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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철입니다.
종일 비가 오락가락합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웃나라 중국과 일본은 70년만의 큰 비라던가 하여튼 물난리로 체제까지 들먹거릴 정도로 큰 피해를 보는 모양인데
요행히 우리나라는 그 무서운 수마가 비껴가는 모양입니다.
얼마나 다행인지요?
허지만 코로나는 아직도 번지고
전에는 없었던 해충들이 극성을 부리는 참 불안한 날들이지요.
참 불확실성의 세대라 할까요?
오늘은
시를 쓰는 자세에 대해 얘기 하고자 합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족을 만나면 친족을 죽여라.”
중국의 고승 임제(臨濟)의 화두다. 무비 스님은 <임제록 강설>에서 ‘나 아닌 다른 경계에 동요하지 말라’는 말이고, ‘일체를 부정하고 벗어나라’는 말이며, ‘그 어떤 권위나 관념들로부터도 벗어나라. 인정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풀이하였다. 즉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안에도 있지 말고 밖에도 있지 말고 중간에도 있지 말라’는 것이다.
일체의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나야 깨달음에 이르듯 시로 접어드는 길도 그러한 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는 절대자와 부모,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바치는 양식이 절대 아니다. 시의 초보자일수록 ‘무엇을 위해서’ 쓰려고 한다. 또 ‘누구를 위해서’ 쓰려고 한다. 시가 천박해지는 순간이다.
부처를 우러르면 불경을 읽으면서 절을 하면 될 것이요, 예수를 믿으면 교회를 다니면서 기도를 하면 된다. 부모를 공경하면 지극히 효도를 다 하면 될 것이요, 아내를 사랑하면 한 번 더 껴안아 주면 그만이다. 시에다가는 단 한 줄도 절대자의 말씀을 받아 적지 마라. 제발 부모의 자애로움을 칭송하지 말 것이며, 금실 좋은 아내와의 관계를 떠벌리지 마라.
그래도 부처와 예수와 부모와 아내를 시에다 쓰고 싶어 못 견디겠으면 어떻게 하나? 부처의 말씀을 관념의 테두리 안에 가둬버리고 실천할 줄 모르는 자들에 대해 써라. 예수를 팔아 제 잇속을 챙기는 자들을 크게 꾸짖는 시를 써라. 부모의 비겁함과 치부와 죄를 찾아 써라. 아내의 쩨쩨함과 실수와 과욕에 대해 써라.
일찍이 김수영은 시인이 서 있어야 할 자리를 이렇게 노래했다.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어느 날 古宮을 나오면서> 부분)
시인은 이렇듯 절정에서 조금쯤 옆으로 비껴 서 있어야 하는 자이다. 종교가 진리의 절정에 도달한 정신의 영역이라면 문학은 진리의 위기를 포착하는 풍향계여야 한다. 종교와 문학이 손쉽게 화해하면 둘 다 망한다. 시는 종교를 무조건적으로 따라가서도 안 되며, 전폭적으로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시의 마음은 종교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함께 가되, 시의 몸은 종교가 가리키는 방향의 반대쪽을 향해 서 있어야 한다. 그 어깃장, 그 버티는 안간힘, 그 불화의 순간에 가까스로, 시는 태어난다.
“화장품 냄새/ 솔솔 풍기는/ 향기로운 엄마// 뭐든지 척척/ 도와주셔서/ 고마운 엄마// 바른길로 가라고/ 회초리로 찰싹 때리는/ 사랑하는 엄마// 엄마라는 말을/ 부르면/ 목이 메입니다.// 사랑한다고// 말도 떨려서/ 못합니다”(인터넷에서 구한 시,<엄마>)
“작은누나가 엄마보고/ 엄마 런닝구 다 떨어졌다./ 한 개 사라 한다./ 엄마는 옷 입으마 안 보인다고/ 떨어졌는 걸 그대로 입는다.// 런닝구 구멍이 콩만하게/ 뚫어져 있는 줄 알았는데/ 대지비만하게 뚫어져 있다./ 아버지는 그걸 보고/ 런닝구를 쭉 쭉 쨌다.// 엄마는/ 와 이카노./ 너무 째마 걸레도 못한다 한다./ 엄마는 새걸로 갈아입고/ 째진 런닝구를 보시더니/ 두 번 더 입을 수 있을 낀데 한다.”(배한권, <엄마의 런닝구>)
이 두 편의 동시를 비교해서 읽어보면 시에서 사랑이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 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시는 사람의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런데 사람의 사랑을 노래하면 다 좋은 시가 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글쎄, 하면서 고개를 흔들 것이다. 또 누군가 어떻게 하면 좋은 시를 쓸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사람을 지독하게 사랑하면 좋은 시를 쓸 수 있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면서 한 마디 보탤 것이다. 사랑에 대해서 쓰려면 ‘사랑’이라는 말을 시에다 쓰지 말아야 한다고, 제목으로도 쓰지 말아야 한다고, ‘사랑’이라는 말을 아예 잊어버려야 한다고 훈수를 할 것이다.
