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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만약 청일 양국 간에 일어난 당시의 외교사를 집필하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책 첫 머리의 한 장을 동학당의 난에 할애해야 할 것이다.'
무스 무네미쓰가 쓴 건건록(蹇蹇錄)에 나와 있는 구절입니다. 동학난은 실제로 조선에서 벌인 청나라와 일본의 영향력 대립을 절정으로 이끌어내고, 또 결국 최후로 나아가게 하는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당시 청일간의 관계를 서술하면서 동학난을 언급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말할 수가 없습니다.
앞서 김옥균의 사망이 일본 국내의 여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언급을 했는데, 군대를 일으킬 실제적인 동기에 대한 부분은 바로 이 동학난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런데 이 타이밍이 김옥균이 사망한 후 곧바로 일어나는 등 이상할 정도로 잘 맞아떨어진 탓에, 동학난과 일본의 관계를 연결시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조선에서 대규모 소요가 일어나는것 자체는, 일본에게 이익이었기에 그 전부터 일본 낭인들은 교란공작을 위해 부산으로 많이들 건너간 참이었습니다. 흑룡회(黑龍會의 전신이 되는 겐요샤(玄洋社) 등의 젊은 낭인들이 일본의 대외 진출 과정에서 여러 비합법적인 일을 도맡은 일 자체는 사실인데, 이러한 단체의 젊은 낭인들 중에는 자신들이 동학을 선동해서 일을 벌이게 했으며, 따라서 청일전쟁의 최대 공로자 ─ 뒤에 설명하겠지만, 일본의 입장에서 청일전쟁의 최대 난관은 '전쟁을 일으키는것' 이었습니다. ─ 는 자신들이라고 소리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물론 이는 다분히 젊은 남자들의 허세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동학의 강령도 그러하고, 동학의 배경 역시 일본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습니다. 단, '동학난이 일어나게 만드는 수준' 은 아니어도, 천우협(千佑俠)이 동학과 접촉하려고 했고, 실제로 일단 접촉 한 적이 있기는 한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에서 난이 일어난다면, 일본으로서는 대단히 좋은 일이니 지원을 해줄 생각도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동학의 배경 등은 교과서에서 자세히 나올 정도이니 굳이 이 글에서 다룰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경과만을 언급하자면 동학군은 전봉준(全琫準)을 중심으로 하여 큰 기세를 보였고, 조선 정부에서는 홍계훈을 사령관으로 파견해 이를 진압하려 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원세개는 자신 있게 소리쳤습니다.
"만약 내가 나선다면, 평정에는 열흘도 걸리지 않을거요."
하지만 동학군이 전주를 함락시키자, 각지에서 농민들이 분분히 동학군에 동참하여 그 세력은 삽시간에 어마어마해졌습니다. 고종은 자신이 없고 겁에 질려서 원세개에게 청나라의 군사를 파견하여 동학군 토벌을 도와주라고 부탁했습니다.
일단 고종의 출병 요구를 들었지만, 원세개가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사정은 이홍장의 사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홍장은 북양군이 일본과 붙는 일만은 절대로 원하지 않고 있었기에, 만일 청나라 군대가 조선으로 들어오는 일이 일본을 움직이게 만드는 결과가 된다면 그다지 좋은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이때, 일본의 대리 공사인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는 원세개를 찾아왔습니다. 본래 일본의 공사는 오토리 게이스케(大鳥 圭介)였지만, 마침 휴가기간이라 일본에 와 있던 참이었기 때문입니다.
오토리 게이스케
"동학군 때문에 일본인들의 상업 활동에 손해가 무척 많은데, 조선 군대는 진압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 청에서 출병을 해야 합니다."
원세개가 보기에는 일본은 거류 상인들의 안전에만 관심이 있는것 같았기에, 딱히 군대를 파견해도 문제가 생길것 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이에 원세개는 이홍장에게 이런 전보를 보냈습니다.
