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색창연하다.
왜 원앙이어야 하는 지, 뜻도 모르고 사전적 의미가 그러 하다니, 그냥 쓰는 단어이기도 하다.
잉꼬의 금슬로 넘어 가면, 뜻은 좀 알 것 같아 지는데, 조금 유치한 맛이 베어 든다.
좌튼, 원의는 " 부부의 바람직한 인간 관계 "의 이름이다.
혼자가 아닌 사람치고,
누군들, 한 쌍의 원앙이지 않고 싶으며,
누군들, 잉꼬라는 닭살 돋는 표현일지라도, 굳이 털어 내고 싶을까 ?
허나, 사노라면, 그것이 그리 녹녹치 않을 뿐이리라.
내 어리석디, 어리석은 30년의 맨 앞에 오는 회오는 이것이다.
칫솔을 같이 쓸 수 있는 사람에게 정확히 절반의 자리를 인정하지 못 했다는 눈물.
승부처도 아닌 곳에서 이기려고 했고
승부처였다고 하더라도, 이겨야 한다는 우매함에 푹 절어 있었다.
무표정해도,
거의 흉기의 수준인 내 세수대야를 찌그러 뜨려서,
돼지 멱 따는 소리를 내어서,
때 지난 잡지 책을 내던져서,
법의 여신이 쥐고 있는 천칭만큼 팽팽히 평형을 이루어야 할 그 관계에서,
그 저울의 내 접시가 내 쪽으로 기우는 경사를 얻고자 했다.
내 아이의 엄마로 하여금 동물적인 두려움을 지니게 해서, 어쩌자는 뜻이었을까?
왜 최소한의 존중 대신에 언제 불거질 지 모르는 짜증과 석연치 않은 분노와 일종의 유사 광기에 대한 두려움을 심으려 했을까?
30년이 지나서야,
이제는 그러한 두려움을 심고자 해도, 심어 지지 않는 습기 빠져 나간 팍팍한 모래밭이 된 관계 속에서야,
어이,
비로소,
그 미망에 눈 떠지는 것인가?
바라건대,
나의 안이 나를 만만히 여겨 주기를 !
아, 이미 그러하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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