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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성숙을 향해 가는 길에서 반드시 기억해야할 가장 위대한 교훈 중 하나는 “하나님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때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잘 기다린 사람이 누구보다 성숙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스턴트 커피, 인스턴트 감자, 인스턴트 우유, 전자레인지에 의한 인스턴트 음식 등 “인스턴트” 문화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과소 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도할 때도 자연히 즉각적인 응답을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는 당신의 때에 일하십니다.
그때까지는 기다려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기다림”은 바람이나 쐬며 여유 만만하게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량을 베풀어 하나님께 시간을 양보하는 것도 아닙니다. 번호표를 받아들고 자기 순서를 기다리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집중적으로 고요함을 유지하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유롭게 역사 하십니다. 당신이 일하시는 방법을 기다리는 사람에게만 알려주십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40:28-3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은혜와 사랑이 한이 없으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일하시기까지 참을성 있게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새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시인은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시37:7a)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까지 믿음으로 참고 견디며 기다리십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는 기막힌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만을 붙잡고, 하나님을 구하는 시인의 모습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는 환난과 시험 속에서 몸이 쇠약해 질 정도로 하나님을 사모했습니다. 81-84절입니다.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오히려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나의 말이 주께서 언제나 나를 안위하시겠나이까 하면서 내 눈이 주의 말씀을 바라기에 피곤하니이다 내가 연기 중의 가죽 병같이 되었으나 오히려 주의 율례를 잊지 아니하나이다 주의 종의 날이 얼마나 되나이까 나를 핍박하는 자를 주께서 언제나 국문하시리이까”
여기서 “피곤하오나”(카라 : kawlaw')는 “끝나다, 소모하다, 써버리다, 기진(氣盡)하다” 등의 뜻으로, 시인이 극도로 쇠약하고 곤비(困憊)해 질 정도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하여 강한 욕망을 가졌음을 의미합니다. 시인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만을 사모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구원 외에는 그 무엇으로도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내면은 온전히 은혜의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구원을 갈망하였습니다. 그의 유일한 바람은 “주의 구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열정을 다 기울였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의 구원을 바랬었는지 극도로 지쳐 쓰러질 정도였습니다. 눈이 쇠약해 질 정도였습니다.
시인은 오직 하나님의 구원 한가지만 소원하였던 것입니다. 히5:7절은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피곤하여 지쳐 쓰러질 정도까지, 눈이 쇠약해 질 정도까지 하나님을 사모해 보셨습니까? 정말로 간절히 하나님 한 분만 구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 보셨습니까?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피와 땀과 눈물을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물로 드려보셨습니까?
환난과 시험의 때에 정말로 간절히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시인의 간절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은 오랫동안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지체되었습니다. 그의 피부는 연기에 그을려 바짝 말라버린 가죽 병처럼 되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불의 열기와 연기를 통해 가죽 병을 서서히 데움으로써 그 속에 든 포도주를 향기롭게 익히기 위하여 가죽 병을 연기 중에 매달아두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고난을 통해 우리의 영혼이 성숙해질 수 있음을 교훈 합니다. 그러나 본 절에서는 탄력이나 습기가 없고 보기에도 흉한 상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름이 잡힌 시인의 얼굴은 슬픔으로 인해 거무틱틱하고 음침해졌습니다. 자연히 그의 몸도 슬픈 마음 상태와 같이 윤기를 잃었습니다. 마치 마르고 그을린 가죽 병처럼 변했습니다. 그의 인격은 비방의 독한 연기에 그을렸고, 그의 마음은 핍박의 불꽃에 바싹 타들어 갔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심한 정신적 고통으로 인해 쓸모 없고 무능한 존재로 전락할까 두려웠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낡아서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가죽 병처럼 여길까 두려웠습니다. 거기다 바로 그때까지도 원수들은 여전히 기세 등등하게 그를 대적하고 있었습니다. 85-88절입니다.
