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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 石龍山
- 위 치 :경기 가평군 북면, 강원 화천군 사내면
- 높 이 : 1,147m
1. 일 시 : 2012. 3. 15. 08:30 ~
2. 장 소 : 석룡산
3. 참석인원 : 23명 (새내기 2명)
4. 탐방코스 : 38교 - 조무락골 - 지능선 - 정상 - 방림고개(쉬밑고개) -
복호동폭포 - 조무락골 - 38교 원점회귀
5. 다녀온길 : 경춘로 - 가평읍 - 북면 목동삼거리 가화로 사창(김화)방면 -
적목리38교
6. 오늘활동 상황
○ 08:30 --- KBS앞 출발
○ 09:46 --- 38교 도착
○ 09:50 --- 일정안내 및 단체기념사진 촬영
○ 09:56 --- 들머리 진입
○ 10:16 --- 지능선, 복호동폭포갈림길
○ 11:14 --- 도마치갈림길
○ 12:06 --- 정상
○ 13:26 --- 방림고개(쥐밑고개) 후미, 점심식사
○ 14:31 --- 중봉갈림길
○ 14:56 --- 복호동폭포
○ 15:28 --- 지능선, 복호동폭포갈림길 원점회귀
○ 16:00 --- 38교 도착(후미)
○ 16:08 --- 38교출발
○ 16:22 --- 명지산군립공원주차장 하산행사
○ 17:00 --- 주차장 출발
○ 18:18 --- KBS앞 도착
7. 석룡사 살펴보기
□ 개관
- 경기 가평군 북면에 위치한 석룡산은 강원도 산골 못지않게 교통이 불편한 오지여서 그만큼 비경지대를 많이 간직하고 있다. 특히 6㎞에 걸쳐 조무락골 계곡이 펼쳐져 휴가철에 피서객이 많이 몰린다. 폭포, 담, 소가 이어지는 석룡산은 웅장한 산세에 비해 등산로가 완만하고 시종 물소리를 들으며 오르내릴 수 있기 때문에 여름산행으로 적당하다.
- 石龍山은 산정에 용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고 해서 또는 돌이 용으로 승천했다고, 조무락골에 돌이 많아 석룡산이라고 부른 것이 아닌가 하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석룡산은 대부분 흙길로 주능선 정상 부근 몇 백 미터에 돌이 조금 있긴 하지만 용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고는 알려지지 않았다. 능선길과 정상은 우거진 나무숲으로 조망이 거의 없는 숲길트래킹 코스이다.
- 경기도 최고의 오지이자 마지막 비경지대인 석룡산은 서울에서 동북으로 약 90km, 가평읍에서 30km지점 경기도 가평군 북면과 가평읍 적목리와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삼일리 경계를 이루며 한북정맥상의 도마치봉에서 남서쪽으로 가지를 쳐 화악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상에 있다.
- 석룡산은 수도권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데다 산행 들목인 목동 - 적목리 용수동에 이르는 도로가 완전 포장되어 있어 찾기가 더욱 쉬워졌다. 게다가 최근 용수동에서 화천군 사창리로 이어지는 도마치 고갯길도 대형 관광버스가 마음 놓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확포장이 완료되어 석룡산을 찾는 등산인들이 더욱 많아지고 있다.
□ 주변 볼거리
<강영천 효자문>
- 적목리 논남부락에 있는 강영천 효자문은 향토유적 제5호로 지정되었다. 효자 강영천은 진주강씨로 3세때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 연일정씨에 의해 양육되던중 그가 7세때 모친이 지병으로 몸져 눕게 되었다. 그는 나이가 비록 어렸으나 효성이 지극하여 병든 모친의 수발을 들던 중 모친의 병이 악화되어 정신을 잃자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모친의 입에 흘려놓고 그 자신도 쓰러지고 말았다. 소생된 모친이 피를 흘리며 쓰러진 어린아들을 발견하여 정성껏 간호한 끝에 깨어날 수 있었다. 정문앞에 걸린 "효자업무강영천지문각 강희 319년 경진3월25일입"이라 새겨진 현판으로 보아 이 효자문은 숙종 26년(1700년 3월 15일)에 건립 했음을 알 수 있다. 본래의 건물은 29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멸실된 것을 1987년도에 복원하였다.
<신앙유적지>
- 본 향토유적은 가평군청에서 북서쪽으로 약35㎞지점인 가평천 상류 북면 적목리 산1-28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전국 각지에서 징용을 피해 모여든 주민들이 목탄생산, 경춘철도에 소요되는 침목조달과 벌목작업등을 하며 광복이후까지 산기슭 곳곳에 반지하식 움집을 짓고 공동생활을 하면서 숯생산과 벌목등을 하여 왔던 곳으로 특히, 그 가운데에는 신앙인들이 일제의 신사참배, 창씨개명, 종교탄압과 강제징용을 피해 은신하며 신앙심을 지켜온 곳이기도 하다. 현재 이곳에는 당시 일제강점기의 거주 및 생활문화등 당시의 어려운 생활상 및 종교, 풍속등을 엿볼 수 있는 곳으로 교회터 1개소, 관솔불터 1개소, 가옥 및 숙소터 8개소등이 남아 있다.
<적목용소>
- 적목용소는 가평팔경 중 한 곳이다. 경기도 최북단의 도마치계곡이라 일컫는 곳으로 가평 적목리 방향 시내버스 종점인 용수동 마을에서 38교 다리를 지나 무인의 계곡을 한없이 거슬러 오르노라면 노변을 따라 이어진 계곡의 진경에 넋을 잃게 된다. 이곳은 환경청이 고시한 경기도내 유일의 청정 지역으로 천연기념물인 열목어가 서식하고 있다. 38교에서 상류로 3km지점에 용소라는 소가 있는데 물이 깊고 청명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용이 목욕을 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용소를 지나 1시간 정도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크고 작은 폭포와 소가 즐비하여 마침내 거대한 폭포에 이르는데 옛날 무관들이 나물을 안주 삼아 술 마시고 춤을 추며 즐겼다는 전설이 있는 무주채폭포로서 경관이 수려하고 한여름에도 추위를 느낄 만한 곳이다. 토산품으로 더덕, 고사리, 버섯, 산나물 등이 유명하다.
8. 등산기행
□ 산행안내준비
<석룡산등산 안내도>
- 가평군은 산림청이 선정한 100대 명산 중 화악산, 명지산, 축령산, 유명산, 운악산 등이 소재하고 있고 산악인이 선정한 130대 아름다운 산 중 연인산, 석룡산, 화야산 등 7개의 청정명산을 지닌 산림부군(山林富郡)이다. 앞에 열거한 산들은 이미 우리 모두산악회에서 최근 들어 모두 섭렵한 산들이다.
