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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미학
유공희
이효석의 수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성북동의 포도원. 삼인행. 배경과 인물이 단순은 하나 꿈이 그처럼 풍요한 때도 드물다. 나는 그들의 치마와 저고리의 색조를 기억하지 못하며 얼굴의 치장을 생각해 낼 수 없으나 <그 모든 것은 이미 지나간 것이므로 꺼져버린 비늘구름과도같이 일률로 아름답고 그리운 것이다.> 누렇게 물든 잔디 위에 배를 대고 누워 따끈한 석양을 담뿍 받으며 끝물의 포도빛을 바라보며 무엇을 이야기하고 어떤 몸짓을 가졌던지 한 마디의 대사도 기억 속에 남지는 않았다.이 추억을 더 한층 아름답게 하는 것은 총중의 한 사람이 세상을 버렸음이다. 나머지 한 사람은 그 뒷소식을 알 바 없다. <영원히 가버렸으므로 지금에 있어서 잡을 수 없으므로 이 한 토막은 한없이 아름답다.> 신비가 있었다. 생활이 빛났다. 지난날의 포도의 맛은 추억의 맛이요, 꿈의 향기다.
이 아름다운 글은 필자가 < >에 넣은 부분으로 인해서 더 한층 매혹적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것이다. 거기에는 뚜렷하게 ‘거리의 미학’이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좀 야비스러운 상상 같지만 만일 작자가 글 속의 한 사람과 부부가 되어서 살고 있었다면 이런 아름다운 글이 생산되었을 리도 없을 것이요, ‘성북동의 포도원’이 ‘신비’의 무대가 될 수도 없었을 것이며, 포도의 맛이 ‘꿈의 향기’일 수도 없었을 것이다.
모든 추억이 다 아름다운 것은 신비로운 거리의 작용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겠지만 이 ‘거리의 미학’을 생활 속에서 터득하고 자기의 생활철학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다. 가까이서 보면 밉게 생긴 여자도 어느 정도의 거리에서는 미인으로 보일 수가 있다. 그래서 팔등신(八等身) 아닌 ‘8미터 미인’이란 말이 생겼다. 이같이 거리의 혜택 속에서 빛을 받는 여성을 노상에서 흔히 보지 않는가!
명승지에 가지 않더라도 원경(遠景)은 어디나 아름답다. 보들레르는 ‘불과 몇 마일 범위의 물이 인간을 영원의 정서로 몰아넣는다’고 바다를 노래했지만 바다의 수평선은 우리에게 탈세속의 신비감조차 안겨준다. 푸른 하늘을 흐르는 구름, 밤하늘을 수놓는 별들은 우리와의 영원한 거리로 인해서 언제나 신비로운 시요, 그림인 것이다.
서양 사람들의 발자국이 그 고운 얼굴을 쑤세미같이 만들어 놓을 날이 온다 해도 달이 사람에게 주는 정서는 우리와의 그 변치 않는 거리로 인해서 변함이 없을 것이다. 언덕 위에 누워서 흘러가는 구름에, 반짝이는 그 숱한 별들에 언제까지나 마음을 날리며 지냈던 소년 시절의 꿈은 모두 이 신비로운 ‘거리의 미학’에 매어 있었던 것 같다.
‘거리의 미학’은 무엇보다도 생활 속에서 더 깊이 터득되어야 할 것 같다. 스탕달의 『연애론』에 ‘결정작용(結晶作用)’이란 말이 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상대방의 미점(美點) 선점(善點)만이 무럭무럭 피어나서 애정이 아름답게 결정되어 간다는 이론이다. 늘 붙어서 살면 모처럼 타고난 숱한 선(善) · 미(美)들이 피어나기도 전에 시들어버려 사랑이 무너질 기회가 두 사람을 노리게 될 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백년해로(百年偕老)할 것을 맹세하고 따뜻한 축복 속에서 맺어진 한 쌍이 몇 해도 못 가서 이혼한다고 아우성을 치기 전에 이 스탕달의 학설을 한번 머리에 띄울 일이 아닐까? 스탕달은 그 풍부한 경험에서 실감하고 설파한 이론이겠지만, 이것은 스탕달 아니라도 동서고금에 시들지 않는 진리라고 생각한다. 어느 사회학자의 통계에 의하면 이혼율이 가장 적은 직업은 마도로스라고 한다. 1년에 한 번이나 두 번밖에 못 만나는 한 쌍의 이야기… 그것은(한쪽이 변심만 않는다면) 저 ‘견우직녀’ 다음가는 아름다운 로망스가 아니겠는가!
