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660년 싸우지도 않고 항복해 온 의자왕과 부여융에게 굴욕을 겪게 한 것은
뇌물을 받아내기 위함이었다. 또한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하려고 하자
이에 반발하여 항거한 것이 흑치상지와 10여명의 장군들이었다.
이들을 따라온 3만명이 다시 백제 전역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아래에는 흑치상지가 두려워하였다고 왜곡하였으나 '분노하여' 가 맞는 것이다.
촌장 10여명이라 하였으나 원문에는 좌우추장이었다. 어찌 추장이 도움이 되겠는가?
본래의 기록은 좌우 10여명의부장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백제의 서부 사람인데 키가 7척이 넘고 날래고 굳세며 지모가 있었다. 그는 백제의 달솔로서 풍달군(風達郡)의 장수를 겸하였는데, 이 직위는 당의 자사(刺史, 지방 관리)와 같다고 한다.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하였을 때, 그는 자기 부하를 데리고 항복하였다. 정방은 늙은 왕을 가두고 군사를 풀어놓아 크게 노략질을 하였다. 상지가 두려워하여 가까운 촌장 10여 명과 함께 달아나, 도망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임존산(任存山, 충남 예산)에 웅거하며 굳게 지키니 열흘이 못 되어 그에게 귀순한 자가 3만이나 되었다. 정방이 군사를 정비하여 그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상지는 드디어 2백여 성을 회복하였다.
常之懼 與左右酋長十餘人遯去
첫댓글 당교전투는 77세인 소정방(592-)을 매수하고 당군을 매수하여 거짓 전쟁을 벌인 것입니다.
소정방은 신라에서 환대를 받고 눌러 앉은 것입니다. 당나라군도 환대를 받고 전투시늉만 하고 돌아갔다고 판단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