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이냐시오는 1491년에 에스파냐 북부 기푸스코아 지방의 아스페이티아 위쪽의 로욜라 성(城)에서 영주인 바스크 가문의 아버지 ‘벨트란 야네즈 데 오냐즈 이 로욜라’와 어머니 ‘마리나 사에즈 데 리코나 이 발다’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오나의 ‘성 에네쿠스’의 에스파냐 이름인 ‘이니고(나의 귀염둥이라는 뜻)’로 세례를 받았는데, 언제부턴가 ‘이냐시오’로 바꾸어 불리게 되었습니다. 1506년 7살의 나이에 어머니의 여의고 당시 귀족 집안의 관습대로 에스파냐의 왕실 재무상이자 친척인 ‘후안 벨라스케스 데 쿠에야르’의 집에서 위탁 교육을 받았는데, 그는 훗날 이때부터 자신이 방탕하고 무절제한 생활을 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청소년 시절의 이냐시오는 군사 훈련과 자신의 명성을 쌓아올리는 일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는데, 특히 엘 시드와 아서 왕 전설, 롤랑의 노래와 같은 무용담에 깊이 심취해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17세에 군대에 입대한 그는 몸에 딱 달라붙는 바지를 입고 부츠를 신은 다음 허리춤에는 장검과 단검을 차고, 어깨에 달린 긴 망토를 휘날리며 거들먹거리면서 거리를 활보했다고 전해집니다. 하루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 무어인과 마주친 그는 분개를 참지 못하고 무어인과 목숨을 건 결투를 벌인 끝에, 결국 그를 칼로 찔러 죽이게 되었는데, 이후로도 회심할 때까지 다른 사람들과 사소한 일로 빈번히 다툼을 벌이곤 했다고 합니다.
1519년, 그는 나헤라 공작 안토니오 데 라라와 나바라 총독의 군대에 자원 입대하게 되는데, 천부적인 외교적 수완과 뛰어난 지도력으로 나헤라 공작에게 큰 도움을 준 공로로 기사 작위를 받게 됩니다. 이후 그는 나헤라 공작의 지휘 아래 큰 부상 없이 많은 전투에 참가하게 됩니다. 그러나 1521년 5월 20일 팜플로나 요새 공방전에서 프랑스군이 쏜 포탄에 맞아 한쪽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성을 점령한 프랑스군은 부상당한 그를 치료해 주고 로욜라 성에 있는 가족들에게 후송까지 해주었는데, 부상의 정도가 너무 심했기 때문에 몇 차례 외과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아직 마취제가 없던 시절이라 수술 시간은 그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부상으로 인한 치료를 마치고 회복기에 접어들자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그는 평소 즐기던 낭만적인 내용의 책을 찾았으나 성 안에 그런 내용의 책이 없어 가족들은 대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삶에 관한 책을 가져다주었고 그 중에는 작센의 루돌프가 40년에 걸쳐 완성한 《그리스도의 생애》라는 책도 있었습니다. 그는 이 책을 통해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결국 그의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 책은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복음서의 기록과 교회 교부들들의 저술과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훗날 그가 영신수련을 위해 시작한 관상 기도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책을 읽어 가면서 기사로서의 공상들이 자신을 황폐하게 만들고 아무런 만족도 주지 못한 반면, 성인들의 모범을 따르는 삶 속에 참된 기쁨과 평화가 있음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을 즈음, 그는 아기 예수님을 안고 계신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보게 되면서 큰 위안을 받게 되는데, 그러면서 지난날의 방탕했던 생활과 세속적인 욕망을 따르던 자신의 모습에 심한 혐오감을 느끼며 차츰 회심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회심을 체험한 후 그는 로욜라 성을 떠나 1522년 3월 25일 몬세라트 산에서 약 15km 떨어진 만레사 마을 근처의 한 동굴로 거처를 옮겨 기도와 극기와 묵상에 몰입하며 가끔씩 마을에 나가 문전걸식을 하여 허기를 달래곤 했습니다. 평화와 안식을 얻으려던 그는 오히려 자신이 지난날에 지었던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며 고행을 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기도와 보속의 삶을 실천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여 1523년 2월에 시작된 예루살렘으로의 순례 여정은 그가 각오했던 것 이상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의 저서로 유명한 “영성 수련”은 바로 이 시기에 그 기본 골격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1년간의 고통스런 순례를 마친 그는 계속 예루살렘에 머물려고 했으나 그곳의 프란치스코 회원들이 받아들여주지 않아 결국 이듬해 3월 바르셀로나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이후 약 11년 정도는 학문에 정진하게 되는데, 바르셀로나에서 라틴어 공부를 시작하는 것을 필두로, 1526년에는 알칼라 대학에서, 1527년에는 살라망카 대학에서 공부를 했으며, 1528년 여름에는 프랑스 파리로 학교를 옮긴 뒤 그곳에서 1535년 3월 14일 석사학위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건강 악화로 1535년 봄 고향인 에스파냐로 돌아가 요양을 하게 됩니다.