어떤 종류의 위대한 예술작품은 ‘거리’의 산물일 수도 있는 것 같다. 괴테와 롯데가 결합될 수 있었다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탄생될 수 없었을 것이요, 또 유명한 단테의 『신곡』이 시인의 평생을 두고 사랑한 베아트리체가 현실적인 애인일 수 없었던 데서 탄생된 걸작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비단 남녀간의 애정에만 그칠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친구끼리 친하대서 너무 자주 만나고 있지 않는가? 드문드문 만나는 데서 그 친함은 더 깊고 짙어질 것이다. 둘 사이의 거리를 지금보다 더 키울 필요가 없을까?
인간 상호간의 모든 정은 귀한 화초를 정성들여 돌보듯 서로가 키우고 가꾸어야 할 것이다. 이런 진리를 모르는 데서 일어나는 갖가지 비극이 생각보다 자주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거리를 함부로 거부하거나 무리하게 좁히려 할 때 사람이 추악해진다는 사실을 나는 종종 보아 온다. 때로는 우리가 체념하지 않을 수 없는 거리도 있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어떤 이는 거리를 거부하고 좁히려고 노력하는 데서 삶의 보람이 생기고 문화 문명도 창조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엄마 등에서 달을 잡으려고 내미는 아기의 손의 의미… 그것이 만물지영장의 원시표징임을 누가 부인하랴. 다만 매사에 한계가 있는 중간자적 존재인 인간으로서 한 번밖에 없는 일생을 좀더 멋있게 살려면 하나의 생활철학이 필요하고 그 중에서도 이 ‘거리의 미학’은 가장 슬기로운 요소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뿐이다. 같은 대자연의 품에서 살아오면서도 서양인은 너무 잡으려고만 해 왔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도 슬기있는 사람은 잡는 영광보다는 잡는 비애를 더 깊이 깨달았었다.
우리 동양인은 잡으려고 하기보다 멀리 두고 보기를 좋아한다. 멀리 두고 보는 데서 서양인과는 차원이 다른 철학과 슬기가 꽃핀 것이다. 잡히지 않는 것이 값진 것이요, 이미 잡힌 것은 무미하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서양인은 대뜸 얼싸안는다. 그러나 우리 동양인은 멀리서 그윽한 웃음으로 반긴다. 우리 조상들의 이른바 애이불비(哀而不悲)하고 낙이불음(樂而不淫)하고 화이불유(和而不流)한다는 저 은근한 삶의 모습은 모두 이 ‘거리의 미학’을 터득한 생활철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소월(素月)의 꽃은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서 영원히 시들지 않는 것이다.
(1973. 여성동아, 12월호)
낙서 단상 / 유공희
그날 회의에서 학생과장이 제출한 긴급 토의사항은 ‘변소의 낙서에 관한 건’이었다.
‘지워도 지워도 불사조처럼 살아나는 변소의 낙서를 완전히 소탕할 수 있는 묘안은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진지하게 중론(衆論)이 오고가는 동안, 나는 그 안건(案件)이 해학적인 데 비해 용렬하기만 한 의견들이 속출하는 것이 꼭 체홉의 어느 단편소설의 한 장면 같다고 생각했다.
구구한 의견들이 모두 채택의 여지가 없는 고식책뿐이어서 장내의 공기가 소연해 갈 때 나는 분연히 다음과 같은 요지의 대책을 제시했다.
‘변소와 식당은 본질적으로 동등한 문화 시설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환경 관리의 실태는 공평한 것이 못 된다.
