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震默大師(진묵대사) 수행일화
사미 시절 창원의 마상포(馬上浦)를 지나갈 때
한 동녀(童女)가 사랑을 느꼈으나 따를 수 없었으므로,
그녀는 죽어서 남자가 된 뒤 다시 전주 대원사(大元寺)에서
만나 기춘(奇春)이라는 시동이 되었다.
대사가 그를 각별히 사랑하였는데 이것을 대중들이 비난하였다.
대사는 그것이 이락삼매행(離樂三昧行 : 일체의 즐거움에 대한
애착을 떠난 삼매행)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기춘을 시켜 국수로
대중 공양을 하겠다는 것을 알리게 하였다.
대사는 대중에게 바루를 펴게 한 뒤 기춘으로 하여금
바늘 한 개 씩을 각자의 바루 속에 넣어 주게 하니,
대사의 바루 속 바늘은 국수로 변하여 바루를 가득 채웠으나,
다른 승려들의 바루에는 여전히 한 개의 바늘만이 있었다.
늙은 어머니를 왜막촌(倭幕村)에서 봉양하고 있을 때,
여름 날 모기 때문에 고생하는 것을 보고 산신령을 불러
모기를 쫓게 한 뒤로는 이 촌락에 영영 모기가 없어졌으며
어머니가 죽자 제문을 지어 위령하였다.
곡차라고 하면 마시고 술이라고 하면 마시지 않는 것이
계행(戒行)이었는데, 어느 날 한 중이 술을 거르고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이 무엇이냐?"고 세 차례나 물었으나,
중이 대사를 시험하기 위하여 모두 술이라고 대답하였으므로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그 중을 타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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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대원사를 비롯해 신라 때 부설거사가 창건한
월명암(月明庵)도 재건하고 오래 주석하셨다.
여기에 계실 때의 일이다.
이곳도 수도처로 신심있는 사람들이 아니면 올라가기
어려워 먹고 지내기가 힘들었다.
가을이 되어 대중 스님들은 탁발을 나가고 시자 한 사람만
남아 스님을 시봉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네에 초상(忌故)이 나서 시자는 그곳에 가야 했다.
시자는 때가 되면 스님께서 잡수시도록 공양을 준비하여
탁자 위에 올려 놓고 스님께 여쭈었다.
"여기에 공양을 차려 놨으니 때가 되면 스님께서 들어다
잡수십시요."
스님은 고개를 끄덕이시면서 방문을 열어 놓고
능엄경(楞嚴經)을 보시는 채로 그냥 계셨다.
시자는 곧 마을로 내려가 일을 다 보고 다음날 암자로
돌아 왔다.
돌아 와 보니 스님은 어제 그대로 앉아 꼼짝도 하지 않으셨다.
시자가 가까이 가서 보니 문지방에 얹혀진 스님의 손에서
피가 흘러 그대로 말라 엉겨 있었다.
문지방에 스님의 손이 얹혀 있는데 바람이 불어 문을 밀어붙인
것이다.
스님은 손가락이 깨어져 피가 흘러도 그것을 알지 못한 채
삼매에 들어 계신 것이다.
탁자를 올려다 보니 어제 차려 놓은 공양이 그대로 있었다.
시자가 절을 하고 밤사이 문안을 올리니 스님은,
"너는 왜 제사 참례 안하고 빨리 왔느냐"고 했다.
스님은 수능엄삼매(首楞嚴三昧)에 들어 하룻밤이 지나갔는데도,
시자가 돌아와 소리내어 문안을 드릴 때까지 그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스님은 마음도 몸도 다 벗어버리고 그것을 초월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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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봉서사의 산내 암자인 상운암(上雲庵)에 계실 때의
일이다.
공부하는 대중들이 결제(結制)를 앞두고 모두 탁발을 나갔다.
결제기간중에는 참선도량에서는 일체의 출입을 엄격히 금지한다.
그러므로 결제기간중에는 사람이 죽어도 그대로 두었다가
해제가 되어서야 다비식을 거행한다.
