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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楓 巖 亭 (楓巖精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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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醉 歌 亭 (취가정)
-문헌 참조: 무등산권 문화유산 기초조사 보고서-
취가정에 올라가는 길
● 김덕령 장군의 최후에 대하여
광주(光州) 출신으로, 임란 때 왜군이 침공하자 장성현감 이귀의 천거로 의병을 일으켰고, 광해군으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이라는 칭호와 함께 군기를 수여받았다. 같은 의병장 곽재우와는 막역한 사이로, 작전을 함께하기도 했으며 군공을 세웠다.
1596년 도제찰사 윤근수의 종이 탈영하여, 그 행방을 캐기 위해 종의 아비를 잡아들였다. 윤근수가 눈감아 줄 것을 청탁하였으나 김덕령은 거절하였고, 결국 매를 때려 숨지게 하였다. 후에 이몽학의 난이 일어난 뒤, 반군을 문초하던 중 최, 홍, 김이 적힌 패가 나와 문초하니 고문에 견디다 못한 졸개가 최담령, 홍계남, 김덕령 등 명망 있는 장수들의 이름을 무고했다. 윤근수가 이를 빌미로 과거의 원한을 풀고자 김덕령을 체포하였고, 선조가 친히 국문을 열었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류성룡은 김덕령의 치죄를 신중히 따져가며 하도록 간했으나 서인 판중추부사 윤두수는 엄벌을 주장했다. 수백 번의 형장 신문으로 마침내 정강이뼈가 모두 부러질 정도로 혹독한 고문을 받은 김덕령은 결국 장독을 견디지 못해 죽고 말았고, 별장 최담령도 이때 죽었다. 그때 김덕령이 묶인 포승줄을 끊고, 담장을 뛰어넘어 갔다가 다시 국문장으로 다시 오는 등 죄가 없음을 호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죽음을 직감한 김덕령은 ‘춘산에 불이 나니’라는 시조를 지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후에 신원되고 난 뒤에도 역적죄가 있던 터라 문중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묻혔었는데, 1965년에야 광산 김씨의 무덤이 모여 있는 광주 무등산 이치(梨峙)로 이장하게 되었다. 밤중에 묘를 이장하던 중 김덕령의 관을 여니 생시와 다름없이 살이 썩지 않고 있어, 이를 본 사람들은 김덕령 장군의 한이 서린 것이라 하여, 광주에서 사진기를 가져와 모습을 남기려 하였으나, 사진기가 흔치 않던 터라, 사진기를 무덤까지 가져와 보니 시신은 이미 검게 변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김덕령이 입고 있던 옷이나 철릭 등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현재 광주 무등산에 있는 충장사에 전시되고 있다.
- 참고 문헌 ; 위키 백과 -
광주 사직공원에 있는 충장공 김덕령의 옥중시조 碑
춘산(春山)에 불이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연기 없는 불은 끌 물 없어 하노라
애국의 뜻을 다 펴보지 못하고 29세의 꽃다운 나이로 옥사한 충장공의 피 끓는 충절에 숙연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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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자구경도 하고 역사공부도 하고 ... 수고 많으셨습니다. 올 봄에 담양의 정자들을 둘러 볼 때는 예전과는 다른 시선이 될 것입니다.
열심히 편집했는데 유 선생님이 일등으로 보셨군요. 저도 담양의 정자들을 조사하면서 역사에 기록된, 미처 몰랐던 사실들을 새로이 알게 되어 보람을 느낌니다. 감사합니다.
풍암정은 여름 피서지로 딱인데(바로 앞이 맑은 물이 촬촬 흐르는 원효계곡이거든요) 눈덮인 겨울풍경도 정말 좋네요. 마침 눈이왔는데 내일쯤엔 그곳에나 가볼까.. 좋은 정보 항상 감사드려요.
향남씨가 초대해 주신 '8월의 명옥헌'이 넘넘 좋아, 이왕이면 담양의 정자들을 두루 구경해 보자는 계획을 세웠지요. 송강정, 식영정, 서하당, 환벽당, 면앙정, 소쇄원, 풍암정, 취가정을 두루 다녔으니(환벽당, 풍암정, 취가정은 초행입니당~ㅎㅎ..) 이젠 더 남쪽으로 가려 합니다. 2월 19~20일에 성천아카데미 회원들과 여수, 순천지방으로 봄맞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