배설은 식사보다 몇 갑절 더 중요하고도 쾌적한 생리란 것을 강조한다.
바쁜 일상에서는 누려보기 어려운 그 한가한 시간에 무료한 만물의 영장이 눈앞의 무구한 공백을 그냥 둘 수 없는 것은 오히려 건강하고 창조적인 인간적 작위가 아닌가?
지워도 지워도 불사조처럼 살아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소중한 건물의 벽을 보기 흉하게 미봉만 할 게 아니라,
하다못해 FM 라디오를 설치한다든가, 좋은 그림을 걸어 놓는다든가, 영장의 무료를 덜어줄 만한 환경 관리가 바람직하며 이는 또한 문명의 새로운 척도를 창조하는 계기도 되지 않겠는가!’
내 열변은 ‘예산이 불허한다’는 서무과장의 한 마디로 즉석에서 묵살되고 말았다.
나는 씁쓸한 소외감 속에서 고독한 명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국민학교 시절에 시절에 나는 저 유명한 로댕의 조각을 꼭 ‘똥 누는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 후 생각하는 자세가 용변하는 자세와 같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체험해 왔다.
로댕의 그 걸작은 용변할 때 착상되었을 것이 틀림없고 그는 우선 눈앞의 벽면에 데상을 해 보았을 것이다.
식당의 훤조(喧噪)에 비해 변소 안의 그 한적한 동안이 얼마나 밀도 짙은 발상의 기회인가 하는 것은 저 구양수(歐陽脩)의 ‘삼상(三上)’ 속에 ‘측상(廁上)’이 들어있다는 사실로써 증명이 되고도 남는다.
동서고금 없이 변소야말로 ‘굿 아이디어’의 유현한 산실이었던 것이다.
배가 부르면 머릿속이 흐리고 배가 고플 때 머릿속이 맑다는 것은 보통 사람이면 누구나 경험해 본 생리일 것이다.
용변하는 동안이 곧 두뇌의 정화 과정임을 더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식당의 그 요설(饒舌)과는 차원이 다른 인간의 지혜가 풍성하게 발화(發花)하는 그곳의 벽면에 불사조처럼 낙서가 살아 있는 소이(所以)가 여기 있다.
변소의 환경 개선안을 예산 탓으로 묵살하는 처사는 몽매한 행위랄 수밖에 없다.
낙서 하나 없는 말끔한 벽면은 마치 핏기도 없이 탈속해 버린 수녀의 얼굴처럼 삭막하다.
개발새발 개구쟁이들의 낙서로 알록달록한 골목안의 담 밑을 지날 때 흐뭇한 삶의 입김을 느끼며 안도의 미소를 짓게 된다.
로댕은 그 작품에다 금단을 범하고 낙원에서 추방된 ‘중간자(中間者)’의 비극적 숙명을 형상화 했는지도 모른다.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이 그런 심각한 포즈를 취해 보았을 리가 없다.
이른바 ‘호모 사피엔스’는 ‘신의 형벌에 고민하는 인간’이란 의미가 될 것이다.
‘이성(理性)’이니 ‘지성(知性)’이니 하는 말들이 그래서 생긴 것 같은데 해괴한 것은 많은 철학자들이 그것을 인간 속에 깃들인 신의 속성으로 단전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과연 신을 닮아서 사색하는 것일까?
인류의 고향은 본디 낙원이었고 그곳에는 사색 이전의 유희가 있었을 뿐이다.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이기 전에 ‘호모 루덴스’이었다. 신을 닮은 인간의 모습은 이맛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버릇 속에 있는 게 아니라 빈둥빈둥 흥얼흥얼 노니는 버릇 속에서 살아나는 것이다.
무료하다 못해 이 거창한 삼라만상을 창조해 낼 수밖에 없었던 그 엄청난 신의 권태를 인간이 조금 닮은 것이다.
우리를 한없이 경탄하게 하는 이 우주 만상이야말로 신의 위대한 낙서가 아닌가?