이렇게 엄한 것이 선방(禪扉)의 규율이었다.
상운암의 대중들도 그런 엄격한 규율 밑에서 진묵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공부하고 있었으므로, 3개월 동안 참선을
하려면 그동안 먹을 양식을 미리 탁발해 두어야 하는 것이다.
스님만 흔자 남아 집을 보시게 하고 대중들은 한 달 동안을 기
약하고 멀리 떠나 갔다.
탁발 나갔던 사람들은 충분히 탁발을 해서 상운암으로 돌아왔다.
진묵스님은 석고처럼 우두커니 앉아서 사람이 돌아 오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가까이 나가 가서 보니, 스님의 얼굴에는 거미줄이 쳐져 있고,
무릎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얼굴에 얽혀 있는 거미줄을 걷어내고, 무릎의 먼지를 털어내며,
이름을 대면서, "돌아왔습니다. "고 인사를 드리닌,
스님은, "너는 왜 그렇게 속히 왔는냐"고 물으셨다.
탁발을 내보내고 스님은 홀로 남아 앉은채로 '정(定)'에
들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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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명암에 있을 때 불등(佛燈)이 매일 밤 일점 성광(星光)이
되어 멀리서 비치어 왔으므로 대사는 이것을 발견하고
목부암으로 옮겨가서 원등암(遠燈庵)이라 개칭하였다.
이곳은 원래 십육나한(十六羅漢)의 도량으로,
그들이 항상 대사를 시봉하는 마음에서 월명암으로
등광(燈光)을 비추었는데 그것은 대사의 뜻을 계발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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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부에 있는 한 흠포자(欠逋者 : 官物을 축낸 죄인)가
도망을 가려고 대사에게 인사를 하러 왔을 때,
"도망가는 것이 어찌 남자의 할 짓인가? 그러지 말고
나에게 공양을 올려라."고 하였다.
그를 돌려보낸 다음 대사는 주장자(?杖子)를 가지고
나한당에 들어가 차례로 나한의 머리를 세 번씩 때리며
"관리 아무개의 일을 잘 도와 주라."고 하였다.
그 이튿날 밤에 나한이 그 관리의 꿈속에 나타나서,
"네가 구하는 바가 있으면 직접 우리들에게 말할 것이지
어째서 대사에게 말하여 우리를 괴롭히느냐?
너의 소행을 보아서는 불고(不顧)하여도 가하나 대사의
명령이시니 따르지 않을 수 없다." 하고 그를 구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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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민중속에서 애환을 함께 하며 그들의 깨우쳐 포교방식이
원효대사와 진배없었다.
그 중 진묵의 기담포교로 유명한
어혼환생진묵(魚魂還生震默)의 이야기가 있다.
진묵이 이미 고승(高僧)이 되어서였다.
그가 속해 있던 절은 무척 가난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진묵이 길다란 배낭을 필어지고 어느 고을인지 탁발을
나갔던 것이다.
머리에는 용수갓을 쓴 채 다 낡아빠진 장삼, 가사에 목탁을 치고
염불을 외우며 어느 마을에 당도하니 때 마침 마을 사람들이
한데모여 큰 가마솥에 시뻘건 불을 지펴 놓고 많은 물고기를
끓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 가운데 누구 하나 이 고명한 진묵대사를 알아차릴 사람이
있을 수 없었다.
오히려 장난기 많은 사람들은 장대같이 솟은 키에 때국이
졸졸 흐르는 장삼자락을 움켜잡고 염불을 외우는 이 볼품없는
중을 한 번 골려줄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지나가는 진묵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여보 스님! 오뉴월의 이 긴긴 해에 탁발하러 돌아다니시기에
배도 좀 고프겠오.
그래 스님을 생각하여 이 생선국 한 그릇을 끓여 놓았으니
염이 있다면 한 그룻 해보시는 것이 어떻소."
중이라면 본래 오채를 금하는 법이고 또 더 더군다나
살생을 금하는데 어찌 생명있는 생선국을 먹을 것인가!
이것은 분명히 볼품없는 중을 한 번 골려주기 위한 장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진묵은 태연하기만 하였다.