"청은 조선을 보호할 의무가 있으며, 조선이 청에게 동학란을 평정해 달라고 요구하였으니 상국으로서 체면이 서는 일입니다. 만약 우리가 출병하지 않으면 다른 나라들 중에서 필연코 나서기 좋아하는 나라가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청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 절대 책임을 미룰 수 없습니다. 동학군은 한성에게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으며, 조선과 각국 열강의 반대로 일본이 출병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홍장으로서는 조선의 정세에 대해서는 원세개의 판단에 맡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 당시 베이징의 대리 공사는 고무라 주타로(小村太)였었는데, 모르긴 몰라도 그 역시 청나라의 출병에 대해 일본은 반대하지 않는다는 식의 뜻을 이홍장에게 전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공사들은 결국 당시 일본의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츠의 입김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청일전쟁은 무쓰 무네미츠가 일으킨 전쟁이었습니다.
무쓰 무네미쓰
심지어 무쓰는 이홍장이나 원세개 뿐만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 등도 손바닥에 놓고 있었습니다. 도쿠도미 소호(德當蘇峰)는 청일전쟁을 평론하면서, '무쓰 등이 이토 히로부미 등을 속인 전쟁' 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일단 천진조약에 의거하여 청나라 군대가 출병하는 일에 맞춰 일본군도 출병할때, 무쓰는 파병 병력이 1개 여단이라고 보고했습니다. 2천여명 정도라면 별 문제가 있을리가 없었고, 당시 수상이던 이토도 이에 속아버렸다는 식입니다. 하지만 같은 여단이라고 해도, 혼성 여단이라면 6천여명에서 7천여명 사이의 편성이 가능합니다. 또 무쓰는 서둘러 대본영을 설치했는데, 대본영이 설치되면 기밀 상항은 국무대신도 관여할 수 없게 됩니다. 무쓰는 일단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만들어버려 반대파가 무슨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홍장은 6월 4일 해군제독 정여창 등을 파견했습니다. 만일 천진조약에 의거하는 내용이라면, 일단 청나라가 '출병 통지'를 일본에 보낸 후에 일본이 움직여야 합니다. 하지만 무쓰는 인천까지의 거리가 청나라는 가깝지만 일본은 멀기 때문에, 먼저 움직여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나는 청국 정부로부터 정식으로 출병 통지를 받은 날보다 이틀 앞서, 오토리 공사를 태우고 요코스카 항에서 출범시켰다."
즉 청나라가 미리 통보하기 전에 일본군의 일부 병력은 이미 이동을 시작한 셈입니다. 일본군은 파병을 요청한 청군보다 한발 앞서 한성에 도달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조선 정부나 백성들이 크게 놀란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일단 파병을 요청한 정부도, 또 힘든 삶에 지쳐 들고 일어난 동학군도, 게중 누구도 외국 군대가 조선 땅에 들어와서 활개를 치는걸 진심으로 좋아하는 자가 있을리는 없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그들을 철수시키는게 모두를 위한 일이 되자, 동학 토벌에 나섰던 홍계훈과 동학군은 일단 원한을 잊고 상황을 정상으로 만들기 위해 '전주화약'을 성립시켰습니다. 전주화약이 체결될 당시, 일본군은 한성에 들어선지 이틀 째였고 청군은 아직 아산만에 상륙하고 있었습니다.
청이나 일본이나 군대를 파견할 수 있는 명분은 '동학군 진압'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주화약의 성립으로 인해 그 명분은 물거품이 된 상황이었습니다. 현지에서 이 상황을 본 오토리 공사는 이 사실을 도쿄에 알렸습니다. 무쓰 등은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상륙을 중지하는것은 불가능하다."
무쓰 무네미츠는 건건록에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공사(오토리)는 계속 일본 정부에 전보를 보내, 며칠 동안 많은 군대를 조선에 파겨해서 조선 정부와 국민, 특히 제삼자인 외국인에게 불필요한 의혹을 심는 것은 외교상 이롭지 않다는 뜻을 권고해 왔다. 그러나 돌이켜 우리 일본의 내정을 보면, 이미 기호지세(騎虎之勢)에 있으므로 도중이 이미 정한 병력을 변경할 수 밖에 업을 뿐만 아니라, 종래 청 정부의 외교를 보건대, 그 동안 어떠한 권모술수를 써서 막판에 우리를 속일지 모른다."