“주의 법을 좇지 아니하는 교만한 자가 나를 해하려고 웅덩이를 팠나이다 주의 모든 계명은 신실하니이다 저희가 무고히 나를 핍박하오니 나를 도우소서 저희가 나를 세상에서 거의 멸하였으나 나는 주의 법도를 버리지 아니하였사오니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로 소성케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입의 증거를 내가 지키리이다”
여기서 “교만한 자”(제드 : zade')는 “오만한, 염치없는, 거만한, 건방진” 등의 뜻으로, 사회적인 높은 지위를 이용하여 탈법적인 행위를 일삼는 비윤리적이고 폭력적인 지도자들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특히 본 절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면서까지 시인을 모해(謀害)하려는 상류층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무고한 희생물을 잡기 위하여 덫을 놓는 사냥꾼처럼 시인을 잡기 위해 자신들의 높은 지위를 악용했습니다. 겉으로 볼 때 거의 하자가 보이지 않는, 그래서 합법적으로 보이는 고도로 치밀하고도 은밀한 계획을 짰습니다.
그들의 핍박의 근거는 거짓과 속임수였습니다. 있지도 않은 일을 있는 것처럼 꾸며 시인을 비방하고 모함했습니다. 한편, “멸하였으나”는 81절의 “피곤하오나”의 다른 번역입니다. 그리고 이는 너무 가혹하고, 너무 오래 계속된 대적들의 핍박에 방치된 시인의 기력이 거의 고갈되었고, 이제는 기진 하여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시인은 의지할 것이라곤 전혀 없는 고아와 같은 상태에서 참으로 외롭고 고독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하나님께서는 저를 언제쯤 위로하실 작정이십니까? 저를 박해하는 자들을 언제나 벌하실 것입니까? 저는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시인이 기다리다 지쳐 하나님의 구원을 의심한 것이라고 오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도, 감당할 수 없는 누적된 고통의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습니다. 때가 차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축복과 저주가 반드시 분명한 현실로 드러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죽음 같은 환난과 시험과 핍박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집착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인의 자세는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그는 오랫동안 계속되어온 핍박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 하나만을 의지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그러한 자세를 근거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공적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철저히 숨겼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 곧 인자를 의지했습니다. 또 자신에게 어떤 상황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으로 거듭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확신을 가장 만족스럽게 여깁니다.
그래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른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지나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지속적으로 주어지기를 진지하게 바라고 기대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약속을 어기실 수 없을 뿐 아니라, 당신의 말씀이 주는 소망으로 인해 고무된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실망시키실 수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시인과 같은 상황이 주어졌을 때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환난과 시험이 계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이 지연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끝까지 믿고 기다리십시오. 그것을 통해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때때로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더욱 큰 그리스도의 지식에 이르게 하십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더욱 큰 영적 성숙으로 인도하십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더 큰 의존과 상함의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다른 차원으로 옮기십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계시하십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한 동정심을 갖게 하십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의 용기를 북돋워주십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 안에 가득한 비판주의를 제거하십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회복하십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 안에 천국에 대한 소망을 키워주십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철저히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만드십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결국 당신의 뜻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우리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계속되고, 구차한 신세로 전락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할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구해야할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인자를 구해야할 이유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져야할 참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릴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C. S 로빈슨은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인내와 침묵과 눈물만을 요구하실 때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토머스 맨턴은 “하나님에 대해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께 불평을 털어놓도록 하자. 하나님을 불평하는 것은 불신과 불만의 싹을 자라게 하지만, 하나님께 불평을 토로하는 것은 믿음과 소망과 인내를 자라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소망만이 우리의 영혼을 기진맥진한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참된 신앙은 인간의 영혼 속에 자리잡은 하나님의 생명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환난과 시험의 때에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힘겨워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피와 땀과 눈물을 제물로 드리십시오. 하나님의 생명을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생명의 힘으로 하나님의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그것을 통해 참된 신앙은 환난과 시험 속에서도 결코 흔들리거나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기다리는 것임을 온 세상에 증거 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