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천사가 각각 책을 들고 있다. 왼쪽 천사가 든 책이 오른쪽 천사가 든 책보다 훨씬 작다. 왼쪽 작은 책엔 구원받을 이름들이 적혀있고, 오른쪽 큰 책엔 심판받을 이름들이 적혀있다. 심판명부가 구원명부보다 훨씬 크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했을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적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많아, 구원명부는 작고 심판명부가 크다.
구원명부를 든 천사 뒤에서 네 천사가 입을 잔뜩 부풀려 힘껏 나팔을 분다. 억울하게 죽거나 의롭게 죽어 무덤스올에서 잠자는 이들을 깨운다. 「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고린도전서15:51~53 」
나팔 소리가 무덤을 뚫고 들어가 죽어 잠자는 이들에게 닿으면, 나팔 소리는 하나님의 생기가 되어 죽은 이들의 뼈에 근육을 붙게 하고 근육에 피부를 입힌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던 창조가 다시 재현된다. 최후의 심판과 태초의 창조는 닮았다. 같은 사건이라도 어떤 이에겐 심판, 어떤 이에겐 창조다. 책을 든 천사가 오른손으로 책 아래를 받치고 왼손 집게손가락으로 이름들을 짚어주며 부활한 이들을 공중으로 맞이한다.
심판명부를 든 천사 뒤에 한 천사가 나팔을 어깨에 걸쳤다. 나팔을 불진 않고 나팔로 누군가를 후려칠 태세다. 또 한 천사는 나팔을 불려다가 나팔에서 입을 뗀 채 책을 들여다본다. 지옥 하데스로 보내기 위해 스틱스강으로 떠내려갈 사람들을 위해 굳이 나팔을 불 이유가 없겠다. 스틱스강으로 떠내려가는 배를 향해 굳이 나팔을 불어 큰 소리 내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흘러갈 것들이다. 흘려보내면 그만이다. 칼을 칼집에 두지 않고 사람과 세상을 향하여 휘두르는 이들이 성하나, 스틱스강처럼 시간도 흐른다. 어떤 악한 권력도 흐르는 시간을 거스를 수 없어 결국 쇠한다. 예수께서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신 까닭이다마12:19. 제 아무리 강성한 권력이라도 고요히 흘러가는 시간을 거스르지 못한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계11:15」 요한은 일곱 천사가 나팔을 불면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된다고 선언한다. 십자가에 처형된 이가 그리스도 되어 “세세토록 왕 노릇”한다는 선언은 아름답다. 미켈란젤로는 『최후의 심판』 복판에 제우스 외양의 근육질 몸으로 부활한 예수를 그렸다. 미켈란젤로가 살던 당시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예수를 표현한 것이다.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었을 예수를 번개로 세상을 지배하는 제우스처럼 묘사한 건 어색하나, 부활하신 예수가 이상적인 몸을 지녔을 것이라는 상상은 유쾌하다. 십자가로 처형하는 로마 황제가 아니라,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가 왕이라는 역설은 아름답다.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마침내 완전한 몸으로 부활했다는 유쾌하고 아름다〉운 역설을 나는 믿는다. 그러나,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가 통과했던 좁은 문 앞에서 나는 배회한다. 믿음은 장하나 마음은 오종종해, 한해 한해 지나도 늘 제자리걸음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갈 마음 없이 제자리 걷는 나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3:1)” 아스팔트 도로 위를 빠르게 달리며, 그날그날 해야 할 일을 성실하게 수행한다 해서 살아있는 게 아니다. 무덤은, 내가 죽었으면서도 살아 있다는 착각을 갖게 한다. 무덤 속에 누워있는 이가 죽었고, 무덤 밖에 서 있는 자가 살아있다는 건 착각이다. 나는 살아있다는 착각 속에 파묻혀 죽어있다. 그럼에도 착각에 파묻힌 나를 순간순간 나팔소리로 깨우시고, 구원명부에 적힌 내 이름을 천사의 집게손가락으로 짚어 보이소서, 아멘.
〈그림묵상〉 《목회와 신학 24년 1월호》
글/ 민들레교회 목사 김영준