- 가평군 북면은 천혜의 자연림과 빼어난 경관 때문에 1985년 9월에 환경처에서 청정지구로 고시한 지역이다. 따라서 석룡산이 있는 가평군 북면 일원은 '경기도의 알프스'라 불린다. 석룡산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경기도에서 최고봉인 화악산 신선봉과 중봉을, 서남쪽으로는 두 번째로 높은 명지산을 조망할 수 있어 전망 또한 일품으로 꼽힌다. 그 뿐아니라 석룡산에는 조무락골이라는 청정 피서지를 품고 있다. 조무락골은 가평천의 최상류에 위치한 가장 깊고 험한 계곡이기고 하다. 항상 새들이 조무락거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조무락골이다. 6km에 걸쳐 폭포, 담, 소로 이루어진 조무락골은 한여름 피서철에 더욱 진가를 발휘하는 곳이다.
- 또한 지난해 1월 27일 경기 제일고봉으로 꼽히고, 경기 5악 중 엄지로 꼽히는 화악산 중봉(1,450m)을 도대2리 관청보건지소 - 큰골 - 중봉정상 - 언니통봉 - 적목리(가림마을) 코스로 다녀온바 있다. 그날 중간그룹 일부 일행 분들은 하산 길에 진로를 잘못 들어 석룡산 등산로인 조무락골로 접어드는 바람에 고생하신 경험을 갖고 있다. 그날 포근하고 구름 한 점 없이 해맑은 날씨덕분에 멀리 가리산 정상이 시원하게 조망되던 감격의 순간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였다. 또한 그 직후인 2월 1일 몇몇 지인 분들과 함께 촛대봉(촉대봉 1,125m)을 다녀오면서 앞으로 기회가 닫는 대로 화악산에서 흘러내린 석룡산을 마음에 두고 때를 기다려왔었다.
- 이달부터 5월 중순까지 산불예방차원에서 전국적으로 입산통제가 이루어져 3. 4월 정기산행지 선정에 어려움이 컸다. 국립공원에서도 특정 탐방로를 제외한 대부분의 탐방로가 입산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평군내에 소재한 청정명산 대부분은 입산통제라는 허울 좋은 굴레에서 부담 없이 벗어날 수 있었다. 가평군청 관할부서에 전화를 넣어 본 결과 하늘을 날 듯 기분 좋게 얻은 답이었다. 그런 연유로 인하여 가평군내 명산 중에서 3월 첫째 주 정기산행지로 화야산을 골랐고, 이어 세 번째 주 정기산행지로 우리 모두산악회에서 다녀 온지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파악되는 석룡산을 우선하여 선정하게 되었다. 3.8교를 등산기점으로 원점회귀 하는 동안 전 구간에 걸쳐 무난하게 산행일정을 운영할 수 있는 코스로 소개되고 있었기 때문에 화야산이나 삼성산 - 관악산 종주코스에 비하여 부담 없이 산행안내준비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 빠른 길 찾기 정보에 의하면 오늘 등산기점인 적목리 38교까지는 검색정보 없음으로 나타났지만 적목리 조무락골로 검색해 본 결과 57,6km / 1시간32분으로 검색되었다. 역시 38교 보다는 조무락골이 더 널리 알려졌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정도의 제원이라면 10:00 이전 들머리 진입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 지난 주말부터 이어진 꽃샘추위가 월요일에 최고조를 이루며 -10℃ 안팎을 오르내리다가 화요일을 정점으로 숙으러들기 시작하여 수요일부터 평년기온을 되찾으면서 오전, 오후 흐리고 한때 비가내리다가 점차 개는 기상도를 볼 수 있었다. 또한 당일은 오전에 맑고 오후에 구름이 조금 끼는 날씨에 아침최저 -6℃에서 낮 최고 12℃ 분포를 보였기 때문에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좋은 산행환경을 예고할 수 있었다.
<석룡산등산지도>
- 가평군 발행 가평 청정명산 산행가이드에 의하면 석룡산 등산코스는 38교 - 조무락골 - 복호동폭포 - 방림고개 - 석룓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5,8km / 제1코스와 38교 - 조무락골산장 - 좌측능선 - 석룡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4,6km / 제2코스로 구분하여 소개하고 있었다. 오늘은 제2코스와 제1코스를 연계하여 10,4km / 5시간 종주코스로 준비하였다.
- 석룡산 등산코스는 38교를 등산기점으로 조무락골 1,3km 지점에 있는 석룡산 - 석룡산. 중봉삼거리에서 왼쪽 872m봉 방면 지능선을 경유하여 정상에 오른 다음, 화악산 방면 방림고개(쉬밀고개)를 경유하여 남서쪽 쌍룡폭포 - 복호등폭포 - 삼거리 - 3.8교까지 원점회귀하거나 이 코스를 역으로 이용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 그 밖에 조무락골 방면에서 정상에 오른 후 북서쪽 주능선으로 약 600m 거리인 1,103m봉(헬기장)에 이른 다음, 서쪽 고시피골을 경유하여 다시 38교로 나오는 코스를 이용할 수도 있다. 또 다른 코스로는 38교에서 도마치 방면 도로를 따라 약 1km 거리인 고시피골 들목에서 북동쪽 862m봉 지능선을 경유하여 주능선으로 오르는 등산로도 있다. 이 지능선길은 조무락골이나 고시피골 코스와는 달리 태고적 자연미가 그대로 살아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 산행안내
<북면 적목리>
- 오늘 등산기점이 소재한 행정구역을 먼저 살펴보고 넘어간다. 북면은 가평군 최북단에 위치해 있는 면으로서 동으로는 강원도 춘천시에 인접해있고 북으로는 화천군과 서쪽으로는 포천군에 경계를 이루고 있는 심산 중령의 산악지대이다. 본래 북면은 조선말엽까지 상북면, 하북면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상북면사무소는 현 도대리 관청부락에 있었고(후에 제령리로 사무소를 이전함) 하북면의 소재지는 죽둔리에 있었다. 관할 동으로는 상북이 제형리, 도대리, 백둔리였고, 하북은 죽둔리, 상목동, 소복동, 이목동, 이곡리, 소법리, 화악리였다. 그후 1896 년 관제개혁으로 인하여 상북, 하북면을 통합하여 북면으로 개칭함과 아울러 그때 까지 포천군에 예속되어 있던 역목, 용소동, 주무동, 논남기, 임산등이 북면으로 편입되었다. 규장각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가평읍지에 의하면 1871 년 현재 북면에는 8개동 즉 이곡리, 상목동, 화악, 소법리, 제구령리, 도대리, 백둔리 전체호수가 451 호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높은 산 깊은 계곡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북면지방에는 타 지역에서 볼 수 없는 명승비경이 즐비하다.