"후한 인심이로다. 그래 당신들은 왜 먹지 않고 나에게만
먹으라는 거요?"
그러자 한 사내가 대답했다.
"실은 여기 있는 사람들은 배가 터지라고 먹었는데 스님에게도
한 그릇 권하고 싶어서.
맛이야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르리만큼 천하의 일품이니
염이 있으시면 한 그릇 해보시지요."
해 놓고는 모두 깔깔 웃기까지 하는 것이다.
"후한 인심이로다. 정 그렇다면 내가 먹어 볼만도 하이 "
진묵은 이렇게 말하고 장삼과 배낭을 풀어 놓을 생각도
아니하고 그대로 부글부글 끓고 있는 가마솥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윽고 누가 옆에서 주는 큰 사발을 저만치
던져버리고는 그 큰 가마슬을 불끈 두 손으로 쳐드는 것이 아닌가.
어느 장사가 그처럼 힘있게 물고기와 물이 가득 든 채
부글부글 끊고 있는 가마솥을 그렇게 가볍게 들 수 있을 것인가.
놀란 것은 물론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었다.
"아니! 이 양반이 ‥‥‥‥"
조소에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던 마을 사람들은 이 느닷없는
이변에 모두 입을 벌려 말을 잇지 못했다.
마침내 진묵은 그 가마솥안에 든 물고기를 한 사발도 남겨 놓지
않고 꿀꺽꿀꺽 다 마셔버리고만 것이다.
"허, 허, 허허 ‥‥‥‥"
마을 사람들은 진묵의 이 호연지기(浩然之氣)와 역발산(力拔山)의
항우같은 힘에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자! 이만하면 어떻소! 덕택으로 잘 먹었소이다. "
이윽고 입을 딱 벌린 채 말대답조차 못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뒤에 두고 진묵은 똘물을 타고 한참동안 올라가더니 냇물에 벌건
엉덩이를 내놓고 변을 보는 것이 아닌가.
이 무슨 괴이한 변일까.
진묵의 변이 물위에 흘러내리는데 얼마 전까지 가마솥에서 푹푹
삶아져 그의 입으로 들어갔던 물고기들이 펄펄 뛰며 살아서
도랑으로 헤엄쳐 내려오는 것이었다.
꿈속인양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그 때에야
모두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것이였다.
"미흡한 인간들이 미처 고명하신 대사님을 몰라 뵈옵고
황공 무지로소이다.
그러하오나 고기가 다 살아서 저렇게 펄펄 뛰어 노는데
어찌하여 저놈 한 마리는 꼬리가 잘라진 채 소생을 못하옵니까?"
하고 공손히 물었다.
"하나 ‥‥‥ 과연 그렇군! 그놈의 꼬리는 저 가마솥가에
있을 것이요."
아닌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가마솥을 들여다 보았더니
거기엔 잘라진 꼬리 한 토막이 붙어 있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엎드려 잠시동안의 허물을 계속
사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이야기는 바로 진묵이 불도 도통했다는 경지의 이야기이기도
하겠으나 또 어흔(魚魂)이 인도환생(人道還生)해서
바로 진묵이 되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전주 지방과 김제,
만경지방에 아직도 전해지는 전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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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가 하루는 시자를 시켜 봉서사 남쪽 부곡(婦谷)으로
소금을 가져다주라 하니, 시자가 누구에게 주느냐고
반문하자 가보면 알 것이라고 하였다.
시자가 가서 보니 사냥꾼 여러 사람이 노루 고기를
회쳐놓고 소금이 없어서 먹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소금을 받으며 "활인지불(活人之佛)이
골마다 있다 함은 이를 말한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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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유명한 승려 진묵 대사(1562~1633)가 아직
사미(沙彌)로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여러 사람이 먹을 상추를 씻으러 우물가에 갔다가,
멀리 해인사 장경각에 불이 난 것을 신통력으로 관(觀)하여
알게 되었다.
다급한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상추에 물을 묻혀 해인사쪽으로
물을 뿌려서 불을 끄기 시작하였다.
