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카니스탄의 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텔레반 정부에 밀려나 국토의 1/10정도만 사수하고 있는 아프칸 북부연맹이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하여 남하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북부연맹을 지원하며 아프칸 내의 교두보를 확보하려고 합니다. 다국적군의 면모도 대략 갖추어져가고 있으며, 미국, 영국, 프랑스는 특수부대를 배치해 빈 라덴을 체포 또는 사살하려고 준비를 완료한 상태에 있습니다.
지난 20일(현지시각)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미 의회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탈레반 정권을 향해 모든 테러분자들과 지원조직들을 인도하고 테러훈련장을 즉각 영구적으로 폐쇄한 뒤 미국의 검증을 받으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는 이런 요구는 협상이나 토론의 대상이 아니며 이를 거부할 경우 탈레반 정권은 테러분자들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또 그는 이번 전쟁의 목표는 이슬람 교도가 아니라 테러리스트들이며 세계의 모든 나라는 "우리(미국)의 편이 되든지 아니면 테러리스트의 편이 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라면서 "미국은 오늘 이후 테러리즘을 계속 보호 또는 지원하는 어떤 국가도 적대적인 정권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패권주의 국가가 세계를 상대로 협박을 자행하는 오만불손한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보복공격은 과연 그것이 정당한가 하는 의문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후지다 히사이치 간사이 대학 법학부 교수는 "미국이 자위권을 발동해 무력행사를 하려면 아프간이 테러공격에 관여했다는 것과 테러조직을 탈레반 정권이 지원하고 실질적으로 관여했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지금 상태에서 공격하는 것은 '침략행위'라며 "유엔결의의 우호관계선언은 이런 복수로서의 무력행사를 금지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중국 외교부가 이번 사태에 대해서 "유엔헌장 원칙과 국제법 규정에 맞게 안보리가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무조건적 테러 반대' 입장을 천명했지만 테러범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먼저 진행돼야 하고 이 조사 결과에 따라 장본인을 국제법정에 세우는 것이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미국의 아프간에 대한 군사행동은 부시대통령을 국제법정에 세우는 정도는 아닐지라도 세계의 여론재판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며 *무력사용을 정당화하고 *공격 목표물을 신중하게 선정해야 하며 *아프간 쪽의 주장에 대처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춰야 국제적 비난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2. 학급 증설
교육인적자원부가 최근 7차교육과정의 여건을 마련한다면서 교실 늘리기 사업에 착수하고 있습니다. 학급당 학생 수를 현재 42.7명에서 35명으로 줄이기로 한 대통령의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서입니다.
교육인적자원부는 오는 2004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수준으로 학급당 학생 수를 낮추기 위해서 전국에 1202개의 학교를 신설하고 1만 6264학급의 교실증설을 하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예산은 무려 2조 5천여억원에 달합니다.
현재 우리교육에 있어 교육여건의 개선은 시급하고도 절실함 문제입니다. 양질의 교육을 위해서는 학급당 학생 수를 줄이는 일이 무엇보다도 필요하죠. 그러나 지금 교육부가 하고 있는 일을 보면 좀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학급을 늘리는데 '부지가 없으면 운동장이나 녹지 옥상 등을 활용하고, 실험실 체육관 등을 개조해서라도 수요를 채우라.’ ‘2002년 2월 신입생을 받기 전까지 학교신설을 포함한 교실증축을 완료하라'는 것이 교육인적자원부의 지시입니다.
무리한 추진과정이 벌써 문제되고 있습니다. 학교 부지를 잘못 선정했다거나 특정한 업자나 인물에게 특혜를 준다든지, 사업비를 터무니없이 높게 책정하는 등 부작용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조급한 공사로 인한 부실시공도 우려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기존의 어학실이나 정보처리실, 심지어는 음악실이나 미술실까지도 교실로 바꾸라고 하니 이것이 교육적 발상인지 모르겠습니다.
교원확보가 어려우니까 한, 두달 연수로 자격증까지 주는 부전공연수를 도입하다 못해 이제는 교실부터 우선 지어놓고 보자는 것인데 왜 이런 발상이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혹 내년 대통령 선거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닌지요.