- 해발 1,217m 인 명지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이라던가. 적목리 도마천에서 장장 30여 km 나 흘러내리는 계곡에는 크고 작은 폭포들이 즐비하다. 용소목에 용소는 용이 놀고 있는 형국이고, 도마치에 무주치폭포, 소락동에 소락폭포, 임산부락에 삼단폭포등은 아직까지 사람들의 왕래가 드물어 태고의 신비와 감정을 맛보게 하는데 충분하다. 모든 계곡이 바위로 되어 있어서 더욱 장관이기도 하지만 한마디로 물이 흐른 다기 보다는 구슬이 굴러 내린다고 보는 게 타당한 말인지도 모른다. 문화유적으로는 적목리 논남부락에 효자 강영천 의 효자정문이 있는데 이 정문은 조선숙종 27년(서기1700년) 에 하사받은 내용의 현판이 있으며, 현재의 건물은 1806년(순조 6년) 12월 12일 이오성목수에 의하여 세워진 것이다. 백둔리 죽터에는 비석바탕의 망두석이 이곳의 수호신이 되어 있고, 소법리 이봉골에는 충남 진잠현감을 지낸바 있는 구하주 (후에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증직 )의 묘가 있고, 소법리에는 전주류씨로 가평군 하면에서 출생하여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장령, 필선 등을 역임하고 동부승지가 된 유준창 (1601~1670)의 묘도 있다.
- 그밖에 애국지사 최종화, 정흥교, 이영현, 장호리의 묘도 모두 북면에 있다. 산이 높고 물이 맑아 주민들의 기상이 뛰어나고, 나라를 생각하는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배출지이기도 한 북면은 문자 그대로 충성의 고장이다. 1896년 을미 의병운동 당시에는 가평의 의병들이 이곳에 주둔해 있었고, 동료들을 구하고자 단신으로 대항했던 의병장 정문위의 출신지가 또한 이곳이며 3.1 만세 운동의 시발지가 목동리 멱골. 싸리재인점만 보아도 북면의 기상을 짐작키 어렵지 않다.
- 오늘 등산기점이 소재한 목동리 지역은 대부분이 높은 산과 깊은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가는 곳마다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아름다워, 사시사철 나들이 인파가 끊이지 않는 하늘이 준 천혜의 고장이다. 예로부터 인걸은 지령이라 했듯이 화악산(華岳山 1468m) 의 높은 기상의 맥이 동남쪽으로 뻗어 내리다가 잠시 이곳에 기착하여 범바위(虎岩)를 수놓으니 많은 이들이 이르기를 이곳에서 훌륭한 인물이 출현할 것이라 하였다.
<단체기념사진>
- 석룡산은 춘천인근에 소재한 산으로 접근이 용이하고 산행일정이 무난하기 때문에 성원을 기대했었는데 어인 영문인지 20여명을 간신히 넘기는 수난을 겪었다. 엄동설한이 지나고 춘분을 코앞에 둔 계절의 특성상 겨우내 움츠렸던 사지를 쭉 펴고 네 활개를 칠만도 하건만 모두님들의 반응이 별로 없으니 산행안내 도우미마저 기력상실증에 걸리고 말았다.
- 가평읍을 지나 북면 목동리와 제령리 일원 본인의 주말농장을 경유하면서 생기가 돌았다. 이미 얼음이 다 녹아 좋은 탐석환경으로 변해있었다. 목동천 양안으로 전개된 시원한 돌밭에 얼굴을 빠끔히 내놓고 나를 모셔 가세요! 하며 손짓하는 착각에 빠지면서 오늘 한번 미처 봐! 산행이고 뭐고 다 접어치고 主業인 탐석이나 해볼까 하는 망설임에 젖어보기도 하였다.
-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총무님에게 저 여기 주말농장 있는 것 아세요? 하며 말을 건네 보았지만 무슨 생각을 그리도 골똘히 하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총무님! 왜 얼마나 되느냐고 묻지 않으세요? 라는 독촉을 받고나서 하시는 말씀이 걸작이었다. 저 뻥인 줄 알았거든요. 진짜 있으세요? 얼마나 되는데요? 넵, 아직까지 측량을 못해봤걸랑요. 거봐요.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요. 라고 즉시 응답이 왔다.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이 본전도 못 추리고 싱겁게 판정패로 끝나고 말았다. 결국 오늘은 아침부터 본인 스스로 싱거운 넘이 되고 말았다.
- 곧이어 연인산, 명지산, 화악산 중봉입구를 연이어 지나면서 하산행안내준비를 하면서 예상했던 시간대에 무사히 오늘 등산기점인 38교에 도착하였다. 입구에는 석룡산등산안내도를 비롯하여 석룡산입구, 鳥舞樂골, 조무락골카페, 조무락골산장 등을 안내하는 현판들이 즐비하게 걸려있었다. 평일인데다가 계절특성상 조용한 조무락골의 아침나절이었지만 새들의 조무락이나 재잘거림 대신 무두님들의 조무락으로 조무락골을 깨웠다.
- 춘천을 출발하면서 버스 내에서 일정안내시간을 통하여 위 등산지도에 그려진 산행코스에 대하여 1차안내하고 현장에 도착하여 보충설명을 남겨두었었다. 목적지까지 오는 동안 이미 석룡산을 다녀오신 원로님께서 점심식사 장소에 대한 정보와 함께 위 코스를 역으로 운영하는 것에 대하여 권고의견을 주셨다. 현지경험을 통한 권고의견에 대하여 재고의 여지가 없었다. 위 코스를 역으로 운영하기로 결정하고 양해를 구한 다음 일정운영에 들어갔다. 오늘은 일정운영시간을 5시간으로 잡고 오후 15:00까지 하산을 예고하고 조무락골을 배경으로 단체기념을 남기고 들머리에 들었다.
<38교>
- 38교는 오늘 산행일정상 등산기점이면서 원점회귀 지점이다. 38교는 그 이름으로 보아 위도 상 38선상에 위치한 다리 중 하나일 것이다. 이 기회에 38선에 대하여 살펴보고 넘어간다. 38선은 1945년 8월 미. 소 양국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일본점령지의 전후처리를 위해 설정한 임시군사분계선으로 한반도의 허리를 관통하여 12개의 강과 75개 이상의 샛강을 단절시켰고, 181개의 작은 우마차로, 104개의 지방도로, 15개의 전천후 도로, 8개의 상급고속도로, 6개의 남북 간 철로를 단절시켰다. 우리 도내 38선상에도 그 이름을 딴 휴게소를 비롯하여 38선 경계석들이 많이 남아있다.
