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관-수평적 관계론 수정해야 할 부분입니다.
청소년의 시기에 고민이 많았던 적이 있습니다.
법적 나이로 나누어 볼까?
그런데 법적 나이도 모두 다릅니다.
아동복지법의 아동의 나이, 청소년기본법의 청소년의 나이,
음비법, 성보호법 등 법률마다 마음데로 정해져 있습니다.
기준이 무엇인지 아직도 이해 못하고 있습니다.
학령기로 나누어 볼까도 고민해 보았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하면 모두가 성인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자퇴한 아이들이 일년이면 5만~6만명 정도라고 합니다.
거기에 대학생들은 어떻습니까?
자녀의 대학 학점이 잘 못 나왔다며 교수님에게 항의하는
학부모님이 계신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학령기도 어설픕니다.
독립의 관점에서 나누어 봅니다.
제가 경제적이거나, 부모님께 완전한 독립을 했는지 생각해 봅니다.
어머님을 모시고 살고 산다지만 가끔씩
어머님의 보살핌이 더 클 때가 많습니다.
완전한 독립이 존재하진 않는 것 같습니다.
과거 10대 중반이면 아이 낳고 어른대접 받고 잘 살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20대가 되어도 자기주체성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청소년지도, 상담, 복지 관련 책에
청소년의 개념을 정의하는데 빠지지 않고 나오는 글이 있습니다.
질풍노도기와 지불유예기 등의 말입니다.
제가 행하는 활동상 10대 초반의 아이들부터 70대 이상의 어르신들까지
많은 분들을 만납니다. 정말 외람된 말씀이지만 어르신 가운데에도
'질풍노도'와 같은 분들이 간혹 계십니다.
10대임에도 자기 원칙과 타인에 대한 배려,
비전이 정확하게 삶을 영위하며 최선을 다하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시간관으로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은 이미 잘 못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정의 내리기에는 이미 너무나 큰 무리가 있습니다.
상담학에서 지속해서 사용하는 발달론적 관점이 응당 옳은 면도 있으나
개인적 관점으로 옳지 않은 부분이 너무나 많습니다.
몇가지 이론과 학설로 인해 현재의 우리 아이들이 당하는 피해는 너무나 많습니다.
근래 시간관에 대해 대학의 모 교수님과 이야기 나눌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때의 이야기를 기억해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청소년은 젊으면서도 늙을 수가 있습니다.
같은 시간에 미래와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현재는 미래와 연계되어 있습니다.
과거와도 연계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의 시간은 가장 중요합니다.
미래를 만들기도 하지만 현재가 미래를 퇴행시키기도 합니다.
많은 이들이 나이가 먹으면 먹을수록 변화한다고 믿습니다.
그 변화가 진보라 여기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변화 자체를 생각해 보시면 이해하기 편합니다.
진보하는 변화도 존재하는 퇴행하는 변화도 존재합니다.
변화 자체를 미래로의 성장적 변화, 진보된 변화로만 생각하지만
역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도 변화입니다.
시간이 그런 것 같습니다.
공존하고 과거와도 맞물려 있습니다.
연령층은 어떻습니까?
몸이 노쇠했다고 해서 계속해서 진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과거로도 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바라 봄에 있어서
이러한 시간관만으로 모든 것을 평가한다는 것은 코메디에 가깝습니다.
아이들을 바라봄에 있어서
그 인정의 깊히는 성인들과 진배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부터 아이들의 관계에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관계로 대해야겠습니다.
'수평적 관계'는 중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