3. 선언무하적
중아함경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비구 마라가는 석가세존이 이 세계의 끝은 있는지, 영혼과 육체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등에 대해 가르쳐 주지 않는 데에 대해 불만을 품었습니다. 그는 세존에게 그런 것을 일러 주지 않는다면 불문을 떠나겠다고 말합니다. 이때 부처님이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마라가여, 만일 어떤 사람이 독화살에 맞았다고 하자. 그의 벗들이 의원을 부를 것이다. 그런데 그가 ‘나를 쏜 자는 누구인가? 나를 쏜 활은 어떤 활인가? 화살은 어떤 것이고 어떤 모양인가? 이런 것들을 모두 알기 전에는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면 그는 아마 죽고 말았을 것이다.
마라가여, 마찬가지로 세계는 끝이 있는지 없는지, 영혼과 육체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이런 것들에 대한 어떤 견해가 있으면 깨끗한 수행이 있을 수 없다. 그런 견해가 있는 곳에 생로병사와 고뇌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성인들은 말하지 않을 수 없을 때, 부득이 할 때만 말을 합니다. 무엇을 분별하고 나누어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라고 소리 높여 따져 봐야 해결될 일이 없습니다.
장자는 세 가지 소리를 가르칩니다. 사람의 소리와 땅의 소리와 하늘 소리입니다. 땅의 소리는 수동적인 소리입니다. 바람이 불며 지나가면 당연히 나는 소리입니다. 땅의 온갖 구멍을 스치고 지날 때 나는 소리입니다. 수동적이지만 사사로움이 없습니다. 사람의 소리는 사람의 작위가 함께 묻어 생겨나는 소리입니다. 능동적이나 사사로움이 깃들어 있습니다. 하늘 소리는 이 모든 소리를 있게 하는 근원입니다. 능동적이지만 사사로움이 전혀 없는 소리입니다. 땅의 소리는 하늘 소리가 될 수 없지만 사람소리는 하늘 소리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렇고 부처님의 말씀이 그렇습니다.
하늘 소리에 가까운 소리를 흔히 진언이라고 합니다. 진짜 소리라는 것이죠. 그래서 진언은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 쓸 때 없는 소리, 사사로움이 잔뜩 묻어 있는 소리를 허튼소리라고 합니다. 이보다 더 나쁜 것은 불교에서 입으로 짓는 죄 4가지, 거짓말, 두 가지 말, 악한 말, 꾸며대는 말도 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말에 관한 교훈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심판 날에 터무니없이 지꺼린 말에 대해서 낱낱이 해명을 해야하며, 선한 말을 한 사람과 악한 말을 한사람은 각각의 보응을 받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말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삿되면 말도 삿될 수밖에 없고 마음이 선하면 말도 선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지만 말을 통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치 열매를 보고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를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서 비롯된 말은 행동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옛 어른들의 지혜가 바로 이것입니다. 말로 미루어 마음을 알 수 있듯이 말로 미루어 행동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소개한 부시의 상하원 합동 연설문은 악구에 해당하죠. 막말로 세계를 상대로 협박하고 있는 그런 말입니다. 말로 미루어 보아 그들의 행동은 무자비한 폭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 뻔하죠. 성내는 마음이 이런 결과를 낳았습니다.
교육인적자원부의 학급 증설에 대한 지침이란 것은 화려한 말, 남을 속이는 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미루어 짐작하건데 결코 좋은 결과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어리석은 마음이 이런 일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오늘 성서의 말씀은 자신의 말에는 책임이 뒤따른 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과보를 심판 날에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심코 던진 한마디의 말 때문에 인생을 힘들게 살아가게 되는 경우도 있겠습니다.
노자는 선행은 무철적이요 선언은 무하적이라는 가르침을 베풉니다. 선한 행동은 자취를 남기지 않고 선한 말은 허물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취와 허물을 남기지 않기 때문에 심판도 없습니다.
지금 이 세계는 내가 옳으니 니가 옳으니 하는 말싸움으로 가득합니다. 미국과 이슬람이 서로가 옳다고 주장함으로써 결국 전쟁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마음과 말이 바뀌지 않고는 이 싸움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다를 바 없습니다. 규모에 차이는 있지만 시시비비가 끊이지 않고 이것 때움에 감정상하고, 다툼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럴 겨우 결국은 후회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선언무하적이라는 노자의 가르침이 새삼스레 마음에 닿은 것도 이때문인 것 같습니다. 말이 달라지려면 마음이 먼저 달라져야 합니다. 탐심과 성냄, 어리석음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