- 38선의 辭典的 풀이를 상세히 살펴본다.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분할했던 이 분단선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 과정에서 생겼지만, 역사적으로 1894년과 1903년 각각 중·일, 러·일간에 한반도 분할문제를 두고 열린 비밀회담에서 이미 거론된 적이 있었다. 38선이 언제, 그리고 누구에 의해 생겼는지, 그 과정에 대해서 '얄타·포츠담 결정설'을 둘러싼 논쟁과 '가드너 미 해군 부제독의 제안', 미 육군부 작전국 정책과장 찰스 본스틸 대령과 딘 러스크 대령의 '38선 분획안' 등이 논의되어왔다. 한반도 문제가 미·소간의 포츠담 회담에서 논의되지는 않았으나, 이 회담 도중 미국이 미·소 간 한반도 육상작전구획선과 항복접수선으로 이 선을 구상한 것만은 분명하다. 미 육군 참모총장 조지 C.마셜 대장과 육군 작전국장 존 E. 헐 중장이 미군의 한반도 진공(進攻)과 미·소의 육상 군사작전 경계선에 관해 준비하면서 "최소한 인천항과 부산항이 미군지역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결정하고 서울 북방 45마일에 선을 그었는데, 이것이 정확히 38선은 아니었으나 거의 그것에 가까웠다. 1945년 8월 11일 미국의 국무부·해군부·육군부 3부 조정위원회(SWNCC)는 그동안의 미 육군부 제안들을 바탕으로 38선 이북은 소련군이, 이남은 미군이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도록 하는 38선 분할초안을 기안했다. 38선 분할안이 최종 결정되기 전인 12일에 이미 웅기·나진 등에 진주한 소련도 미국이 제안한 이 조항을 반대없이 받아들였다. 이어 태평양 방면 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가 1945년 8월 15일 발표한 '일반명령 제1호'에서 "38도선 이북의 일본군의 항복은 소련이, 이남 일본군의 항복은 미군이 접수 한다"고 선언하여 38선이 공식적으로 기정사실화되었다. 트루먼은 38선 분할 안에 대해 "한국에서 힘의 공백이 생겼을 때 실질적 해결책으로 우리들에 의해 제안된 것"이라고 회고했다. 38선 확정은 별도의 미·소 간 비밀협약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미·소 간 항복접수구획선으로 제안된 미 육군부의 건의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군사작전의 구획설정을 위해 편의적으로 그어진 작전구획선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38선은 전후 한반도에 단일세력 진입을 막기 위한 신탁통치안, 제2차 세계대전중 군사점령과 항복접수를 일국에 맡길 수 없다는 구획선안 등 전후처리 과정에 줄곧 내재된 미·소의 국제정치적 흥정과 이익이 작용한 결과이다. 6·25전쟁 이후 남한과 북한을 정치·경제·군사·문화 등 모든 측면에서 분열·대립시키는 민족분단선으로 남아 있다.
<조무락(鳥舞樂)골>
- 석룡산 산행은 가평군 북면과 화천군 사내면을 잇는 75일반국도 상의 38교에서 시작한다. 38교에서 조무락골 진입로는 차량통행이 가능한 비포장길이다. 조무락골입구에서 약 1.3km 거슬러 올라가서 민가가 끝나는 지점에서 두 갈래로 갈린다. 왼쪽 임도로 올라가면 남서릉을 경유하여 정상에 오르고 계류를 따라 올라가면 복호동폭포 - 방림고개(쉬밑고개)를 경유하여 정상에 오르는 길이다. 산행안내준비를 하면서 왼쪽방향 제2코스로 올라갔다가 오른쪽방향 제1코스로 하산할 요량이었으나 위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일정을 조정하여 왼쪽 임도로 들어섰다.
- 조무락골은 38교에서 우측으로 들어서면서 화악산에 오르는 계곡을 일컫는다. 약 1㏊의 농경지와 복호동 폭포, 독바위, 문바위, 석용산, 조방나미고개가 있고 미제에 백백교 터가 있다. 대골(竹谷)은 높은 산에 자생하는 신초(神草) 대나무가 있다하여 대골이라 불렸다. 또한 조무락골에는 감자 채종포(採種圃)가 있어, 고냉지 감자재배지로 각광을 받았으며 화악산 중봉으로 오르는 등산로도 이곳에 있다. 이곳 조무락골은 새들이 조물조물 울며 즐거워하고 춤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6.25 전후 약 3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었으나 1973년 화전정리로 인해 모두 이주하였다고 한다. 복호(伏虎)등 폭포란 호랑이가 엎드려 있다는 형상이라 붙여졌으며, 석룡(石龍)산은 돌이 용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졌고, 조방나미고개는 조무락골에서 화천군 사내면 사창리로 넘는 고개로 조랑말을 타고 넘나드는 고개가 訛傳된 듯하다.
- 조무락골은 석룡산 자락을 흐르는 가평천의 최상류에 있는 험난한 계곡으로 6km에 걸쳐 폭포와 담(潭), 소(沼)가 이어진다. 산수가 빼어나 새들이 춤을 추며 즐겼다 하여 조무락(鳥舞樂)이란 이름이 지어졌다고 하고, 산새들이 재잘(조무락)거려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조무락계곡에는 넓은 물줄기가 좁아지며 폭포수가 돌아 흐르는 골뱅이소와 중방소, 가래나무소 등 여러 소(沼)가 이어지는데, 복호등폭포에 이르러 물줄기가 바위에 부딪쳐 부채살처럼 퍼진다. 문영호의 모무락 시 한 수를 소개한다.
조무락 계곡
♣ 문 영 호
연둣빛 초록 산
캔버스 그림 속에
진한색깔 잎사귀 하나
팔랑 팔랑
바람타고 놀다가
물위에 누우면
냇물은 초록색
저 진한 색깔
젊음을 모두 불태우면
곧 가을이 오고
숲도 하늘도
빨갛게 달아지겠지
피리가 뛰어 노는
싱그러운 조무락 계곡
냇물에 쉬다보면
마당바위 술 한 잔
저 봉우리가
덩실덩실 춤춘다
<능선갈림길>
- 11:14 능선안부 경유
- 능선안부에는 지루봉하산 2,5km, 삼팔교 3,3km, 석룡산정상 1,1km를 알리는 스텐리스 안내판과 삼팔교 3,3km, 삼팔교 3,5km, 석룡산정상 ? km(이정이 훼손되어 거리 확인 불가)를 알리는 목재 이정표가 함께 새워져 있어 헷갈렸다. 이지점까지 올라오는 동안 능선안부 약0,5km 전방에서 임도를 벗어나면서부터 눈길로 이어졌다. 먼저 다녀가신 선구자의 발길 한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어 진로선도에 어려움은 없었지만 착지가 원활하지 못하여 어려움을 겪었다. 아이젠을 착용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말까로 가닥을 잡고 말았지만 지난겨울 혹독한 심설산행 이후 처음 맞이하는 눈 산행인 관계로 조심조심 살얼음판을 걷듯 더듬거리기 일쑤였다. 그동안 쌓인 노하우가 있어 이쯤이야 하고 깔보기는 하였지만 내심 방심은 금물이라고 망신이나 당하면 어쩌지 하는 기우에 혼란을 겪었다. 배낭 망사주머니에 수납된 아이젠을 꺼내 착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을 구차스럽게 꾀를 부린 꼴이 되고 말았다.
- 임도 갈림길에서 등산로로 접어들면서 눈길로 이어졌기 때문에 발자국이 선명하여 진행방향 표식 없이 그냥 올라가갔는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바로 뒤에 따라 올라오시던 일행 분들이 계속 임도로 올라가셨던 것이다. 결국 능선안부 직전에서 만나기는 하겠지만 우회하는 길로 판단되어 능선길로 유도하고 도마치갈림길방향 능선으로 접어들었다.