즉, 이미 상황은 변경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쓰는 이미 전쟁을 기정사실로 만든 참입니다. 하지만 오토리 공사는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습니다.
"지나치게 많은 병력을 상륙시키면 외교상 분규를 초래할 것임. 본 공사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병사 외에는 모두 쓰시마로 철수시켜 명령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바람직함. 육군 대신과 상의해서 이러한 취지로 오시마(당시 군을 이끌던 여단장)에게 훈령으로 내려주기 바란다."
이에 대해, 무쓰는 전보를 더 보내지 않고, 서기관에게 극비 훈령을 내려 구두로 자신의 지시를 전하게 했습니다.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개전의 구실을 만들 것."
본래 오토리 공사는 청나라와 일본이 서로 힘을 합쳐 서구 열강에 맞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의 인물이었기에, 전쟁을 일으키자는 이야기는 난감한 이야기였지만 이러한 조치는 어떠한 '오해' 를 이유로 한 다른 움직임도 차단해버렸습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오토리는 청국의 문서에 조선을 속국으로 부르는 부분이 많으므로, 그것을 문제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무쓰는 그것만으로는 적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무쓰는 일본과 청나라가 공동으로 조선의 정치 개혁을 이루자고 제안하는 작전을 세웠습니다. 조선을 속국으로 삼고 있는 청나라는 아쉬울 게 없던 상황이었기에, 당연히 이에 응할 이유가 없었고, 일본은 청나라의 거절을 구실로 삼은 것입니다.
원세개는 정세가 뭔가 묘하게 변해가자 이홍장에게 대부대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는 한편, 어차피 자신이 조선에 머물러도 별 도움이 되진 않고 나라의 체면만 깎을 테니 어서 귀국시켜 달라고 요청했지만 청나라 조정에서는 조선에 남아 정보를 탐지하라며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외부에서는 미적지근한 반응만 오고, 내부에서는 일본이 계속해서 내정 개혁을 이유로 소리를 질러대고 있으니, 원세개는 노여워서 어쩔 줄을 모르다가 고열로 앓아 눕기까지 했습니다.
전쟁은 당장이라도 일어날것 같은데, 일본군은 원세개가 일본의 세력을 몰아낸 장본인이고 원세개에게 전부 책임이 있다는 식의 말을 했고, 원세개는 이 말을 듣고 자신이 계속 있으면 일본군에게 참혹한 꼴을 당할 것이라며 이홍장에게 호소했습니다.
원세개는 조선 백성들의 보복이 두려워 공관 밖으로 감히 나가지도 못했는데, 그나마 공관도 안전하진 않았습니다. 결국 청과 일본의 모든 협상이 결렬 될 조짐이 보이자, 청나라 조정에서는 7월 18일 원세개를 소환했습니다. 원세개는 즉시 모든 일을 당소의(唐紹儀)에게 맡기고 아픈 몸도 아랑 곧 하지 않고 귀국했는데, 마침 동학의 잔당이 자신을 암살하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깜짝 놀라 간담이 서늘해지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거의 일어난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자, 이홍장은 마지막으로 러시아에 희망을 걸어보았습니다. 러시아가 간섭하면 일본도 함부로 나서지는 못할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주일 러시아 공사는 러시아의 외무장관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를 올렸습니다.
"일본인은 자부심에 도취되어 있고, 국내는 극도로 흥분 상태에 있다. 정부가 원한다고 해서 철병할 수 없을 것이다."
정한론,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 김옥균의 찢겨진 시체. 이미 일본 내의 분위기는 달아오를대로 달아오른 상황이었습니다. 무쓰는 이미 전쟁을 멈출 수도 없었고, 멈출 생각도 없었으며, 일본의 여론도 그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마침내 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첫댓글 허어 료마전에 나오는 무쓰 무네미쓰가 여기선 이런책략가로 등장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