그가 공부하는 동안 많은 어려움과 시련도 있었지만, 동시에 동료들을 규합한 시기이기도 했는데, 파리에서 만나 자신과 뜻을 같이 한 동료들 중에는 사부아 출신인 ‘성 베드로 파브르’, 나바라 출신인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우스’, 에스파냐 사람인 ‘라이네스’와 ‘살메론’과 ‘보바디야’, 포르투갈 출신의 ‘로드리게스’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냐시오처럼 외적 고행과 구걸, 단식, 맨발로 다니기 등으로 자신을 단련했는데, 1534년 8월 15일 그들은 몽마르트르 수도원의 소성당에서 청빈과 순결, 순명을 맹세하며 공부가 끝나는 대로 예루살렘으로 가겠다는 서약을 하게 되지만, 그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고향으로 돌아가 요양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1537년 1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다시 9명의 동료와 모였지만, 당시 터키와의 전쟁이 일어나 또다시 순례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1537년 6월 24일 동료들과 함께 그곳에서 사제품을 받게 됩니다.
1537년 겨울 그는 동료 ‘베드로 파브르’와 ‘라이네스’와 함께 교황을 만나기 위해 로마로 가는 도중 로마 근교의 ‘라 스토르타’라는 마을의 경당에서 환시를 체험하게 되는데, 성부께서 그를 예수 그리스도와 한자리에 머물게 해주시는 환시를 통해 “내가 로마에서 너희에게 호의를 보여주리라”라고 말씀하시는 환시였습니다. 그리하여 그와 동료들은 자신들을 ‘예수회’(예수님의 동반자라는 뜻)라 부르게 되었는데, 당시 교황 ‘바오로 3세’는 이들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주게 됩니다. 그때까지 장상이나 규칙, 전통 없이 열심히 생활만 하던 그와 동료들은 마침내 1540년 9월 27일 예수회 창립을 확인하는 교황의 교서를 통해 정식 인가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듬해 4월 그는 초대 총장으로 선출되었고, 4월 22일에 그와 동료들은 로마의 성 바오로 대성전에서 장엄 서원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예수회는 즉시 선교 지역으로 나갔고, 수도원과 대학교, 신학교 등을 전 유럽에 세웠으며, 교육과 지적인 분야에서 그들의 탁월한 능력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그와 동료들이 세운 세 가지 목표는 교육에 힘쓰고, 자주 성사를 받음으로써 교회를 개혁하고, 선교지에서 폭넓은 활동을 전개하며 이단과 싸운다는 것이었는데, 훗날 이것이 예수회 활동의 뿌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여생을 로마에서 보내며 개신교 종교 개혁에 대한 대응책으로 가톨릭 개혁을 정열적으로 추진했습니다.
그의 생활은 극히 검소하고 엄격했습니다. 수면 시간은 3시간에 불과했으며, 많이 기도하고 고신극기하며 소박한 음식에 만족하여 때로는 구운 밤 몇 개로 식사를 때운 적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에게 엄격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매우 관대하고 온순했으며 사랑에 가득한 모습으로 대했습니다. 1556년 7월 31일, 그는 로마에서 열병에 걸려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시신은 로마에 있는 한 성당에 안치했다가 1568년 기존의 성당을 헐고 그 자리에 새로 건축한 예수회 성당으로 옮겨 안장되었습니다. 그는 1609년 12월 3일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하여 시복되었고, 1622년 3월 12일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우스 등과 함께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성 이냐시오는 1922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피정과 영성 수련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첫댓글 오늘도 귀한자료 감사드립니다.
많은 도움 되었어요^^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더위에 건강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