<백백교(白白敎)터>
- 산행안내준비를 하면서 하산길목에 백백교터가 있었기 때문에 백백교터를 찾아보려고 하였지만 허사였다. 조무락골 비포장길 첫 번째 이정표 지점에서 왼쪽 골자기로 접어들었으면 아마도 백백교터를 경유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오늘 제2코스에서는 그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 비록 백백교터는 찾지 못하고 지나쳤지만 이미 역사 속에 묻혀버린 희대의 백백교사건이기 때문에 백과사전에 올라있는 자료를 소개한다. 백백교는 1923년 우광현(禹光鉉)이 세웠다. 이 교단은 기존의 백도교(白道敎)라는 단체를 개명한 것에서 연유한다. 즉 1919년 백도교의 교주인 전정예(全廷藝)가 죽자 우광현과 전용해가 그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암매장했다. 나중에 이 사건이 탄로 나자 교단명칭을 백백교로 바꾸었다. 교단에서는 전용해를 천부(天父)의 아들로 삼고 세상의 임박한 종말을 강조했다. 그리고 종말에 살아남기 위한 피난소를 53개소나 설치했다. 이 교단이 사회에 알려진 것은 1940년 교단 내의 살인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즉 전용해가 간부 18명과 신도 314명을 살해한 혐의로 경찰에 구속되었다. 그 후 전용해는 사형선고를 받고 도주하던 중 시체로 발견되었다. 나머지 간부 12명도 사형을 언도받았으며 무기징역을 받은 자도 많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교단은 급속히 소멸되었다.
- 이곳에 백백교를 창시한 전용해(全龍海)가 머무르며 수천명의 신도를 데리고 생활하던 터와 우물이 남아있지만, 1937년 자신을 추종하던 간부(참모 이경득,문봉조 등)들이 일제에 붙잡혀 500명이상의 인명이 희생되었다는 실상이 드러나자 교주 전용해는 양평 도일봉에서 자살하였다 한다. 대골은 일제시대의 사교 운동이었던 백백교의 본거지였다고 하는데 애초에 李朝 정부와 日帝의 탄압을 받던 동학의 한 분파였던 백도교가 현실도피적인 密敎화되어 全廷雲이라는 자가 1912년 강원도 오성산에서 정식으로 출범시켰는데 그 또한 불과 4년여 만에 신도가 1만 명을 넘어선다. 이후 그의 세 아들이 엄혹한 정치현실에 눈 돌려 도피하는 민중들의 구세주신앙을 誤導하여 백백교라는 사이비로 굳어지게 된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 아울러 본 사건에 대한 김 삼 웅 <언론인. 성균관대 겸임교수>님의 자료가 상세히 소개된 것이 검색되었기에 참고로 붙인다. 백백교(白白敎) 사건이라면 지금도 으스스 몸을 떨게 한다. 일제 강점기에 수많은 사교집단-사이비종교-이단종파들이 판을 쳤지만 백백교처럼 오랫동안 베일에 덮혀서 수백 명의 신도를 살해하고 여성신도들을 간음하면서 교세를 유지한 사교집단도 흔치 않다. 살인광마 사교집단인 백백교는 1900년 평안남도 영변군 근산면 화현동의 가난한 농사꾼으로 동학교도였던 전정운(全廷雲)이 백도교(白道敎)를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농사를 짓다가 25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3년 동안 도를 닦아 천지신령의 도를 터득하였다고 주장하며 함경남도 문천군 운림면 마양동에 백도교를 창설했다. 교명을 백백교로 고친 전정운은 1904년 6월에 천재지변이 일어나 전 인류가 멸망하지만 백백교를 믿으면 동해바다에 새로 생길 신선의 땅으로 피난하여 불로장생하게 된다면서 신도를 끌어 모았다.
- 전정운이 감언이설로 신도들을 미혹시킨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산을 넘으면 바다가 있고 거기에 아름다운 섬이 떠 있는데 거기는 사철 기화요초가 만발하고 토질이 비옥하여 일하지 않아도 농사는 저절로 되어 식량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기후는 항상 따뜻하여 눈도 비도 거의 없고 꽃 향기만 그윽하니 사람들은 수백년을 예사로 산다. 그 섬의 소유는 백백교이다. 잘 개간된 토지 위에 궁궐같은 집들을 이미 잘 지어 놓았고 모든 준비가 다 되었으므로 이 이상향에서 영원히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백백교에 들어오라. 이 신선들의 세계에서 돈 따위는 필요치 않고 다만 보화만을 기준으로 삼으니 속세에서 사용하는 돈 따위는 모두 버리고 들어오라"
- 대부분의 종말론들이 그러하듯 백백교의 경우도 거짓으로 드러났다. 1904년 6월이 지나도록 천재지변은 일어나지 않았고 동해의 유토피아도 나타나지 않았다. 신도들이 동요하자 반발하는 신도들을 죽이고 강원도 철원군 보개산으로 본거지를 옮겼다가 다시 근동명 오성산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1만여 명의 신도를 모은 전정운은 신도들의 재산을 갈취하고 60명이 넘는 첩을 거느리고 호사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1919년 51세의 나이에 본거지를 새로 옮긴 가평군 화악산 기슭에서 병사하였다. 그동안 첩 4명을 생매장하고, 장인이자 수제자인 우광현(禹光鉉) 등과 함께 신도 최인상 최인혁 형제 가족 8명을 살해하는 등 많은 사람들을 살해하였다.
- 교주 전정운이 죽자 장남 용주(龍株)와 차남 용해(龍海) 사이에 재산싸움이 벌어졌다. 전용해는 재빨리 외할아버지 우광현과 결탁하여 재산을 차지하고 차병간을 백백교의 새교주로 내세웠다. 이에 패배한 전용주는 별도로 인천교(人天敎)를 만들어 교주가 되었다. 백백교와 인천교는 각기 포교활동을 통해 신도 수를 늘려가는 한편, 여신도 간음과 재산탈취 등을 예사로 하였다. 1923년 전용해가 형을 내쫓고 인천교까지 장악하여 가평의 본거지에 궁궐을 방불케 하는 거대한 대교당을 짓게 된 것은 그만큼 갈취한 신도들의 재산이 많았기에 가능했다. 백백교의 중심 교리는 "한 사람(교주)의 흰 것으로 천하를 희게하자(一之白將欲白之於 天下地)"는 것으로, 이는 유불선 3교가 모두 성쇠를 거듭하며 3천년을 흐르는 동안 그 본질이 쇠퇴하고 거죽만 남았으므로 새로운 종교가 요구되고 그 것이 바로 백백교라는 것이다.
- 그들은 신도들에게 백백교를 믿으면 살아서 무병장수하고 죽어서 극락에 가게 된다면서 우매한 민중을 끌어 모았다. 입교식은 돈 1원을 내고 행하는데 먼저 마음속으로 기도를 한 후 맑은 물 한 그릇을 정히 떠놓고 세 번 손을 들었다 놓은 후 "제불자 제불자 천혼도우 제여자 제여자…" 운운 하는 괴상한 주문을 7번씩 세 차례 외는 것이었다. 신도는 성별에 따라 평상시에도 늘 주문을 외워야 한다. 성인 남자의 경우 "백백백의의의적적적감응감감응하시옵숭성(白白白衣衣衣赤赤赤感應感感應하시옵崇誠)" 따위다.
