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치와 창건 백련사(白蓮寺)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231번지 고려산(高麗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사찰이다. 이 절은 416년(고구려 장수왕4)에 한 인도 승려가 창건했다고 전해오지만 고증할 수는 없다.<전등본말사지> 에 실려있는 (고려산백련사중건기)에도 '중국 동진의 천축조사가 강화의 한 산에 이르러 산의 정상에 오색 연꽃이 핀 연못을 보고 다섯 색깔의 연꽃을 꺽어서 공중으로 날려 연꽃이 떨어지는 곳마다 절을 창건하였는데, 이곳에 백련이 떨어졌기 때문에 백련사라고 하였다고 하나 문헌으로 고증할 수는 없다'. 고 하였다. 신라 및 고려, 조선 전기의 백련사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오늘날 전해오지 않고, 다만 그 자세한 연혁을 의해당 처활(義海堂 處活) 스님의 부도와 비석에서 볼 수 있다. 청허 휴정(靑虛 休靜) 스님의 법맥을 이은 천봉(天峯)스님의 제자인데, 이 절에서 60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문도들이 부도를 세우고 비석을 세웠던 것이다. 1881년(고종 18)에는 벽담 대규(碧潭大奎)스님이 화주가 되어 현왕도를 조성하였고, 1888년 (고종 25) 에도 벽담스님이 지장보살도. 신중도. 칠성도. 독성도 등을 조성하여 법당에 봉안하였는데 이들 불화는 오늘날에도 전해오고 있다. 1905년에는 인암(忍庵)스님이 보월(寶月)스님과 함께 퇴락한 절을 중창하였다.그 해 정월에 인암스님이 불사를 일으킬 것을 발원하여 자금을 모으기 시작하였으며, 2월 28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3월 17일에 상량 하였고, 7월 30일에 공사를 마쳤다. 1908년에 불상을 개금하였고 각 전각에 탱화를 봉안하였으니, 지금 극락전에 봉안되어 있는 아미타후불탱화도 이 때에 조성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덕원(德元). 선조(善照). 창환(昌煥). 봉식(鳳植). 재운(在芸). 창렬(昌烈)스님 등이 주지를 지냈으며, 불교정화운동 후에는 성탄(性坦). 현 일(玄一). 만법(萬法)스님이 주지의 소임을 맡았다. 그리고 근래에 이르러 1967년 삼성각 기와불사와 아울러 관음전이 중수되었다. 1986년에는 범종각이 지어졌고, 관음전의 현판을 지금의 극락전으로 바꾸었다. 최근 1995년에는 극락전의 부엌자리에 종무소를 지었다
■ 성보문화재 현존하는 건물로는 극락전과 삼성각. 칠성각. 범종각. 요사 등이 있다.
■ 극락전 극락전은 현재 법당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1905년에 보월스님이 건립하였고, 1967년에 성탄(性坦)스님이 중수하였다. 건물 한쪽에는 '옹호각(擁護閣)'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내부에는 아미타. 관음. 지장상과 아미타후불탱화. 지장보살도. 현왕도. 신중도. 광음보살도 등이 봉안되어 있다.
■ 아미타후 불탱화 아미타 후불탱화는 1908년에 제작된 가로 214.5㎝, 세로 151㎝크기의 불화이다. 화면중앙에아미타후불이 있고 그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중심한 8대보살이 배치되었으며, 그밖에 성문중 제식과 범천 사천왕 등이 묘사되어 있다 비교적 차분한 색조로 그려진 이 불화는 조선 말기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왼쪽의 관음보살은 백의를 걸치고 손에는 보병(寶甁)을 잡고 있으며 오른쪽의 지장보살은 머리에 두건을 썼으며 손에는 석장을 짚고 있다. 화면의 오른쪽 하단에는 화기(畵記)가 적혀 있어 1908년에 초월 응천(初月應天)스님의 증명하에 금어 혜고 봉감(慧고 奉監)스님 등이 그렸으며, 화주는 보월 선조(寶月善照)스님이 맡았음을 알 수 있다
■ 지장보살도 지장보살도는 신중도. 칠성도. 독성도와 함께 1888년(고종25)에 조성되었다. 가로 178.5cm,세로 141.5cm 크기의 불화로, 연꽃 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지장보살이 화면의 중앙에 크게 자리하고 있으며, 그 좌우에 권속과 시왕 및 동자가 함께 그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안정되고 색감도 차분한 불화로 하단에 15행의 화기가 남아 있다.
■ 신중도 신중도 역시 1888년에 그려진 것으로 가로 221㎝ 세로 145㎝ 크기의 불화이다. 화폭을 상하 2단으로 구분하였으며 윗부분에는 천룡을 중심으로 좌우에 제석과 범천을 위주로 한 신중을 배치하였으며, 아랫부분에는 무장의 모습을 한 신중을 배치하였다. 화기의 기록에 의하여 환경 우인(幻鏡 雨仁)스님이 증명법사가 되어 니봉 중린(尼峰仲璘). 혜산 축연(惠山 竺衍)스님 등이 그렸고 당시 화주는 벽담 대규스님이 맡았음을 알 수 있다. 칠성도와 독성도도 이 때에 함께 그려져 봉안되었다.
■ 현왕도 현왕도는 1881년에 조성된 가로 75.5㎝, 세로 79.5㎝ 크기의 불화이다. 화면 중앙에 현왕이 그려져 있고 좌우에 판관과 사자가 배치되어 있으며, 앞쪽에는 녹사와 동자가 묘사되어 있다. 이 불화는 벽담 대규스님이 화주가 되어 금어 긍률(肯律)이 그린 것임을 화기를 통해 알수 있다. 그런데 극락전에는 본래 철조미타여래상이 봉안되어 있었다. 이것은 고려 후기의 양식을 지닌 불상으로서 14세기 후반에서 15세기 초기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는 우수작이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 삼성각 삼성각은 극락전 왼쪽에 자리하고 있다. 그 창건 년대는 잘 알 수가 없지만 1967년에 여러 전각을 중수할 때 함께 단장되었다. 내부에는 중앙에 칠성도를 안치하고 그 좌우에는 산신도와 독성도가 봉안되어 있다. 절의 경내에는 1806년(순조 5)에 세워진 의해당 처활스님의 부도와 비석이 있다. 문좌(門佐)인 취허 환열(翠虛幻悅)스님이 쓴 비문에 의하면 처활스님은 청허 휴정(淸虛休靜)스님의 법맥을 이은 천봉(天峯)스님의 제자로 성품이 온화하고 유순했으며,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과묵한 분이셨다고 한다 나이 20세에 출가할 뜻을 갖고 양헌(良憲)선사에게서 머리를 깍고 천봉대선사에게 수업을 하였으며, 평생 염불삼매를 닦다가 나이 60에 이르러 스스로 입적할 때를 알고 게송을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 제자들이 스승의 사리를 수습하여 1806년에 부도와 비석을 세워 그 뜻을 기렸다고 한다. 1806년 입적에 들 때의 나이가 60세였다고 하므로 처활스님의 태어난 해는 1746년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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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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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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