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노트) 나는 마지막을 뛰어넘고 싶은 시인이다.
아버지! 마지막 잎새는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는 걸 아버지의 나이를 지난 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잎새가 다 떨어지고 떨어져 누운 잎새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진대도 나는 결코 떨어지지 않는, 떨어지지 않을,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마지막 잎새입니다.
당신을 쏙 빼 닮은 내게 남겨 주었던 ‘마지막’이라는 습성을 운명처럼 생각하며 살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한스럽고 지난하기만 한 세상은 내 편이 아니었기에 필사적으로 생의 가지를 붙들고 있는 내가 구차하게 여겨지곤 했었습니다. 나를 내동댕이치면서 조소를 던지던 높새바람과 이리저리 나를 몰아붙이던 된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면서 세상 같은 건 더러워서 버려야 한다고, 그것이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노을 지는 하늘을 달려 나오는 경의선 열차를 넋 잃고 바라보며 사디스트 같은 세상에게 지지 않겠다던 당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하곤 하던 날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마지막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신이 등 돌리고 돌아간 시간,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그리움이라는 이름의 문을 꼭꼭 닫아 기억의 블랙홀 속에 던져 놓고 마지막 시를 읽고 있었습니다. 세차게 비가 내리고 천둥이 치는 날들이었습니다. 이제 다 떨어졌을 것이라고, 한 장 남은 이유마저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날, 내 안에서 무수히 일고 있는 이 많은 의미들은 무엇이었을까요. 저 풀들과 담장 밑 채송화는 무슨 이유로 나와 함께 흔들리고 있는 걸까요. 들릴 듯 말 듯 누군가의 집에서 흘러나오는 서툰 피아노 소리는, 아들과 엄마인 듯한 이들이 다투는 소리는, 하교 시간에 비를 쫄딱 맞고도 깔깔거리며 몰려다니는 너 댓 명의 학생들은 무슨 이유로 잎을 피워내고 있는 걸까요.
어째서 내 마지막 남은 이파리가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한잎 두잎 새 잎이 돋아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을 완전히 답습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어디서 내 마지막이 시작이 되었는지 누가 모래시계를 뒤집어 놓았는지 알아내야 하기에, 여전히 내 삶이 지난하고 구차하다 할지라도 당신의 옳은 선택을 당분간은 유예하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