- 전용해는 1923년 7월 조선총독부로부터 공식적으로 포교허가를 받아 3대 교지를 만들었다. 첫째는 "백백교는 유불선 3교를 종합한 것이며 교조의 결박한 심령으로 세도인심을 결백하게 하고 이를 믿으면 몸과 마음이 다 결백해지고 일체중생은 모두 선남선녀가 된다". 둘째는 "전 세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신의 심판을 받게 되는데 서양은 불로 망하고 동양은 물로 망한다. 그러나 백백교도만은 정감록에서 구인백백(求人白白)이라고 한 것 같이 구원을 받는다". 셋째는 "30척 이상의 대홍수 재앙이 있은 후에 동해에 새로운 섬이 생겨나는데 이곳은 기린과 봉황이 춤추고 불로초가 있어 양식걱정이 없고, 교도는 질병과 재앙이 없어 불로장수하여 극락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자식 없는 사람은 자식을 두게 된다"는 허황하기 그지없는 내용이다.
- 일제의 폭압통치에 시달리면서 희망 없는 삶을 살고 있던 가난한 농민들과 어리석은 민중에게 백백교의 달콤한 교리는 한줄기 구원이고 복음이었다. 거기에 궁궐을 방불케 하는 대회당은 믿음을 주었다. 백백교에 끌려온 수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빼앗기고 부인과 딸은 교주에게 헌상되었다. 남자들은 산 너머 이상향의 목적지에 보낸다면서 모두 죽여 없앴다. 교주 전용해는 아버지 전정운의 잔인함과 음란함을 보고 배운 뒤에 더 흉악한 간계를 보태어 무려 14년간이나 비밀을 지켜오며 음란과 살인극을 자행하였다.
- 교주 전용해는 학식이 없는 무지한 인간이었지만 사람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마음을 끌어들이는 재주가 있었다. 총참모격인 이경득과 문봉조 등 간부들을 각도에 보내 예쁜 딸을 가진 부모들을 골라서 백백교에 입교시킨 뒤 그 딸을 전용해의 시녀로 바치게 하여 정조를 유린하였다. 전용해는 이렇게 끌어들인 젊은 여성 4∼5명 씩을 항상 첩으로 거느리다가 살해하는 것을 능사로 삼았다. 이런 속에서도 백백교의 교세는 늘어나 가평소재 일본인 경찰서장이 인사를 오기도 했다고 한다.
- 1930년 전 교주 전정운이 첩 4명을 생매장한 사실이 뒤늦게 발각돼 백백교 간부에 대한 일제검거령이 내렸으나 전용해 등은 교묘하게 잠적하여 검거를 피할 수 있었다. 해마다 거액을 일경에 바쳤던 터라 경찰에서도 애써 잡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 전용해는 부하들에게 외조부이자 늙은 교주인 우광현을 살해하도록 지시하였다. 명실상부한 실권을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전용해는 금광개발을 한다면서 탄광을 사들였다. 그러나 이 광산은 금을 캐는 것이 아니라 화약폭발음 소리에 맞춰서 백백교도들의 살인 장소로 이용되었다.
- 정용해와 백백교 간부들은 신도들에게 갈취한 돈으로 호화방탕한 생활을 계속하면서 살인을 다반사로 저질렀다. 전용해는 1935년 서울 신당동으로 거소를 옮기면서 자신의 살인마각을 알고 있는 이복동생 전잡비와 그의 여동생까지 살해하는 등 인면수심의 만행을 거듭하였다.
- 백백교의 범죄사건은 "사소한" 일로 희대의 사교 교주의 죄상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부친이 백백교에 빠져 여동생을 교주에게 첩으로 바치고 전재산을 빼앗긴 유혼룡이란 청년이 교주 면담을 요구하고 나서면서 흑막이 폭로되었다. 건장한 청년신도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나타난 전용해가 유혼룡에게 거액의 헌금을 강요하자 유혼룡이 이를 거부하면서 백백교를 성토하자 전용해는 칼을 빼들고 격투가 벌어졌다. 싸움판이 벌어진 곳은 바로 동대문경찰서 왕십리주재소 옆이었다. 싸움 소리에 놀란 모리야 순사부장이 순사들을 이끌고 급히 달려와 이들을 체포하였다. 이 틈에 전용해는 애첩 등을 데리고 양평군 비밀장소로 도주하였다. 경찰은 8개월에 걸쳐 전용해의 아지트와 전국 각처의 백백교 비밀장소에서 346구의 시체를 발굴했다. 전용해는 몇 달후 용문산 도일봉 능선 솔밭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세간에는 신출귀몰한 전용해가 자신과 체격이 비슷한 사람을 잡아다가 자기의 옷을 입히고 자살한 것처럼 위장하고 도망쳤을 것이란 추측이 나돌았다.
- 1941년 1월에 마무리된 백백교사건의 선고공판은 혼자서 170명을 죽인 김서진, 167명을 죽인 이경득, 127명을 죽인 문봉조 등 살인마들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나머지 십 수 명에게는 징역형이 선고되면서 희대의 살인마 사교사건은 막을 내렸다.(<신시(紳市)>, 1992년 11월호, "역사에 누락된 백백교사건의 진상"등을 참고하였음을 밝힌다) 라는 내용이었다. 석룡산 자락이 이러한 희대의 사건 본거지였음을 상기해 보시라는 의미에서 전문을 옮겼다.
<도마치갈림길>
- 11:52 도마치갈림길 경유
- 도마치갈림길에는 석룡산정상 0,3km, 삼팔교 4,3km, 도마치고개 9,8km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능선안부 갈림길에서 이 지점까지 올라오는 동안 이 봉우리가 정상인줄 알았다. 이 지점 직전에서 후미팀과 동행중인 고문님과 무선교신을 하면서도 이 지점이 정상인줄 알고 선두는 이미 정상에 도착하였다고 응답하였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0,3km 전방이 석룡산 정상이라는 이정표만 있을 뿐 정상석이 없었던 것이다. 코앞에 있는 또 하나의 봉이 석룡산 정상이었던 것이다. 공연히 뻥을 친 셈이었다. 하기야 입만 뻥끗하면 뻥이 되는 요즘의 일상이니만큼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기셨을 것으로 보고 부담 없이 넘어갔다.
- 이 지점에서 화악산 정상이 거침없이 건너다 보였다. 오늘 산행구간 중 화악산 전망이 제일 좋은 곳이다. 지난해 중봉이나 촛대봉(촉대봉)에서 건너다보던 화악산 전방과 비교되었다. 출입이 제한되어 오를 수 없는 화악산 앞과 뒤를 다 보았으니 오늘로서 화악산에 종지부를 찍은 날로 기억하고 싶었다.