‘시는 자연의 모방’이란 말은 예술가는 조물주를 유일한 스승으로 삼으라는 말이요, 천재는 신의 무료를 무료해 할 줄 아는 인간이라는 그 수구초심(首丘初心)을 강조한 말이다.
우리도 어린 시절에는 모두 무료한 천사들이었다. 억울하게 ‘철’이 들어버린 어른들은 창구멍을 뚫는 아기 손에 입 맞추어 주고 마당 한쪽의 금잔디를 걷어내고 금모래 은모래밭을 만들어 주어야 할 것이다.
‘정말로 놀 줄 아는 것은 천재뿐이다’고 말하는 보들레르는 예술의 근원은 동심이라고 하는 것이요, 예술의 본질은 ‘장난’이라고 하는 것이다.
‘시인은 25세부터 전통에 매달린다’는 엘리어트의 말은 사람은 ‘철’이 들면서 속물이 되어 간다는 뜻이요, 예술가는 늙기 전에 죽는다는 말이다.
망가진 자전거의 손잡이와 안장을 땜질로 맞춰 ‘소머리’를 만들어 놓고 좋아하는 피카소는 90세가 넘었어도 골목 안 담벽에 낙서를 즐기는 개구쟁이의 유희심을 잃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일생을 한결같이 자기의 ‘유희’에 골몰하고 떠나가는 천재는 흔하지 않다.
연꽃 모양으로 청자연적의 꼬부라진 꽃잎 하나가 곧 수필이라고 말한 수필가가 있다.
가지런하게 꽃잎을 만들어 가다가 도중에서 한 개를 일부러 꼬부라뜨린 고려시대의 그 개구쟁이가 누구였을까.
그런 ‘동심(童心)’이 없어서 숫제 수필을 쓰려고 아니 한다고 그분은 말한다.
수필은 ‘철’든 사람이 철없이 집착할 문학은 아닌 성싶다.
써도 그만이요, 안 써도 그만인 것이라고 달관할 일이다.
함부로 섬기려 들다가는 도리어 모독을 범하기 십상인 그런 대상인 것만 같다. (1979. 수필문학, 11월호)
배회 취미 / 유공희
내가 누구보다도 가장 경원(敬遠)하는 사람은 밥을 빨리 먹어버리는 속칭 속식가(速食家)다.
혹 동반해서 점심을 먹게 될 때 내가 미처 반도 먹기 전에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바닥을 내버리고는 유유히 담배를 피워 무는 친구가 더러 있는데 그런 때 나는 무슨 경기(競技)에서 패배한 선수같이 우울한 열등감에 젖어버린다.
이제는 식사를 같이하자고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나보다 빠른 그 정 떨어진 속식가인지 아닌지부터 판정하게 되고, 대개의 경우 차라리 혼자 하게 될 때가 많다.
무슨 일이나 동반해서 하게 될 때 서로의 템포가 맞아야 쾌적하다는 것쯤은 상식이 아닌가.
내기도 아닌 바에 먼저 먹어치웠다고 유쾌할 까닭도 없겠지만 심신으로 피해를 입는 것은 언제나 나 같은 느리광이인 것이다.
상대방에 템포를 맞추자니 생리에 무리가 오고, 기다리게 한 것이 미안해서 그만 먹자니 억울하고, 모처럼 즐거워야 할 식사가 참기 어려운 고역이 되고 마는 것이다.
모든 것이 경기화되어 살아가기 힘든 세상에서 식사까지 경기하듯 해서야,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식사는 산책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할 일이다. 인간의 건전한 생리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식탁 위의 갖가지 음식이 그러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지난겨울 한 친구와 ‘정종대폿집’이란 데서 마신 적이 있었다.
술을 ‘대포’라고 하게 된 것이 언제부터인지 궁금하다. ‘대포’ 하면 막걸리로만 알고 있었는데 정종까지 ‘대포’로 마시게 된 것을 보니 그 살벌한 경기풍조가 차원을 범한 지 오랜 모양이다.