한편 해인사에서는 때아닌 화재로 장경각의 경책(經冊)이
모두 탈 위기에 처했었는데, 갑자기 장경각 위에만 억수 같은
소낙비가 쏟아져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해인사 큰 스님이 입정에 들어 관(觀)해 보고
진묵대사가 불을 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묵대사는 그 후 열심히 공부해서 득도하였고 당대의
유명한 스님이 되어 그 이름이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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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가 하루는 목욕, 삭발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문을 나가 시냇물을 따라가다가 지팡이를 세우고 서서
손가락으로 자기의 그림자를 가리키며 시자에게
이르기를, "이는 석가모니의 그림자니라." 하니,
시자가 "이것은 스님의 그림자입니다." 하였다.
대사가 이르기를, "너는 화상의 가(假)만 알 뿐
석가의 진(眞)은 모르는구나!"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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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묵대사가 어느 절에 계실 때 한 보살님이 득남을
하기 위해 기도를 왔다.
진묵대사는 곡차를 가져 다면 기도를 해 주겠다고 해서
보살님은 곡차를 가져다가 진묵 대사께 드렸다.
그러나 득남을 하기 위해 매일 절을 찾아와 기도를
하건만 진묵 대사는 한 번도 법당에 들어와 같이
기도염불을 해주지 않았다.
기도가 거의 끝나갈 무렵 보살님은 진묵 대사를 찾아가
“스님께서는 곡차를 가져오면 기도를 해 주시겠다고
하시고선 매일 곡차만 마시고 기도는 안 하시니 너무
하십니다.”
“그래. 그러면 내가 나한님에게 득남을 할 수 있게
부탁을 드려보지요.”
진묵 대사는 나한전에 들어가 “보살이 득남이 원인데
한 번 들어주지.” 하면서 나한의 빰을 일일이 때렸다.
그날 밤 그 보살의 꿈에 나한들이 나타나서 진묵 대사가
우리들의 뺨을 때려서 몹시 아프니 득남의 소원은 들어
줄테니 제발 진묵대사에게 다시는 부탁은 드리지 말라고
부탁을 하고 사라졌다.
과연 그 보살님은 득남을 하게 되었고 그 후 많은 사람들이
그 절에서 기도를 한 후 영험을 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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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진묵대사는 인연이 다 되어서 그 절을 떠나려고
내려오는데 길에서 우연히 한 동자를 만나게 되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내려오다 냇가에 이르렀다.
마침 전날 소나기가 내린 후라, 냇물이 많이 불어 있는
상태였다.
동자가 말하기를 스님 냇물이 많이 불은 것 같은데
제가 먼저 건너가 보지요.
스님께서는 제가 간 길만 따라오시면 안전할 것입니다.”
동자는 곧 바로 냇물로 들어갔다.
그런데 보기에는 냇물이 불어 깊어 보이는데 동자가
냇물 중간쯤에 가서도 발목까지밖에 잠기지 않았다.
진묵 대사도 안심을 하고 곧 동자가 간 길을 따라갔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동자는 발목까지밖에 잠기지
않았는데 진묵대사가 냇물 중앙쯤에 가니 가슴까지
물이 차 올랐다.
어렵게 강을 건너고 보니 동자는 홀연히 사라졌다.
이에 그 동자는 나한임을 알았다.
진묵대사는 “신통은 나보다 나한이 높을지는 모르나
도에 대해서는 나에게 물어야 할 걸”하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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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심신에 전혀 구애를 받지 않는 스님의 초탈한 경계를
입증하는 또 하나의 재미있는 일이있다.
진묵스님이 누님 집에 가 있다가 출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득도한 스님은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풍류를 즐길 줄 알았으며,
스님은 특히 술을 좋아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술이라하면 마시지 않았고 곡차(穀茶)라
해야 만 마셨다.
스님은 익산군 춘포면 쌍정리에 있는 누님 집에 가끔 들렀다.
누님은 동생을 위해 곡차를 늘 준비해 두고 있었다.
