어 메모리얼 파크에 차를 갖다 댔다. 수많은 가족묘들이 다소곳이 자리해있었다. 어머니 묘소 앞으로 걸어갔다. 준비한 소주 한 병과 장미꽃을 제대 앞에 올렸다.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 묘역 주변에 부었다. 어머니께서 힘들고 적적할 때 홀로 마셨던 소주였다. 몇 잔을 계속 따라 묘소 둘레에 적시게 부었다. 고향 술 냄새가 났다. 콩밭 매던 어머니의 적삼에 배인 땀 냄새가 어우러졌다. 마지막 남은 잔은 윤재가 들이켰다. 속이 확 올라왔다.
옆 잔디에 그대로 누워 팔베개를 했다. 하늘에 양털 구름이 노닐었다. 어미 양 옆에 어린양이 기대어 누운 형상이 보였다. 새들이 날아와 지져귀었다. 옆에 놓인 장미송이를 하나씩 갖다 코에 댔다. 빨간 장미에서 진한 핏빛 향기가 났다. 이어 노란 장미를 통해서도 가을걷이 볏단내음이 올라왔다. 마지막 하얀 장미로부터는 겨울 눈 그리움이 배어나왔다. 스르르 잠이 들다가 하늘에서 춤을 추었다. 세상을 내려다보며 갈매기 한 마리가 날개를 저었다. *
#원고지 200x112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