<석룡산 정상석>
- 12:06 정상 도착
- 도마치갈림길에서 15분 남짓 걸렸다. 능선갈림길에서 시작된 전 구간이 한겨울 이 연상될 정도로 눈이 쌓였다. 북쪽 사면에 쌓인 눈의 깊이를 가늠하기 위해 스틱을 꽂아보니 손잡이까지 넘쳤다. 정상일원 나뭇가지에는 지난밤 맺힌 상고대가 따사로운 햇살에 녹아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귓전을 때렸다. 석룡산은 바로 앞에 자리한 화악산의 기세에 눌리고, 가평방향 우뚝솟은 명지산의 유명세에 눌려 빛을 보지 못하는 산이지만 조무락이라는 걸출한 계곡과 가평8경 중 하나인 적목용소를 가까이하고 있기 때문에 한여름 피서철에 세인의 관심을 끌만한 산으로 손색이 없어보였다.
- 가평방향으로는 가평산하를 온통 뒤덮은 듯 명지산자락이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고 북녘 화천방향으로는 사내면 사창리 일원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 처음에는 저 동네가 무슨 동네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으나 회장님의 도움을 얻고 나서야 지형지세에 대한 판단이 섰다. 화악산이나 석룡산이 화천군 사내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므로 당연히 사내면일진데 어찌하여 감이 잡히지 않았을까? 이래가지구서야 어디 안내도우미를 해먹겠는가? 이 넘아 얼른 냉수 한 사발 들이켜고 앞으로 정신 좀 차리그라! 혼자서 쭝쭝대며 주문을 외고 나서야 흐트러진 마음이 다스려졌다.
- 가평군 북면 적목리 산 1-1번지 소재 석룡산 정상 안부는 한두 평 남짓하다.정상 꼭지점에는 대리석과 화강암으로 제작 설치한 정상석 2기가 나란히 서 있다. 이상한 점은 설치기관이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석룡산 높이가 차이가 나는 점이다. 1998. 8. 1 설치한 화강암 정상석에는 해발 1,153m로 새겨져 있고, 검은색 대리석 정상석에는 1,147.2m로 새겨져 있다.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 먼저 정상에 오른 선발팀을 예정된 점심식사장소인 방림고개(쉬밑고개)로 출발시키고 나니 곧이어 부회장님 일행이 정상에 도착하였다. 정상 인증 샷을 남기면서 잠잠했던 장난 끼가 발동하고 말았다. 두 정상석 사이에 첫 번째 선수를 앉게 하고 한 컷 누를 때는 정상석이 똑바로 서 있었다. 그 사이즈가 표준 모델인 듯 딱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두 번째 선수를 그 사이에 앉게 해 본 즉 문수차이가 나는지 그 사이즈가 맞지 않았다. 겨우 억지로 한 컷 찍고 났을 즈음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똑바로 서 있던 정상석이 비스듬히 넘어가 있었던 것이다. 평수 차이가 나도 너무 크게 났던 것이다. 이때쯤 찍사의 의중을 눈치 챈 일행 분들이 한바탕 웃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그러는 바람에 지난주 삼성산 정상안부 점심식사 장소에서의 “싱거운 년” 사건이 다시 도마에 오르며 화두가 되었다. 대장님은 욕두 잘 하셔! 라는 얘기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면서 또 한 번 망가지는 신세가 되었다. 정상에서 1시간 남짓 머물면서 후미일행과 합류하여 점심식사 장소로 점지해 둔 방림고개(쉬밑고개)호 향했다.
- 석룡산(石龍山)이란 이름은 수림이 울창하고 계곡미가 뛰어난 이 산의 산정에 용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는 데서 유래한다. 석룡산은 광주산맥에 딸린 산으로 주위에 백운산(904m), 화악산(1,468m), 국망봉(1,168 m), 명지산(1,217m), 청계산,운악산, 철마산,주금산 능선이 겹을 이룬 채 수묵화 같은 산그리메를 그렸다. 북동쪽 비탈면을 흐르는 수계(水系)는 사창리(史倉里)에서 용담천(龍潭川)을 이루고, 서쪽 비탈면에서 발원하는 수계는 남쪽으로 흘러 가평천(加平川)으로 흘러든다. 북동쪽 백운산과의 사이에 있는 도마치(道馬峙)와, 동쪽 화악산 너머에 있는 실운현(實雲峴)은 예로부터 가평과 화천을 잇는 주요 교통로로 이용되어 왔다.
<방림고개(쉬밑고개)단체기념사진>
- 13:26 발림고개(쉬밑고개) 경유
- 이 고개 넓은 안부에는 석룡산정상 0,7km, 삼팔교 5,2km, 화악산방향 등산로 없음을 알리는 이정표가 외롭게 서있다. 고개 이름이 특이하여 방림고개나 쉬밑고개에 얽힌 전설이나 유래가 있을 듯 싶었지만 마땅한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 인터넷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검색해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마지막으로 가평문화원 지명유래방과 북면 홈페이지 마을유래방을 들려 보았지만 위에서 살펴본 조무락골 이외의 소개할만한 자료를 얻을 수 없었다.
- 고개 안부에 도착하면서 오늘 일정을 조정하여 역으로 운영하기를 참 잘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지점까지 오는 동안 모두가 함께할 마땅한 점심식사 장소가 없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오늘 좋은 정보를 주신 원로님께 감사드린다.
- 방림고개(쉬밑고개) 마루에 도착하면서 밥상도 차리기 전에 하산주 세례를 받았다. 여기저기서 대장을 불러대는 통에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먹다 남긴 술인지 대장 오면 줄려고 남겨뒀던 술인지 분간할 수 없었지만 그 판에 그걸 따져봤자 무슨 소용이 있으랴 주시면 주는 대로 고맙게 마시면 되는 거지 뭐 부르는 대로 이집 저집 방문하면서 막걸리를 비롯하여 이름 모를 담근 주 몇 잔을 연거푸 받아 마시고 나니 뱃속이 짜릿해지면서 금세 취기가 올랐다. 어떤 분은 라면전골 한 공기를 퍼가지고 오셔서 안주로 내 놓으셨다. 오늘따라 기분이 업되는 바람에 사양의 미덕을 잊어버리고 하산주의 도를 넘은 듯 싶었다.
- 이미 선발팀은 점심식사가 끝나가고 있었다. 후미일행 분들이 점심식사를 하는 동안 점심식사를 먼저 마친 분들께서 무슨 구경거리라도 난 듯 후미일행 분들을 빙 둘러서서 난리들이었다. 그러는 동안 후미일행 분들 식사가 끝나기를 무료하게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했던 모양이다. 회장님 주선으로 오랜만에 동행하신 홍00 여사님과 오늘 처음 입문하신 황00 여사님을 산상 가요무대에 세우셨다. 회장님의 술수에 걸려든 두 분 덕분에 뜻하지 않은 곳에서 뜻하지 않은 숨은 끼를 보고 들으면서 잠시나마 즐거움을 함께할 수 있었다.