과연 모두들 큰 맥주컵으로 들이켜고 있었다. 취한 모양들도 정상이 아닌 것 같다. 맥주컵 두 개를 가지고 다가와서 윙크하는 아가씨보고, 정종을 45도 정도로 데워서 주전자에 담아오고, 제일 작은 잔을 가져오라 일렀더니 윙크가 사라지고 해괴하다는 눈치다.
정종에는 단 맛, 쓴 맛, 신 맛, 매운 맛, 떫은 맛, 다섯 가지 맛이 있다.
그리고 사람의 혀는 그 다섯 가지 맛을 알뜰하게 알아보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따끈한 정종을 누깔사탕 한 알만큼 입안에 담고 혓바닥 위를 골고루 굴린 다음 살짝 목을 넘겨야 술도 태어난 보람을 느끼면서 사람을 기분 좋게 취하게 해 주는 것이다.
주객이 술에 따라 마시는 법도 알아야 하지만, 파는 쪽에서도 그런 것쯤은 알고 함부로 정종을 ‘대포’로 내밀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 아가씨가 어느 정도나 공감을 했는지 모른다.
무슨 술이나 ‘대포’로 들이켜는 무지한 행동에 비하면 속식가는 그래도 점잖은 편이다.
어떤 학생이 ‘교양’을 위해서 세계 명작을 읽어야겠다고 산 책이 유고의 『레 미제라블』이었다면서 지루해서 도저히 독파할 수가 없더라고 했다.
그 긴 소설을 끝까지 읽어내는 끈기가 무섭다고 했다.
그것은 끈기 문제가 아니라, 이야기의 결말을 서두르는 좋지 못한 마음가짐 때문이다.
소설은 헐덕거리며 뛰어야 하는 마라톤 코스가 아닌 것이다.
갖가지 흥미진진한 요소들이 가득히 담겨 있는 책을 명작이라고 한다.
매사가 다 그런 것이지만, 종말을 서두르지 말고 도중과 과정에 정성을 기울여 산책하듯 소요(逍遙)하듯, 한 페이지 한 페이지, 한 마디 한 마디를 음미하고 있노라면 알찬 보람과 함께 언젠가는 끝이 올 게 아닌가? 무엇이 그리 급하단 말인가?
그 학생이 유고와 얼마나 깊이 사귀었는지 모르겠다.
‘여행을 즐겁게 할 줄 아는 사람은 인생을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
인생은 곧 여행이기 때문이다’고 말한 철학자가 있었다.
나는 여행을 즐겁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본다.
첫째, 짐이 없을 것, 둘째, 목적지가 없을 것, 셋째, 뜻 맞는 친구가 있다면 몰라도 혼자 떠날 것. 누구나 한번 시험해 봄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정말 즐거움을 실감했다면 그 사람에게서는 들어볼 만한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들어볼 만한 이야기는 체험담보다는 인생을 살아가는 슬기라는 뜻이다.
이 경우 ‘여행’을 ‘산책’이란 말로 바꾸면 더 실감이 날 것 같다.
인생을 살아가는 자세도 가지가지 있겠지만, 세상 탓인지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무슨 장애물경기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
그 출발점에서 혹 그 도중에서 허둥대는, 야망에 찬 젊은이들의 눈을 많이 본다.
허다한 장애물 저 편 아득히 ‘출세’라는 고올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고 있는 얼굴이다.
이른바 ‘엘리트’의 초상이다.
오다가다 듣는 대화들도 거의가 경기장 분위기에서 일어나는 열띈 정보들이어서 때로는 살벌한 느낌이 든다. 모두가 ‘명선수’가 되는 것이 소원이다.
‘명선수’가 되어 가는 그 동안에 그 젊은이의 ‘인간’은 만신창이가 되어 가는 것은 아닌지.
명선수… . 실수 없이 만점만 따내는 명선수에게 쏟아지는 박수소리는 언제나 요란하다.
그러나 ‘코마네치’가 실수하는 순간에 오히려 갈채를 보내고 싶은 마음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보다도 인생을 무슨 경기로 알고 살아가게 될 때, 너무도 소중한 본연의 것들을 잃게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앞만 보고 달려서야 주위의 무엇이 눈에 들어오고, 마음에 오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인생을 혓바닥 위에 놓고 굴릴 수가 없을 바에 우리가 인생의 이 구석 저 구석을 슬슬 굴려야 인생의 참맛을 알 게 아닌가?
