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는 1696년 9월 27일 이탈리아의 나폴리 왕국의 수도 나폴리 인근 마리아넬라에서 아버지 주세페와 어머니 안나 카발리에리 사이의 7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나폴리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으로 아버지는 나폴리 공국의 해군이었으며 어머니는 트로야의 카발리에리 주교의 동생으로 신앙심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불과 16세의 나이로 나폴리 대학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아 변호사가 되었는데, 그 후 몇 년 동안 변호사로 일하면서 절대로 패소하지 않는 변호사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723년 그가 참여한 토스카나 대공과 다른 공작 사이에 큰 금전 문제가 걸린 소송에서 어떤 중요한 문서를 잘못 해석하고 서명하는 바람에 재판에서 패소하고 말았는데, 이 사건으로 스스로 변호사로서 자격이 상실되었다고 생각한 그는,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며 변호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나의 친구여, 우리의 직업은 불화와 위험으로 가득하네. 그 때문에 우리는 불행한 삶을 살고 있고, 죽음마저 불행하게 맞이할 위험을 안고 있어.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이 일을 그만둘 거야. 나한테는 맞지 않거든. 왜냐하면 나는 내 영혼이 구원받기를 간절히 소망하기 때문일세.” 그는 27세에 이렇게 법조계를 떠나게 됩니다.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법률가를 그만둔 그는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며 기도하던 중 1723년 8월 28일 불치병 환자들을 위한 병원을 찾아갔다가 신비체험을 하게 되면서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고 ‘성 필립보 네리’가 세운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하여 신학 공부를 시작하게 됩니다. 3년 뒤 12월 21일 30세의 나이로 드디어 사제서품을 받은 그는, 처음 1년간은 집도 절도 없이 떠돌며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던 청소년들을 돌보는 일을 하면서 청소년들이 직접 운영하는 기도 모임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후 이 모임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기도와 강론, 사회활동, 교육 등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러한 모임은 72개로 늘어났으며, 1만 명이 넘는 사람이 활동에 참여하게 되는데, 그는 강론을 통하여 신앙을 멀리하고 사회로부터 소외받던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평소 자신에게 엄격했던 그는 살아가면서 자주 죄책감에 시달리곤 했는데, 특히 도덕적인 죄와 관련해서는 사소한 문제에도 심하게 가책을 느끼며 슬퍼하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양심의 가책을 축복으로 보기도 하면서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양심의 가책은 곧 회개의 시작이다. 그리하여 영혼을 정화시키고 사려 깊은 성격으로 만든다.” 그는 2년 정도 나폴리 근방을 돌며 선교사로 봉직한 뒤, 1729년 집을 떠나 나폴리에 있는 중국어 대학교에 거주하게 됩니다.
1730년 친구인 ‘토마스 팔코이아’가 스칼라 지방에 있는 카스텔라마레 교구의 주교가 되자, 그는 그곳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는데, 그가 스칼라에서 수녀들의 피정을 지도할 때 ‘마리아 첼레스테’ 수녀를 만나면서 새로운 수도회에 대한 그녀의 환시를 확신하게 됩니다. 이것은 ‘팔코이아’ 주교가 로마에서 경험한 환시와 일치하는 것으로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서 기쁜 소식을 전하라(루카 4, 18).”는 성경 말씀에 따라 1731년 ‘마리아 첼레스테’ 수녀가 환시에서 받은 규칙을 기반으로 ‘여자 구속주회’를 설립하였으며, 이듬해에는 ‘팔코이아’ 주교와 ‘파가노’ 신부 그리고 몇몇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남자 구속주회’를 설립하기에 이릅니다.