- 오늘도 같은 장소에서 간은 시간대에 모두가 함께 점심식사시간을 갖은 하루였다. 복호동폭포방향 하산길에 오르기 전에 단체기념을 남기면서 배꼽 잡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모두가 도열하여 자리를 잡고 촬영 준비를 마쳤는데도 불구하고 충무님 보따리 챙기기가 미쳐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잠시 기다리다가 총무님을 빼고 그냥 마무리하려는 순간 오늘 산행정보를 제공하신 원로님께서 진지한 표정으로 총무님 없으면 나도 안 찍어! 하시면서 대열을 이탈하시는 돌출행동이 벌어졌다. 평소 별로 말씀이 없으시고 점잖으신 그 분의 성품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기치 못한 의외의 행동이 놀라웠지만 놀랄 겨를도 없이 모두가 배꼽을 잡고 말았다. 아마도 화악산신령님이나 석룡산신령님께서도 이 장면을 목격하셨다면 웃지 않으시고는 못견뎠을 줄 믿는다.
- 여기서부터 후미대열에 합류하였다. 하산길 시작부터 눈이 녹아 질퍽댔고 착지가 불안하였다. 눈이 녹은 곳을 골라 가며 거북이 걸음이 되었다. 아이젠 생각이 간절하였지만 여기까지 무사히 잘 왔는데 조금만 더 내려가면 맨땅이 나오겠지 하고 기대를 걸면서 게으름을 피웠다. 방심은 금물이라는 평소 지론이 현실로 나타났다. 저의 바로 앞에 내려가시던 일행 분께서 대장님! 앞서 내려가세요. 하시면서 길을 양보하셨다. 그러면서 자신 있게 몇 걸음 떼어 놓는 순간 두 다리가 허공에 번쩍 뜨면서 어이쿠! 쿵! 하는 천지가 진동하는 굉음을 내면서 엉덩방아를 찧었던 것이다. 눈 녹은 가랑잎을 밟은 것이 화근이었다. 그 밑에 얼음판이 깔려있었음을 간과하였기 때문이다. 이 장면을 뒤에서 목격하신 총무님께서 화악산이 떠나랄 듯 웃어 제켰다. 총무님! 남은 시방 엉덩이가 깨져 죽을 지경인데 시방 웃음이 나와요? 라고 소리치면서 덤벼들었지만 그래도 웃음을 그치지 않고 계속 웃어댔다. 총무님 앞으로 두고 봅시다. 라는 후렴을 남기면서 발길을 돌렸지만 주변에 계시던 일행 분들의 웃음은 그칠 줄 몰랐다. 이 지점에서 “산악대장님 넘어지셨다!” 가 하산길 내내 화젯거리였다. 아니 자기네 넘어지면 나도 넘어질 수 있는 거지 뭐! 왜들 그리 난리야! 아마도 이 소리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복호동 폭포>
- 14:56 복호동폭포 경유
- 하산예정시간이 임박한 시간대에 복호동폭포를 경유하였다. 산행안내준비를 하면서 복호동폭포 전에 쌍룡폭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러나 물소리 없이 빙폭을 이룬 현장에서 폭포를 찾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 본인 스스로 폭포를 워낙 좋아하는 터라 반드시 찾아보기로 마음먹고 왔었는데 이미 그냥 지나쳤으니 어이없는 노릇이었다. 백백교터을 찾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는데 쌍룡폭포마저 그냥 지나쳤으니 아쉬움으로 남았지만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 복호(伏虎)동 폭포란 호랑이가 엎드려 있다는 형상이라 해서 붙여졌다. 등산로에서 계곡으로 50여m 거슬러 올라가면서 복호동폭포의 위용을 가늠할 수 있는 빙폭을 이룬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여름 수량이 많을 때라면 우뚝 솟구친 바위벼랑에서 폭포수가 물보라를 흩날렸을 것이다. 복호동이란 ‘엎드린 호랑이’란 뜻이지만 호랑이란 느낌은 전혀 없었다. 다만 금년 여름 탐석에서는 반드시 저 폭포를 빼어 닮은 폭포석 한 점 점지하리라는 마음을 다지고 하산길을 서둘렀다.
<하산행사>
- 16:00 가 다 돼가면서 38교에 당도하였다. 하산예정시간을 무려 1시간이나 지체하였다. 38교 현장의 상황이 하산행사를 치르기에는 부족함이 많았지만 그래도 국도변에 자리를 펴고 하산행사를 준비하다가 철수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개울 건너편 요양시설에서 바로 현장이 목격되었기 때문이다. 명지산군립공원주차장으로 자리를 옮기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졌기 때문이다.
- 명지산군립공원주차장은 우리 일행이 유일한 손님이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하산 현장에서 찌개를 끊여 놓고 하산행사가 치러졌다. 그동안 엄동설한과 하산 현장의 상황이 여의치 않아 귀로 버스 내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좁은 버스통로 앞뒤를 오가며 옹색하게 치러졌었다. 오늘 하산행사는 어제부터 사골을 푹 고아 만든 육수로 뭉텅찌개 버금가는 찌개를 준비해 주신 테리(차 영 준)님의 후의가 압권이었다. 무려 40여분이나 소요되었다.
□ 산행을 마치고
- 본인의 입장에서 가평은 고향과도 같은 푸근함을 느끼는 곳 중 한곳이다. 현리의 모 부대에서 무적전차를 벗 삼아 조종천을 주름잡으며 한 시절을 풍미했었고, 장년에 접어들면서 봄 되면 나물 캐고, 여름 되면 돌멩이 주우면서 다슬기 잡고, 가을 되면 알알이 영근 알밤 이삭 줍는 쏠쏠함이 일상에 배어있었으므로 아마도 각별한 인연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춘천에서 접근성이 좋고 물 맑아 찾기 시작한 것이 벌써 10여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났으니 그럴 만도 하다. 더욱이 산을 접하면서부터 가평 청정명산 기행과 아울러 오지를 사랑하는 모임(오지회) 활동을 통하여 가평산하 구석구석을 찾아다녔으니 고향 못지않은 향수에 젖어 봄직도 하다.
- 산을 즐기는 입장에서 보면 요즘 계절이 어정쩡하게 느껴졌다. 겨울도 아니면서 겨울산행 장비는 다 챙겨야 되고, 꽃도 피우지 못하는 주제에 봄 행세를 하는 계절 특성상 겨울과 봄을 넘나들어야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겨울과 봄이 공존하는 현실에서 계절 특성을 감안한 테마산행지 선정도 자유롭지 못했다. 겨울이면 눈을, 봄이면 꽃을, 여름이면 계곡을, 가을이면 단풍을 테마로 엮어 산행지를 화려하게 엮어갈 수 있다. 그러나 3월은 동장군에서 행방된 것 이외에 특별함을 맛 볼 수 있는 상품 개발이 제한적이었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즐길 수 있는 경지에 오른다면 어려움이 없겠지만 본인의 입장에서는 요즘 수준이 한계였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저조한 참여율을 보였을 것으로 결론짓고 쓴 웃음을 지으며 만족해야만 했다.
- 오늘 겨울과 보을 넘나드는 어려운 산행환경을 무난히 극복하시고 안산, 즐산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린다. 특히 오늘 하산행사를 빛내 주신테리님과 처음 모두와 소중한 인연을 맺어 주신 새내니님들에게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올리면서 석룡산에서의 일상정리를 여기서 접습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