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집『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실천문학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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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은 입술의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 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을 거라며 스물네 살에 비망록을 남긴 매력적인 감성의 시인 김경미. 사람의 인연이란 더구나 남녀 사이의 그것이란 참 오묘하고 알다가도 모를 것이다. 날 알지 못하는 사람을 내가 사랑하게 될 수도, 내가 모르는 그 누군가가 나를 그리워할 수도, 그녀의 흘린 미소가 나를 향한 게 아닐 수도, 내가 베푼 친절이 그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닐 수도, 그리고 그녀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순간이 내게는 영원일 수도, 내가 무심코 내뱉은 한 마디가 그녀에겐 긴 추억이 될지도 모르는 일.
그녀에겐 내가 친구라 해도 내게는 그 이상일 수도, 그녀가 나를 사랑이라 불렀어도 내 심장의 박동이 전혀 평균치 이상의 리듬으로 쿵쾅거리지 않았을 수도 있는 거다. 사랑이란 지독히 일방적일 수 있는 불공정거래이며, 그래서 더러 착각하고 우리는 자주 이기적이 된다. 여자가 남자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었을 때 남자는 이미 권태기에 빠져 헤어날 궁리를 한다든가, 남자는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는데 여자가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여 상처로 남는 사랑도 있으리라. 연애 따로 결혼 따로라고 생각하는 여자가 있는가 하면 초지일관 사랑은 하나라고 믿는 순진한 남자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사랑은 자주 엇박자여서 온도차이가 있고 시차도 생긴다. 차라리 미수에 그쳤던 사랑이라면, 그래서 그 사람과 함께 갔던 관광지를 훗날 다시 찾았을 때 기념품점에서 우연히 풍경엽서를 보았다면, 또 그래서 문득 그 사람이 생각났다면, 우표만큼의 관심도 남아있지 않을 그 사람에 대한 엽서 크기 만큼의 추억이 부풀었다가 다시 구겨진다고 해도 나쁘지 않으리. 내게도 '나 몰래 나를 꺼내보고는 하는 사람도 혹 있을까' 언필칭 첫사랑의 마지막 엽서가 대문 안쪽에서 나뒹굴던 날, 하롱하롱 꽃잎 졌던가, 낙엽 굴렀던가. 구월의 어느 깊어가는 가을날이었던가.
권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