이 회는 공동생활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주님의 말씀 전파하며 도시의 슬럼가와 빈민가 등지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성직 수도회였습니다. 팔코이아 주교를 명예 원장으로 하는 이 수도회는 본부를 스칼라 수녀회의 숙박소에 두고 활동에 들어갔으나 초창기에 중대한 알력이 일어나 ‘마리아 첼레스테’ 수녀가 포치아에 따로 나가 수도원을 설립하면서 1733년에는 ‘쿠르시오’라는 수도자 한 명만 남고 모든 회원이 다른 회를 설립하여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고 회를 지키면서 다른 회원들을 맞아 1734년에 빌라 데글리 스키아비에서 새롭게 수도회를 구성하며 수도회를 발전시켜 나갔던 것입니다.
구속주회는 당시 교회 안에 팽배했던 인간의 자유의지와 성찬례를 부정하였던 ‘얀센주의’ 이단과 윤리적 엄격주의에 맞서 싸우며 자신의 역량을 이 새로운 임무에 모두 쏟아 부었습니다. 그는 평소 고해소에서 신자들을 배려하여 항상 부드러운 태도를 유지하며 그들을 위로했는데, 특히 수도회원들에게는 “죄를 지은 자는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나쁜 악습에 깊이 빠져들어 있을수록, 그만큼 더 부드럽고 다정하게 다가가야 한다. 고해신부는 죄가 남긴 수많은 상처를 돌보아야 한다. 그는 풍부한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꿀처럼 부드러워야 한다.”라며 회원들의 자세를 강조하였습니다.
마침내 구속주회는 1749년 2월 25일 교황 ‘베네딕토 14세’로부터 인가를 받으며, 같은 해에 열린 총회에서 수도회 종신 총장으로 선출되었고, 이듬해에는 여자 구속주회도 교황으로부터 승인받게 됩니다. 그러나 왕권주의를 내세워 수도회들을 적대시하던 왕과 ‘타누치’ 후작 때문에 나폴리 왕국의 인가는 받지 못하다가 1752년 교황령과 시칠리아만을 사목활동 영역으로 한정한다는 조건으로 인가를 받게 됩니다. 이 시기에 그는 인근 지역을 다니면서 설교 사도직을 열심히 수행하며 저술 활동에도 매진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교황 ‘클레멘스 13세’는 1762년 6월 20일 ‘산타 아가타 데이 고티’라는 나폴리의 한 작은 교구장 주교로 그를 임명했는데, 이 무렵 그는 고령인데다 류머티즘에 걸려 목이 휘어 턱이 가슴을 눌러 상처가 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아 교구장 직을 사양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 교구를 돌보는 13년 동안 성직자, 수도원 그리고 전 교구의 혁신을 단행하였으며,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자선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런 열정적 활동으로 병세가 점점 악화하자 결국 1776년 교황 ‘비오 6세’의 허락받아 주교직을 사임하게 됩니다.
교구장을 지내는 동안 그는 성체와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장려하는 내용의 강론집과 책, 논문들을 집필했는데, 은퇴 후에는 이탈리아 파가니에 있는 수도공동체로 돌아가서 글을 쓰고 사람들을 만나며, 구속주회의 정립과 운영을 위해 주력하였습니다. 당시 교회와 나폴리 왕국 사이의 갈등 상황에서 교황령 외의 지역에 있던 공동체들이 그의 관할권을 벗어나게 됨으로써 수도회는 두 계열로 분열되었는데 그는 분열되었던 수도회가 다시 합쳐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1787년 8월 1일 살레르노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구속주회는 그가 선종한 직후 다시 하나로 재건되어 발전하는 변화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성 알폰소는 윤리, 신학, 수학에 관한 놀라운 저서들을 남겼는데, 특히 그의 윤리신학은 얀세니즘과 반성직주의를 극복하면서 올바른 윤리관을 정립한 저서로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의 신심서에서 가장 돋보이는 책은 제1장 ‘하례하나이다, 천지의 모두여’로 시작하여 총 10장으로 구성되어있는 「마리아의 영광」입니다. 그는 1816년 9월 15일 교황 ‘비오 7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1871년 교회학자로 선포되었습니다. 그 후 1839년 5월 26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1950년 4월 26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고해 사제들과 윤리 신학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