빈둥거리고 어슬렁거리고 게을러져라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때 이형기 시인은 부산으로 피난 온 조지훈을 만나 술을 한잔 같이 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팔팔하게 젊은 이형기는 대선배 조지훈에게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조지훈은 “그것은 그저 방치해 둘 수밖에 없는 일이오”라고 짤막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조지훈은 이 말을 전에 정지용한테서 들었다고 일러 주었다.
시를 방치하는 일, 그게 시를 잘 쓸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당신은 이 선문답 같은 짧은 일화를 유심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 시의 대가들뿐만 아니라 서양인도 비슷한 충고를 한다. 브렌다 유랜드는 <참을 수 없는 글쓰기의 유혹>에서 창의적인 글은 “오랫동안 비효율적이고 행복하게 게으름을 피우고 빈둥거리며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다.
노동의 효율성과 경제적 이윤 추구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견해는 야만이거나 무책임한 언설일 뿐이다. 열심히 시간을 쪼개 공부해도 다다르지 못할 판에 빈둥빈둥 게으름을 피우라니!
당신은 오해하지 마라. 좋은 시를 쓰기 위해 무조건 한가하고 낭만적인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그 누구나 빈둥거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루 종일 책을 보면서 머리를 쥐어뜯어 본 적이 있는 사람, 그래도 시 한 줄 떠오르지 않아 발을 동동 굴러본 적이 있는 사람, 이러다가 영영 시를 쓰지 못하는 게 아닐까 두려워해본 적이 있는 사람, 그리하여 아예 시를 포기해버리고 싶다고 자조 섞인 푸념을 내뱉어본 적이 있는 사람만이 빈둥거릴 권리가 있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매혹적인 제목의 글에서 버트런드 러셀이 한 말은 우리에게 힘이 된다. 그는 노동이 미덕이라는 믿음이 현대사회에 막대한 해를 끼치고 있다고 단언한다. “우리는 생산에 관해선 너무 많이 생각하고 소비에 대해선 너무 적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루의 노동시간을 4시간으로 줄여야 한다고 파격적인 의견을 내놓는다. 하루에 4시간만 일을 하고 나머지 시간을 불성실하게 보내라는 말이 아니다. 그 나머지 시간에 지금보다 더 많은 즐거움을 누리도록 더 적극적인 태도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빈둥거리며 노는 시간을 발효와 숙성의 시간이라고 부르고 싶다. 만약에 당신이 맛있는 술을 마시고 싶거든 술이 제대로 익기를 기다려라. 열흘이라도 백일이라도 기다려라. 좋은 술일수록 절대로 혼자 병마개를 따고 홀짝이며 마셔서는 안 된다. 함께 마실 친구가 저녁 어스름 무렵에 당신을 찾아올 때까지 기다려라. 그렇게 기다리는 시간에 초조하게 담장 바깥을 기웃거리지 마라. 당신은 그냥 뒷짐을 지고 어슬렁거리며 걸어라.
나는 어슬렁거리며 걷는 시간을 좋아한다. 어슬렁거려야 미세한 데 눈길을 줄 수 있고, 세상이 요구하는 질서의 뒤편을 응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신이 있다면, 아마 그도 어슬렁거리며 걷는 일로 하루를 다 소비하는 자일 것이다. 시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도 나는 특별한 이유 없이 되도록 많이 걸을 것을 주문한다. 한적한 오솔길이나 들길이 아니더라도 좋다. 바르게 걷지 말고 ‘따복따복’ 걸어라. 모든 길은 세상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훌륭한 통로다.