빈둥빈둥 두리번두리번 하는 배회 취미, 소요 취미가 필요한 소이다. (1978. 수필문학, 12월호)
[발문]
문집 간행의 경위와 편집 체재
임 보
1. 간행의 경위
유공희 선생님 생존 시 역촌동의 사택을 방문할 때마다 선생님의 작품집 간행에 관해 여쭈워 보았지만 허락을 받지 못했다. 선생님께서 작고하시기 1년 전쯤 와병 중에 계실 때, 이이화 오병선 임보 등 몇 제자들이 찾아가 다시 문집 발간을 건의했지만 그때도 마찬가지로 뜻을 바꾸지 않으셨다. 선생님께서는 생전에 문집을 엮어낸다는 것을 별로 탐탁히 여기지 않았다. 문집이란 본인의 사후에 제자들이나 후손들의 손에 의해 간행되는 것이지, 본인 생존 시에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신 것 같았다. 일찍이 해외 유학을 통해 서구 문화에도 밝은 개방적인 지식인이었지만, 처신에 있어서는 동양의 전통적인 선비정신을 잃지 않은 곧은 분이셨다.
2003년 선생께서 작고하신 후 한동안 잊고 있다가 2007년에 이르러 문득 선생님의 유고에 관해 생각이 미쳤다. 그리하여 수소문 끝에 4월 9일 선생님의 장남인 유민 씨와 연락이 닿아 보관 중인 유고를 확인할 수 있었다.
4월 21일 양성철 대사의 『움』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이이화 박상용 임보 등이 문집 간행에 관해 논의를 하게 되고, 5월 17일 유민 씨로부터 유고를 받게 되었다.
산문 43편, 시 77편 그리고 일문으로 표기된 시 49편이었다. 산문은 문예지나 교지에 발표된 인쇄물로 스크랩되어 있었고, 시는 세 권의 육필시고와 몇 편의 낱장 원고로 보관되어 있었다.
원고를 인수한 즉시 컴퓨터에 입력 작업을 개시 7월 말에 정리를 마친 뒤, 8월 13일에 제1차 편집회의를 인사동의 한 음식점에서 가졌다. 이날 참석한 편집위원들은 박상용 이이화 오병선 양성철 임보 등이었는데 출판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하였다. 출판의 주체, 출판비 조달 및 출판사 선정 등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출판의 주체는 선생님의 지도를 가장 많이 받았던 광주고등학교 제7회 졸업생, 그 가운데서도 실질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재경동문회가 맡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의견을 모았다. 한편 선생님과 인연을 가진 광고의 다른 기수와 서울고 및 중동고 출신 제자들에게도 알려 동참케 하도록 했다. 그리고 출판비는 발의를 한 편집위원들 및 발의에 동의한 기획의원들의 성금 그리고 각 동창회 후원금으로 충당키로 결정했다.
제2차 편집회의는 9월 6일에 같은 장소에서 있었다. 출판사를 ‘시학사’로 결정하고 원고를 넘겼으며 한편 문집에 참여할 필진들을 선별해서 글의 청탁에 들어갔다.
9월 18일 뉴국제호텔에서 재경 광주고등학교 제7회 임시동창회를 개최하고 유공희 문집 『물 있는 풍경 』간행 사업을 추진키로 의결했다.
2. 편집 체재
책의 체재는 화보와 경력, 간행사, 선생님의 수필과 시, 제자들의 추억담, 작품 해설, 간행 경위 등의 순으로 구성토록 했다. 간행사는 출판의 주체인 재경광주고제7회동창회 대표가 쓰고, 선생님에 얽힌 추억담들은 각계의 제자들을 배려하여 청탁토록 하며, 발문격인 출판 경위에 관한 글은 편집진에서 맡기로 했다.