어느 날 스님이 누님 댁에 들렸더니 누님은 집에 없었다.
밭일 나간 누님을 찾아가 안부를 묻고 돌아서려는데 누님이
집에 곡차를 준비해 두었으니 마시고 가란다.
스님은 그 좋아하는 곡차를 두고 그냥 갈 수가 없었다.
누님이 일러준대로 부엌으로 들어가 술이 담겨 있는 것
같은 조그만 독 뚜껑을 열고 독채로 들이마셨다.
스님은 기분이 좋아서 봉서사에 돌아와 정(定)에 들어 있었다.
들일을 마치고 석양이 되어 집에 돌아 온 누님은 부엌으로
들어가 동생이 곡차를 마시고 갔는지를 먼저 살폈다.
술독이 놓여 있는 곳을 살핀 누님은 깜짝 놀랐다.
술독은 그냥 있는데 그 곁에 있는 간수독의 뚜껑이 뒤집혀
있었다.
심장이 멈춰서는 것 같은 충격으로 두 독의 뚜껑을 벗겨봤다.
간수독은 비어 있고, 술독의 술은 그대로 있었다.
누님은 용수철처럼 뛰어나와 그대로 봉서사를 향해 달렸다.
이미 석양인데 삼십 리 길을 단숨에 뛰었다.
간수 한 독을 마시고 살아남을 사람이 누군가.
아마 황소가 마셨더라도 살지 못할 일이다.
누님은 자기의 잘못으로 동생이 간수를 마시게 됐다고
가슴을 치면서 정신없이 봉서사까지 뛰어간 것이다.
해가 서산 마루에 동그란 얼굴을 반만 걸쳐 놓고 부지런히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내려오는 산길을 거꾸로 올라 봉서사에 당도한
누님은, 절이 조용한 것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진묵스님이 있었으면 절 안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묵스님은 조실 방문을 열어 놓고 기분이 좋아 빙그레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너무나 의외의 일에 누님은 또 한번 놀랐다.
"곡차가 알고 마시면 곡차가 되는 것이지 누님은 걱정도
많으십니다. 어둡기 전에 어서 돌아 가십시요."
살아 있는 동생이 한없이 고맙고 존경스러웠지만,
해가 져가는 시간에 삽십 리가 넘는 산길을 되돌아 가라니
야속하고 섭섭했다.
그러나, 동생의 신비스런 힘을 믿는 누님이었으므로,
그 길로 돌아서 집으로 왔다.
누님이 집에 다 올 때까지 서산에 꼭 그만큼 걸려 있던 해가
누님이 집에 들어서자 산너머로 들어가 버리고,
갑자기 캄캄한 어둠이 꽉 차는 것이었다.
진묵스님이 해를 묶어 났다고 속인들은 이 일을
더욱 재미있어 하지만, 스님은 염산성분의 맹독을 마시고도
그것을 인체에 유익한 곡차로 소화하는 자재한 정신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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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효심은 단연코 타의 추종을 허락치 않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서거하신 곳이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밝히지 못하고
있지만, 그 곳이 불거촌이 아닌 것만은 확실한 듯 하다.
왜그러냐하면 진묵스님은 어머니의 만년을 늘 가까이서
모셨고, 진묵스님이 주석하신 곳이 봉서사, 원등암, 일출암
등 전주 일원이고 월명암과 대둔산 태고사(太古寺)까지
연장하여 어머니의 만년을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간다.
아무튼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진묵스님과 두자매가
모두 세상을 떠나더라도 길이 길이 만인의 향화 참배를
받게 되도록(無子孫千年香火之地: 자손 없이도 천년동안
향화를 올릴 명당지)를 찾아 불거촌에 어머니의 묘를 모셨다.
봉서사나 일출암에서 불거촌까지는 백리가 넘는 먼길이다.
스님은 어머니의 유해를 모신 상여를 스님이 태어난 고향땅
불거촌까지 메고 가서 거기에 가서 안장한 것이다.
출가한 신분으로 어머니와 그 자매들에 나타내 보인
이 지극한 효와 우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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