그러니 시가 오지 않으면 아등바등 시를 찾아 나서지 마라. 그냥 놀아라. 빈둥거려라. 시를 써서 무슨 이름을 얻겠다는 허영심을 버리고, 시가 실패할지 모른다고 초조해하지도 마라. 소나기가 내려도 마당에 널어놓은 고추를 치우러 허겁지겁 뛰어나가지 말 것이며, 개수대에 설거지 할 그릇들이 산처럼 쌓여 있어도 잊어버려라.
시를 쓰다가 슬럼프에 빠지면 어떻게 해결하나 물어보지 마라. 시를 한 편 한 편 쓸 때마다 슬럼프인 것이니 시를 쓰는 사람에게는 별도의 슬럼프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정말 시를 쓰고 싶거든 슬럼프마저 사랑하고 즐길 도리밖에 없다. 스스로 슬럼프에 빠졌다고 생각되거든 승용차를 버리고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보라.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이곳저곳 일없이 기웃거려라. 바다로 가거든 휴대전화를 물속에다 던져버려라. 저녁이 찾아오면 전등을 켜지 말고 어둠 속에서 어둠과 한 몸이 되어보라.
위선환 시인은 30년 간 시를 끊었다가 근래에 빛나는 시를 생산해내고 있는 분이다. 그 시간 동안 시를 ‘방치’한 것이다. 다시 시를 쓰면서 그는 주로 걸으면서 시를 생각했다고 한다. “시를 다시 쓰면서부터는 신문을 끊었고 티브이를 거의 끊었고 외출을 거의 끊었다. 내가 문밖으로 나오는 것은 아침저녁 아파트 옆 구릉 위로 난 산책로를 걷는 때로 거의 한정되어 있었다. 그 길을 걸으면서 시를 생각하고, 머릿속에다 집을 짓듯 시를 짓고, 지은 시를 외우며 돌아와서는 외워온 시를 입력하고, 한밤중에도 일어나 앉아 시를 고쳐 쓰곤 했었다.”
빈둥거리며 걷다가 보면 운 좋게 이런 풍경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김종삼의 <묵화(墨畵)>다. 이 시의 앞 두 줄을 이렇게 바꾸어 읽어본다.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가 손을 얹었다.” 피동접미사 ‘히’를 빼고 나면 시의 호흡이 별안간 빨라진다. 할머니의 손길이 소 목덜미까지 가 닿는 시간도 빨라진다. 그렇게 되면 소를 쓰다듬는 할머니 손길의 경건함도 지긋한 사랑의 느낌도 사라지고 만다. 시가 여유를 놓치는 순간이다.
능동적인 생각과 행동만이 우대 받는 세상을 우리는 통과해왔다. 느림이나 게으름 따위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악성 종양처럼 알고 지냈다. 학교의 선생님도 집안의 부모도 우리에게 좀 더 빨리, 좀 더 높은 곳으로 가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래야만 행복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지금, 소 목덜미에 손을 얹는 할머니는 얼마나 낮은 곳에 살고 있는가. 우리는 할머니가 얼마나 천천히 부엌에서 걸어 나왔는지, 얼마나 느리게 소한테 여물을 갖다 주었는지, 소가 여물을 우물거리는 동안 얼마나 그윽하게 소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다 안다. 그리고 소와 함께 무엇을 하며 하루를 보냈는지도 충분히 안다.
저녁 무렵, 할머니에게 이미 소는 집에서 기르는 가축이 아니다. 서로의 아픔과 외로움을 들여다볼 줄 알고, 서로를 쓰다듬어줄 수 있는 동병상련의 관계다. 비록 여섯 줄밖에 안 되는 짧은 시이지만, 행간과 행간 사이에 여백은 무한하고, 시행은 끝났건만 마지막 쉼표는 소와 할머니의 상처와 그 둘 사이의 적막이 오래 지속 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적막을 사랑하라. 적막에 사로잡힌 적막의 포로가 되라. “풀숲에 호박이 눌러앉아 살다 간 자리같이/ 그 자리에 둥그렇게 모여든 물기같이/ 거기에다 제 얼굴을 가만히 대보는 낮달과도 같이”(<적막> 전문)
적막 속에서 빈둥거리다가 보면 문득 소란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그렇다고 세상의 소란 속으로 단번에 뛰어들지 말고, 가능하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라. 그러다 보면 시를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시간이 찾아올 것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을 알면서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 시인이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주체하기 힘든 표현 욕구를 옛사람들은 ‘기양(技양)’이란 말로 표현했다. ‘양’이란 가려움증을 말한다. 아무리 긁어도 긁어지지 않는 가려움이 있다. 이런 가려움은 어떤 연고나 내복약으로도 고칠 수 없다.”(정민, <한시미학산책>)
아래는 필사를 권하는 시들입니다.