문집의 근간인 유공희 선생님의 글은 산문을 앞에 놓고 운문을 뒤에 싣기로 했다. 산문은 거의 평생을 쓰신 글이고 운문은 선생님의 2, 30대 청년기의 작품들이어서 산문에 비중을 두었다. 선생님께서 손수 스크랩하여 정리해 둔 산문은 총 43편인데 이 중 같은 내용을 개작한 한 편과 짧은 가십의 글 한 편을 제외한 나머지 41편을 실었다. 작품의 배열은 스크랩되어 있는 순을 가급적 따랐는데 에세이 류의 글은 뒤에 놓았다.
운문 곧 시의 원고는 총 77편인데 네 파트로 분류된다. 세 권의 필사본으로 묶인 시집과 원고지에 기록된 형태로 남아 있는 작품들이다. 필사본으로 정리된 첫 시집 『풍경』에 20편, 제2시집 『물 있는 풍경』에 19편, 그리고 부인을 위한 연시집으로 추정되는 제3시집 『사랑하는 나의 N.H.K.에게 드립니다』에 21편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비교적 후기의 작으로 보인 미 정리고 15편과 1946년 중국에서 쓴 2편이 남아 있다. 한편 『풍경』의 끝에는 일문(日文)으로 기록된 작품들이 49편 첨부되어 있다. 일문시 중 일부는 한글 시와 동일한 작품도 있는데 어느 것이 원본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작품의 배열은 집필된 시집들을 역순으로 놓고, 시집에 수록된 대로 따랐다. 여러 시집들에 2중 수록된 작품들은 뒤에 나온 시집에 넣었다. 미 정리고와 2편의 중국시편은 「ILLUSION」이란 제목을 새로 달아 맨 앞에 놓고, 일문 시는 부록의 형식으로 맨 뒤에 붙여 장차 문학연구가들의 자료가 될 수 있도록 했다.
표기는 가급적 원문을 살리려고 노력을 했으나 현대 맞춤법에 맞도록 교열을 보았다. 이 책의 제목을 『물 있는 풍경』으로 정한 것은 동명의 글이 수필과 시에 거듭 있을 뿐만 아니라 평소에 선생님께서 아끼시던 글로 기억되었기 때문이다.
[사족]
선생님께서는 그림도 잘 그리셨다. 한번은 무슨 일로 오후 늦게 교무실에 들렀는데 몇 선생님들이 칠판을 보면서 껄껄대고 웃고 계셨다. 칠판에는 한 폭의 만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공중묘지를 향해 걸어가는 일련의 군상이었다. 모두들 무거운 짐들을 지고, 이고 혹은 메고 낑낑대면서 가고 있는데 맨 끝에 큰 술병 하나만 들고 빈둥거리며 따라가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그 인물에 화살표를 해놓고 ‘나’라고 써 놓았다. 선생님의 인생관을 단적으로 드러내 보인 그 만화가 지금도 내 뇌리에 생생히 남아있다.
× ×
지난여름은 유달리 무더웠다. 그 무더위 속에서 선생님의 원고를 정리했지만 괴로운 줄을 몰랐다. 아니, 선생님의 글을 읽는 동안 옛날 수업시간에 들려주셨던 말씀들이 떠올라 학창시절로 다시 되돌아간 듯한 즐거운 착각에 빠질 수 있었다.
나는 선생님의 시「ILLUSION」을 소개한 글을 쓴 바 있는데, 그 글의 끝에 선생님에 대한 내 심경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 바 있다.
“유상(愉象) 선생은 스스로 문학의 딜레탕트라고 겸손해 했다.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을 사랑했고 실존주의 철학자들을 좋아했다. 자존(自尊)과 개성을 소중히 여긴 자유인이었으며, 진정한 멋을 안 댄디(dandy)였다. 유머와 위트가 넘친 낭만주의자, 그러나 지조를 잃지 않은 선비였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내가 지금까지 이 지상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멋진 분이었다. 그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 내 생애의 큰 행운이며 기쁨이었다. 그분의 맑고 고운 문향(文香)을 세상과 더불어 나누고 싶다.”
삼가 선생님의 명복을 빌어 마지않는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