누에 / 나희덕
세 자매가 손을 잡고 걸어온다
이제 보니 자매가 아니다
꼽추인 어미를 가운데 두고
두 딸은 키가 훌쩍 크다
어미는 얼마나 작은지 누에 같다
제 몸의 이천 배나 되는 실을
뽑아낸다는 누에,
저 등에 짊어진 혹에서
비단실 두 가닥 풀려 나온 걸까
비단실 두 가닥이
이제 빈 누에고치를 감싸고 있다
그 비단실에
내 몸도 휘감겨 따라가면서
나는 만삭의 배를 가만히 쓸어안는다
어두워진다는 것 / 나희덕
5시 44분의 방이
5시 45분의 방에게
누워 있는 나를 넘겨주는 것
슬픈 집 한채를 들여다보듯
몸을 비추던 햇살이
불현듯 그 온기를 거두어가는 것
멀리서 수원은사시나무 한그루가 쓰러지고
나무껍질이 시들기 시작하는 것
시든 손등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는 것
5시 45분에서 기억은 멈추어 있고
어둠은 더 깊어지지 않고
아무도 쓰러진 나무를 거두어가지 않는 것
그토록 오래 서 있었던 뼈와 살
비로소 아프기 시작하고
가만, 가만, 가만히
금이 간 갈비뼈를 혼자 쓰다듬는 저녁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 나희덕
우리집에 놀러와, 목련 그늘이 좋아.
꽃 지기 전에 놀러와.
봄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날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못 들은 척 나오지 않고
이봐. 어서 나와.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소리까지 치면서 문을 두드리면
弔燈 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리고, 그 불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 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련 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그가 너무 일찍 피워올린 목련 그늘 아래로.
빗방울, 빗방울 / 나희덕
버스가 달리는 동안 비는
사선이다
세상에 대한 어긋남을
이토록 경쾌하게 보여주는 유리창
어긋남이 멈추는 순간부터 비는
수직으로 흘러내린다
사선을 삼키면서
굵어지고 무거워지는 빗물
흘러내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더 이상 흘러갈 곳이 없으면
빗물은 창틀에 고여 출렁거린다
출렁거리는 수평선
가끔은 엎질러지기도 하면서
빗물, 다시 사선이다
어둠이 그걸 받아 삼킨다
순간 사선 위에 깃드는
그 바람, 그 빛, 그 가벼움, 그 망설임
뛰어내리는 것들의 비애가 사선을 만든다
하루살이 / 조창환(1945~ )
여기까지 오느라 날 저물었구나
한 생애의 중노동이 생피 같은 노을 속으로 뭉쳐져 사라진다
잉잉거리며, 우글거리며
하루살이 떼는 채송화 꽃씨처럼 잘게 흩어진다
꽃씨? 그래, 꽃씨지!
끝 무렵에는 총 맞은 꽃씨 되자
꽃씨처럼 터지는 화약을 안고
생피 같은 노을 속으로 뭉쳐져 사라진다, 하루살이 떼
단풍들다 / 장민정
며칠 밤 하강하는 기온을 붙들고
떨며 인내했을
나무들
햇볕이 나자
몸 뒤척이며
지난밤 안간힘을 말리고 있다
마음과 마음이 다르고
상처와 사연이 다른
저 무수한 아픔들
무르팍에 얼굴을 묻고
괴로워하던
내 아픔의 처연한 빛깔도
멀리서 바라보면
꽃보다 아름다울 것인가
산다는 것은
서서히 단풍드는 것
봄 산보다
가을 산이 더 깊고 아름다운 걸 알겠다
첫댓글 오미자의 맛 / 이 동엽
어려서는 많이 먹고싶고
젊어서는 자랑 하고싶고
늙어서는 서글퍼 지는것
싫어도 먹어야 하는 나이
한해도 빠지지 않고
평생 먹어온 나이
그 맛은 오미자의 맛 .
이동엽 님의 글 동인방으로 옮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